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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廣場/김금희]우리 죽은 者들이 깨어날 때|東亞日報

[동아廣場/김금희]우리 죽은 者들이 깨어날 때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8月 15日 23時 54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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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强占期 自己 信念을 갖고 살아간 사람들
이제 그들의 呼訴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김금희 客員論說委員·小說家
요즘 日帝强占期와 解放 前後에 關한 資料를 읽고 있다. 冊이 大部分이지만 論文, 口述, 新聞記事와 잡지, 公文書까지 多樣하다. 歷史家와 小說家가 資料를 바라보는 觀點은 多少 다를 것이다. 小說家에게는 普遍性 못지않게 個別性을 통한 眞實 構築이 重要하다. 情報를 綜合해내기 爲한 結論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解體하는 個個人의 삶들을 찾아내어 裏面의 可能性을 남겨두는 作業이랄까.

歷史學者 강동진의 ‘日帝의 韓國侵略政策社’(1980年)는 日帝 政府 記錄을 통해 그 當時 個個人들의 抵抗的 面貌를 뚜렷하게 喚起할 수 있는 資料였다. 1919年 日帝는 地方 有志들을 對象으로 ‘脂肪宣傳講習會’를 實施해 晩餐을 베풀며 親日 輿論을 造成하기 위해 애썼는데, 講演이 다 끝나기도 前에 朝鮮人들은 故鄕으로 돌아가 그렇게 말했다가는 “우리 生命이 없어진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總督이 膳賜한 卓上時計도 도랑에 버렸다고 文書는 報告하고 있다. 日帝는 民心을 살피기 위해 다양한 方法으로 民情視察 資料를 蒐集했는데, 한 報告者는 朝鮮 民心은 한낱 旅館 主人조차 “自治라든가 內政獨立이라는 것은 決코 우리의 속마음이 아니다. 우리는 絶對로 獨立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實情이라고 傳하고 있다. 大大的인 宣傳政治를 벌였지만 거의 效果가 없다는 報告書였다. 이러한 場面들, 行事場을 나온 朝鮮人들이 그 當時 귀하디귀한 신문물 卓上時計를 躊躇 없이 내다 버리거나, 카운터를 無聊하게 지키며 하루를 흘려보내고 있는 듯한 旅館 主人이 내놓는 祖國의 未來에 對한 自己 信念 等은, 그 時節을 살아간 사람들과 만나는 決定的 場面처럼 느껴졌다.

그 後 日帝가 敗戰하고 朝鮮에 남아 있던 日本人들은 한瞬間에 自身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植民地下 朝鮮人들이 堪耐해야 했던 鬱憤과 憤怒가 解放을 맞아 一瞬間에 噴出하면서 ‘殘留 日本人은 기어서라도 當場 떠나라’는 檄文이 나붙던 時節이었다. 釜山港을 통해서만 67萬餘 名의 日本人이 빠져나갔는데, 그럼에도 이곳을 등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朝鮮人과 結婚해 移住해온 日本人 女性들이었다.

寫眞家 김종욱의 論文 ‘近代期 朝鮮 移住 日本人 女性의 삶에 對한 硏究’는 殘留 日本人 女性의 삶을 記錄하고 撮影한 所重한 資料다. 그는 우연한 機會에 殘留 日本人 女性들이 餘生을 보내고 있는 나자레원을 알게 된 뒤 오랫동안 그들의 肉聲을 듣고 肖像 寫眞을 찍었다. 그 이야기와 寫眞을 눈에 담으며 季節들을 보낼 때 나는 자주 마음이 아파 읽기를 멈춰야 했다.

當時 日本 政府는 이른바 內鮮一體를 내세우며 朝鮮人과 日本人의 結婚을 積極 奬勵하고 나섰지만, 막상 現實에서는 많은 日本 父母들이 딸의 그런 結婚을 反對했다. 大部分 家族들의 뜻을 어기면서 사랑을 選擇해 朝鮮으로 왔고 以後 펼쳐진 고통스러운 삶을 견뎠다. 숱한 日本人 妻들이 스스로 世上을 등질 만큼 悲劇的인 現實이었다. 나자레원의 한 할머니는 “六十 年을 눈물로 歲月을 보내다 보니 이제는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라고 回顧했다.

그렇다면 異邦人으로 排斥받으며 살아간 이들을 위한 이 施設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設立者인 김용성은 父親이 獨立運動을 하다가 逮捕되어 淸津監房에서 獄死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面會 때 그는 “슬픈 얼굴을 하지 마라. 나는 부끄러운 삶을 살진 않았어. (…) 政治로는 人間을 求할 수 없다. 우리 民族의 精神世界를 豐富하게 하는 것은 敎育이나 宗敎나 藝術이 아니면 안 된다. 내 말 銘心해라”라는 아버지의 遺言을 듣는다.

그 뒤 滿洲를 떠돌며 苦學으로 僅僅이 學業을 마친 그는 解放 後 咸鏡北道 會寧으로 돌아와 保育院을 세웠고 韓半島에 殘留한 日本人 아이들에 對해 알게 된다. 個人事的으로는 아버지를 죽인 日帝에 對한 反感과 怨望이 누구 못지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왜 日本人 아이들을 保護하느냐, 親日分子냐 하는 非難을 들으면서도 그는 保育院을 抛棄하지 않았고, 저 日本人 아이들의 存在는 “우리 어른들의 良心을 試驗하고 있다”고 呼訴했다. 그리고 朝鮮人이라 差別받던 우리들이 丁寧 같은 行爲로 되갚아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以後 그는 殘留 日本人 女性을 위한 施設을 만들어 歸國을 願하는 이들에게는 書類를 만들어 주었고 갈 곳이 없는 이들에게는 居處를 提供했다. 私的 複數에서 나아가 더 큰 形態의 容恕를 만들겠다는 한 個人의 良心에서 나는 묵직한 衝擊을 받았다.

우리는 때마다 다양한 理由로 고통스러운 歷史와 영광스러운 歷史를 기린다. 그 目的도 어쩌면 어떤 種類의 ‘試驗’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記憶과 記念은 오늘의 우리 現實을 向한 죽은 者들의 물음이다. 그렇게 해서 되살아난 이들이 내놓는 呼訴에 귀를 기울일 때 速斷할 수 없는 未來의 可能性과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김금희 客員論說委員·小說家


#日帝强占期 #自己 信念 #그들의 呼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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