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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高宗이 보낸 暗殺團에 激怒… 日 亡命 中에 上疏文[박훈 韓日 歷史의 갈림길]|東亞日報

김옥균, 高宗이 보낸 暗殺團에 激怒… 日 亡命 中에 上疏文[박훈 韓日 歷史의 갈림길]

  • 東亞日報
  • 入力 2021年 11月 12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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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망명 당시 일본 전통 복장을 입고 있는 김옥균(왼쪽사진 왼쪽). 오른쪽 그림은 프랑스인 조르주 비고가 1887년 2월 일본 잡지에 게재한 풍자만화 ‘낚시 놀이’. 일본, 청나라, 러시아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모습을 담았다. 김옥균이 꿰뚫어본 당시 세계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아일보DB·위키미디어
日本 亡命 當時 日本 傳統 服裝을 입고 있는 김옥균(왼쪽寫眞 왼쪽). 오른쪽 그림은 프랑스人 조르주 備考가 1887年 2月 日本 雜誌에 揭載한 諷刺漫畫 ‘낚시 놀이’. 日本, 淸나라, 러시아가 虎視眈眈 朝鮮을 노리는 모습을 담았다. 金玉均이 꿰뚫어본 當時 世界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東亞日報DB·위키미디어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1884年 겨울, 甲申政變에 失敗한 金玉均은 日本으로 逃走했다. 그의 亡命은 前 日本 言論의 注目을 받았다. 日本 新聞들은 그를 ‘朝鮮版 메이지維新’을 試圖하다 失敗한 悲運의 革命家로 描寫했다. 以後 日本은 政治的 困境에 빠진 朝鮮(韓國) 政客들의 避難處가 되었다. 유길준, 이준용(李昰應의 孫子), 박영효(甲午改革 市 再次 亡命)에게 그랬고, 光復 後에도 김종필, 김대중 等 政界의 巨物들이 日本으로 避身했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게 된 것만으로도 퍽 多幸이다. 金玉均은 1894年 상하이로 건너가 高宗이 보낸 刺客 洪鍾宇에게 暗殺되기까지 10年間 日本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日의 過激한 路線과 距離 두기

金玉均이 亡命해 오자 興奮한 것은 日本의 在野 勢力이었다. 政府의 朝鮮政策이 微溫的이라고 不平하던 이들은 金玉均을 앞세워 朝鮮의 內政改革을 試圖하려 했고, 甚至於는 軍事行動을 構想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세 가지 그룹이 있었다(琴秉洞, ‘金玉均と日本’). 먼저 後날 ‘帶同合邦論(大東合邦論)’을 써서 韓日의 ‘對等한’ 合邦을 主張한 多루이 도키치(樽井藤吉)는 곧바로 金玉均을 만나 고베의 有名한 아리마 溫泉에서 交分을 나눴다. 다음으로는 아시아主義와 大陸 浪人들의 巨頭로 有名한 현양사(玄洋社)의 도야마 미쓰루(頭山滿)다. 後日 그는 金玉均에 對해 “人格, 識見, 그 風采와 言辯 等으로 볼 때 稀代의 豪傑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範圍에서는 中國의 孫文, 黃興(黃興) 같은 사람도 傑物이었지만, 그들에게는 各各 後繼者도 있어 天下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쉽도다, 김옥균에게는 그것이 없구나!”라고 回顧했다. 세 番째 그룹은 自由民權運動의 自由黨 左派勢力이었다. 이들은 메이지 政府에 反對해 各地에서 蜂起를 일으키다 失敗하자, 朝鮮 問題를 口實로 勢力을 回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當事者인 金玉均은 距離 두기를 繼續했다. 이들의 過激한 路線이 도움이 될까 우려스러웠고, 무엇보다도 이들은 메이지 政府의 政敵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當時 朝鮮에는 金玉均이 日本人들을 이끌고 朝鮮에 쳐들어올 거라는 所聞이 나돌았다. 朝鮮 政府의 이런 疑心을 確信으로 바꾼 事件이 1885年 12月에 일어났다. 一名 ‘오사카 事件’이다. 위에서 言及한 自由黨 左派 그룹이 朝鮮 侵攻을 實行에 옮기려다 發覺된 것이다. 手母自認 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는 金玉均과 接觸했지만 同意를 얻지 못하자 獨自的으로 움직였다. 浪人 數十 名을 보내 朝鮮 政府 要人을 殺害하면 各地에서 獨立黨이 同調하여 蜂起할 것이라는 荒唐한 計劃을 세우고, 居士資金 마련을 위해 官公署나 富者들을 터는 强盜 行爲도 서슴지 않았다.

奸臣 除去하라고 高宗에 直擊彈

‘오사카 事件’에 朝鮮 政府는 戰慄했다. 日本 政府에 김옥균 引渡를 要求했지만, 日本은 亡命客에 對한 國際的 冠禮를 내세워 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直接 손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장은규에 이어 池運永을 暗殺犯으로 派遣했다. 그러나 金玉均 側近들은 池運永의 正體를 看破하고 高宗의 暗殺指令文까지 奪取해 金玉均에게 건네줬다. 한때나마 高宗의 寵愛를 받았던 金玉均은 激怒해 上疏文을 올렸고, 이는 日本 新聞에 報道됐다. 金玉均의 背信感과 함께 當時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글이니, 좀 더 詳細히 살펴보자(한국학문헌연구소 篇 ‘김옥균全集’).

金玉均은 먼저 池運永이 갖고 있던 暗殺指令文이 正말 高宗이 준 거냐고 따져 물으며, ‘輕車(輕擧)’라고 詰難한다. 이어서 高宗이 重用하는 閔氏들 中 國家의 富强과 百姓의 삶에 寄與한 者가 果然 몇이나 있느냐며, 이런 奸臣들을 除去하지 않는다면 “廢하는 亡國의 君主됨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直擊彈을 날린다. 上疏文을 본 高宗은 金玉均을 죽일 決心을 더 단단히 했을 것이다.

當時 英國은 러시아에 맞서 巨文島를 占領한 狀態였다. 그의 화살은 淸國으로 向한다. 淸나라가 朝鮮을 屬國이라고 하면서도 “巨文島를 回復하여 朝鮮의 疆埸을 保全하지 못하니 앞으로 또 外國이 다른 港口를 빼앗는 일이 생기면 陛下는 어쩔 것이며 淸國은 무슨 方法으로 이를 막을 것입니까”고 묻고는, 곧바로 “袁世凱 같은 어린 아이가 오로지 自己의 功을 탐하여 외람되게 陛下를 속이려고 하니 廢하는 부디 그 術策에 넘어가지 마소서… (淸國이) 袁世凱와 같이 口尙乳臭(口尙乳臭)하여 時勢를 判斷하지 못하는 者를 派遣한 것을 신은 理解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袁世凱를 糾彈했다. 그의 港靑(抗淸) 意識을 느낄 수 있다. 한便 日本 亦是 甲申政變 以後로 朝鮮에 對해 消極的 態度로 돌아서 있으니 이 亦是 믿을 만하지 않다고도 했다.

海外에서 묻힌 政治改革 構想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의 외국인 묘역에 있는 김옥균의 무덤과 비석. 동아일보DB
日本 도쿄 아오야마 公園墓地의 外國人 墓域에 있는 金玉均의 무덤과 碑石. 東亞日報DB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金玉均의 解答은 明確하다. “오직 밖으로는 널리 歐美 各國과 信義로써 親交하고 안으로는 政治를 改革하며…상업을 일으켜 財政을 整理하고 兵力을 養成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英國은 巨文島를 돌려줄 것이요, 다른 外國도 侵略의 생각을 斷念할 것”이라는 얘기다. 金玉均이 보기에 朝鮮은 그럴 만한 潛在力이 있는 나라였다. 人口는 2000萬 名을 넘고 工産品은 아직 없지만 鑛物 같은 것은 나라의 財源이 되기에 足하다고 봤다. 社會的으로는 兩班 撤廢를 主張했다. “우리나라가 中古(中古) 移轉 國運이 隆盛할 때에는 모든 物産이 中國과 日本을 넘어섰는데 只今 모두 廢絶되어 그 痕跡도 없어진 것은 다른 理由가 아니라 兩班의 跋扈와 專橫 때문”이라며 只今 世界가 商業을 爲主로 서로 競爭하는 때에 兩班을 除去하지 않으면 國家는 廢亡할 것이라고 氣焰을 吐했다. 모두가 將次 世界史의 흐름을 正確히 꿰뚫은 識見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사카 事件 等 在野 勢力들이 過激해지고, 朝鮮 刺客까지 日本에 드나들게 되자 日本 政府는 金玉均을 부담스러워하기 始作했다. 그래서 第3國으로 보내려 했으나 如意치 않자, 日本의 奧地로 쫓아낼 窮理를 했다. 日本 警察은 于先 外部와의 接觸을 遮斷하고자 요코하마 그랜드호텔에 머물던 金玉均을 미쓰이 別莊에 强制 抑留했다. 이에 對해 日本 言論과 市民들 사이에 同情輿論이 커져가자 1886年 8月 日本 警察은 金玉均의 激烈한 抵抗을 억누르고 拉致하다시피 船舶에 그를 태웠다. 外國에서 當한 流配였다. 流配地는 도쿄에서 無慮 1000km나 떨어진 太平洋의 高度(孤島) 오가사와라(小笠原)섬이었다.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김옥균 #高宗 #暗殺團 #上疏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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