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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體絶命의 瞬間 王들이 擇한 避亂處, 公山城[이한상의 祕密의 열쇠]|東亞日報

絶體絶命의 瞬間 王들이 擇한 避亂處, 公山城[이한상의 祕密의 열쇠]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5月 17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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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무늬가 새겨진 청동거울. 중국 청동거울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龍무늬가 새겨진 靑銅거울. 中國 靑銅거울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國立公州博物館 提供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이한상 대전대 歷史文化學專攻 敎授
1624年 正月, 平安兵士 李适이 亂을 일으켰다. 精銳兵 1萬의 叛亂軍이 破竹之勢로 南下하자 朝鮮 朝廷은 큰 混亂에 빠졌고 仁祖는 及其也 蒙塵을 決定했다. 說往說來 끝에 車齡 以南의 公主가 避亂處로 決定됐다. 가슴 졸이며 公州에 到着한 王은 監營이 아닌 公山城에 머물기로 했다. 或 생길지 모를 威脅에 對備하려 함이었다. 머지않아 李适의 亂이 鎭壓되고 李适의 受給을 눈으로 確認하기까지 그는 不眠의 밤을 보냈다.

人組보다 더 切迫한 心境으로 公山城을 찾은 王들이 있었다. 475年 高句麗 長壽王의 奇襲을 받아 王都 漢城을 잃은 채 雄鎭으로 遷都한 백제 文周王이 그 가운데 한 名이다. 相對는 叛亂軍이 아니라 高句麗의 大軍이었기에 그가 지닌 두려움은 더 컸을 것이다. 백제 義慈王도 660年 羅唐 聯合軍의 攻勢로 泗沘城이 陷落될 危機에 處하자 公山城으로 避身했다가 그곳에서 降伏했다. 이처럼 여러 王들은 危機의 瞬間마다 ‘天惠의 要塞’ 公山城을 떠올렸다. 公山城은 어떤 곳이고 그곳에서는 어떠한 歷史의 痕跡이 發掘되었을까.
○ 發掘 開始 約 40年 만에 찾은 ‘大闕의 門’
泗沘로 다시 薦度하기까지 熊津은 百濟의 王都였다. 63年이라는 길지 않은 期間이었음에도 이 時期에는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武寧王, 聖王 等 5名의 王이 在位했다. 그 가운데 문주왕과 東城王은 臣下에게 弑害됐고 삼근왕은 어린 나이에 釋然치 않은 죽음을 맞았다.

雄鎭이 現在의 公州임은 분명하지만 日帝强占期 以來 王宮이 어디에 있었는지 論難이 벌어졌다. 公山城 안에 있었을 것으로 보는 見解가 大勢였지만 高句麗나 私費機 百濟의 事例를 들면서 公山城 밖에서 찾아야 한다는 主張도 꾸준히 提起됐다.

1980年에 이르러 公州大博物館은 熊進機 백제의 王宮을 찾기 위한 發掘에 着手했다. 10月 初부터 그해 末까지 4次에 걸쳐 公山城 內外 곳곳을 파 보았지만 王窮地로 指目할 만한 곳은 찾지 못했다. 1985年에 이르러 王窮地의 端緖를 찾았다. 李适의 亂 때 仁祖가 머물렀던 雙修正 앞 넓은 뜰에서 大型 建物地 여러 洞과 함께 石築 蓮못, 地下 倉庫 等이 確認됨에 따라 調査團은 그곳을 王窮地로 特定했다.

그러나 反論도 만만치 않았다. 發掘品 가운데 多數가 私費機 백제나 統一新羅 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雙修正 앞뜰에는 王窮地가 아닌 ‘推定王窮地’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어 性 內外 곳곳을 發掘했지만 그 어느 곳에도 王宮의 痕跡은 없었다. 그러던 次에 2018年 末부터 이듬해 봄까지 進行된 發掘에서 王宮의 位置를 알려주는 決定的 실마리가 드러났다. 公山城의 南門인 진남루와 推定王窮地 사이에서 ‘大闕의 門’에 該當하는 門闕(門闕) 痕跡이 發見된 데 이어 雙修正 周邊에서 大規模 土木工事를 벌여 만든 大型 建物의 基礎部가 確認됐다. 이 發掘을 통해 熊進機 백제 王宮의 位置가 雙修正 앞뜰이었음이 분명해졌다.
○ 地下 깊숙이 숨겨진 ‘百濟 最後의 날’
충남 공주 공산성에서 발굴된 검은색 갑옷 조각(큰 사진). 붉은 글자인 ‘행정관십(行貞觀十)’, 
‘구년사월이십일일(九年四月x一日)’은 백제 의자왕 5년인 ‘645년 4월 21일’이란 뜻으로 백제가 멸망하던 시기 땅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사진은 건물 추녀 끝에 장식하던 기와인 수막새. 공주대 역사박물관·국립공주박물관 제공
忠南 公州 公山城에서 發掘된 검은色 甲옷 彫刻(큰 寫眞). 붉은 글字인 ‘行政官十(行貞觀十)’, ‘九年四月二十一日(九年四月x一日)’은 백제 義慈王 5年인 ‘645年 4月 21日’이란 뜻으로 백제가 滅亡하던 時期 땅에 묻힌 것으로 推定된다. 작은 寫眞은 建物 추녀 끝에 裝飾하던 기와人 수막새. 公州大 歷史博物館·國立公州博物館 提供
數十 年間 進行된 公山城 發掘의 하이라이트는 옻漆 甲옷이 發見된 瞬間이다. 2011年 4月 公州大博物館 調査團은 拱北樓 앞 廣場에서 發掘에 着手했다. 1990年代까지만 해도 그곳에 큰 마을이 있었기에 백제 遺跡은 大部分 毁損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試掘 調査 때 地下 5∼7m 地點에 백제 遺跡이 남아 있음을 確認했기에 精密調査를 始作한 것이다.

堆積土가 워낙 두꺼워 發掘이 만만치 않았다. 켜켜이 쌓인 흙을 操心스레 걷어낸 다음 百濟 때의 生活面까지 到達하는 데 몇 달이 걸렸다. 9月 下旬에 이르러 펄이 가득 채워진 구덩이 속에서 遺物이 쏟아지기 始作했다. 처음에는 土器와 기와 조각이 主宗을 이루었으나 10月 初, 놀라운 遺物이 出土됐다. 꽃삽으로 펄을 조금씩 除去하던 이현숙 學藝社는 保存 狀態가 完璧한 옻漆 甲옷 조각을 發見한 데 이어 검은色 甲옷 彫刻에 流麗한 筆體로 써내려간 붉은色 글字들을 찾아냈다. ‘行政官十九年(行貞觀十九年)’. 定款은 唐나라 年號로, 19年은 645年이며 백제 義慈王 5年에 該當한다. 遺物 露出 作業은 繼續됐고 여러 官廳의 名稱, 李氏 姓을 가진 人命이 쓰여 있는 甲옷 彫刻을 追加로 찾아냈다. 옻漆 말甲옷, 鐵製 甲옷 彫刻, 銀으로 裝飾된 큰칼度 出土됐다.

調査團은 옻漆 甲옷의 出土 脈絡을 檢討한 뒤 ‘百濟山 甲옷을 義慈王 或은 그에 準하는 人物이 使用하다가 敗亡 時點에 묻은 것’으로 推定했다. 이 見解에 對해 甲옷의 主人을 唐나라 將帥로 보아야 한다는 反論이 提起됐다. 甲옷에 쓰인 관청명이나 人命이 백제의 記錄에서 確認되지 않는다는 點이 主要 論據이다. 이 甲옷의 主人이 敗亡한 백제 義慈王 或은 王族인지, 백제를 敗亡시킨 唐나라 장수인지 斷定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甲옷이 百濟 ‘最後의 날’을 전후해 땅에 묻혔음은 分明해 보인다.
○ 如前히 풀지 못한 公山城의 祕密
國內에서 公山城처럼 백제, 統一新羅, 高麗, 朝鮮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防禦施設로 活用된 事例는 찾기 어렵다. 백제 敗亡 後 그 터에 여러 時期에 걸쳐 새로운 建物이 지어짐에 따라 백제의 痕跡은 相當 部分 지워졌다. 다만 低地帶의 境遇 持續的으로 土沙가 堆積되면서 백제의 痕跡이 封印됐고 千數百 年 後 그 痕跡이 發掘로 드러났다.

40年 以上 發掘이 持續되면서 여러 時期의 遺跡과 遺物이 次例로 드러났는데 特히 백제와 關聯된 것으로는 王宮, 官衙, 攻防, 蓮못, 道路 等이 發掘됐고 建物 지붕을 裝飾했던 各種 기와, 日常에서 使用한 土器, 戰場에서 쓰던 甲옷과 武器 等이 쏟아졌다.

이러한 成果에도 不拘하고 公山城을 문주왕 때 처음 쌓았는지, 宮闕 內 殿閣은 언제 만들어졌고 어떻게 配置되어 있었는지, 東城王 때 세운 林류覺은 어디에 있는지, 武王은 私費의 宮闕을 修理할 때 왜 한동안 公山城에 머물렀는지 等은 只今도 如前히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앞으로의 發掘과 硏究를 통해 그러한 祕密이 次例로 밝혀지길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歷史文化學專攻 敎授
#公山城 #百濟 #公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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