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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性, 材料 아닌 몸에서 나오는 것”…韓國籍 ‘新表現主義’ 보여준 황창배[韓國美術의 딥 컷]|東亞日報

“韓國性, 材料 아닌 몸에서 나오는 것”…韓國籍 ‘新表現主義’ 보여준 황창배[韓國美術의 딥 컷]

  • 東亞日報
  • 入力 2020年 3月 30日 16時 49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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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美術의 딥 컷<1>韓國籍 新表現主義, 황창배

딥 컷(Deep Cut). 大衆音樂에서 이 말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마니아들이 認定하는 名曲, ‘숨은 寶石’을 가리킨다. 韓國 美術에도 堂堂히 世界에 내놓을 만한 ‘딥 컷’이 있다. 다만 韓國 美術市場에서 아기자기하고 예쁜 그림의 需要가 많고 觀客과 만날 機會가 制限되면서 제대로 注目받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韓國 美術의 ‘숨은 寶石’을 深層的으로 紹介한다.

황창배의 그림은 ‘무조건 부정’에서 시작했다.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거꾸로 보며 그리기도 하고, 제일 싫어하는 색을 일부러 
뿌려 보기도 했다. 그의 자화상에서도 이러한 기질이 드러난다. / 황창배, 무제(1995년), 캔버스에 아크릴, 72×60㎝, 
황창배미술관 제공
황창배의 그림은 ‘無條件 否定’에서 始作했다.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거꾸로 보며 그리기도 하고, 第一 싫어하는 色을 일부러 뿌려 보기도 했다. 그의 自畫像에서도 이러한 氣質이 드러난다. / 황창배, 無題(1995年), 캔버스에 아크릴, 72×60㎝, 황창배美術館 提供


1980年代 世界 美術界에는 新表現主義 바람이 불었다. 國內에서도 人氣인 英國 作家 데이비드 호크니를 비롯해 新表現主義 作家들은 只今까지도 美術市場의 主流로 活動 中이다. 이런 新表現主義를 韓國籍 脈絡에서 보여준 作家가 황창배(1947~2001)다.

● 槪念에서 繪畫로…신표현주의

독일 작가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기존의 사회 질서와 작별하는 ‘판데모니엄 선언’을 한 뒤 위 아래가 뒤집어진 그림을 그렸다. / 
게오르그 바젤리츠, Ralf W. -Penck - Kopfbild(Head Painting), 1969, 캔버스에 오일, 162 x
 130 cm ⓒGeorg Baselitz
獨逸 作家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旣存의 社會 秩序와 作別하는 ‘판데모니엄 宣言’을 한 뒤 위 아래가 뒤집어진 그림을 그렸다. / 게오르그 바젤리츠, Ralf W. -Penck - Kopfbild(Head Painting), 1969, 캔버스에 오일, 162 x 130 cm ⓒGeorg Baselitz

브리태니커百科事典은 新表現主義(Neo-Expressionism)를 ‘1980年代 初·中盤 美國과 유럽의 美術市場을 占領한 藝術家(主로 畫家)들의 다양한 움직임’이라고 定義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新表現主義는) 1970年代까지 高度로 槪念化된 抽象藝術에 對한 反作用으로 人體나 形態의 表現으로 돌아간 젊은 作家군을 가리킨다. 技法은 多樣하지만 共通 要素가 있다. 傳統的 構成과 디자인의 拒否, 同時代 都市의 삶과 價値를 反映한 模糊하고 不安定한 感情 表現, 不調和와 날카로운 色彩 對比, 對象의 遊戱的이고 强烈하며 原始的인 表現 等이다.”

現在 美術市場에서 作品 最高價를 形成하는 多數의 作家도 新表現主義的 傾向을 보인다. 獨逸의 안젤름 키퍼, 게오르그 바젤리츠,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美國의 章 미셸 바스키아가 그렇다. 이들은 美術史의 段階的 흐름을 벗어나 個人의 觀點에서 다양한 技法을 活用한 主觀性이 두드러진다. 황창배 또한 이런 新表現主義의 屬性에 뒤지지 않는 革新을 보여줬다.

● ‘韓國的 新表現主義’

황창배의 거의 모든 作品은 題目이 없다. 生前 그는 “題目을 달아 作品의 다양한 面을 限定시키지 않고, 그림으로만 充分히 보여 주겠다. 題目에 神經을 기울이기보다 作品 製作에 沒頭하겠다”고 했다. 大部分의 作品 內容은 이미지에 따라 推測해보는 수밖에 없다.

황창배, 무제(2000년), 장지에 혼합재료, 265 ×150㎝, 황창배미술관 제공
황창배, 無題(2000年), 葬地에 混合材料, 265 ×150㎝, 황창배美術館 提供

이 그림은 作家가 膽道癌 手術을 받고 作故하기 前 해인 2000年에 完成된 것이다. 지난해 國內에 선보인 데이비드 호크니의 作品을 聯想케 한다. 그림의 折半 以上을 어두운 系列의 검은色과 褐色이 덮고 있지만 人物의 華麗한 머리色과 衣裳이 畵面의 산뜻한 雰圍氣를 主導한다.

그림 속 왼쪽 아래 나무에서 始作돼 오른쪽 上段까지 이어지는 綠色 線, 세 갈래로 뻗어나가 中心을 잡는 가운데 人物의 붉은 팔, 그림의 무게를 잡아주는 어두운 背景 위 人物의 無彩色 옷을 눈여겨보자.

畵面의 리듬감을 위해 作家는 人體의 形態나 色彩, 配置를 自由自在로 움직인다. 그림의 出發은 같은 都市 風景이겠지만, 結果物은 作家 固有의 視角으로 再解釋한 버전이다. 20世紀 初 獨逸의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1880~1938), 노르웨이의 에드바르 뭉크(1863~1944) 等의 表現主義 作品에서도 볼 수 있는 屬性이다.

오른쪽 아래 署名에는 平素 短期(檀紀)로 表記했던 年度를 서기(西紀)인 ‘2000’으로 적어 獨特하다. 이 무렵 作家는 膽道癌 手術을 받고 忠北 槐山 作業室에서 나와 서울에서 生活했다. 21世紀를 맞아 낯설 程度로 탈바꿈한 都市의 모습을 作家의 눈에 비친 대로 담고 있다.

● ‘韓國畫 테러리스트’
우측에 닭이 우는 소리 ‘꼬꼬댁’을 적은 위에 X표를 긋고 좌측에는 곡고댁(哭高宅)이라고 썼다. ‘높은 집 때문에 곡소리가 
난다’는 뜻으로 빈부격차를 풍자한 듯하다. 문자를 시각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이 돋보인다. / 황창배, 무제-哭高宅(1990), 
한지에 혼합재료, 127 ×61㎝, 황창배미술관 제공.
右側에 닭이 우는 소리 ‘꼬꼬댁’을 敵은 위에 X標를 긋고 左側에는 曲高宅(哭高宅)이라고 썼다. ‘높은 집 때문에 哭소리가 난다’는 뜻으로 貧富隔差를 諷刺한 듯하다. 文字를 視覺的으로 活用하는 모습이 돋보인다. / 황창배, 無題-哭高宅(1990), 韓紙에 混合材料, 127 ×61㎝, 황창배美術館 提供.

“韓國的 이미지를 찾고 드러내는 作業, 그것이 저의 關心입니다. 밀가루로 빵만 만드는 게 아니라 수제비, 국수도 해먹을 수 있어요. 새로운 韓國化 運動, 우리의 共通된 이미지를 찾아가는 길에 東洋畫家나 西洋畫가 또 彫刻家 等 모든 이들이 同參해야 합니다.” (1990年代 月刊誌 인터뷰)

황창배는 東洋畫로 그림을 始作했다. 1966年 서울大學校 繪畫科에 入學한 그는 韓國美術을 體系化해야겠다고 決心해 專攻을 西洋畫에서 東洋畫로 바꾸었다. 월전 장우성(1912~2005)을 찾아가 東洋畫를 배우고, 書藝와 殿閣은 撤農 이기우(1921~1993)를 師事했다. 1975年에는 淸明 임창순(1914~1999)에게 漢學과 韓國 書藝美術史를 工夫했다.

以後 황창배는 破格을 거듭한다. 韓國에선 西洋的으로, 西洋에선 韓國的으로 보이는 그림들이었다. 이런 作品들로 그는 ‘韓國畫 테러리스트’라는 別名을 얻어 注目받는가 하면, 東洋畫의 傳統을 지키지 않는다는 非難도 받았다. 破格의 理由를 그는 이렇게 說明한다.

“傳統的 東洋畫를 工夫하다보니 이것 또한 中國的 話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事實을 깨달았다. 于先 西洋人의 方法論을 選擇하며 旣存 美術에 對한 反撥로 모든 것들을 否定하기 始作했다.” (1989年 ‘New Life Magazine’ 特輯 對談 ‘황창배 畫伯의 作品世界’)

傳統에 對한 抵抗과 不正은 新表現主義의 또 다른 特徵이다. 極端的 例가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거꾸로 그린 그림들이다. 바젤리츠는 歪曲된 形態에 暴力的일만큼 華麗한 色彩를 더했다. 作品을 實際로 接하면 어지러움이 느껴질 程度다. 황창배 또한 끊임없이 慣習의 破壞를 試圖하며 自身만의 言語를 찾아 나갔다. 그 過程은 아래 作品에서 두드러진다.

황창배, 무제(1987), 한지에 채색, 150×189.5㎝,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황창배, 無題(1987), 韓紙에 彩色, 150×189.5㎝, 國立現代美術館 提供

自由롭게 종이 위에 번지도록 無作爲로 線을 그린 다음, 그 속에 具體的 形象을 追加해 完成했다. 비슷한 作品들을 ‘숨은 그림 찾기’ 시리즈라고도 한다. 四君子나 算數(山水)라는 傳統的 東洋畫의 素材를 벗어났고, 色彩를 禁忌視했던 韓國畫의 慣習도 脫皮했다. 綠色은 勿論 그림 下段에 붉은色과 파란色을 더해 生動感을 더한다.

이 무렵 선화랑 個人展에서 선보인 類似한 作品群에 對해 그는 後日 “傳統的 空間이나 線描에서 벗어나 時間도 없고 遠近도 없는 그림을 試圖한 것”이라며 “그러나 너무 作品이 예쁘게 보여 不滿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 韓國性(性)은 “몸에서 나오는 것”

以後 作品은 “日記帳을 쓰듯 그림을 그린다”는 말처럼 個人의 視覺言語 完成에 集中해갔다. 洛東江 페놀 汚染 事件(1991)李 素材가 되거나 韓國 畫家 最初로 訪北해 北韓 風景을 스케치(1997)하기도 했다. 重要한 것은 그가 觀念的인 韓國性(韓國性)을 强調하기보다 作家의 主觀을 藝術的으로 表現하려고 努力했다는 點이다.

1989年 月刊 ‘東洋畫’와의 인터뷰에서 ‘現代性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質問에 그는 이렇게 答했다.

“따지고 보면 過去의 모든 사람들도 自身이 現代를 살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우리도 조금만 지나면 過去의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現在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感動을 極大化시켜 最善을 다하는 일, 그것이 現代性이라고 생각한다. 현대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다.”

바스키아가 作品에 借用한 그래피티는 特定 時空間에서 個人이 處한 正體性과 文化를 보여주는 素材에 不過하다. 황창배가 東洋畫 技法이나 素材를 活用한 것도 韓國에 살고 있는 ‘個人 황창배’의 正體性을 보여주기 위한 道具에 不過하다.

그런데 ‘集團的’ 韓國性을 찾으려는 視角이 그의 作品을 藝術 自體로 보는 데 걸림돌이 된다. 그의 作品에 關한 談論 大部分이 韓國化나 書藝의 土臺에서만 이뤄져서 그렇다. 藝術作品의 韓國性을 固定된 素材나 色, 技法으로 限定시키는 視角이 많다. 그러나 황창배는 生前 글과 인터뷰를 통해 ‘그러한 視角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主張했다.

그렇다면 眞正한 韓國性이란 무엇일까. 그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힌트를 남겼다.

“人類 歷史는 道具 變化의 歷史다. ‘韓國의 色’ 또한 애初부터 定해진 것이 아니라 流入되고 變奏된 것이다. 伽倻琴 하나로도 다양한 演奏를 하고 西洋樂器와 合奏를 하는 世上이다. 그런데 穩全히 우리 것도 아닌 것을 그대로 따라하기를 强要하는 것은 억지다. 韓國性은 時代에 맞게 자연스럽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황창배, 무제(1994), 캔버스에 혼합매체, 259×194㎝,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황창배, 無題(1994), 캔버스에 混合媒體, 259×194㎝, 서울市立美術館 提供.


김민 記者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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