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토 히로부미보다 앞서 朝鮮에 깊이 干與한 이노우에 가오루”[박훈 韓日 歷史의 갈림길]|東亞日報

“이토 히로부미보다 앞서 朝鮮에 깊이 干與한 이노우에 가오루”[박훈 韓日 歷史의 갈림길]

  • 東亞日報
  • 入力 2021年 10月 15日 03時 00分


코멘트
영국 런던에서 유학한 일본 조슈번의 청년 5명은 서양의 선진문물을 접한 뒤 개국파로 변신했다. 뒷줄 오른쪽은 이토 히로부미, 앞줄 왼쪽이 이노우에 가오루.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英國 런던에서 留學한 日本 조슈번의 靑年 5名은 西洋의 先進文物을 接한 뒤 個國波로 變身했다. 뒷줄 오른쪽은 이토 히로부미, 앞줄 왼쪽이 이노우에 가오루.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우리는 흔히 韓日 近代史에 關聯된 日本 政治人 하면 이토 히로부미를 떠올린다. 그러나 事實 그보다 더 오랫동안 韓國 問題에 干與한 사람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1836∼1915)라는 人物이다. 幕府 打倒에 앞장섰던 조슈번 出身으로 메이지維新의 院訓 中 한 名이다. 이토 히로부미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그의 故鄕 親舊이자 政治的 猛雨(盟友)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政敵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에 맞서 對內的으로는 改名路線, 對外的으로는 穩健外交를 펼칠 때 이노우에는 恒常 그의 便이었다. 外務大臣, 農商務代身, 內務大臣, 財務大臣을 歷任했으니 總理 빼놓고는 다 해본 實力者다.》

이노우에는 1876年 江華島條約 締結 때 全權大使 구로다 기요打카(黑田淸隆)와 함께 不全權大使로 派遣되어 朝鮮과 因緣을 맺었다. 條約 締結 後 美國과 유럽에서 2年間 工夫했다. 그 前에도 이미 20代 時節인 1863年 이토 히로부미와 英國에 留學한 적이 있었으니, 메이지 政府 最高의 西洋통이라 할 만하다.

淸나라와 戰爭 警戒한 日

그가 朝鮮 問題에 本格的으로 干與하기 始作한 것은 壬午軍亂 때부터다. 當時 그는 外務大臣이었다. 舊式軍隊의 不滿으로 터진 內亂에서 日本公使館이 불타고 日本人들이 殺害당했다. 日本 輿論은 閔氏 勢力과 大院君의 權力鬪爭에 애꿎은 日本人들이 犧牲됐다며 憤怒했다. 當時 日本에 留學 中이던 兪吉濬과 尹致昊는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에게 “淸國이 이 機會에 大院君을 問罪한다는 名分으로 出兵하고 朝鮮人이 그 指揮를 받으면 朝鮮은 獨立을 다시는 圖謀할 수 없으며 朝鮮의 모든 權利가 淸人의 手中에 들어가게 됩니다”라며 日本 兵力을 빌려 줄 것을 要請했다(김흥수, ‘壬午軍亂 時期 유길준·尹致昊 延命相서’).

日本 政府는 이를 拒絶하고 請보다 먼저 서울에 入城하기 위해 直接 兵力을 派遣했다. 자칫하면 同時 派兵한 廳과 改悛할 可能性도 있었다. 이노우에는 이를 憂慮했다. 그가 主導한 政府會議는 “아직 改悛한 게 아니므로 暴徒를 만나더라도 戰鬪를 避하고 防禦에만 힘쓴다”는 方針을 定했다. 그래도 不安했던지 이노우에는 軍部에 內訓(內訓)을 보내 “陸海軍은 工事(公使)의 重大한 使命을 完遂하기 위해 遂行하는 것으로, 平和를 위한 出動이지 戰爭을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平穩하게 行動해야 한다는 것을 銘心하고 朝鮮에 滯留할 때에도 現地人에게 亂暴한 行動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못을 쳐두었다. 이참에 日本의 힘을 빌려 大院君, 나아가 閔氏 勢力을 掃蕩하려 했던 金玉均은 이런 뜨뜻미지근한 措置에 이노우에와 하나부사 公使를 ‘2人組 惡黨’이라며 憤慨해했다(김흥수·위의 論文).

日에 ‘低姿勢’ 보인 朝鮮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일본공사관이 공격당하자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를 비롯한 공관원들이 인천으로 탈출해 귀국하는 모습을 그린 일본의 보도판화. 당시 외무대신이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때부터 조선 문제에 본격적으로 간여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882年 壬午軍亂으로 日本公使館이 공격당하자 하나부사 요시모토 公社를 비롯한 公館員들이 仁川으로 脫出해 歸國하는 모습을 그린 日本의 報道版畫. 當時 外務大臣이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때부터 朝鮮 問題에 本格的으로 干與한다.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壬午軍亂이 收拾된 지 얼마 안 있어 이番에는 甲申政變이 勃發했다. 金玉均의 開化黨 쿠데타에 日本軍 兵力이 加勢했으니 日本으로서는 壬午軍亂보다 훨씬 深刻한 事態였다. 日本政府는 現職 外務大臣人 이노우에를 派遣했다. 外務大臣을 直接 보낼 程度로 事態를 嚴重하게 여기고 있었다. 仁川港에 到着한 이노우에에게 서울의 狀況이 報告되었다. 日本 側 人員 2名이 불탄 日本 兵營을 調査하고 있는데, 敦義門(西大門)을 지키던 淸國 兵士가 이를 制止하면서 銃 한 발을 쏘는 等 狀況은 一觸卽發이었다.

이노우에는 朝鮮 政府에 自身의 身邊保障을 要求하며 濟物浦를 出發해 入京했다. 1885年 1月 4日, 그의 宿所에 統理衙門獨판(外務長官 格) 조병호가 豫防했다. 조병호는 “元來 日本 政府와 우리 政府 사이에는 아무 問題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兩國 關係는 어떤 支障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甲申政變 過程에서 日本 民間人 數十 名이 죽고 公使館이 불탔으니 日本의 報復이 두렵기도 했겠지만, 朝鮮 政府 立場에서 보면 甲申政變은 쿠데타에 日本이 介入한 것인데도 첫 만남에서 이미 ‘좋게, 좋게’ 매듭지으려는 低姿勢가 느껴진다. 이노우에는 이를 놓치지 않고 “設令 오랜 友好國이라 하더라도 한 番 일이 틀어져 兩國이 戰爭에 이르는 것은 自古로 例가 적지 않은 일”이라며 威脅해 두는 걸 잊지 않았다.

이노우에에게 호통친 김병시


마침내 1月 6日 이노우에는 昌德宮 樂善齋에서 高宗을 謁見한다. 이 謁見 場面도 緊張感이 가득하다(‘근대한국외교문서’ 9卷). 이노우에 發言을 日本 側 通譯官이 高宗 옆에서 直接 아뢰자 事大黨의 김병시(金炳始)가 無嚴한 일이라며 制止했다. 公式的인 接見儀禮가 끝나고 이노우에가 常住할 게 있으니 左右를 물리쳐 달라고 했다. 그러자 다시 김병시가 大臣들은 물러나선 안 된다고 主張했다. 高宗이 代身은 殘留케 하는 게 좋겠다고 하자, 이노우에가 누가 代身이냐고 물었다. 高宗이 領議政 심순택 等을 가리키자, 이番에는 代身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했다. 高宗이 미처 答하기 前에 김병시가 “大臣의 이름을 알고 싶으면 물러난 後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될 것을, 어찌 無禮하게 이처럼 直接 여쭙는가!” 하고 크게 꾸짖었다. 이노우에가 아랑곳하지 않고 談判은 王이 直接 하실 것인가 아니면 全權을 任命할 것인가 하고 묻자, 高宗은 全權이 할 것이라고 했다. 이노우에는 再次 全權은 누구로 삼을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이番에도 김병시가 “이리도 强壓的으로 여쭙다니 어찌 이리 無禮한가!” 하고 막아섰다. 나중에 高宗은 김병시에게 그때 氣分이 아주 좋았다며 靑에서도 ‘朝鮮에는 김병시가 있다’고 했다더라는 말까지 하며 그를 추켜세웠다.

이노우에의 傲慢과 김병시의 氣槪를 엿볼 수 있는 逸話지만, 다음 날부터 全權代身 金弘集과 이노우에 사이에서 進行된 會談은 外交街 氣槪만 갖고 되는 게 아님을 아프게 보여줬다. 이노우에는 始終 戰爭 勃發 可能性을 내보이며 金弘集을 壓迫했다. 그 結果 맺어진 것이 우리가 試驗 보려고 외우던 漢城條約이다. 그러나 當時 日本은 戰爭할 形便이 못 되었고, 위에서 본 대로 이노우에 自身도 戰爭이 나지 않도록 極度로 注意하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會談場에서 처음 마주 앉은 바로 그날(1月 7日), 淸의 李鴻章은 도쿄 駐在 淸國 公使에게 日本 政府에 衝突을 願치 않음을 알리라고 通報하고 있었다. 이런 狀況을 알고 있었더라면 이노우에의 攻勢를 좀 더 잘 防禦할 수 있었을 것이다. 外交는 氣槪보다는 情報와 判斷力이다. 餘談이지만, 10年 後 甲午改革 때 이노우에는 다시 朝鮮에 와서 金弘集을 內閣總理大臣의 자리에 밀어 올렸다. 甲午內閣의 崩壞와 함께 金弘集은 서울 市內에서 群衆에게 맞아죽었다. 이 두 사람도 奇緣이라면 奇緣이겠다.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이노우에 가오루 #壬午軍亂 #韓國 問題 干與
  • 좋아요
    0
  • 슬퍼요
    0
  • 火나요
    0
  • 推薦해요

댓글 0

只今 뜨는 뉴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