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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살고 싶어요”[동정민 特派員의 파리 이야기]|東亞日報

“아름답게 살고 싶어요”[동정민 特派員의 파리 이야기]

  • 東亞日報
  • 入力 2019年 2月 8日 16時 55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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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윤정희 파리 인터뷰 마지막便

백건우 윤정희 부부가 지난해 12월, 40년째 살고 있는 파리 외곽 뱅센숲 근처 자신의 집에서 취재진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백건우 윤정희 夫婦가 지난해 12月, 40年째 살고 있는 파리 外郭 뱅센숲 近處 自身의 집에서 取材陣에게 人事를 하고 있다. 파리=동정민 特派員

지난해 12月7日 午後 7時, 인터뷰를 위해 프랑스 파리 外郭 카페에서 백건우-윤정희 夫婦를 만났다.

“저 사람을 아는데 가물가물해. 聖堂에서 본 사람인가?”

카페 저 便에 앉아있던 한 프랑스 女性이 반갑게 웃으며 다가오자 백건우는 윤정희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봉주르, 꼬망 딸레部?(安寧하세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프랑스 女性이 프랑스語로 친숙하게 安否를 물었다. 윤정희가 웃으며 “트레 非앙(아주 잘 지내요)”이라고 對答하고, 백건우度 “簿 잘레 非앙(當身도 잘 지내시죠?)”라고 한바탕 人事를 나눴다. 인터뷰를 하는 途中이나 길거리를 걸어갈 때 洞네 사람들은 이렇게 백건우-윤정희 夫婦에게 자주 人事를 건넸다.

백건우 윤정희 부부가 40년째 살고 있는 집 앞 빵집에 함께 들어가고 있다. 백건우는 매일 아침 이 곳 빵집에서 따끈따끈한 바게트를 산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백건우 윤정희 夫婦가 40年째 살고 있는 집 앞 빵집에 함께 들어가고 있다. 백건우는 每日 아침 이 곳 빵집에서 따끈따끈한 바게트를 산다. 파리=동정민 特派員
그도 그럴 것이 이 夫婦가 이 집으로 移徙 온 게 1979年이니 벌써 40年째 이 洞네에 살고 있다. 이 夫婦는 1904年에 지어진 100年도 더 된 多世帶 住宅 建物에 살고 있다.

“(尹) 바로 옆에 숲도 있고, 名作 三銃士에 나오는 城도 있고, 집 앞의 벚꽃도 아름답지만 이 집을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理由는 家族 같은 이웃 德分이에요. 韓國 같아요. 미리 電話도 하지 않고 먹어보라고 飮食을 갖고 내려오죠. 처음에는 다들 갓난 애기들을 키웠는데 이제 그 애들이 커서 自己 애들을 데려올 程度로 時間이 흘렀네요. 제 딸 진희(1976年生)도 여기서 컸죠.”

윤정희는 “서로를 집으로 자주 招待해 파티를 여는데 저는 전식으로 雜菜, 本式으로 불고기를 내놓는다”고도 했다. 1974年에 만나 45年 째 파리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마음속에 韓國은 늘 그리운 故鄕이다.

백건우 윤정희 부부의 프랑스 파리 집에 김수환 추기경이 들렀을 때 모습. 이들 부부는 모두 가톨릭 신자다. 백건우와 윤정희의 세례명은 각각 조셉마리와 소화데레사이다. 사진제공 백건우-윤정희
백건우 윤정희 夫婦의 프랑스 파리 집에 金壽煥 樞機卿이 들렀을 때 모습. 이들 夫婦는 모두 가톨릭 信者다. 백건우와 윤정희의 洗禮名은 各各 조셉마리와 消化데레사이다. 寫眞提供 백건우-윤정희

백건우-윤정희 夫婦는 每年 한 두 次例는 반드시 韓國에 들어간다. 백건우는 特히 거의 每年 地方 公演을 하고 있다. 올해도 이番 달 印度 公演을 마친 뒤 4月부터 거의 두 달 間 韓國 地方公演이 豫定되어 있다.

-世界的인 피아니스트가 每年 地方 公演을 하는 건 드문 일이에요.

(百) “1993年에 처음 大規模 地方 公演을 始作했어요. 韓國에서 10年 程度 演奏하다보니 늘 큰 都市 한 두 군데서만 하더라고요. 音樂을 즐기는 건 모든 사람의 卷리잖아요.”

-地方은 公演 施設이 劣惡할 텐데요.

“첫 全州 公演을 잊을 수가 없어요. 公演場이 없으니 映畫를 上映하는 劇場에서 했어요. 劇場 바로 앞에 解酲국 가게가 있는 在來市場이었어요. 제가 全州에 到着해서 第一 좋은 피아노를 어디서 빌릴 수 있냐고 물었더니 한 피아노 學院에 있대요. 劇場까지 바퀴가 가운데 하나 달린 구루마(리어카)에 피아노를 통째로 올려놓고 運搬 했어요. 元來는 피아노 다리와 페달 떼고 몸통만 箱子에 넣어서 移動하는데 그럴 겨를도 없었죠. 그렇게 劇場 舞臺 위로 피아노를 올리다가 바퀴가 부러져 버렸어요. 제가 피아노 바퀴 자리에 食卓 흔들릴 때처럼 뭔가를 끼워 넣고 위를 보니 照明이 없어요. 앞에 있는 市場 鐵物店에 가서 鐵板을 세 個 샀죠. 돌돌 동그랗게 말아서 그 속에 燈을 넣어 제가 照明을 만들어 公演을 했어요.”

-그렇게 벌써 25年째 地方 公演을 하고 있네요.

“慶北 安東에서 音樂會가 끝났는데 한 어머님이 이 쪽(윤정희)에게 와서 울어요. 自己 딸이 피아노 工夫하는데 音樂會 들으려면 늘 서울에 가야 하는데 公演 票 사고 하룻밤 자고 할 돈이 없었다고. 여기까지 찾아와줘서 고맙다고요. 그게 보람이에요. 地方 많은 音樂會를 개런티 없이 해요. 한 番은 서울하고 같은 公演 價格을 받기에 主催者에게 火를 낸 적도 있어요. 脂肪分들에게 그런 經濟的 負擔을 갖게 하면 안 되죠.”

地方 公演은 이제는 백건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섬 音樂會’로 이어졌다.

“섬에서 公演 보러 뭍으로 나오는 게 쉽지 않잖아요. 象徵的으로 文化는 누구든지 接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섬 音樂會를 企劃했어요. 그런데 樂器 運搬하고 돈이 많이 들거든요. 너무 하고 싶어 演習室에 大型 韓國 地圖를 그려놓고 혼자서 여기 가면 좋겠다고 하고 섬에 동그라미를 쳐 보기도 했죠. 偶然히 MBC 社長과 連結돼 할 수 있게 됐어요.”

外國에서 나홀로 배고픔과 외로움에 힘들게 音樂 했던 백건우는 全 世界에서 猛活躍 中인 피아니스트 後輩들만 생각하면 뿌듯하다.

“美國 出身의 한 이탈리아 親舊가 콩쿠르 審査를 하고 난 뒤 連絡이 왔어요. ‘건우野, 어떻게 된 거냐. 콩쿠르 1等부터 5等까지 모두 韓國人이야’라고요. 차이코프스키나 엘리자베스 콩쿠르 程度 빼고는 大部分 國際 콩쿠르에서 韓國人이 1位를 한 것 같아요. 絃樂器, 聲樂家에 이어 피아니스트도 頭角을 보이고 있죠.”

백건우는 外國 사람들이 韓國人들의 音樂的 퍼포먼스가 뛰어난 理由를 물으면 “韓國民 모두가 音樂的인 사람들”이라고 答한다.

“보세요. 1980年度 쯤 父母님이 계시던 釜山 東萊 溫泉 갔어요. 그 뒤에 동산이 있거든요. 이 사람(윤정희)과 함께 散策하는데 노래 소리가 들려요. 가서 봤더니 아낙네 스무 名 假量이 둘러앉아서 노래로 對話를 해요. 男便이 또 술 먹고 늦게 왔다 뭐 이런 內容인데 그걸 卽興的으로 노래로 하더라고요. 부산역에 가보니 老人들이 노래 부르며 춤을 추고 있고 거지가 손을 내밀고 타령으로 求乞을 해요. 우리나라는 葬禮式도 全部 노래로 하잖아요.”

백건우가 한국에서 법정 스님 만났을 때 모습. 윤정희가 찍어준 사진이다. 사진제공 백건우-윤정희
백건우가 韓國에서 法定 스님 만났을 때 모습. 윤정희가 찍어준 寫眞이다. 寫眞提供 백건우-윤정희

백건우는 言論 인터뷰를 할 때 對答하기 싫어하는 質問이 몇 個 있다.

‘이番 公演이나 音盤은 어떤 點에 主眼點을 두고 들어야 하나요’라는 質問이 첫 番째다.

그는 “音樂은 말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들으면 되죠. 音樂을 듣는 方法이 뭐 있나요. 제가 가이드라인을 주는 게 말이 안 되죠.”라고 말했다.

1970, 80年代 프랑스 獨逸 英國 等 유럽에서 主로 活動하다 1990年 社會主義가 崩壞한 以後 폴란드를 비롯한 東유럽, 러시아, 中國에서 主로 活動한 것도 그런 理由였다.

“제가 이 生活을 繼續 하는 건 音樂은 모든 사람과 對話할 수 있고 또 說得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 때문이에요. 저는 音樂을 宗敎같이 믿어요. 한 때 中國 觀客은 態度가 안 좋다는 所聞도 있었어요. 웬걸요. 얼마나 훌륭한데요.”

延長線上에서 自身을 ‘鍵盤위의 求道者’로 表現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한 言論 記者가 ‘求道者’라는 表現을 처음에 썼는데, 어떤 일이든 一生 동안 그 일에 從事는 사람은 누구나 求道者죠. 저만 특별한 게 아니에요. 一生 동안 音樂을 宗敎처럼 믿고 했을 뿐이에요.”

모든 音樂家는 各自의 소리가 있다고 믿는 백건우는 ‘後輩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는 質問도 答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有名한 피아니스트는 自己 소리가 있어요. 타고난 自己의 獨特한 音樂的 言語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그냥 鍵盤 누르는 피아니스트들이 많아요. 自己만의 메시지가 없는 거죠. 콩쿠르 審査를 가 보면 數十 名이 같은 曲을 치잖아요. 그런데 같은 피아노인지 의심스러울 程度로 소리가 달라요. 그냥 鍵盤을 치는 이도 있고 自己의 소리를 끄집어내는 사람도 있죠.”

-七十 平生 演奏를 해도 演奏 前에 如前히 緊張되나요.

“그럼요. 그런데 緊張의 種類가 다르죠. 젊었을 때는 한 音만 틀려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이제는 正確히 치는 것보다 曲이 살아있는 게 더 重要하다는 걸 알게 됐죠. 曲 도 삶과 죽음과 같아요. 音에 生命體가 있어요. 그러니 演奏家 創作이라고 할 수 있죠.”

記者는 백건우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궁금해 質問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自己만의 소리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曲에 對한 성실하고 眞實된 接近이 必要해요. 大衆에게 歡迎받는 曲만 골라서는 안 됩니다. 自己가 하고 싶은 것을 먼저 깨닫고 그걸 觀衆에게 들려줘야 해요. 아는 것과 깨닫는 건 天地差異죠. 깨닫기 위해서는 엄청난 努力이 必要하거든요. 콩쿠르에서 賞 받았을 때 빨리 그거 앞세워서 돈 벌어야겠다 이런 마음은 안 가졌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친한 친구가 프로방스 뤼베홍(Luberon)에 간 백건우-윤정희 부부를 찍어준 사진. 사진제공 백건우-윤정희
예전에 親한 親舊가 프로방스 뤼베홍(Luberon)에 간 백건우-윤정희 夫婦를 찍어준 寫眞. 寫眞提供 백건우-윤정희



▼ 에필로그 ▼

지난달 29日, 파리의 한 食堂에서 만난 백건우는 왠지 쓸쓸하고 낯설어 보였다.

백건우는 지난달 16日부터 혼자 스페인 빌바오와 팜플로냐 演奏를 다녀왔다. 백건우는 “結婚 後 43年 동안 혼자서 演奏를 다녀온 건 거의 처음인 것 같다”고 했다. 어머니 葬禮式 參席을 위해 歸國한 윤정희는 持病 治療次 當分間 韓國에 머물 豫定이다. 두 사람은 43年 동안 南美 카자흐스탄 타히티까지 全 世界 演奏 旅行을 늘 함께 다녔다.

지난달 백건우가 스페인 빌바오에 연주를 하러 갔을 때 찍은 빌바오의 상징 구겐하임 미술관. 윤정희가 한국에 머물면서 홀로 연주 공연을 온 백건우의 사진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있다. 사진제공 백건우-윤정희
지난달 백건우가 스페인 빌바오에 演奏를 하러 갔을 때 찍은 빌바오의 象徵 구겐하임 美術館. 윤정희가 韓國에 머물면서 홀로 連奏 公演을 온 백건우의 寫眞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묻어있다. 寫眞提供 백건우-윤정희

서로의 가장 親한 親舊(切親·Best-Friend Forever)로 살아가는 커플 이야기를 다루는 東亞日報 切親 시리즈를 위해 지난해 12月 한 달 동안 백건우-윤정희 夫婦를 네 次例 만났다. 인터뷰 時間만 13時間에 이른다. 이들 夫婦는 “둘이 함께 이렇게 오랫동안 仔細한 인터뷰를 한 건 平生 처음”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携帶電話도 함께 쓰고, 머리도 男便이 잘라준다는 老夫婦의 삶이 궁금해서 인터뷰를 始作했다. 韓國 最高 有名 夫婦가 프랑스 파리에서 平生 살고 있는 理由도 궁금했다.

“全 世界的으로 連奏 다니기에 韓國은 너무 먼 곳”이라는 백건우의 說明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파리는 로맨틱하잖아요”라고 말하는 윤정희의 철없는 說明이 더 와 닿았다.

그래서 두 사람과 함께 45年 前 戀愛를 했던 追憶의 場所를 함께 가보자고 提案했다. 몰래 單 둘이 同居했던 몽마르트 언덕 밑 屋塔房, 두 사람이 偶然히 처음 만난 팡테옹 옆 허름한 中國 食堂, 세느江邊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였던 藝術의 다리(퐁데자르) 等을 同行하며 지켜본 두 사람은 周邊 눈치 보지 않고 서로의 사랑을 表現하는 프랑스 老夫婦와 똑 닮아 있었다.

파리에서는 빨간色 바지를 입은 할아버지와 하이힐을 신은 할머니가 두 손을 꼭 잡고 걸으며 낮에 함께 카페 테라스에 앉아 麥酒를 마시는 게 日常이다. 그렇게 백건우-윤정희 夫婦는 걸어 다닐 때 손을 잡거나 어깨와 허리를 두르며 함께 발을 내딛었고 추우면 길에서도 꼭 안았다.

“근데 세느강 江邊 建物에 왜 이렇게 大型 廣告가 많아” “요즘 파리에 옷 살 가게가 없어. 파리 패션도 다 便한 것만 追求하고 個性이 사라졌어”라며 투덜대는 맞장구도 찰떡宮合이었다.

백건우-윤정희 부부가 40년째 살고 있는 집 앞 골목을 함께 손을 꼭 잡고 걸어오는 모습. 파리에서 이들 부부는 늘 손을 잡거나 어깨와 허리를 서로 두른 채 걸어다녔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백건우-윤정희 夫婦가 40年째 살고 있는 집 앞 골목을 함께 손을 꼭 잡고 걸어오는 모습. 파리에서 이들 夫婦는 늘 손을 잡거나 어깨와 허리를 서로 두른 채 걸어다녔다. 파리=동정민 特派員

最高의 피아니스트와 女俳優지만 大衆의 人氣보다는 내 滿足이 優先인 藝術家로서의 自尊心으로 똘똘 뭉쳐있는 것도 비슷했다.

백건우는 “人氣를 올리겠다는 건 藝術家의 길이 아니죠. 그건 ‘쟁이’ 들이 하는 거에요”라고 말했다. 윤정희度 “저는 그저 映畫를 좋아하고 좋은 作品을 만들기 위해 熱心히 했을 뿐이에요. 그게 제 꿈이니까요”라고 말했다.

‘觀客들이 어떤 피아니스트나 俳優로 記憶해주기를 바라느냐’는 質問에도 두 사람의 對答은 싱거웠다. “저는 그런 생각 안 해요. 그냥 眞實한 音樂家가 되고 싶어요”(백건우) “저도 같아요. 다른 거 없어요. 그냥 하늘나라 갈 때까지 延期하고 싶어요”(윤정희) 그들의 對答이었다.

人生觀을 묻자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온 答은 簡單했다.

“아름답게 살고 싶어요.”

파리=동정민特派員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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