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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北 1號 辯護士 이영현 “쌀 한 背囊 救하러 豆滿江을 건넜죠”[주성하의 北에서 온 이웃]|東亞日報

脫北 1號 辯護士 이영현 “쌀 한 背囊 救하러 豆滿江을 건넜죠”[주성하의 北에서 온 이웃]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6月 18日 08時 00分


코멘트
苦難의 行軍 時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脫北해 韓國에서 1號 脫北民 辯護士가 된 이영현 法務法人 以來 辯護士.


1997年 6月 어느 아침. 남루한 行色의 14歲 少年이 풀밭을 헤치며 豆滿江 기슭을 헤매고 있었다. 울먹이며 三寸을 애타게 불렀지만, 누구도 對答하지 않았다.

간밤 少年은 30代 後半의 外三寸과 함께 豆滿江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서로 손을 꽉 잡고 江물을 헤쳤지만, 비 온 뒤의 豆滿江은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물살이 셌다.

어느새 둘은 손을 놓고 허우적거리기 始作했다. 少年은 바닷가에서 자라 水泳에 自信 있었지만, 발아래서 돌이 굴러가는 急물살에는 束手無策이었다. 無酌定 손을 휘저으며 버틸 뿐이었다.

어느 瞬間 少年은 물살에 휩쓸려 精神을 잃었다. 옆에서 “語푸, 어푸”하는 外三寸의 悲鳴을 들은 것도 같았다.

얼마나 時間이 흘렀을까. 少年은 江기슭에서 눈을 떴다.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江 건너便을 보니 北韓이었다. 저녁 8時에 豆滿江에 뛰어들었는데 간밤의 記憶을 잃어버렸다.

精神이 돌아오자 少年은 外三寸을 찾기 始作했다.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豆滿江 기슭을 오르내리며 몇 時間째. 하지만 끝내 外三寸은 보이지 않았다. 屍身도 없이 사라진 外三寸을 찾으며 少年은 홀로 앉아 엉엉 울었다.

22年이 흐른 2019年. 少年은 大韓民國에서 脫北民 1號 辯護士가 됐다. 北韓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 家族과 生離別하고 中國에서 少年공으로 일하며 “하나님, 저에게 제발 工夫할 機會를 주세요”라고 애타게 企圖했던 少年은 迂餘曲折 끝에 韓國에 왔고 20歲에 英語 알파벳부터 배우기 始作했지만, 어떤 逆境도 그를 주저앉히진 못했다. 法務法人 以來의 이영현 辯護士가 그 主人公이다.

지난해 8月 法務部 招請으로 北韓 人權 關聯 特講을 進行하고 있는 이영현 辯護士.


● 豆滿江에서 外三寸을 잃다

이영현은 1983年 咸鏡南道 咸興에서 걸어서 몇 時間 떨어져 있는 작은 漁村마을에서 3兄弟 中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水産協同組合 漁夫였고, 어머니는 協同農場 農民이었다. 父親은 너무 일찍 돌아가 얼굴도 잘 記憶이 나지 않는다.

그가 人民學校를 마치고 中學校에 막 올라갈 무렵, 北韓엔 嚴酷한 ‘苦難의 行軍’李 닥쳐왔다. 農民인 어머니가 혼자 세 아들을 벌어 먹여야 했다. 老衰한 媤어머니도 한 집에서 살았다.

配給이 끊어지자 영현의 兄弟들은 學校를 가지 않고 어머니를 도와 먹고 살기 위해 뭐든 다 했다. 영현度 山에 올라가 나무를 해왔고, 나무껍질을 벗겨왔다. 그래도 하루 한 끼 풀粥度 먹기 힘들었다.

나이든 할머니부터 쓰러졌다. 먹지 못해 힘없이 누워 있던 할머니는 苦難의 行軍 첫 해인 1995年을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듬해엔 같은 마을에 살던 三寸도 굶어죽었다.

굶어 죽어가도 아무 對策이 없었던 마을 사람들에 비해 그나마 영현의 家族에겐 믿을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어머니 親戚들이 中國에 있었던 것이다.

1997年 6月 隣近에 살던 外三寸이 집에 찾아와 中國으로 가자고 했다. 어머니는 14살 영현을 딸려 보냈다.

“三寸 따라가서 꼭 쌀 한 背囊이라도 메고 와.”

둘은 가다 서다를 反復하는 汽車를 타고 며칠 苦生한 끝에 마침내 豆滿江 옆인 韓半島 最北端 咸北 穩城에 到着했다. 親戚들의 電話番號를 모르니 國境에 가서 中國에 電話를 할 수도 없었다. 江을 넘는 것밖에 方法이 없었다.

돈이 없어 國境警備隊를 買收할 수도 없었다. 30代 後半의 外三寸은 어느 날 영현을 데리고 豆滿江 옆 道路를 따라 걸으면서 어디로 건너가면 좋을지 偵察하기 始作했다. 1997年은 國境警備隊度 많지 않았던 터라 盜講할 場所가 몇 군데 눈에 들어왔다.

外三寸이 擇한 곳은 豆滿江 幅이 50m 程度 되는 훈춘 맞은便의 어느 野山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때는 큰비가 내린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다. 하지만 江에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 道路에서 보니 물살이 얼마나 센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어둠이 내리자 外三寸과 영현은 봐두었던 渡江支店으로 移動했다. 어둠 속에서 본 豆滿江은 悠悠히 흘러갈 뿐이었다. 漁村마을에서 자란 영현은 어려서부터 바다에서 놀아 물이 두렵지 않았고, 水營에도 自身이 있었다. 外三寸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손을 잡고 江에 들어갔다. 멀리 江 河口에 보이는 中國 마을이 이들의 目標였다. 떠내려가더라도 앞으로만 헤엄쳐 간다면 마을 近處에선 땅에 발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장마 뒤의 江물은 바다와 全혀 달랐다. 허리까지 들어가자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놓치고 말았다. 이젠 計劃한 대로 앞으로 헤엄쳐 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그런 물살에선 헤엄도 제대로 칠 수가 없었다. 그냥 本能的으로 손을 휘저을 뿐이었다. 어두운 豆滿江에서 영현은 外三寸을 잃어버렸지만 約束한대로 中國을 向해 無酌定 헤엄쳐 나가다가 精神을 잃었다.

중국에서 은신처 생활을 할 때 다른 탈북 청소년들과 함께 생일을 쇠고 있는 이영한 변호사(맨 뒤).
中國에서 隱身處 生活을 할 때 다른 脫北 靑少年들과 함께 生日을 쇠고 있는 이영한 辯護士(맨 뒤).


● 少年을 救해준 朝鮮族 夫婦

아침에 精神을 차린 영현은 豆滿江 上流를 向해 걸었다. 三寸은 自己보다 더 빨리 기슭에 到着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올라가도 三寸은 보이지 않았다. 서너 時間을 걸어갔을 때 눈앞에 中國 마을이 나타났다. 간밤 目標로 삼았던 그 마을이었다.

마을이 보이자 少年은 그제야 自身이 處한 現實이 徐徐히 實感나기 始作했다.

“三寸은 죽었구나. 이제 어떻게 할까. 마을에서 쌀 한 背囊을 求乞해 집으로 돌아갈까.”

집에 너무 가고 싶었다. 그런데 豆滿江을 보니 다시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苦心하다가 少年은 마을로 들어가 어느 집 門을 두드렸다.

“저는 朝鮮에서 왔는데, 三寸은 江을 넘어오다가 빠져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그러니 밥 한 그릇만 좀 주세요.”

中年의 夫婦가 내다보더니 혀를 찼다.

“이틀 前에도 朝鮮에서 건너온 사람들 도와주었는데 또 왔구나. 一旦 들어와라.”

영현은 집에 들어갔다. 주는 밥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자 夫婦는 또 한 空氣를 퍼주었다. 또 먹었다. 그렇게 서너 空氣를 먹고 나니 밥이 없었다.

“우리는 밭에 일하러 가야 해. 너는 집에서 씻고 쉬어라.”

훈춘의 朝鮮族 農夫 夫婦는 너무 親切했다. 영현은 그들을 理解할 수 없었다.

“어떻게 처음 본 애한테 밥도 주고, 門도 잠그지 않고 나가다니….”

江을 하나 넘었을 뿐인데 理解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밥을 몇 空器나 먹었지만 如前히 배가 고팠다.

부엌에 나가 보니 누룽지가 보였다. 그는 그것도 다 먹었다.

저녁에 돌아온 夫婦는 “어린 애가 어떻게 이걸 다 먹었냐”고 깜짝 놀랐다.

그 집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朝鮮族 夫婦는 親戚을 찾는 것도 도와주었다. 少年은 外三寸이 오면서 中國 親戚들의 이름과 사는 地域을 이야기해주었던 것을 記憶했다. 그걸 土臺로 두꺼운 電話番號簿를 뒤지며 該當 地域 親戚과 같은 이름의 電話番號에 無酌定 電話를 해봤는데 이것이 成功했다. 찾아낸 親戚은 吉林에서 살았는데, 高位職이었다.

親戚은 “내가 高位職이라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드나들기 때문에 北에서 越境한 아이를 데리고 있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親戚인데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어 네가 지낼 곳을 찾아주겠다”고 말했다.

親戚이 알려준 住所로 가니 훈춘의 어느 農村마을이었다. 親戚은 脫北 아이들을 돌보는 朝鮮族 傳道師를 搜所聞해냈던 것이다. 傳道師는 少年을 보고 다시 어딘가에 連絡했다. 한 男子가 나타났다. 새로 나타난 男子는 朝鮮族 執事였는데, 北에서 온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미리 連絡을 해두었던 참이었다.

男子를 따라 나섰다. 汽車를 타고 멀리 멀리 따라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到着한 곳은 萬里長城 東쪽 끝에 있는 港口都市인 허베이(河北) 性 친황다오(秦皇島)였다.

한국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이영현 변호사. 20살 때 사진이다.
韓國에 와서 高等學校를 다니던 時節의 이영현 辯護士. 20살 때 寫眞이다.


● 學校 壁에 매달린 14歲 少年工

執事를 따라 市內 邊두리의 집에 들어가니 한눈에 봐도 가난해 보였다. 그리고 집士에겐 그와 비슷한 또래의 아들 두 名이 더 있었다.

집에 들어가자 夫人이 잔소리를 늘어놓기 始作했다.

“아니, 相議 없이 아이를 데려오면 어떻게 해?”

執事는 못들은 척 대꾸를 하지 않았다. 며칠 뒤 그는 少年을 데리고 派出所에 갔다. 公安들에게 “延邊에 살던 親戚집 아이가 孤兒가 돼 데리고 왔다”고 申告하자 그들은 알았다고 끄덕였다. 아직 脫北者가 있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한 洞네였던 것이다.

執事는 며칠 있다 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자 “어린 애가 무슨 밥을 그리 먹냐”는 夫人의 타박이 더 甚해졌다.

그렇게 한달쯤 눈칫밥을 먹던 영현은 일을 하러 다니기 始作했다. 그 집과 가깝게 지내는 親舊 中에 페인트漆을 爲主로 하는 인테리어 業者 한족이 있었는데, 그가 영현을 보자 데리고 다니며 일을 배워주겠다고 한 것이다.

執事 夫人이 다 낡았지만 그래도 굴러가는 自轉車를 하나 가져다주었다. 영현은 그 自轉車를 타고 業者를 따라다녔다.

아침 7時에 집을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日常이 反復됐다. 當時 中國에서 국수 한 그릇이 2慰安이었는데, 영현은 8위안을 하루 日當으로 받아왔다. 번 돈은 모두 執事 夫人에게 주었다.

그러자 그女의 表情이 달라졌다. 밥도 많이 주고 그때부터 “아들, 아들”하며 살갑게 對해주기 始作한 것이다.

이곳에서 영현은 2000年까지 3年 남짓 살았다. 가끔 學校 外壁 페인트漆을 할 때도 있었다. 밧줄을 타고 壁에 매달려 페인트漆을 하던 10代 中盤의 영현은 敎室 안에서 敎科書를 읽는 自己 또래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울먹이며 懇切히 祈禱했다.

“하나님. 제발 저에게도 工夫할 機會를 주세요.”

中國에서 自身을 돌봐준 은춘표, 임정하 夫婦를 만난 이영현. 現在 美國 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이 夫婦에겐 이영현이 只今도 親아들이나 다름없는 存在다.


● 다시 찾아간 延邊

朝鮮族 執事가 영현을 데리고 온 理由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하루는 그가 베이징에 가자며 영현을 데리고 나섰다. 베이징에서 만난 사람은 美國 國籍의 韓人 宣敎師였다. 中國에서 피터은(본명 은춘표)이란 이름으로 活動한 그는 美國의 한 韓人敎會 長老로 있다가 朝鮮族 宣敎를 하러 中國에 왔다. 하지만 大量 脫北을 알게 되면서 큰 衝擊을 받았다.

이때 그가 아는 朝鮮族 執事가 脫北 아이를 保護하고 있다고 하자 한番 보자고 한 것이다. 베이징에 간 영현은 一週日 程度 은 宣敎師와 머물며 聖經 工夫를 했다. 돌아갈 때는 用돈도 넉넉히 주었는데 그 돈은 執事 夫人에게 모두 넘겨주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宣敎師는 執事에게 영현의 中國 戶籍을 사라고 5000慰安도 주었다. 當時엔 中國에서 2年 가까이 쓰지 않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이었지만, 그 돈도 執事가 다 着服했다. 영현을 집에 데려온 것은 美國이나 韓國 宣敎師들에게 내세워 앵벌이를 하기 위한 目的이 컸다.

하지만 그 德分에 영현은 1年에 한두 番 베이징으로 가 머물며 韓人 宣敎師와 親해졌다. 2000年頃이 되자 은 宣敎師는 美國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예 延邊에 머물며 博士 身分으로 바꾸어 脫北民 使役에 邁進했다.

그는 自身이 만난 1號 脫北 少年인 영현을 便法을 써서 단둥에 있는 朝鮮族 學校에 넣어주었다. 하지만 戶口도 없이 臨時로 들어간 學校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두 달쯤 지나자 學校 先生들이 영현을 疑心하면서 戶口를 提出하라고 닥달질하기 始作했다. 더 버틸 수는 없었다. 영현은 夜半逃走하듯이 단둥을 떠나 延邊에 자리 잡은 은 宣敎師에게 찾아갔다.

2011年 연세대 法大를 卒業한 이영현 辯護士.


● 하늘이 도운 韓國行

은 宣敎師는 수많은 脫北民들을 保護하기 위해 延邊 地域의 어느 깊은 山中에 脫北民 定着村을 만들었다. 脫北民들은 山을 開墾해 農事도 짓고, 家畜도 키웠다.

갑자기 외진 山골짜기에 사람들이 모여 사니 申告가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마을은 公安에 摘發돼 얼마 維持되지 못했다.

은 宣敎師는 延邊의 農村에 技術學校도 만들었다. 中國 애들도 工夫를 했지만, 脫北民 아이들도 그 學校에서 함께 工夫했다.

脫北民 아이들은 農村에 있는 住宅에서 은 宣敎師와 함께 살면서 學校를 다녔다. 영현度 그들 中 한 名이었다. 2002年 3月 脫北民 25名이 베이징 駐在 스페인 大使館에 集團 進入하기 前까지는 그럭저럭 조용히 숨어살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 25名 中에는 은 宣敎師와 한 집에서 살던 少女도 있었다. 스페인 大使館 進入 事件은 中國에서 큰 뉴스로 다뤄졌다. TV에서 大使館 進入 場面이 反復해서 나오자, 洞네 住民이 알아봤다. “저 女子애는 여기서 살며 學校 다니던 애였는데 脫北한 애였네.”

正體가 드러나는 것은 時間 問題였다. 아이들은 恐怖에 떨었다. 같이 살던 아이들이 갑자기 하나둘 사라졌다. 며칠 지나니 영현이 살던 집에 남아있는 애들은 3名뿐이었다.

은 宣敎師도 深刻性을 알았다. 그는 어느 朝鮮族 執事에게 아이들을 韓國으로 보낼 수 있는 길을 알아보라는 指示를 내렸다. 朝鮮族 執事는 몽골 國境까지 事前踏査한 뒤 돌아왔다.

4月 20日에 韓國으로 떠나기로 날짜가 定해졌다. 하지만 執事가 强勁했다. 여기서 더 머무는 것은 너무 危險하니 遲滯없이 떠나야 한다고 主張했다.

그의 말이 받아들여져 아이들은 19日에 집을 나섰다. 25살 女性과 19살 영현, 14살 少年이 한 팀이었다. 그들은 汽車를 타고 內몽골 都市까지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延邊에서 들려온 消息을 들었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重武裝한 公安 100餘名이 트럭 여러 代에 나눠 타고 그들의 隱身處를 急襲했다는 것이다.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逮捕됐다. 은 宣敎師도 함께 逮捕돼 50日 넘게 調査를 받은 뒤 美國으로 追放됐다. 以後 그는 中國에 다시 가지 못했다.

朝鮮族 執事는 이들을 國境까지 案內해주었다. 그리고 別 하나를 가리키며, 저쪽으로 繼續 가면 몽골이니 쉬지 말고 걸으라고 했다. 며칠 前에도 그는 脫北民 몇 名을 넘겨 보냈는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그들이 호텔 앞에 서 있었다고 했다. 그들도 나름 밤새 걷고 걸었는데, 아침이 돼 보니 다시 떠난 位置로 돌아온 것이다. 沙漠에선 方向을 가늠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영현의 一行은 다시 알려준 方向으로 걷고 걸었다. 한참을 걸어가니 鐵條網이 나왔다. 바닥을 파고 通過했다. 그런데 한참 걸어가니 또 鐵條網이 나타났다. 鐵條網을 한 番만 넘을 줄 알았던 이들은 唐慌하기 始作했다. 두 番째 鐵條網도 어찌어찌해서 通過해 걷는데 또 鐵條網이 나타났다. 밤새 이들이 땅을 파거나 기둥을 잡고 넘어간 鐵條網은 大略 10餘個나 됐다.

끝날 것 같지 않던 鐵條網도 더는 나타나지 않을 때쯤 날이 밝기 始作했다. 그때 멀리 마을이 보였다. 가서 살펴보니 中國語를 쓰지 않았다. 몽골에 온 것이다. 그 마을에 좀 머물러 있으니 몽골 守備隊 여럿이 나타나 銃을 겨누며 眼帶를 씌웠다. 車를 타고 간 곳은 邊方 守備隊 兵營이었다. 이곳에서 열흘 程度 調査를 받고 울란바토르行 汽車에 올랐다. 그곳에서 飛行機를 타고 韓國에 到着한 날이 2002年 5月 17日이었다.

2011年 延世大 卒業 禮拜에 參加한 總長과 敎授들 앞에서 卒業生을 代表해 踏査를 하고 있는 이영현 辯護士.


● 마침내 찾아온 工夫할 機會

8月 하나圓을 卒業한 영현은 無緣故 靑少年으로 分類돼 賃貸住宅은 받지 못하고 天安에 있는 無緣故 靑少年 쉼터로 가게 됐다. 가보니 敎會 하나만 달랑 있고, 함께 간 脫北 靑少年들이 머물 宿所도 없었다. 大量 脫北을 처음 經驗해 본 政府는 그때까지도 體系的인 靑少年 定着 시스템을 마련해놓고 있지 못했다. 脫北 아이들은 받겠다는 곳만 있으면 現場 踏査도 없이 無酌定 보내다 보니 살 집도 없는 곳에 보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현은 다른 애들과 함께 집을 짓기 始作했다. 中國에서 少年공으로 살았던 것이 도움이 됐다. 甓돌을 나르고 쌓고 겨우 몸을 누울 空間을 만들었지만 이곳에 오래 있진 않았다.

6個月 뒤 그는 2002年 開校한 基督敎 代案 特性化學校人 地球村高等學校에 入學해 釜山으로 옮겨갔다. 地球村高等學校는 2020年 廢校를 했는데, 運營期間 脫北民 社會의 優秀한 靑年 人材들을 많이 輩出했다.

영현은 그렇게 바랐던 工夫할 機會를 드디어 얻었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꿈이 現實이 된 것이다. 北韓에서 生存을 위해 學業을 그만들 수밖에 없었던 영현은 英語 알파벳도 잘 몰랐다. 數學 等 基礎 科目도 새로 배워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抛棄하지 않았다. 工夫가 힘에 부칠 때면 中國 學校의 外壁에서 밧줄에 매달려 “工夫할 機會를 달라”며 부르짖었던 過去의 自身을 떠올렸다. 2年 동안 죽으라고 工夫해 高等學校를 卒業하고, 2005年 연세대 法大에 入學했다.

그의 꿈은 法曹人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아들을 찾아 脫北했던 어머니와 兄弟가 北送됐다는 消息을 나중에 들었다. 韓國에 와서 故鄕에 사람을 보냈지만, 찾지 못했다는 傳喝을 받았다. 죽었는지, 아니면 收容所로 끌려갔는지 알 수도 없었다. 只今도 그는 北送된 家族의 生死를 알지 못한다. 영현은 法曹人이 돼 抑鬱한 脫北民들의 自由와 權利를 守護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20歲부터 工夫를 始作한 그가 연세대 法大 過程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 番뿐인 배울 機會를 浪費하지 않았다. 試驗 期間이면 圖書館에서 열흘 남짓 먹고 자며 살았다. 그래도 첫 學期는 平均 C 學點을 避할 수는 없었다. 果然 卒業할 수 있을까 두려움도 들었지만 抛棄하진 않았다. 放學 때 削髮하고 山에 들어가 工夫만 한 적도 있었다. 努力하는 그에게 機會도 찾아왔다. 卒業할 즈음 로스쿨制度가 생겨난 것이다.

2011年 영현은 大學을 卒業하고 慶北大 로스쿨에 入學했다. 大學 期間 1年은 英語를 익히기 위해 韓人 宣敎師가 사는 美國에 건너가 工夫를 했고, 또 1年은 로스쿨에 合格하기 위해 再修를 하다보니 大學 卒業에 6年이 걸렸다.

2008年 25살 때 美國에서 1年 동안 留學하던 時節의 이영현 辯護士.


● 脫北 1號 辯護士의 꿈

로스쿨 亦是 쉽지 않았다. 경북대는 地方大이긴 하지만 學費가 低廉한 國立大라는 長點을 갖고 있었다. 그의 同期들은 大多數가 SKY 出身의 ‘學點機械’들이었다. 그들을 따라가는 것은 正말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工夫하는 것밖에 없었다.

3年 過程을 4年 동안 마치고 2015年 드디어 辯護士 試驗을 보기 始作했다. 하지만 첫 試驗은 落榜이었다. 로스쿨 制度가 생겨 2012年에 치른 첫 試驗에서 辯護士 試驗 合格率은 87%를 記錄했지만 해가 갈수록 그 比率이 떨어졌다. 2015年엔 61%가 合格했다. 그는 떨어진 39%에 들었다.

이듬해 또 挑戰했다. 試驗 機會는 다섯 番 附與된다. 이듬해 合格率은 55%로 더 떨어졌다. 그는 또 떨어졌다. 그렇게 連거푸 네 番을 落榜했다. 그러는 사이 合格率은 51%, 49%로 繼續 낮아졌다.

2019年 마지막 機會가 찾아왔다. 이제 通過하지 못하면 辯護士가 되기 위해 바쳤던 15年의 歲月이 虛無하게 끝나게 되는 것이다. 어느덧 영현度 36歲의 靑年이 돼 있었다.

合格者 發表가 나기 前날 그는 恒常 그랬던 것처럼 비가 쏟아지는 公園을 定處 없이 걸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只今까지 繼續 떨어졌지만, 그는 自身이 辯護士가 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辯護士가 되는 過程이 참 많이 힘들지만, 죽음도 넘겼는데 못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辯護士試驗 準備를 하는 내내 눈이 닿는 모든 곳에 ‘合格’이란 글을 써서 붙였다. 携帶電話 알람音도 ‘合格’이었다.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늘 ‘合格’만 머리에 떠올렸다. 하지만 정작 마지막 機會가 다가오니 萬感이 交叉했고, 心臟이 떨렸다.

合格者 發表가 뜬 時刻 떨리는 손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그는 ‘辯護士 試驗 合格’이라는 글字가 보이자 두 손을 하늘로 높이 들고 ‘만세’를 큰소리로 외쳤다. 瞬間 그의 얼굴에는 기쁨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4錢5基의 努力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脫北民 出身 最初의 辯護士가 됐다. 여기저기서 인터뷰 要請이 왔다. 하지만 다 拒絶했다. 只今까지 살아오면서 한 고개를 넘으면 다른 고개가 또 다가온다는 것을 뼈저리게 體得한 그였다. 辯護士 生活이란 새로운 고개를 들뜨지 말고 初心으로 始作하고 싶었다.

한 中堅 로펌에서 實務 收拾過程을 마친 뒤 그는 여러 로펌을 거쳐 現在는 法務法人 以來에서 파트너 辯護士로 일하고 있다. 여느 辯護士들처럼 그 亦是 刑事, 民事, 家事, 保險 等 여러 分野를 다뤄야 한다. 그의 房은 밤늦게까지 불이 켜 있다.

지난해 5月 北韓人權法 執行을 促求하는 記者會見에서 發言하고 있는 이영현 辯護士.

그는 바쁜 辯護士業務를 하면서도 大韓辯護士協會 北韓人權特別委員會와 北韓離脫住民法律支援委員會 等에 加入해 北韓人權과 脫北民 定着問題를 解決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대한변협 人權財團의 事務總長職度 遂行하면서 脫北民들에 對한 法律相談과 法律敎育 關聯 事業을 直接 企劃하고 進行한다. 그 外에도 여러 北韓人權 關聯 機關이나 團體 活動에도 積極 參與하고 있다.

그는 人類普遍的 價値인 北韓人權을 改善하고, 먼저 온 統一인 脫北民들이 韓國社會에서 잘 定着하도록 돕는 것이 自身의 疏明이라고 말한다. 脫北民 辯護士로서 그가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召命意識은 늘 運命처럼 새겨져 있다.

그는 時代가 부르는 날이 온다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그리고 切實하게 北韓住民과 脫北民을 위해 나설 意志와 覺悟를 깊은 곳에 품고 살고 있다.

“萬若 來日이라도 北韓 體制가 무너지고 北韓으로 갈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저는 躊躇없이 가겠습니다. 只今 北韓 體制에 賦役하던 사람들을 法曹人으로 再敎育시켜 쓸 순 없습니다. 法曹人이 없는 空白의 狀態가 올 것인데, 새로운 法秩序를 移植하는 過程도 겪어야 합니다. 北韓 2000萬 同胞 中 自由民主主義 世上에서 第一 먼저 法曹人이 된 제가 當然히 주춧돌이 돼야 할 겁니다. 그게 쌀 한 背囊을 지고 오려고 豆滿江을 건넌 제게 分斷의 曺國이 짊어지게 한 運命이 아닐까요.”

그의 表情은 부드러웠지만 語套는 斷乎했다. 辯護士 이영현은 工夫가 만들어낸 法曹人이 아니라, 時代가 만들어낸 法曹人이었다.

東亞日報·南北하나財團 共同企劃

鑄成하 記者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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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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