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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日’ 以前에 ‘港靑’… 屬國을 拒否한 朝鮮의 싸움[박훈 韓日 歷史의 갈림길]|東亞日報

‘反日’ 以前에 ‘港靑’… 屬國을 拒否한 朝鮮의 싸움[박훈 韓日 歷史의 갈림길]

  • 東亞日報
  • 入力 2021年 5月 28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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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시각으로 그린 임오군란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을 일본 시각으로 담은 보도판화. 하급 군인들이 일본 공사관 직원들과 싸우는 모습으로, 가운데 그림의 상단에는 일본 공사가 본국에 보낸 전보가 붙어 있다. 조선이 청에 진압을 요청하면서 병자호란 이후 약 250년 만에 청군이 조선에 들어왔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日 視角으로 그린 壬午軍亂 1882年 發生한 壬午軍亂을 日本 視角으로 담은 報道版畫. 下級 軍人들이 日本 公使館 職員들과 싸우는 모습으로, 가운데 그림의 上段에는 日本 公使가 本國에 보낸 電報가 붙어 있다. 朝鮮이 淸에 鎭壓을 要請하면서 丙子胡亂 以後 約 250年 만에 淸軍이 朝鮮에 들어왔다. 大韓民國歷史博物館 提供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前近代 時期 韓中關係는 朝貢冊封體制下에 있었다. 그런데 惡名 높은 이 關係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形式的인 것이었다. 特히 18世紀 中葉 以後에는 定期的인 使節團 派遣과, 中國을 上國으로 待接하는 外交 儀禮만 지키면 나머지는 거의 朝鮮의 自由 意思가 尊重되었다. 丙子胡亂(1637年) 以後 朝鮮에 淸軍이 駐屯하거나 淸의 官吏가 서울에 主宰하는 일이 單 한 番도 없었던 것이 이를 證明한다.》

朝貢 關係는 ‘支配-服屬’ 關係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關係를 막고자 서로 庇護하거나 援助하는 一種의 ‘패트論-클라이언트’ 關係였다고 할 수 있다.(김봉진, ‘朝鮮=屬國, 屬邦’의 槪念社)

그런데 이런 關係는 19世紀 後半 西洋과 日本의 大斗로 重大한 挑戰에 直面하게 된다. 이미 主權國家 體制를 確立한 이 國家들이 造淸(朝淸)關係의 ‘正體’를 묻기 始作한 것이다. 그 契機는 丙寅洋擾(1866年), 辛未洋擾(1871年)였다. 프랑스와 美國은 朝鮮과 戰爭을 하면 淸나라를 侵犯하는 게 되는지, 淸나라는 介入할 것인지, 그 以前에 都大體 造淸關係는 어떤 것인지를 물었다. 淸 政府의 答辯은 ‘屬國이지만 自主的인 나라이고, 自主的이지만 同時에 屬國’이었다. 卽, 屬國자주(屬國自主)였다. 對等한 主權國家 體制에 사는 現代人들로서는 쉽게 理解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近代朝鮮의 險難한 旅程은 이 말로부터 始作했다. 現代 韓國語의 ‘屬國’과 달리 當時 이 말의 意味는 매우 曖昧했다. 朝鮮 같은 朝貢國은 事實上 獨立國이라는 게 當時 朝鮮과 西洋, 그리고 日本의 立場이었다.

‘朝鮮 屬國化’ 淸의 態度 變化


朝鮮은 朝貢國이라는 타이틀을 維持한 채 自主國이 되고자 했다. 朝貢을 하는 代身 請에는 國際社會의 威脅으로부터 朝鮮을 保護해 줘야 하는 義務를 지우고자 했다. 하지만 內政干涉은 限死코 拒否했다. 청은 “朝鮮이 中國의 保護를 求하는 것은 決코 眞心이 아니다. 但只 中國의 힘을 빌려 어깨의 짐을 덜고자 하는 것일 뿐”이라고 볼멘소리를 냈다. 이때부터 淸日戰爭까지 約 15年間은 朝鮮을 屬國化하려는 淸과, 이를 拒否하려는 朝鮮의 싸움이었다. ‘反日’ 以前에 ‘港靑(抗淸)’이 있었던 것이다.

1880年代 들어 淸은 傳統的인 立場을 바꿔 朝鮮 屬國化 政策을 急激하게 推進했다. 그 主導者는 北洋大臣 李鴻章(李鴻章)과 그 部下인 馬建忠(馬建忠), 袁世凱(袁世凱)였다. 政策 變化의 理由는 淸의 危機感이었다. 辛未洋擾 後 大院君이 失脚하자 日本은 朝鮮과 江華島條約(1876年)을 맺고 이어 류큐 王國을 倂合(1879年)해버렸다. 지난 칼럼에서 敍述한 대로 류큐 滅亡은 朝貢國에 도미노 現象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憂慮를 낳았다. 프랑스도 베트남을 蠶食하고 있었다. 淸의 安保에서 朝鮮은 류큐와 베트남에 비할 수 없을 程度로 重要한 나라였다.

廳에서는 어떤 方法으로 朝鮮을 確保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熾烈한 論爭이 벌어졌다. 壬午軍亂(1882年) 때 大軍을 이끌고 朝鮮에 들어온 吳長慶(吳長慶)의 部下 張騫(張건)은 古代 漢四郡의 前例에 따라 朝鮮國王을 아예 廢하고 朝鮮性(朝鮮省)을 設置하자고 했고, 翰林院 侍講 腸悖倫(張佩綸)은 大臣을 派遣하여 朝鮮의 內政과 外交를 直接的으로 掌握하자고 했다. 이처럼 朝鮮과 청은 서로의 關係에 對해 全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朝鮮이 이에 抵抗한 것은 當然했다. 그러나 朝鮮의 抵抗에 큰 障礙를 招來한 大事件이 일어났다. 事實上의 大院君 쿠데타인 壬午軍亂이다. 이를 鎭壓하고자 丙子胡亂 後 約 250年 만에 淸軍이 들어왔다. 亂을 鎭壓한 靑軍은 大院君을 請으로 拉致해 갔고 閔氏 政權을 다시 세워줬다. 청은 이제 서울에 있는 軍事力을 背景으로 朝鮮 內政에 맘대로 介入했다. 그 先頭에 선 게 袁世凱였다.

外交術과 國力의 重要性


이런 露骨的인 干涉에 靑果의 關係 自體를 깨버리려는 움직임이 擡頭했다. 먼저 金玉均은 日本의 支援을 받아 甲申政變(1884年)을 일으켜 朝貢關係를 廢棄하고 아예 獨立하려는 急進的인 試圖를 했지만 靑軍은 이를 簡單히 鎭壓해 버렸다. 이어 高宗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請을 밀어내려고 꾀했지만 袁世凱는 이를 알아채고 그를 廢位시키려 했다.

어떤 사람들은 왜 金玉均과 高宗은 外勢에 依存했느냐고 詰難한다. 卓上空論이다. 淸의 屬國 試圖를 막을 아무런 힘이 없는 狀況에서 어떻게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있나. 國力이 갖춰질 때까지는 絢爛한 外交術로 朝鮮의 ‘自主’를 認定해줄 他國의 힘을 利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 사이에 必死的으로 國力을 키워야 했다. 當時 朝鮮 爲政者들의 잘못은 外勢 依存에 있다기보다는 貧弱한 外交力과 內政改革 失敗에 있었다. 外勢를 ‘利用’하기 위해서는 어느 程度의 自强이 必須的이다. ‘涌溢(用日)’을 하고자 했으나 ‘親日(親日)’로 轉落한 開化派의 말로는 이를 잘 보여준다.

强大國에 둘러싸인 데다 地政學的 要衝地인 韓半島에서 外勢로부터 完全히 자유로운 ‘主體國家’를 바라는 것은 非現實的이다. 實際로 大韓民國은 獨立國이지만 美國의 强力한 影響과 干涉을 받았다. 하지만 李承晩 朴正熙는 이를 適切히 ‘利用’하면서 빼먹을 건 빼먹고 拒否할 건 斷乎히 拒否했다. 歷代 美國 政府가 이 두 大統領을 除去하고 싶을 程度로 골머리를 썩였음은 잘 알려진 事實이다. 이들은 外勢의 힘을 充分히 活用하여 國力 强化를 이뤄냈다. ‘자주’에 成功한 것이다.

獨立門은 淸에서 벗어난 象徵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영은문과 그 옆에 있던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淸나라 使臣을 迎接하던 迎恩門. 迎恩門과 그 옆에 있던 慕華館을 헐고 그 자리에 獨立門을 세웠다. 國家文化遺産포털 提供
청은 淸日戰爭(1894年)李 勃發하기까지 朝鮮의 ‘자주’와 改革을 妨害했다. 매우 不平等한 貿易關係를 强要했고(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事實上 總督으로 君臨하던 袁世凱는 조러密約을 粉碎했다. 韓美條約에 따라 1887年 高宗은 박정양(朴定陽)을 美國公使로 임명했으나 請은 ‘駐在國에 着任하면 그곳 淸國公社와 協議하고 그 指示에 따르라’며 朝鮮의 ‘自主’를 認定하지 않았다. 朴定陽은 淸나라의 妨害로 제대로 任務 遂行을 못하고 結局 일찍 歸國하고 말았다. 傳統的인 朝鮮의 ‘自主權’을 無視하고 屬國으로 만들려고 했던 淸의 野慾이 朝鮮의 改革을 가로막았고 朝鮮人을 등 돌리게 했으며 청이 그토록 憂慮하던 日本의 韓半島 侵略을 불러들였다. 個項부터 淸日戰爭까지의 韓國 近代史는 ‘屬國化’에 맞서 ‘자주’를 確保하려는 請에 對한 抗爭이 中心軸이었다. 迎恩門과 慕華館을 헐고 세워진 獨立門(1897年)은 바로 그 象徵이다.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反日 #港靑 #朝鮮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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