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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몸, 나의 選擇 [김민의 그림이 있는 하루]|東亞日報

나의 몸, 나의 選擇 [김민의 그림이 있는 하루]

  • 東亞日報
  • 入力 2021年 11月 13日 10時 3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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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발라동 ‘푸른 房’

最近 英美圈 言論에서는 모델 兼 俳優 에밀리 라타이코우스키가 發刊한 冊 ‘My Body’가 話題입니다. 21살 때 매거진 表紙에 누드 寫眞으로 登場해 눈길을 끌고, 有名 歌手의 뮤직 비디오에도 裸體로 登場하면서 有名稅를 얻게 된 그女가, 自身의 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社會의 視線에 對해 率直하게 써내려갔기 때문입니다.

BBC와 인터뷰하는 에밀리 라타이코우스키
BBC와 인터뷰하는 에밀리 라타이코우스키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2800萬 名이 넘는 그女는 영미圈에서 ‘섹시한 女子’의 代名詞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性的인 魅力을 앞세워 有名稅를 얻은 그女는 페미니스트들에게 非難을 받기도 했고, 俳優가 되려고 했을 때는 “할리우드에서 成功하려면 예쁨을 망가뜨려야 한다”는 助言을 받았다고 回顧합니다. 또 어느 인터뷰에서 로버트 볼라뇨의 小說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을 ‘예쁜 女子가 冊도 읽는다’는 式으로 報道된 것에 抗議한 적도 있습니다.

라타이코우스키의 몸을 두고 한 쪽에서는 끊임없이 性的 對象化를 하고, 다른 쪽에서는 當身의 그런 몸이 잘못됐다고 指摘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라타이코우스키는 ‘나의 몸’이라는 題目의 冊에서 自身은 누구의 對象도 아닌 나의 것이라고 털어 놓았고, 그것이 또 다른 여러 가지 話題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事實 우리 모두의 몸은 나의 것이지만 同時에 언제나 누군가에게 보여 지고 財團을 받는 對象일 수밖에 없다는 兩面性을 갖고 있습니다. 이 模糊함을 女性들은 特히나 더 많이 겪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韓國 社會에서도 이러한 問題에 對한 論議가 最近에서야 나오고 있는데요. 이미 100餘 年 전 ‘대상’으로만 머물기를 拒否하고 主體로 나선 한 女性에 對한 이야기를 오늘 그림으로 해보려고 합니다.

○ 파자마 차림의 비너스

只今으로부터 100年 前, 프랑스 파리의 한 女性 藝術家가 58살일 때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포인트는 主人公인 女性의 姿勢입니다. 寢臺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모습은 西洋 美術에서 女性 누드를 表現할 때 자주 使用됐던 포즈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4)를 비롯해 벨라스케즈의 ‘로커비 비너스’(1647~1651),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옷을 벗은 摩耶’(1800~1803),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1865年)에 이르기까지 美術史 속 女人像을 貫通하는 포즈라고 해도 過言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그림 속 女人은 포즈만 借用했지 나머지 코드는 모조리 뒤집혀져 있습니다. 于先 옷을 입고 있고, 그 옷도 마치 누구도 만나지 않을 ‘집순이’ 모드日 때의 服裝을 聯想케 합니다. 便安한 고무줄 바지에 캐미솔 차림이죠.

寢臺 위 이불도 깨끗하게 整頓된 것이 아니라 마치 자고 일어나서 아무렇게나 펼쳐 놓은 狀態 그대로 위에 앉은 듯한 모습입니다. 발치에는 冊 두 卷이 놓여져 있으며 女性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져 있습니다. 마치 ‘내가 말하는 女人像은 이런 거야!’라고 아주 剛하게 主張하는 것 같은 그림입니다.

그림 속 女性은 畫家의 自畫像으로도 推定된다고 하는데요. 100年 前 이 그림을 그린 畫家는 都大體 어떤 사람일까요?

○ 르누아르의 모델에서 藝術家로

主人公은 바로 오른쪽에서 춤을 추고 있는 女性, 수잔 발라동입니다. 허리를 꽉 조여 맨 핑크빛 드레스에 발그레한 볼, 그리고 수줍어하는 듯한 表情이 놀랍습니다. ‘푸른 房’의 비너스와는 正反對의 모습이죠? 畫家가 되기 前 발라동은 印象派 畫家들의 모델로 일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當時만 해도 女性이 畫家가 되는 것은 極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勿論 지난 篇에서 紹介한 베르트 모리조와 같은 畫家가 있었지만, 발라동은 上流層 出身이 아니라는 點에서 또 다릅니다. 모리조나 罵詈 카사트는 모두 中上流層 집안에서 태어나 自身의 家庭이나 周邊 人物의 모습을 그리곤 했습니다.

발라동은 몽마르트의 한 洗濯婦 未婚母의 딸로 태어나 가난한 幼年 時節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누군지 平生 알지 못했고, 11살 때부터 工場이나 帽子 攻防, 野菜 將帥, 웨이트리스 等 다양한 일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自尊感과 끼만큼은 하늘을 찔렀던 그女는 15살에 自身의 꿈이었던 서커스 團員이 됩니다.


몽마르트에서 曲藝師로 舞臺에 서면서 그女는 이곳을 드나들던 앙리 툴루즈 로트렉, 베르트 모리조를 만나게 됩니다. 特히 모리조를 보면서 自身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令監을 얻게 됩니다. 발라동은 藝術 敎育을 받지는 못했지만 9살 때부터 스스로 드로잉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曲藝師가 된 지 1年이 지나지 않아 줄타기를 하다 墜落해 負傷을 입은 그女는 더 以上 서커스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기에 그女는 正式 敎育도 받지 않았고, 또 캔버스를 살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擇한 職業이 바로 모델이었습니다.


1880年 처음 모델 일을 始作했을 때 그女는 如前히 15살이었습니다. 10年 동안 르누아르, 로트렉, 퓌非 드 샤반 等 다양한 作家들의 모델로 일하며 돈을 벌었죠. 特히 드가와는 이 때 깊은 親舊가 되어 그가 죽을 때까지 가까운 사이로 지냈습니다. 드가가 그린 많은 누드가 발라동 德分에 可能했다는 걸 저도 이番 글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또 발라동은 로트렉과도 暫時나마 戀人 關係를 맺었습니다. 畫家로서 발라동이 가진 才能을 처음 알아봐준 것도 로트렉이었습니다. 그는 自身의 作業室에 발라동이 그린 드로잉 3點을 걸어 놓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누가 그렸는지 맞춰보라”며 恒常 紹介를 했다고 합니다. 또 니체와 보들레르 冊을 발라동이 읽어보도록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모델일을 하며 그女는 그림을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우게 됩니다.

○ 나의 몸, 나의 選擇

이 그림은 위 르누아르 ‘敷地발에서 댄스’와 같은 時期 발라동이 自身을 그린 것입니다. 르누아르 그림 속 女子와 自畫像 속 얼굴이 完全히 다른 사람 같죠? 핏氣 없는 灰色調의 푸른빛에 굳게 다문 입, 그리고 正面으로 畵面을 凝視하는 얼굴. ‘모델일 때 내 모습은 眞짜 내가 아냐!’하고 抗議하는 듯한 그림입니다.

르누아르, 드가, 로트렉이 各各 그린 발라동의 모습을 比較해보는 것도 興味롭습니다. 로트렉은 그女를 한 때 사랑했으니 同等한 關係로 對한 것이 느껴지고요. 드가는 徹底히 모델로, 마치 그림 속 構圖의 하나로 보는 視線이 느껴집니다. 勿論 그림 밖에서 드가는 以後 발라동의 그림을 사주기도 하고, 다른 컬렉터를 連結해주며 畫家로서 支援을 해주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르누아르의 그림에서는 至極히 클리셰的인 女性의 모습이 드러나는데요. 實際로 르누아르는 女性의 社會 進出에 對해 宏壯히 시니컬한 反應을 보였었다고 합니다. 발라동이 그림을 그린다고 하자 르누아르는 自身의 親舊에게 쓴 便紙에서 “나는 作家, 辯護士, 政治를 한다고 하는 女子들이 怪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女子 畫家라는 건 멍청한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다양한 視線들에도 그女는 全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모리조, 카사트보다 自身의 實力이 훨씬 뛰어나다 생각했고 그런 理由로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도 拒否합니다. 1900年代부터 本格的인 作品 活動을 始作한 그女는 正말 率直하고 大膽하게 自身을 表現해갔습니다.

그女가 44살이던 1909年에는 23살 戀人 앙드레 위터와 自身이 나란히 서 있는 누드畫를 그리고 ‘아담과 이브’라는 題目으로 發表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죠. 또 어린 아들의 모습이나 平生 單짝이었던 엄마를 그림의 素材로 삼기도 했습니다. 論難의 中心에 서기를 꺼리지 않았던 그女에 對해 男子關係 等 다양한 理由로 作品 世界를 貶下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女가 死亡했을 때 日刊紙 르 피가로는 ‘畫家 모리스 우틸로의 엄마’라고 紹介했지 그女를 畫家라고 絶對 쓰지 않았다고 하니까요.

그렇지만 발라동은 全혀 神經 쓰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女는 언제나 率直하게 삶을 對하고 그것을 直視하며 記錄으로 남겼으며, 結局엔 作品이 남아 그女의 삶을 證言해주고 있기 때문이죠. 72歲 나이로 世上을 떠나기 直前, 발라동은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털어 놓았습니다.

“난 내가 信念을 갖는 것이라면 絶對 背信하지 않았고, 끝까지 抛棄하지 않았다.”


고개는 비스듬히 기울었지만 굵은 輪廓線으로 그어진 剛한 턱과 다문 입술, 그리고 거울 너머 正面을 똑바로 凝視하는 그女. 正말 숨길 것은 하나도 없다는 듯한 表情이죠. 100年 뒤 우리들에게 꼭 “이봐, 나도 그렇게 살았으니 너도 너의 몸뚱이로 堂堂하게 살아”하고 외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김민 記者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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