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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列車에서 뛰어내려, 南쪽에서 作家가 되다 [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東亞日報

달리는 列車에서 뛰어내려, 南쪽에서 作家가 되다 [駐城下의 北에서 온 이웃]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6月 25日 08時 00分


코멘트
심수진 作家가 自身의 作品에 對해 說明하고 있다.


이달 初 서울 종로구 혜화아트센터에서 脫北畫家 심수진 展示會 ‘自由의 땅에서 내 꿈의 旅行’이 열렸다. 只今까지 脫北民 社會에서 심수진이란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에 어떤 作家인지 궁금해서 찾아가봤다.

率直히 큰 期待는 없었다. 하지만 展示室에 들어선 瞬間 뭔가 색다름이 확 와 닿았다. 作品들을 둘러보며 그 색다름의 實體를 깨달았다. 그건 섬세함이었다. 美術을 잘 모르지만, 種種 인사동에서 열리는 展示會들을 觀覽하면서 現代 美術에서 사라져가는 섬세함에 늘 아쉬웠고 목마름을 느꼈다.

作家 심수진의 作品들에는 칼끝의 섬세함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는 丹楓나무잎 하나를 놓고 한 달 동안 칼질을 하며 作品을 完成한다. 그의 作品들은 方式과 材料를 가리지 않았다. 油畫도 있고 水彩畫, 아크릴畫에 甚至於 陶瓷器도 있었다. 材料도 落葉뿐만 아니라 모래, 보리臺 等 다양했다. 하지만 作品들에 들어있는 共通된 特徵은 纖細함이었다. 어떤 忍耐가 배어있어야 이런 作品 創作이 可能할까. 그는 왜 韓國에 와서 作家의 길을 擇했을까. 많은 궁금함을 안고 그女와 마주 앉았다.

自由의 땅을 밟기까지 그는 너무나 많은 代價를 치러야 했다. 中國에서 北送되는 過程에서 달리는 列車에서 뛰어내려 피투성이가 돼 精神을 잃었던 瞬間도 있었다. 自由의 땅이라 믿고 必死的으로 찾아왔지만, 그에겐 肉體의 自由가 許諾되지 않았다. 不過 3年 前까지 그女는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時限附 患者였다. 이 땅에 ‘作家 심수진’이란 이름으로 삶의 痕跡을 남기겠다는 切迫함이 그女의 作品에 녹아있었다. 그는 어떤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렀을까.

이달 初 혜화동에서 열린 심수진 作家 個人展 展示場.


● 書藝 才能을 타고난 少女


심수진은 1978年 咸鏡南道 端川에서 平凡한 勞動者의 子息으로 태어났다. 父親은 機械工場 旋盤工이었고, 어머니는 商店 販賣員이었다.

1995年 中學校를 卒業할 때까지 그의 삶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달랐던 點은 學校에서 글씨를 第一 잘 썼다는 것이다.

그의 才能을 알아본 것은 師範大學 美術學部에서 書藝를 專攻한 學校 사로청指導員이었다. 學生들이 쓴 글 中에서 凡常치 않은 글씨體를 發見한 女性 指導員은 14살 수진을 指導員房에 불렀다. 그러더니 붓으로 글씨를 써보게 했다.

“내가 볼 때 너는 타고난 能力이 있는 것 같다. 이제부터 내가 書藝를 가르쳐줄 건데, 배워볼 생각이 있어?”

수진은 躊躇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3살에 어머니가 死亡하고, 繼母 밑에서 사는 수진에게 書藝는 너무나 好奇心이 가득한 새로운 世界였다.

그때부터 사로청指導員은 授業이 끝나면 수진을 불러 書藝를 가르쳤다. 農村動員과 和睦動員에서도 빼주고, 토끼家族이니, 廢洞이니 等을 내야 하는 ‘꼬마課題’도 全部 免除해주었다.

代身 수진은 學校 壁報를 도맡아 만들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재미있었다. 卒業班에 올라가선 校長에게 拔擢돼 김일성 生日 等 名節 때마다 學校에서 中央에 올려 보내는 ‘忠誠의 便紙’나 學生記錄資料 等을 써야 했다. 卒業할 때까지 學校의 各種 筆師와 붓글씨는 全部 그의 몫이었다.

1995年 卒業과 同時에 그는 速度戰靑年突擊隊에 入隊했다. 한時라도 빨리 繼母의 손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速度戰靑年突擊隊 9旅團에 들어갔는데 當時 部隊는 平安南道 大同郡에서 벼農事를 짓고 있었다. 元來 速度戰靑年突擊隊는 建設을 도맡아하는 部隊였는데, 當時엔 苦難의 行軍 時期라 資材가 없어 建設할 곳이 마땅치 않으니 農村에 보낸 것이다.

苦難의 行軍으로 到處에서 餓死者가 나오면서 社會의 紀綱은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졌다. 速度戰靑年突擊隊도 例外가 아니었다. 1年쯤 지나니 그와 함께 단천시에서 入隊한 隊員 20名 中 18名이 逃亡갔다. 各種 핑계를 내걸고 집에 갔다가 復歸하지 않은 것인데, 汽車를 타고 며칠씩 걸려 집에 찾으러 가도 父母들이 “여기 오지 않았다”고 하면 그만인 때였다.

수진도 저녁에 열린 生活總和 時間에 化粧室에 간다고 하고 平壤 親戚집으로 逃亡갔다. 거기서 旅費를 빌려 집으로 갔는데 繼母는 當場 部隊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서 咸北 淸津에 사는 外三寸 집에 가서 머물며 장사를 始作했다.

처음에는 沙果를 파는 장사를 하다가 나중엔 桐 장사를 始作했다. 銅을 사서 惠山에 들여가면 山 價格의 두 倍를 받았는데, 그 돈으로 다시 中國産 담배를 사서 나오면 또 두 倍가 떨어졌다. 代身 洞은 잘못 걸리면 死刑까지 處하는 國家 戰略 資産이기 때문에 汽車를 타고 다닐 때 목숨을 걸어야 했다. 惠山驛에 내리면 사람들이 檢閱을 避해 나가기 위해 3m나 되는 담牆에 새까맣게 매달렸다.

落葉을 칼로 새겨 만든 審 作家의 作品들.


● 18歲에 人身賣買犯에게 걸려들다


그의 脫北은 偶然히 이뤄졌다. 人身賣買犯의 魔手에 걸린 것이다.

1996年 11月 그는 열흘 넘게 惠山驛에서 露宿을 하는 身世가 됐다. 棟을 팔고 담배를 사서 돌아가려는데, 電氣가 없어 汽車가 열흘째 오진 않았다. 할 수 없이 담배를 다시 팔아 延命할 수밖에 없었다. 行色도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어떤 아줌마가 그에게 다가왔다. 山에 伐木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주는 일을 석 달쯤 해주면 큰 돈을 만지게 해주겠다고 提案했다. 提案도 솔깃했지만, 돈도 떨어져가는 터라 當場 밥을 먹는 것이 急했다.

그女를 따라 어떤 집에 가니 中國産 쌀이 無慮 다섯 包袋나 쌓여있었다. 當時에 그 程度 쌀을 갖고 있는 집은 드물었다. 저녁이 되니 隣近 國境 警備隊員들이 몰려와 밥을 먹고 갔다. 알고 보니 伐木이 아니라 密輸를 專門으로 하는 집이었다. 物件을 나르는 사람들이 밥을 먹고 갔고 이들을 봐주는 軍人들도 밥을 먹고 갔다.

이 집에서 한달쯤 일했을 때, 그 아줌마가 또 提案했다. 江을 건너가 物件을 좀 받아갖고 오라는 것. 저녁마다 鴨綠江을 넘어가고 넘어오는 사람들을 봤던 터라 수진은 돈을 많이 준다는 提案을 拒絶하지 못했다. 그날 밤 그女와 함께 다른 女性 두 名도 함께 江을 넘었다.

江을 건너니 中國에서 車가 마중 나와 있었다. 物件을 실으러 가야 된다며 이들을 싣고 몇 時間을 달려 어느 집에 내려놓았다. 집은 컸는데 담牆 위엔 鐵條網을 쳐서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집 主人이 나오더니 처음에는 物件이 오려면 기다려야 한다며 먹을 것도 豐足하게 주고 새 옷도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지린(吉林) 性 퉁화(通化) 時에 所屬된 메이火口(梅河口) 時였다. 延邊과는 車로 열 時間 넘게 떨어진 곳이었고, 匠伯에서도 車로 南쪽으로 몇 時間 와야 하는 곳으로, 北韓 慈江道 만포시 건너便에 位置해 있었다.

며칠쯤 지나 北韓 女性들은 自身들이 人身賣買의 犧牲羊이 된 것을 알았다. 그러나 鐵條網을 친 집을 벗어나 도망가도 周邊이 온통 漢族이라 나가자마자 잡힐 것이 뻔했다.

보름쯤 지났을 때 어떤 男子가 나타났다. 主人은 저 男子를 따라가 밥을 해주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고, 집에 돈도 보낼 수 있다고 說得했다. 집에 보내달라고 하자 “너를 데려오느라 돈을 많이 써서 보낼 수 없다”고 露骨的으로 脅迫했다.

수진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於此彼 生地獄처럼 變한 北韓에 남은 未練도 없었다. 中國에 와서 지내보니 먹을 것도 豐足하고 살 만한 世上이었다. 남들은 돈을 써서 넘어오기도 힘든데, 已往 이렇게 된 바에 中國에서 結婚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1997年 中國에 막 넘어왔을 때의 심수진. 19살 때 寫眞이다.


● 長春의 첫 脫北 女性


1997年 1月에 男子를 따라가보니 長春이었다. 그를 산 男子는 日本腦炎 後遺症으로 짜증을 달고 사는 30歲 朝鮮族이었다. 그는 장가가기 위해 4000위안을 내고 수진을 샀다. 當時 4000위안이면 500달러 程度 됐다.

北韓 아줌마가 그들을 얼마나 팔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苦難의 行軍 時期에 北韓 處女들은 단돈 100달러에 팔렸다.

1999年 韓國 映畫의 새로운 場을 열었던 映畫 ‘쉬리’에서 北韓軍 特殊 8軍團 少佐 박무영(최민식 驛)은 國精院 遙遠 中院(한석규 驛)에게 침을 튀기며 이렇게 울부짖었다.

“우리의 所願은 統一, 꿈에도 所願은 統一…. 니들이 한가롭게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을 이 瞬間에도 우리 北녘의 人民들은 못 먹고 병들어서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어. 나무껍데기에 풀뿌리도 모자라서 이젠 흙까지 파먹고 있어. 새파란 우리 人民의 아들딸들이 國境 넘어 賣春婦에 그것도 단돈 100달러에 個 팔리듯 팔리고 있어. 굶어죽은 지 새끼의 人肉마저 뜯어먹는 그 에미, 그 애비를 너는 본 적이 있어? 썩은 치즈에 콜라 햄버거를 먹고 자란 니들이 그걸 알 理 없지.”

記者는 脫北해 延邊에 숨어있던 2000年에 그 映畫를 봤다. 北韓 女性들이 단돈 100달러에 팔려 다니는 現場에서 내가 느꼈던 鬱憤과 憤怒를 只今도 잊을 수가 없다. 그 女性들 속에 심수진度 있었다.

수진은 韓國에 온 뒤 自身을 팔았던 北韓 아줌마가 韓國에 와서 脫北民으로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됐다. 그女를 보자 마음속 感情이 複雜해졌다.

거짓말하고 自身을 팔아먹은 것은 容恕하기 힘들었지만, 한便으로 저 女子 때문에 내가 목숨을 건져 韓國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그는 그 아줌마를 容恕하기로 했다.

수진은 長春에 팔려온 첫 北韓 女性이었다. 1年쯤 지나니 여기저기서 北韓 女性들이 하나둘 長春에 와서 살기 始作했다. 10年이 지난 2007年 그가 살던 마을에는 脫北 女性이 20名이 넘게 시집와서 살았다.

하지만 수진이 韓國에 먼저 온 뒤 親했던 사람에게 韓國行 루트를 알려주자 몇 名씩 줄 지어 韓國으로 왔다. 얼마쯤 지나니 그 마을의 脫北 女性들은 모두 사라졌다.

이런 일은 中國 지린 省이나 黑龍江 誠意 수많은 마을에서 벌어졌다. 中國 朝鮮族들은 脫北 女性들을 “갈데없는 거지같은 身世를 걷어주고 먹여 살렸더니 애까지 낳고는 다 달아나는 背恩忘德한 女子들”이라고 辱한다. 하지만 脫北 女性들은 아무리 애를 낳고 살았다고 해도 언제 北送될지 모르는 處地에서 不安에 떨어야 했고, 願치 않은 男子에게 팔려와 온갖 虐待를 堪耐하고 살아야 했다. 韓國에 온다는 것은 그들에겐 人間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意味한다. 아마 朝鮮族들이 立場을 바꾸어 그들의 處地라고 해도 도망가는 選擇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진은 수많은 脫北女性들의 삶을 代表하는 標本이기도 했다. 팔려와 1年쯤 살게 되니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나자 監視도 弱해지고 밖에 나가 일을 할 수 있게 許諾해주었다.

그는 長春 市內에서 호텔과 食堂을 옮겨 다니며 일을 했다. 月給날이면 媤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업고 나타나 돈을 받아갔다. 씨받이 役割을 마쳤으니 그 다음은 아들을 人質로 잡힌 돈 버는 奴隸의 삶이 始作된 것이다.

2007年 韓國으로 떠나기 直前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期約없는 離別을 앞두고 아들을 찾아가 寫眞을 남겼다.


● 달리는 汽車에서 뛰어내리다


수많은 脫北民이 經驗했던 北宋의 危機가 수진에게 찾아왔다. 2001年 食堂에서 일하던 때 갑자기 公安이 찾아와 그를 逮捕했다. 그는 長春에서 逮捕된 脫北民 4名과 함께 北送 汽車에 탔다. 汽車를 타니 멀미가 甚했다. 그는 隨時로 化粧室에 가서 吐했다.

하도 여러 番 化粧室을 들락거리니 護送員들이 그女의 手匣을 벗겨주었다. 中國 汽車는 速度가 빠르기 때문에 설마 24歲 女性이 逃亡을 칠까 放心한 것이었다.

수진은 죽더라도 北韓에 다시 돌아가기 싫었다. 只今 脫出하지 못하면 다시는 機會가 없을 것 같았다. 人生에서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면 只今이라고 생각했다.

새벽 5時가 지나자 護送員들도 꾸벅꾸벅 잠을 자기 始作했다. 수진이 앉은 座席의 窓門 쪽 자리엔 平凡한 朝鮮族 男性 둘이 앉아있었다. 그는 男性들에게 事情하기 始作했다.

“저는 北韓으로 끌려가는 脫北 女性입니다. 제가 이제 가면 살아올 것 같지 못합니다. 제발 付託인데, 窓門만 좀 올려주십시오.”

하도 付託하니 窓門 옆에 앉은 男性들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슬그머니 窓門을 올려주었다. 수진은 瞬息間에 窓門을 넘어 汽車 밖에 매달렸다. 그가 記憶하는 것은 그때까지였다.

얼마나 時間이 흘렀을까. 눈을 떠보니 어느 집 門 앞에 누워있었다. 얼굴과 온몸이 피투성이었다. 옷도 다 찢어졌다. 自身이 어떻게 民家의 門 앞에 누워있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斟酌으론 누군가 線路 옆에 쓰러진 女性을 보고 마을로 데려다놓고 간 것이 아닌가 싶었다.

精神을 차린 그는 洞네 美容室을 찾아 들어갔다. 깜짝 놀란 女主人에게 事情을 說明했다. 女主人은 긁힌 얼굴에 藥을 발라주고, 옷도 새로 가져다주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涓吉이라고 했다. 그는 長春의 男便에게 電話했다. 수진은 男便이 電話 속에서 내뱉은 말을 只今도 잊지 못한다.

“잡혀간 줄 알았는데, 또 電話 온 걸 보니 갈 데가 없네….”

수진은 이제 돌아가면 無條件 집을 뜨리라고 決心했다. 長春에서 媤누이가 찾아왔다.

● 베이징의 北韓 作品 가이드


長春에 돌아와 얼마쯤 있으니 男便이 돈 벌어온다며 고기잡이 漁船을 타러 갔다. 그는 詩集에 “北韓 집에 좀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선 뒤 산둥(山東) 城으로 갔다. 같은 마을에 살던 脫北 女性 한 名이 그쪽으로 가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때가 2002年이었다.

산둥에 간 그는 韓國 會社에서 食母 자리를 얻었다. 韓國人 職員 50名과 日本人 10餘名이 일하는 큰 會社였다. 거기서 2年 동안 일하다가 2004年 베이징으로 옮겨갔다.

베이징에선 北韓 藝術作品을 파는 會社에 就職했다. 社長은 朝鮮族이었는데 北韓에서 그림과 手藝, 保釋火를 받아다가 韓國人들에게 팔았다. 수진은 展示場을 찾아온 韓國 觀光客들에게 北韓 作品을 說明하는 일을 맡았다. 韓國人들은 그를 朝鮮族 가이드로 알았다.

그림을 좋아하는 그에겐 너무 適性이 맞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오래하지 못했다. 하루는 北韓大使館에서 찾아와 그림 販賣 實態를 把握하면서 이것저것 캐물었다. 北韓 外交官들을 본 瞬間 수진은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곧바로 辭表를 낸 수진은 베이징에서 韓國人 家庭집들을 다니면서 밥과 淸掃를 해주는 일을 始作했다. 그는 하루에 세 家庭을 찾아갔다. 韓國 家庭과의 만남은 그에게 韓國에 對한 憧憬을 키워주었다.

“韓國 外交官 家庭과 LG 現地 職員 家庭 等을 다녔는데 모두가 神社다웠습니다. 勿論 잘 사는 집도 있고 못 사는 집도 있었지만, 모두 매너가 좋았습니다.”

韓國 外交官의 夫人은 美人이었는데, 祕密 維持 次元에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次元에서 그랬는지 몰라도 男便하고는 말하지 못하게 徹底히 遮斷했던 것이 記憶이 남는다.

하지만 베이징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2008年 올림픽을 앞두고 外地人들에 對한 團束이 强化됐다. 그는 韓國에 가기로 決心하고 2007年 初 韓國行 루트를 찾은 뒤 길을 나섰다. 東南亞를 통해 韓國에 오는 過程은 다른 脫北民들과 똑같았다.

“泰國 監獄에 들어가니 中國에서 結婚했던 女性들이 異口同聲으로 ‘나는 韓國에 가면 中國 男便과 아이들을 데려오겠다’고 말을 하더군요. 저는 韓國 家庭을 2年 가까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정작 가봐라. 가면 눈이 높아져 絶對 中國 男子 데려오지 않는다. 데려오면 손바닥에 場을 支持겠다’고 했어요. 實際로 中國 男便을 데려온 脫北 女性들은 많지 않지요.”

한국에 온 이듬해인 2008년 여객선을 탄 심수진 작가.
韓國에 온 이듬해인 2008年 旅客船을 탄 심수진 作家.


● 韓國에서 始作한 作家의 삶


2007年 2月 수진은 韓國에 到着했다. 調査機關에서 擔當 調査官이 그가 쓴 漢字 이름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다른 中國語도 써보게 하더니 “脫北 以後에 中國語를 배운 사람은 絶對 이렇게 쓸 수가 없다. 中國에서 태어나 體系的으로 배운 사람이 아니고선 이렇게 예쁘게 漢字를 쓰기 힘들다”고 했다. 德分에 僞裝 脫北民으로 誤解받아 調査를 좀 더 받기도 했다.

그해 8月 그는 平澤에 賃貸住宅을 받고 韓國 社會에 定着했다. 3個月 뒤 電子部品 製作 會社에 檢査員으로도 就職했고, 하나院과 連繫된 大學인 한국폴리텍大學 안성캠퍼스에 디자인 專攻으로 入學도 했다. 모든 게 잘 풀리는가 싶었다.

하지만 大學을 卒業하기 直前인 2010年부터 各種 病魔가 그를 괴롭혔다. 밥을 챙겨먹지 않고 熱心히 일했더니 胃潰瘍으로 病院에 실려 가기도 했다. 거기에 深刻한 肝硬化까지 겹쳤다. 더는 일을 할 수 있는 狀況이 못 됐다. 重症障礙人 診斷까지 받게 되니 憂鬱症도 찾아왔다. 그는 漸漸 삶의 希望을 抛棄해갔다.

그는 空氣 좋은 곳에 가서 남은 人生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생각했다. 偶然히 親舊집에 놀러갔다가 經驗한 忠北 沃川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2010年 沃川으로 내려갔고 只今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現地 文化센터에 登錄해 陶瓷器 體驗 敎育을 받기 始作했다. 타고난 才能은 거기서도 빚을 發했다. 先生과 受講生 모두가 어디서 專門的으로 배웠냐고 물었다. 아무리 처음 해보는 것이라고 해도 믿지 않았다.

陶瓷器를 빚으면서 그는 난生 처음 便安함을 느꼈다. 온 精神을 集中해 作品을 만드는 것이 좋았다. 나중에 材料費가 들지 않는 作品을 생각하다가 落葉을 材料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丹楓나무잎을 主語와 칼로 그림을 새기다보면 온갖 시름이 잊혀졌다. 作品 創作은 그에게 삶의 끈이 되었다. 6年을 그렇게 흘려 보냈다.

陶瓷器와 版畫로 入門했지만 그림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한 試圖 떠나지 않았다. 2016年 몸이 어느 程度 좋아지자 서울디지털대 繪畫科에 入學해 2018年 次席으로 卒業했다. 大學을 다니면서 모래를 材料로 하는 保釋化에 빠졌다. 모래에 150가지 色을 입혀 作品을 創作했다. 2018年엔 보릿대를 주워와 作品을 만들었다.

2017年 수진은 第7回 大韓民國書畫비엔날레에 作品을 出品해 銀賞을 받았다. 이 일은 그에게 큰 自信感을 심어주었다. 2018年 國際現代美術大戰 銀賞, 大韓民國創作美術大典 銅像 等 出品作들마다 좋은 評價를 받게 되자 그는 한국미술협회와 韓國書畫協會에 正會員으로 登錄하고 本格的인 作家의 길을 걷기 始作했다. 只今까지 받은 賞만 10餘個가 넘는다.

作家 심수진을 키운 것은 타고난 才能과 끈질긴 沒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肉體가 받쳐줄 때 可能한 일이었다.

自身의 作品에 對해 說明하는 심수진 作家.


● 自由의 땅에서 내 꿈의 旅行


本格的인 作品 活動에 들어가기 始作하면서 健康은 다시 惡化되기 始作했다. 한나절 동안 作業을 하면 한나절을 寢臺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는 일이 反復됐다.

2020年이 되니 病院에서도 肝硬化를 더는 治療할 수 없다고 했다. 事實上 時限附 判定이었다. 남은 것은 간 移植밖에 없었다.

肝 寄贈者를 찾기는 너무 어려웠다. 이때 아들이 엄마에게 肝을 떼어주겠다고 나섰다. 勿論 아들도 쉽게 決定한 일은 아니었다. 아들은 2015年 17歲 때 韓國에 왔다. 엄마와 살겠다고 中國을 떠나온 것이었다. 願치 않은 結婚과 出産을 거쳐 태어난 아들이고 오랫동안 엄마와 떨어져 자란 아들이지만, 그가 世上에 남긴 唯一한 血肉이기도 했다.

韓國에 와서 高等學校를 다닌 아들은 國籍을 決定할 瞬間이 되자 苦悶하기 始作했다. 韓國 國籍을 얻으려면 軍隊에 갔다와야 했다.

수진이 “앞으로 엄마와 繼續 같이 살려면 軍에 갔다오는 길밖에 없다”고 하자 아들은 “엄마 故鄕 사람들에게 銃 겨누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오랜 苦悶 끝에 아들은 結局 韓國 國籍을 選擇했고 江原道 最前方 部隊에 勤務한 뒤 滿期 轉役했다. 轉役한 날 아들은 수진에게 “軍 服務가 別거 아니었어요. 괜히 많이 苦悶했네. 갔다 오길 잘했어요”라고 했다.

軍에 다녀온 뒤로 아들은 많이 달라졌다. 돈을 아껴 쓰려고 하고, 小小한 飮食은 直接 만들어 먹는다. 올해 2月엔 地方 國立大學을 卒業하고 只今은 就職을 準備 中이다.

아들이 軍 服務를 하던 2020年 수진은 쓰러졌다. 몇 달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아들에게 電話를 했다.

“네가 엄마를 좀 살려줘야겠다. 나는 13살에 엄마를 잃고 살았는데, 只今 엄마가 되고 보니 아들이 장가가는 것을 꼭 보고 싶다. 그리고 北韓에 있는 兄弟도 꼭 다시 만나고 싶다. 마지막으로 엄마는 꿈을 다 이루지 못했다. 네가 엄마의 꿈을 이루게 좀 도와주렴.”

아무리 아들이지만 어릴 때 두고 온 터라 그럴 말을 할 廉恥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엄마는 왜 나를 繼續 힘들게 하냐”고 푸념도 했지만 結局 어머니를 위해 手術臺에 올랐다. 떼어낸 아들의 肝 60%가 수진에게 移植됐다. 이제 수진은 아들의 肝으로 남은 一生을 살아야 한다. 간 移植 後 健康은 뚜렷하게 좋아졌다. 皮膚도 좋아지고 食性도 달라지고 머리카락도 빠지지 않았다. 疲困한 것도 많이 사라졌다. 이젠 살만해졌다.

아들을 볼 때마다 수진은 “내가 살려고 너를 낳았구나”라는 생각이 늘 든다. 恒常 未安한 마음이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그는 새로 얻은 목숨을 1秒도 浪費하지 않고 값있게 쓰고 싶다. 畫家 심수진의 限界가 어디인지 끝까지 가보고 싶기도 하다. 形便이 넉넉하지 않아 如前히 값싼 材料를 救해 作品을 만들 수밖에 없지만, 그건 只今 느끼는 幸福에 비해선 큰 苦悶이 아니라고 했다.

“저는 北에서 19年, 中國에서 10年, 韓國에서 15年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健康이 나쁜 사람이 北韓이나 中國에 있었다면 只今까지 살아있었겠습니까. 韓國의 福祉制度가 너무 잘 돼 있어서 저같은 사람이 只今까지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사는 每日 每日이 저에게 찾아온 膳物 같습니다. 그리고 이젠 꿈도 펼칠 수 있게 됐습니다.”

2023年 6月 혜화아트센터에서 열린 展示會는 脫北作家 심수진을 알리는 첫 個人展이기도 했다. 그는 이달 30日부터 7月 2日까지 열리는 新羅호텔 ‘2023 그랜드 아트페어’ 招待展에도 參加한다.

“只今까지 저는 어둠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제 밖으로 나와 빛을 보려 합니다. 새 生命도 얻고 내 꿈도 펼칠 수 있는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아서 꼭 自身만의 世界를 開拓한 作家로 記憶되고 싶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 그의 첫 展示會 타이틀 ‘自由의 땅에서 내 꿈의 旅行’李 담고 있는 깊은 뜻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의 旅行은 이제 始作됐다. 展示會는 作家 심수진의 出發을 알리는 信號彈이다. 그 旅行길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眞心으로 祈願하며 나는 展示會場을 떠났다.

심수진 作家의 作品들을 記錄한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ZoCuJTMWRwY

東亞日報·南北하나財團 共同企劃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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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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