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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浪士 東쪽에 묻었다’… 1300年 넘게 못찾은 新聞王陵[이한상의 祕密의 열쇠]|東亞日報

‘浪士 東쪽에 묻었다’… 1300年 넘게 못찾은 新聞王陵[이한상의 祕密의 열쇠]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6月 7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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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신문왕과 관련된 추가적인 유물이 1942년 경북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굴되면서 황복사지 주변에서 신문왕릉을 찾으려는 
노력이 활발해졌다. 당시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높이 12.2cm의 금제불좌상(왼쪽·국보 제79호)과 높이 14cm의 금제불입상(국보
 제80호).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新羅 神文王과 關聯된 追加的인 遺物이 1942年 慶北 慶州 黃複寫地 三層石塔에서 發掘되면서 黃複寫地 周邊에서 新聞王陵을 찾으려는 努力이 活潑해졌다. 當時 三層石塔에서 出土된 높이 12.2cm의 禁制佛座像(왼쪽·國寶 第79號)과 높이 14cm의 禁制불入賞(國寶 第80號). 國立中央博物館 提供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이한상 대전대 歷史文化學專攻 敎授
흔히들 三國統一을 이룬 新羅王으로 文武王을 指目하지만, 그의 아들 神文王의 役割도 看過할 수는 없다. 神文王은 民心을 收拾하고 새로운 나라로 나아가기 爲한 制度的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그는 681年 卽位 後 先王의 葬禮를 채 마치기도 前에 危機를 맞았다. 丈人 김흠돌이 亂을 일으킨 것이다. 亂을 鎭壓한 다음 그는 改革政治에 드라이브를 걸며 여러 業績을 남겼지만 貴族들과의 葛藤이라는 宿題를 남긴 채 692年 世上을 떴다.

歷史記錄이 仔細하지 않아 그가 몇 歲에 죽음을 맞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큰아들 孝昭王이 6歲의 어린나이에 卽位한 點을 考慮한다면 長壽하지 못한 듯하다. 文武王의 葬禮 過程에 對해서는 比較的 詳細한 記錄이 남아 있으나 신문왕에 對해선 史書에 ‘浪士 東쪽에 葬事지냈다’는 짤막한 記錄만 傳한다.

그런데 이 記錄과 달리 現在의 新聞王陵은 浪士 南쪽에 位置하므로 이 무덤에 神文王이 묻혔을 것으로 여기는 學者는 매우 적다. 이 때문에 眞짜 新聞王陵을 찾기 위한 發掘과 硏究가 進行되고 있지만 아직 決定的 端緖를 찾지 못하고 있다. 都大體 神文王은 어디에 묻힌 것일까.

○ ‘祖上墓 찾기 烈風’에 뒤바뀐 무덤 主人
935年 新羅의 社稷이 終焉을 告한 뒤 옛 映畫를 象徵하는 宮闕과 歷代 王陵은 頹落의 길을 걷게 된다. 流水와 같은 歲月의 흐름 속에서 華麗하던 宮闕은 荒凉한 빈터로, 莊嚴하게 管理되던 王陵은 수풀이 뒤덮인 모습으로 變했다.

그런데 朝鮮 後期 慶州에서는 新羅 王의 後孫들을 中心으로 祖上墓 찾기 烈風이 불었다. 그 過程에서 一部 무덤이 王陵으로 ‘福券’되었지만, 또 一部는 무덤 主人公이 바뀌기도 하였다. 그 時期의 王陵 妃정안이 只今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 큰 論難을 낳고 있다. 新羅 王陵 가운데 主人公이 바뀐 代表 事例가 慶州 배반동에 位置한 新聞王陵이다.

學界에선 現 新聞王陵에 묻힌 人物로 神文王의 아들 효소왕을 指目하는 見解가 有力하다. 이 見解의 核心 根據는 三國史記의 記錄이다. 三國史記의 贊者 金富軾은 효소왕의 長指와 關聯하여 ‘亡德社 東쪽에 葬事지냈다’고 記錄했다. 亡德社가 新羅의 護國査察 四天王寺의 南쪽에 位置함이 歷史 記錄 및 發掘 結果로 證明되었고 그 東쪽에 現 新聞王陵이 位置하므로 그 무덤의 名稱을 酵素王陵으로 修正해야 한다는 主張이다. 이 見解가 說得力이 있다는 點을 勘案한다면 神文王의 陵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 ‘黃金 箱子’에 새겨진 端緖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굴된 금동제 사리외함과 은제 사리함, 금제 사리함, 그리고 금동제 사리외함의 뚜껑을 확대한 
모습(왼쪽부터). 사리외함 중앙에 은제 사리함이 있었고, 그 안에 다시 금제 사리함이 있었다. 사리외함 뚜껑 안쪽에는 신문왕과 
왕비, 그리고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黃複寫地 三層石塔에서 發掘된 金銅製 舍利外函과 銀製 舍利函, 禁制 舍利函, 그리고 金銅製 舍利外函의 뚜껑을 擴大한 모습(왼쪽부터). 舍利外函 中央에 銀製 舍利函이 있었고, 그 안에 다시 禁制 舍利函이 있었다. 舍利外函 뚜껑 안쪽에는 신문왕과 王妃, 그리고 두 아들에 對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國立中央博物館 提供
神文王의 障지를 解明할 端緖가 1942年에 드러났다. 그해 5月, 朝鮮總督府 學務局은 무너질 危險에 處한 慶州 名長利와 구황리 所在 新羅 石塔 2基를 改建(改建)하기로 決定하고, 6月 1日 工事에 着手했다. 먼저 名長利 三層石塔(용명리 三層石塔)부터 解體했는데 맨 아래 基壇部 石材를 들어올렸을 때 그곳에서 2點의 金銅製 佛像이 出土됐다.

이어 6月 24日부터 구황리 삼층石塔(黃複寫地 三層石塔) 解體를 始作했는데, 이틀 만에 놀라운 成果가 있었다. 6月 25日 日沒時間이 가까워질 무렵 3層 塔身 아래에서 出土된 돌 뚜껑을 들어올리자, 2層 屋蓋石 上部에 파인 네모난 구멍 속에서 金銅製 함이 發見된 것이다. 現場 責任者는 곧바로 遺物을 收拾하기로 하고 살짝 函 뚜껑을 열었다. 그랬더니 빗물로 보이는 濁한 물이 흥건한 가운데 黃金빛 遺物 여러 點이 눈에 들어왔다. 깜짝 놀란 그는 于先 들고 있던 函의 뚜껑부터 아래에서 待機하던 慶州博物館長에게 건넸는데, 그것을 뒤집어본 博物館長은 또 한 番 깜짝 놀랐다. 뚜껑 안쪽에 빼곡히 글字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解讀한 結果 函 뚜껑에는 신문왕과 그의 王妃, 그리고 두 아들과 關聯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692年 神文王이 昇遐하자 神木太后와 孝昭王이 先王의 冥福을 빌며 塔을 세웠고, 700年과 702年에 神木太后와 孝昭王이 次例로 世上을 뜨자, 706年에 이르러 그들을 追復하는 한便 聖德王代 王室의 繁榮과 太平聖代를 빌면서 佛舍利와 純金 彌陀上, 無垢淨光大陀羅尼經 等을 奉安한다는 內容이었다. 이 記錄으로 말미암아 黃複寫가 神文王의 陵寺 或은 新羅 王室의 願刹이었을 公算이 커졌고, 神文王의 陵을 黃複寫地 周邊에서 찾으려는 努力이 始作됐다.

○ 진평왕陵 主人이 신문왕?
學者들은 于先 黃複寫地 石塔에서 東쪽으로 135m假量 떨어진 논바닥을 注目했다. 그곳에 흩어진 石材 가운데 新羅 王陵에 쓰였음직한 것들이 多數 包含돼 있었기 때문이다. 1973年 그곳을 新聞王陵으로 보는 見解가 提起되어 學界의 支持를 받게 되면서 新聞王陵의 位置를 둘러싼 論議는 새로운 局面을 맞았다.

그러던 中 2017年 성림文化財硏究院이 그곳에 對한 發掘 調査를 벌인 結果 反轉이 일어났다. 調査團은 그곳이 神文王의 陵域이 아니며, 建築하다가 中斷한 8勢期待 訶陵(假陵)이라고 說明했다. 石材 가운데 多數가 未完成인 點,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十二支神像이 나중에 周邊 建物을 만들 때 再活用된 點, 石室 關聯 石材가 보이지 않는 點 等을 根據로 들었다. 이어 742年 昇遐한 효성왕을 訶陵의 主人公으로 推定했다.

近來에는 黃복死地에서 東쪽으로 500m假量 떨어져 있는 現 진평왕陵을 神文王의 陵으로 특정하는 見解가 많아지고 있다. 浪士 東쪽에 位置하고 黃複寫地에서 무덤의 全貌가 조망된다는 點이 立論의 根據이다. 그러나 아직 그 一帶에 對한 發掘 調査가 全혀 이뤄지지 않았기에 斷定하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우리가 常識처럼 알고 있는 新羅 文化 關聯 情報에 誤謬가 存在할 可能性이 있다. 勿論 歷史 記錄이 零星함에 原因이 있지만 오래된 誤謬를 積極的으로 찾아내 修正하려는 努力이 不足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將次 새로운 發掘과 硏究를 통해 朝鮮時代 門中 次元에서 이름 붙인 新羅 王陵들이 元來의 이름을 되찾게 되길 바라본다.

이한상 대전대 歷史文化學專攻 敎授


#浪士 東쪽 #新聞王陵 #祖上墓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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