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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인이 皇龍寺 30t 心礎石 들어내자 遺物 쏟아져[이한상의 祕密의 열쇠]|東亞日報

크레인이 皇龍寺 30t 心礎石 들어내자 遺物 쏟아져[이한상의 祕密의 열쇠]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4月 26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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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황룡사지에서 나온 ‘치미’(왼쪽 사진). 건물 용마루 끝에 올려 장식하는 기와로 높이가 182cm에 달해 
황룡사지 건물이 매우 크고 웅대했음을 말해준다. 황룡사 목탑 하부에서 출토된 고리 지름 3.43cm의 금동귀걸이(위 사진)와 높이
 12cm의 백자 소호.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慶北 慶州市 皇龍寺址에서 나온 ‘侈靡’(왼쪽 寫眞). 建物 龍마루 끝에 올려 裝飾하는 기와로 높이가 182cm에 達해 黃龍四肢 建物이 매우 크고 雄大했음을 말해준다. 皇龍寺 木塔 下部에서 出土된 고리 지름 3.43cm의 金銅귀걸이(危 寫眞)와 높이 12cm의 白瓷 소호. 國立慶州博物館 提供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이한상 대전대 歷史文化學專攻 敎授
高麗 高宗 때인 1238年 몽골軍은 慶州에 다다라 닥치는 대로 掠奪을 恣行했다. 그들의 掠奪에서 査察도 例外가 아니었다. 皇龍寺에 亂入한 몽골軍은 곳곳을 헤집고 及其也 불까지 질렀다. 無慈悲한 火魔는 新羅의 세 가지 寶物 中 두 가지에 該當하는 長育尊尙과 9層塔을 집어삼켰다. 數百 年 동안 慶州의 랜드마크였던 皇龍寺는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차츰 世人들의 記憶에서 잊혀졌다.

1976年 그 터에 對한 發掘이 始作됐다. 當初 3年 豫定으로 着手했지만 땅속은 예사롭지 않았다. 建物은 모두 사라졌으나 주춧돌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절에서 쓰였던 遺物들이 쏟아졌기에 發掘을 마무리하기까지 8年이나 걸렸다. 調査 結果 皇龍寺는 塔, 金堂, 講堂이 南北으로 配置되었고 特히 金堂은 東西로 3棟이 配列되었음이 밝혀졌다. 回廊으로 둘러싸인 節 內部의 面積은 無慮 2萬4500餘 坪에 達했다. 皇龍寺는 어떤 절이었고, 이 절터는 어떤 祕密을 吐해냈을까.

○ “黃龍이 나타났다”
三國史記에는 皇龍寺 創建과 關聯한 흥미로운 記錄이 실려 있다. 新羅 眞興王은 스무 살이 되던 553年 月城의 東쪽에 새로운 宮闕을 지으라고 命을 내렸는데, 그곳에서 黃龍(黃龍)이 나타나자 怪異하게 여겨 宮闕 代身 절을 짓고 黃龍(皇龍)이란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黃龍이 나타났다는 記錄을 믿을 수는 없지만 宮闕을 지으려다 抛棄하고 그곳에 절을 세웠다는 記錄은 事實로 볼 수 있다.

眞興王은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卽位했고 그를 代身해 太后가 攝政했다. 學界에서는 眞興王이 個國이라는 年號를 쓴 551年 以後 親庭에 들어간 것으로 보는 見解가 많다. 그때를 전후해 新羅는 領域을 本格的으로 擴張한다. 그 무렵은 新羅에서 佛敎가 公認된 지 한 世代 가까이 지난 時點이었고, 王과 그 一族은 自身들의 權威를 莊嚴하는 데 佛敎를 利用하고 있었다. 이러한 背景에서 皇龍寺 創建의 大役事가 始作됐다. 結局 절을 세우는 것이나 宮闕을 세우는 것이나 모두 王權을 높일 수 있는 裝置였던 셈이다.

1976年 黃龍四肢 下部에 깊게 도랑을 파서 土層 堆積 狀態를 調査한 結果, 절이 들어서기 前에는 低濕地였음이 밝혀졌다. 新羅人들은 그곳에 물의 神, 龍이 살고 있다고 믿었을 可能性이 있다. 넓은 低濕地를 메워 터를 만드는 工事는 國家 次元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作業을 마무리하고 담牆까지 設置한 것은 工事의 첫 삽을 뜬 지 16年이나 지난 569年의 일이다.

○ 層마다 假想 敵國들 이름 새긴 9層塔
新羅 善德女王 때 黨에서 歸國한 磁場 法師가 9層塔 建立을 建議했다. 그 무렵 新羅는 그러한 建築物을 세워본 經驗이 없었기에 백제에 丈人을 要請했다. 그에 應해 百濟가 派遣한 人物이 아비지(阿非知)다. 그가 主導하고 新羅의 木工 200名이 힘을 합쳐 높이 80m에 達하는 9層塔을 645年에 完工했다.

三國遺事에 引用된 新羅 僧侶 안홍의 冊에는 新羅에 威脅이 되는 나라들의 侵入을 막으려 9層塔의 層마다 日本, 中華, 吳越 等 假想 敵國을 割當하였다는 內容이 적혀 있다. 當時 新羅가 周邊國의 侵入을 警戒하고 또 그들의 威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意志가 얼마나 剛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記錄이다.

皇龍寺址는 光復 以後 國家 史跡으로 指定되었으나 이미 곳곳에 家屋이 들어서 있었다. 特히 9層塔 基礎部 위에도 집 한 채가 세워져 있었다. 政府는 1964年 그 집을 買入해 撤去했는데 그 措置가 問題를 불러왔다. 舍利具가 奉安된 心礎石이 外部로 드러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盜掘꾼들이 夜陰을 틈타 舍利具를 훔쳐 달아난 것이다. 2年 後 偶然히 盜掘 事實이 알려져 舍利具의 一部를 가까스로 回收할 수 있었다.

舍利具가 盜掘의 被害를 입었기에 當初 木塔址는 黃龍四肢 發掘의 核心이 아니었다. 따라서 塔 基礎部의 規模 程度만을 밝혀볼 참이었다. 그런데 土層 確認用 도랑에서 靑銅製 팔찌와 그릇이 出土되자 發掘을 擴大하기로 했다. 1978年 7月 25日, 포항제철이 支援해준 크레인으로 約 30t 무게의 心礎石을 들어 올리자 곳곳에서 遺物 痕跡이 드러났다. 그릇, 손칼, 가위, 도끼, 낫, 귀걸이 等 新羅産 物品이 主宗을 이뤘고 黨에서 들여온 靑銅거울과 百子圖 出土됐다. 發掘品에 對해 學界에서는 創建氣의 舍利器와 供養품으로 보거나 地神에게 祭祀 지내며 넣어준 物品으로 推定하고 있다.

○ 皇龍寺 南쪽 蹴球場 3.5個 크기 廣場
절터 內部에 對한 發掘에 이어 1987年부터 近來까지 數十 年에 걸쳐 절터 外郭에 對한 發掘이 이어지고 있다. 그 結果 皇龍寺가 섬처럼 홀로이 떨어져 있지 않았고 新羅 王卿의 核心 要地에 자리했음이 밝혀졌다. 節 담牆 밖에는 넓은 鋪裝道路가 施設되었고 東南쪽과 西南쪽 모퉁이에는 큼지막한 交叉路가 있었다. 절 周邊의 整然하게 區劃된 空間에서는 新羅 王卿人들의 家屋이 連이어 發見됐다.

新羅의 王宮인 粤省은 慶州 盆地 全體로 보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北쪽으로는 麻立干機 王陵들이 자리해 있고 南쪽으로는 남천이 흐른다. 따라서 現在까지의 發掘 結果로 보면 慶州 盆地 都市 區劃의 基準點은 粤省이 아닌 皇龍寺였을 可能性이 높아지고 있다. 近來 新羅文化遺産硏究院이 黃龍四肢 南쪽에서 發掘한 廣場이 學界의 視線을 끌고 있다. 잔자갈을 곱게 깐 이 廣場은 東西 500m, 南北 50m 크기로 國際 規格 蹴球場 3.5個에 該當하는 規模이다. 이곳에서 新羅王은 軍士를 査閱하거나 重要 行事를 主管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皇龍寺는 通商의 査察과는 다른 매우 특별한 空間이었다. 처음에는 王權을 象徵하는 査察이었으나 차츰 新羅人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護國 度量으로 變貌했다. 아마도 新羅의 ‘삼한一統(三韓一統)’ 過程에서 매우 重要한 役割을 擔當했을 것이다. 佛國土에 산다고 생각한 新羅人들에게 皇龍寺는 온갖 두려움을 緩和하는 聖所였을 것이다. 앞으로도 繼續될 發掘 및 硏究를 통해 皇龍寺의 實體가 조금 더 생생하게 드러나길 期待한다.

이한상 대전대 歷史文化學專攻 敎授


#크레인 #皇龍寺 #心礎石 #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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