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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芙江하면 어찌 오랑캐가 脅迫을…” 朴珪壽의 鬱憤[박훈 韓日 歷史의 갈림길]|東亞日報

“나라가 芙江하면 어찌 오랑캐가 脅迫을…” 朴珪壽의 鬱憤[박훈 韓日 歷史의 갈림길]

  • 東亞日報
  • 入力 2021年 6月 25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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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난 일본 군함 운요호 1875년 9월 강화도 앞바다를 불법으로 침입한 일본 군함 운요호의 모습. 운요호는 이때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유발한 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함포 공격을 가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역할을 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1875年 江華島 앞바다에 나타난 日本 軍艦 운요호 1875年 9月 江華島 앞바다를 不法으로 侵入한 日本 軍艦 운요호의 모습. 운요호는 이때 朝鮮 水軍의 防禦的 攻擊을 誘發한 뒤 이에 對한 報復으로 艦砲 攻擊을 加해 江華島條約을 締結하는 役割을 했다. 寫眞 出處 위키미디어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壬辰倭亂 以後의 通信使 派遣을 들어 當時 韓日關係를 親善外交라고 높게 評價하는 境遇가 많다. 하지만 派遣 回數를 보면 大略 20年 만에 한 番밖에 안 된다. 가뭄에 콩 나듯 간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 通信社는 에도(도쿄)까지 가지 않고 쓰시마에서 대충 ‘때웠다’(1811년). 에도까지 간 通信社는 1763年이 마지막이었다. 이때부터 메이지維新(1868年)까지 한 世紀가 넘는 동안 제대로 된 外交는 없었다. 이웃나라끼리 참 드문 일이다. 이러니 이 時期 韓日關係는 親善關係라기보다는 ‘無關係’였다는 것이 實相에 가까울 것이다.》

現象變更을 試圖한 것은 도쿠가와 幕府였다. 그때까지 朝鮮外交는 中央政府人 幕府가 아니라 쓰시마番이 擔當해왔다. 그런데 開港을 斷行한 幕府는 1860年代 들어 朝鮮外交를 直接 하려고 試圖했다. 幕府 滅亡으로 이 試圖는 霧散되었지만 메이지政府는 이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메이지維新에서 江華島條約(1876年)까지는 無慮 8年이 걸렸다. 무슨 曲折이 있었던 걸까.

外交文書 하나로 들끓은 韓日

日本은 維新으로 新政府가 樹立되었다는 西界(書契·外交文書)를 보내왔다. 그런데 그 안에 中國 皇帝만이 쓸 수 있다고 여겨졌던 ‘皇(皇)’, ‘칙(勅)’ 같은 文字가 있는 것을 보고 朝鮮은 守令을 拒否했다. 日本 쪽 事情도 複雜했다. 먼저 中央政府의 外務省과 쓰시마番의 軋轢이다. 조선무역으로 經濟를 支撐하고 있는 쓰시마番은 巨大한 報償이 없는 限 朝鮮 外交權을 뺏기지 않으려 했다. 番 當局이 消極的일 때에는 釜山 倭館에 있는 쓰시마 商人들이 當局에 壓力을 加했다. 朝鮮은 쓰시마 便이었다. 朝鮮과 쓰시마의 抵抗에 日本 外務省은 困境에 處했다. ‘征韓論’ 輿論도 큰 變數였다. 征韓論 하면 1873年 사이고 다카모리가 主導한 征韓論 政變이 有名하지만 事實 유신勃發 때부터 있어왔다. 維新 3걸 中 하나라는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도 征韓論을 主張했고 政府 核心 中 한 名이었던 에토 신페이(江藤新平)는 情恨을 부르짖으며 사무라이 叛亂을 일으켰다(사가의 난).

이런 雰圍氣에서 朝鮮 政府가 連이어 書契를 拒否하자 日本 輿論은 ‘朝鮮에 모욕당했다’며 들끓었다. 그 最高 頂點이 위에서 言及한 征韓論 政變이다. 政府 實權者였던 오쿠보 도시미치는 包含 外交로 威脅해 朝鮮을 協商場으로 끌어내는 데에는 同意했지만, 全面 戰爭으로 發展할 수 있는 사이고의 征韓論은 안 된다며 이를 粉碎했다. 戰爭의 名分이 없고, 日本 國力이 모자라고, 外國의 干涉이 豫想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朝鮮에서도 鎖國政策을 펴던 大院君이 失脚하고 個項에 前向的이던 閔氏 勢力이 執權했다. 兩國에 外交 穩健派 政權이 同時에 成立되어 大院君의 鎖國論과 사이고의 征韓論이 正面衝突하는 일은 免했다(1874년). 2年 後 締結된 江華島條約은 크게 봐서 이런 政治構圖의 産物이다.

16日만에 屈辱의 江華島條約

일본 의회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일본 시각에서 기록한 운요호 사건의 모습.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日本 議會圖書館에 保管돼 있는 日本 視角에서 記錄한 운요호 事件의 모습. 寫眞 出處 위키미디어
征韓論이 挫折되자 옛 사무라이들은 爆發 直前이었다. 이를 달래려고 日本은 1874年 4月 朝鮮 代身 타이완을 侵略했다. 日本의 軍事 挑發에 朝鮮은 敏感하게 反應했다. 淸나라도 朝鮮에 修交를 勸했다. 1874年 9月 以後 마침내 兩國 外交官들이 몇 次例 마주 앉았다. 그러나 書契 問題 等에 合意를 보지 못하고 會談은 끝내 霧散되었다. 會談 決裂 消息에 日本은 包含 外交 카드를 꺼내들었다. 1875年 4月 釜山에 軍艦 운요호를 派遣하여 武力示威를 開始했다. 戰爭이 날 수 있는 急迫한 狀況이었다. 그래도 朝廷 大臣들은 如前히 日本과의 協商을 反對했다. 이때 나선 건 朴珪壽였다. 讀者들이 理解하기 쉽게 옮기면 그는 御殿會議에서 “日本人들의 國書에 僭濫하고 妄靈된 稱號가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禮儀와 謙遜을 저 섬 오랑캐에게 要求하기는 어려운 일인 듯합니다. 그 나라에서 皇帝라고 稱한 것은 周나라 평왕(平王) 時代부터로 이미 數千 年이 되었습니다. (中略) 이는 오직 主上께서 어떻게 包容하시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저 사람들이 國際(國制)를 變更하여 修交를 하자고 했는데 只今까지 拒否當해 왔으니, 分明히 한스럽게 여기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다 問題를 일으킬 口實이 될까 매우 염려스럽습니다”라고 進言했다.

國際的으로 通用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皇(皇)’字를 써온 日本 內部 事情을 理解하고, 또 8年 동안이나 修交 要求를 거절당한 日本 側 心中도 헤아리자는 것이다. 只今 같으면 當場 ‘親日派’로 몰릴 것이다. 많은 大臣들은 朴珪壽를 非難했다. 그는 그들에게 되묻는다. “三千里 疆土에서 안으로는 政治를 잘하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물리칠 方道를 다하여 나라와 軍隊가 富强했더라면, 작은 섬나라가 어찌 敢히 와서 우리를 엿보고 放恣하게 脅迫하는 것이 이 地境에 이르렀겠습니까!” 그러나 이番에도 이런 목소리는 採擇되지 않았고, 機會를 엿보던 日本에 ‘放恣하게 脅迫’할 구실을 줘버렸다. 운요호가 이番에는 仁川 앞바다에 나타난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修交를 拒否해왔건만 條約은 겨우 16日 만에 날림으로 調印되었다. 8年 동안 反對해왔던 사람들 中 변변히 抵抗한 이도 없었다. 그렇게 決死反對해왔다면 무슨 自己說明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於此彼 아무 생각 없이 無責任하게 反對만 해왔던 거다.

外交의 뒷배는 自强


外交에서 相對 國家를 한 덩어리로 認識하면 안 된다. 相對 內部에도 여러 가지 다른 意見이 있고 다양한 政治勢力이 갈려 있다. 우리 內部를 돌이켜보면 쉽게 理解할 수 있다. 當時의 日本이나 只今의 日本도 마찬가지다. 當時의 日本이라고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처음부터 朝鮮侵略을 試圖한 것은 아니다. 侵略도 그럴만한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이 된다 하더라도 그게 自己들 國益에 도움이 돼야 敢行하는 것이다. 메이지維新부터 韓國 倂合까지 42年 동안 日本의 對韓政策은 倂合을 豫定한 一直線이 아니라,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구불구불한 것이었다. 그 길의 模樣은 日本 內部의 路線葛藤과 國際情勢에 따라 휘어졌다, 구부러졌다를 反復했다. 그러나 가장 重要한 것은 朝鮮이 얼마나 力量을 갖추느냐였다. 朝鮮을 통째로 삼켜도 擦過傷 程度만 입는다면 누구나 欲心을 낼 것이다. 하지만 “나를 삼킬 테면 삼켜봐라. 다만 너도 앉은뱅이 程度 될 覺悟는 해라”라면 선뜻 野心을 부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朴珪壽는 開放의 한복판에 朝鮮을 던져, 이를 契機로 그럴 程度의 힘을 기르는 길을 選擇했다.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韓日歷史 #無關係 #江華島條約 #박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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