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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門턱에서 돌아온 그…‘카르페 디엠’, 只今을 잡아라[서영아의 100歲 카페]|東亞日報

죽음의 門턱에서 돌아온 그…‘카르페 디엠’, 只今을 잡아라[서영아의 100歲 카페]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1月 6日 01時 40分


코멘트

[이런 人生2幕]이승룡 前 LG애드 常勤監査
12살 孫女와 새봄맞이 展示會 열어
財團法人 實施學士 事務局長 일하며
木工과 民畫에 빠져 作品活動
3個月 時限附 宣告 이겨내고
“只今 現在를 재미있게 살자”

4日 麻浦平生學習館 1層에 자리한 市民 展示館 麻浦갤러리. 올해 七旬을 맞은 이승룡 氏와 初等學校 6學年에 올라가는 外孫女 김리원(12)孃의 새봄맞이 祖孫(祖孫) 展示會 ‘幸福을 그리다’의 現場이다.

展示會 主人公인 이승룡 氏와 孫女딸 김리원 量. 이들의 展示會는 4日부터 12日까지 麻浦平生學習館 1層 麻浦갤러리에서 열린다. 吏員 羊이 손에 든 것은 作品 ‘薔薇’. 송은석 記者 silverstone@donga.com
할아버지는 平素 그려온 民畫 10餘 點을, 김리원 量은 아크릴畫, 色鉛筆畫 等 10餘 點을 내걸었다. 展示會場에는 主人公들 外에도 李 氏의 夫人과 큰딸 작은 딸에 동생들까지, 出勤한 사람 빼고 온 家族이 모였다.

“양념으로 할머니의 그림 한 點과 孫子 犁鶘(3)가 그린 ‘아기상어’도 걸었어요. 말 그대로 이 집안 祖孫 全員이 出動한 展示會죠. 하하.”(이승룡)

孫女딸이 6學年에 올라간다거나 3살 孫子가 그린 落書인지 抽象畫인지 모를 그림. 刻薄해진 우리 社會와는 距離가 있어 보이는 작고 小小한 意味들이 이곳에서는 世上 그 무엇보다 값지고 所重하다. 이제 俗稱 ‘7學年’이 됐다는 이승룡 氏는 이런 작은 것에 熱과 誠을 바치며 幸福해한다. 事實 이런 작은 意味들이 쌓이고 모여서 歷史가 되고 世界史가 되는 것 아닌가.

한때 잘 나갔지만
그는 30年間 廣告會社 LG애드에서 일하다 2009年 55歲로 退職했다. 2010年부터 모下(慕何) 이헌조 前 LG電子 會長(1932~2015)李 私財 80億 원을 出演해 만든 財團 ‘實施學士’의 常任理事 및 事務局長을 맡아 13年間 일하다가 지난해 봄 여기서도 退職했다.

30年間 廣告會社 물을 먹었다고 하지만 정작 廣告 만드는 일에 關與한 것은 中盤期 3年 程度. 나머지는 戰略과 組織管理 專門家로 일했다. 2003年 病魔로 쓰러졌을 때 職銜은 經營戰略本部長 常務였다.

“入社 4年 次에 企劃管理課長, 8年 車에 部長이 됐습니다. 11年 차였던 1990年 會社는 企劃管理室이라는 組織을 새로 만들고 當時 없던 ‘室長’이라는 職責을 주더군요. 밑에 3個 팀이 있었어요.”

1990年代는 LG애드의 賣出이 해마다 1000億 원 單位로 늘어나던 時節이었다.

LG애드 사보 93년 7월호에 표지모델로 등장한 이승룡 씨.
LG애드 社報 93年 7月號에 表紙모델로 登場한 이승룡 氏.


3個月 時限附 宣告
2003年 轉換點이 찾아왔다. 배가 아파 洞네病院부터 찾았던 것이 瞬息間에 有名 綜合病院에서 應急手術을 받는 事態가 됐다. 그런데 醫師가 手術을 抛棄하고 患部를 다시 닫아버렸다.

腫瘍 近處를 動脈과 靜脈이 지나가고 炎症까지 있어 손을 댈 수가 없다고 했다. 그의 夫人은 “3個月 內에 萬若의 事態가 일어날 수 있으니 對備하라”는 말을 들었다.

아직 49歲. 治療法을 묻는 李 氏에게 當時 擔當 醫師는 唯一한 可能性으로 ‘글리벡’ 服用을 말했다. 글리벡은 當時 白血病 治療劑로 나온 新藥이었다. 李 氏가 “그럼 글리벡이 나오기 前에는 어떻게 治療했느냐”고 물으니 그 醫師는 “方法이 없었다”고 했다.

絶望에 빠져 病院에 누워있는 그에게 當時 LG電子 顧問이었던 이헌조 會長이 電話를 해왔다.

“우리 會社 社長과 暮夏 會長이 어느 結婚式場에서 만났는데 會長님이 제 消息을 듣고 電話를 주신 거죠. 偶然인 듯싶지만 전 이런 건 宿命이라고 믿어요. 會長님은 本人이 癌 手術을 받은 日本의 醫療陣을 紹介해줬습니다.”

日本으로 건너간 李 氏 夫婦는 이 會長의 主治醫와 그 弟子 2名에게 다시 診斷을 받았고 그中 40代였던 野스노 博士가 “確率은 半半이지만 열어봐야 안다”며 手術하겠다고 나섰다. 多幸히 再手術은 成功했다.

그 뒤 國內 綜合病院에서 20年 가까이 追跡觀察을 해왔는데 지난달 ‘더 以上 오지 않아도 된다’는 判定이 떨어졌다.

多幸인 일은 또 있었다. 日本에서 두 달間 入院해 있다가 歸國한 그에게 會社는 ‘一線에서 일하기 어려울 테니 常勤監査職을 맡아달라’고 提案했다. 當時 會社는 多國籍 廣告그룹 WPP에 賣却된 狀態였는데, 辭職을 생각하던 그에게는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었다.

2003年 그의 手術을 執刀해준 野스노 博士는 以後로도 서울에서 찍은 李 氏의 CT 映像을 週期的으로 點檢해준다. 結果를 알리는 메일은 늘 ‘祝賀합니다(congratulations)’로 始作됐다고 한다. 두 딸과 함께 서울을 訪問한 野스노 博士 家族과 三겹살집에서. 이승룡 氏 提供


暮夏 이헌조 前 會長과의 因緣
暮夏 이헌조 前 會長은 그가 1979年 LG애드의 前身인 희성産業(LG애드는 1984年 희성産業에서 獨立했다)에 入社했을 때 社長이었다. 2010年 그 모下會長이 LG애드를 退職한 李 氏에게 連絡해왔다.

“財團을 設立하려는데 設立과 運營을 좀 맡아서 해다오. 處遇를 아주 잘해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걸어 다닐 때까지 길게 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시더군요.”
暮夏 會長은 韓國의 思想的 뿌리를 實學에서 찾는 實施學士를 財團으로 設立해 私財를 投與할 생각이었다.

이제는 故人이 된 이헌조 前 LG電子 會長과 2010年 財團法人 實施學士 創立式에서. 이승룡 氏 提供
“그날 밤 會長님께 이메일로 세 가지를 말씀드렸어요. 첫째 제가 能力은 안 되지만 會長님 뜻을 받들어 誠心껏 熱心히 하겠다. 둘째 或是라도 저를 불러주는 더 좋은 處遇의 자리가 나오면 그때는 놓아주십사. 셋째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時間에 얽매이지 않고 自由人으로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會長님 答은 ‘100% 受容한다’는 것이었죠.”

李 氏가 財團에서 일한 지 2年 程度 된 무렵, 地方 어느 上場會社의 監査 자리를 제안받고 苦悶 끝에 許諾을 求하자 暮夏 會長은 ‘사람이 돈만 갖고 사나?’라고 물었다. 財團에서의 人生이 決코 허술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사람에게는 名分과 矜持가 돈보다 더 重要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거죠. 제 生命을 살려주신 분의 말씀을 차마 거역할 수 없어 財團에 남았습니다.”

그는 木工에도 재미를 붙였다. 作品을 만들며 關聯된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連載한 것이 10年間 180點쯤 쌓이자 冊 ‘이야기가 있는 木工(2020)’으로 묶어냈다.

木工의 最高峯이라는 짜맞춤椅子 만들기에 挑戰한 이승룡 氏. 이 椅子는 只今 이 氏네 집 居室에 놓여 있다고. 이승룡 氏 提供
‘영차, 영차…’  이 씨가 만들어준 책상을 옮기는 3살 리원 양. 이 씨는 이 책상 위에 그림을 그려 넣기 위해 민화 선생을 찾았고 이를 계기로 민화에도 입문했다.  이승룡 씨 제공
‘영차, 영차…’ 李 氏가 만들어준 冊床을 옮기는 3살 吏員 量. 李 氏는 이 冊床 위에 그림을 그려 넣기 위해 民畫 先生을 찾았고 이를 契機로 民畫에도 入門했다. 이승룡 氏 提供


記錄과 保存에 마음을 담아
그는 記錄과 保存에 熱心이다. 이렇게 만든 레거시를 適切한 임자에게 依託해 더 큰 쓰임새를 期待한다.

2015年 先親 이효석 氏(1929~2000)가 남긴 文件과 勳章, 證明書, 記錄物 等 148點을 大韓民國歷史博物館에 孫女 吏員 量 이름으로 寄贈했다. 先親은 獨逸駐在 大使館 首席勞務館, 靑瓦臺 司正祕書官을 歷任했다.

寄贈에 앞서 自身의 페이스북에 ‘아버지의 人生 記錄’ 一部를 公開했는데 反應이 뜨거웠다고. 資料 中에는 꼼꼼하게 整理된 1950年代 結婚祝儀錄, 1970年代 葬禮賻儀錄 等도 있어 當代 民俗史 硏究에 도움이 될 것이란 評價를 받았다.
父母님과의 家族寫眞. 아버지는 歷史의 수레바퀴 속에서 처음엔 敎師였다가 韓國戰爭 때 軍人이 됐고 1960年代에는 公職者가 됐다. 맨 오른쪽이 長男인 이 씨. 이승룡 氏 提供
이 세상 모든 사랑은 할아버지에게서 손주에게로… 이 씨의 선친과 큰딸의 즐거운 한때. 이승룡 씨 제공
이 世上 모든 사랑은 할아버지에게서 손주에게로… 李 氏의 先親과 큰딸의 즐거운 한때. 이승룡 氏 提供
“記錄을 保存하는 건 집안 來歷인 것 같아요. 집 안에 있던 古典 冊이나 옛날 文書 같은 것은 安東의 國學振興院에 孫女딸 이름으로 寄贈했습니다. 제가 會社生活 30年 동안 받은 給與 명세표, 名銜 40餘 張, 辭令狀 等은 LG그룹 歷史觀에 寄贈했어요.”

성균관대 新聞放送學科 學生 時節 일어난 東亞日報 白紙廣告事態도 그에겐 記錄과 保存의 對象이었다. 當時 3個月間의 白紙廣告를 모두 모아 製本해서 所藏하고 있었다.

“新聞 放送學徒로서 이런 歷史的인 記錄을 내가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 製本한 걸 移徙 다니면서도 늘 寢臺 밑에 保管하곤 했어요. 2000年 當時 동아일보가 新聞博物館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寄贈했지요. 나중에 들으니 그게 保管된 게 大韓民國에 3質인가 밖에 없었대요.”
동아일보 신문박물관장으로부터 받은 감사장
東亞日報 新聞博物館長으로부터 받은 感謝狀
―一部 寄贈을 孫女 이름으로 하신 理由가 있을까요.

“於此彼 吏員이도 後孫이니까 나름 意味 있는 일이잖아요. 當時에는 孫女밖에 없었고요.”
큰딸이 낳은 리원이 12살, 둘째 딸이 낳은 孫子 犁鶘는 이제 3살이 됐다.

시니어들의 가슴 속 앙금
60代 以上쯤 된 분들을 만나보면 뭔가 하나씩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 같은 게 있다. 그의 境遇는 13年間 일해온 實施學士가 그랬다.

當初 韓國 實學 硏究의 泰斗라 불리는 成均館大 이우성 敎授가 만든 工夫 모임에 이헌조 前 會長이 80億 원을 出演해 財團으로 만들었다.

李 氏는 2010年부터 事務局長으로 일했다. 2015年 李 會長 死後에는 그 理事職을 이어받아 常任理事를 겸했다. 그런데 2020年 11月 새 理事長이 난데없이 ‘事務局長 停年을 60歲로 하자’는 規定을 理事會에서 通過시켰다. 當時 이승룡 事務局長은 66歲. “나가라, 못 나간다” 싸움이 벌어졌고 結局 지난해 3月 退職했다.

現在 8名의 財團理事陣 가운데 過半을 特定 人脈이 掌握하고 있다고 한다. 暮夏 會長이 世上을 떠나며 財團에 남겼던 代理人이 他人들에 依해 쫓겨난 셈.

“다른 未練보다 暮夏 會長의 遺志를 받들지 못하게 될까 봐, 그게 무척이나 괴롭습니다.”

“할아버지, 只今 遺言하는 거예요?”
―손주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글쎄요. 너무 많아서. 우리보다 좋은 環境에서 꿈을 맘껏 펼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죠. 뭐 特別히 工夫를 잘하거나 좋은 大學에 가거나 그런 거 말고요.”

特別히 뭔가를 말하지 않아도 子孫들은 어른을 보고 배운다. 할아버지가 持續的으로 冊을 만드는 것을 본 當時 3學年 吏員 羊이 ‘나도 冊 한 卷 내고 싶다’고 하자 이 氏가 돕겠다고 나섰다.

孫子孫女와 함께 즐거운 할아버지 할머니. 李 氏는 두 딸에게서 各其 孫女와 孫子를 얻었으니 ‘나는 다 가진 할아버지’라고 자랑한다. 이승룡 氏 提供
리遠邇가 48名의 神의 모습을 그리고 이 氏가 各 神에 얽힌 이야기를 써넣은 ‘리遠邇의 그리스 로마 神話’가 2021年 誕生했다.

“그때는 무척 기뻤는데 只今 와서 보니까 그림들이 너무 어릴 때 그린 거라서 좀 異常해요. 若干 제 黑歷史가 된 것 같아요.^^”(김리원)

이런 逸話도 있다. 어느 날 初等學校 2學年이던 리원이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할아버지 只今 遺言하는 거예요?”

李 氏가 家族 모임에서 自身의 집을 後날 어떻게 活用할지 딸들에게 當付하던 中이었다.

“그래. 遺言 맞아. 언젠가 할아버지가 없어도 엄마랑 姨母랑 이 집을 잘 活用해서 사이좋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할아버지 마음을 말하는 거야라고 말해줬지요.”

展示會場에 出動한 이승룡 氏 家族. 뒷줄 왼쪽부터 둘째 딸 인영 氏, 外孫女 吏員 量, 큰 딸 은경 氏. 앞줄은 夫人 박양화 氏. 송은석 記者 silverstone@donga.com


冊, 世上에 쓰레기를 더하지 않기
李 氏는 2001年 先親의 1週期를 맞아 追慕文集을 엮은 것을 始作으로 15卷의 冊을 펴냈다.

2002年 이 氏가 펴낸 두 番째 冊 ‘李 某 氏네 家族旅行日記’ 表紙. 엄마 아빠와 大學生 高等學生인 두 딸이 함께 國內外 紀行文 14篇을 엮어 펴냈다. 非賣品이다.
二重 6卷은 非賣品이고 나머지는 POD(Publish On Demand) 方式으로 刊行했다. 本人이 컴퓨터를 利用해 글을 쓰고 그림을 넣어 PDF파일로 出版社 홈페이지에 登錄하면 出版社 側이 顧客의 注文을 받아 出版해주는 서비스다.

“자꾸 冊을 내는 行爲가 第게야 意味가 있겠지만 世上에는 別로 貢獻하는 바도 없고 浪費일 수 있어요. 그래도 別 負擔이 없는 건 注文만큼만 冊을 製作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껏 冊을 내지만 ‘公害는 되지 않는다’고 自慰하는 거죠.”

POD方式은 作家 本人을 包含해 누구나 政街로 注文해야 하고 冊값의 20%가 作家에게 印稅로 돌아온다. 作家는 自己 冊을 80% 價格에 사는 셈이다.

―많이 팔렸나요.

“間或 팔리기도 하는지 몇 달에 한 番씩 몇千 원 또는 2, 3萬 원 이렇게 印稅가 들어옵니다. 하하.”

“사는 동안 재미있게 살자”
목공에 이어 요즘에는 민화에 심취해 있다. 자택에서 작업 중인 이 씨. 이승룡 씨 제공
木工에 이어 요즘에는 民畫에 心醉해 있다. 自宅에서 作業 中인 이 씨. 이승룡 氏 提供
이제 말 그대로 年金生活者. 婦人과 합쳐 200萬 원 程度 된다. 實施學士 事務局長 할 때는 적지만 固定給與가 있었지만 지난해 3月 以後 받은 失業給與度 이달 끝난다.

“저도 딸들도 일찍 結婚했어요. 夫婦 둘만 살면 되니까 큰 돈이 必要하지 않아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데 크게 無理가 없습니다.”

―이 年齡帶 大部分이 “생각보다 돈 쓸 일이 많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다만 子息들이 집에 돌아와서 손 벌리기 始作하면 골치 아프다고요.

“子息들이 사고 치면 問題지만 우린 그런 것 없으니까요. 저는 죽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목숨 건져 다시 온 뒤 제 人生觀이 ‘사는 동안 재미있게 살자’가 됐어요. 집사람도 크게 奢侈하지 않고 名品 가방 이런 거에 關心도 없어요. 둘이 어디 旅行가고 맛있는 것 먹고, 아무튼 只今 現在를 재밌게 잘 사는 게 目標예요.”

옆에서 夫人이 “本來 名品을 싫어했던 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런데 좋은 物件 같은 건 男便이 죽다가 살아 돌아오니 아무 意味 없어지더라구요. 그저 조금이라도 이 時間들이 이어져 주길 바랄 뿐입니다.”(부인 박양화 氏)

“이 나이가 되면 世上에 고맙지 않은 게 없습니다. 저는 因緣, 宿命 같은 걸 믿는 사람입니다. 暮夏 會長 德分에 다시 살아 돌아온 것, 좋은 사람들과의 因緣도 모두 宿命이 아닐까. 죽고사는 것도 本人의 宿命이라고 생각해요. 그때까지는 歲月이 익어갈수록 잘 늙어가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야지요.”

할아버지와 손녀의 즐거운 한때. 콧수염은 손녀가 만들었다고. 이승룡 씨 제공
할아버지와 孫女의 즐거운 한때. 콧鬚髥은 孫女가 만들었다고. 이승룡 氏 提供


서영아 記者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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