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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健熙 컬렉션’에 包含된 피카소와 戀人 ‘도라 마르’ 이야기 [김민의 그림이 있는 하루]|東亞日報

‘李健熙 컬렉션’에 包含된 피카소와 戀人 ‘도라 마르’ 이야기 [김민의 그림이 있는 하루]

  • 東亞日報
  • 入力 2021年 5月 16日 11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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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와 도라 마르, 1937년. 사진: 만 레이
피카소와 도라 마르, 1937年. 寫眞: 萬 레이


‘韓國에서의 虐殺’李 70年 만에 韓國에서 展示되고, ‘李健熙 컬렉션’의 國家 寄贈이 話題가 되면서 人氣 作家였던 피카소의 이름이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李健熙 컬렉션’에는 피카소의 陶瓷器 作品과 ‘도라 마르의 肖像’이 包含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도라 마르’는 바로 위 寫眞 오른쪽에 앉아 있는 女性의 이름입니다.

먼저 寫眞을 볼까요. 亦是 20世紀 有名 藝術家인 萬 레이가 찍어준 이 寫眞 속에서 피카소는 正面을 凝視하고 있습니다. 두툼한 손가락 사이엔 담배가 끼워져 있네요. 렌즈를 잡아 먹을 듯 뚫어져라 쳐다보는 모습은 熱情 넘치는 마초의 性格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오른쪽 女人은 심드렁한 듯 턱을 괴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네요. 1937年 當時 도라 마르는 피카소의 戀人이었습니다. 瞬間 捕捉된 그女의 모습은 戀人의 옆이지만 어딘가 不安하고 動搖하는 것 같은 雰圍氣네요. 1年 前 한 展示로 그女의 삶의 조각을 알게 된 저는 그 理由를 斟酌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해보려고 합니다.

■ 피카소의 그늘에 가려진 女子


피카소, 도라 마르의 초상, 1937년. 프랑스 피카소미술관 소장. 사진출처: Flickr/Gautier Poupeau
피카소, 도라 마르의 肖像, 1937年. 프랑스 피카소美術館 所長. 寫眞出處: Flickr/Gautier Poupeau




屬望받는 寫眞家였던 도라 마르는 28살이던 1935年에 映畫 撮影場에서 프로모션을 위한 스틸컷을 찍다가 피카소를 만납니다. 이 때 피카소는 마리-테레즈 월터와도 戀人 關係였죠. 그럼에도 唐突한 도라 마르의 態度에 반한 피카소는 그女와도 愛情 關係를 이어갑니다. 이 關係는 8年 間 持續되었습니다.

그 過程에서 피카소의 가장 有名한 그림 中 하나인 ‘우는 女子’가 誕生합니다. 이밖에 피카소는 도라 마르를 만나는 동안 그女의 肖像을 60餘點 그렸다고 해요. 마르는 피카소의 肖像에 對해 묻는 質問에 이렇게 答했다고 합니다.

“나에 對한 모든 肖像은 거짓이다. 그것은 피카소가 만들어낸 피카소의 모습이지, 單 한 點도 내 모습이 아니다.”

피카소, 우는 여인, 1937년,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 소장
피카소, 우는 女人, 1937年, 英國 테이트모던 美術館 所長


그림 속에서 마르는 苦痛받고 不安한 모습으로 자주 登場합니다. 마치 萬 레이가 찍은 寫眞 속 모습을 極大化한 것처럼 말이죠. 當時 스페인 內戰에 對해 많은 생각을 했던 피카소는, 戰爭 속 苦痛 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도라의 얼굴로 승화시키곤 했다고 합니다. 다만 이에 對해 道라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아 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女의 作品을 다룬 英國의 現代 美術館 테이트모던 回顧展을 昨年 初에 보고 저는 피카소의 戀人이자 모델인줄만 알았던 도라를 完全히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展示場에서 만난 그女는 大膽한 實驗을 할 줄 알았던 寫眞家이자, 社會에 關한 關心을 잃지 않았던 넓은 視野를 갖고 있었으며, 피카소와 헤어진 뒤에는 조용히 自身의 길을 찾아갔던 主體的인 女子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피카소라는 巨大한 그늘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 피카소에게 社會와 政治를 알려 준 女子


도라 마르, 무제(손-조개), 1934년. © ADAGP, Paris and DACS, London 2019
도라 마르, 無題(손-조개), 1934年. ⓒ ADAGP, Paris and DACS, London 2019


위 寫眞은 도라 마르의 1934年 作品입니다. 소라 껍데기에서 뻗어 나오는 매니큐어가 漆해진 손이 感覺的이죠. 구름과 빛이 휘몰아치는 背景과 모래 바닥까지. 미스터리한 雰圍氣가 물씬 풍기는 寫眞입니다.

이렇게 소라껍데기와 손처럼 서로 全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對象을 組合해서 낯선 效果를 만들어내는 것은 典型的인 超現實主義 藝術의 方法입니다. 只今은 合成 技術을 利用해 누구나 이것 저것 組合해 볼 수 있지만, 當時만해도 技術的인 部分에서나 槪念的인 側面에서도 새로운 試圖였습니다. 于先 카메라를 使用하게 된 것도 100年이 채 되지 않았던 時代였습니다.

게다가 프로이트의 ‘꿈의 分析’이 發刊된 것을 비롯해 ‘無意識’의 發見이 유럽 知識人들의 社會에 큰 衝擊을 주었던 時期이기도 합니다. 人間의 思考 속에 스스로 認識하지 못하는 部分이 있다는 것, 우리가 늘 理性과 論理에 依해 行動하는 것이 아니라 衝動과 本能에 左右된다는 發見은 큰 事件이었죠. 이 때 받은 衝擊과 靈感을 藝術로 昇華한 것이 超現實主義 藝術이고, 앙드레 브르통이나 살바도르 달리 같은 藝術家가 代表的이죠.

도라 亦是 파리에서 이들 藝術家와 어울리며 展示에도 參與하는 同等한 一員이었습니다. 萬 레이와 比較해도 遜色이 없는 그女의 寫眞 作品을 보면 그럴 수 있다고 斟酌해볼 수 있지요.

도라 마르, 무제(패션 사진), 1935년 경.
도라 마르, 無題(패션 寫眞), 1935年 頃.


道라는 商業 寫眞으로 轉向해 스튜디오를 차리고 돈을 벌었습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도 함께 工夫하며 알게 돼 平生 親舊로 지냈지요. 商業 寫眞에서도 果敢한 構圖나 技術的인 試圖를 통해 能力을 認定 받았습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完成되는 過程을 寫眞으로 記錄한 것도 바로 도라입니다. 프랑스 파리 피카소美術館의 큐레이터 에밀 부바르는 2018年 아트넷 인터뷰에서 “도라의 超現實主義的 寫眞 作品이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影響을 주었다”는 可能性도 提起했습니다.

展示場엔 이런 感覺的인 寫眞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超現實主義 寫眞 以前에는 길거리를 다니며 社會 問題를 記錄하는 性格의 寫眞도 남겼습니다. 1933年 스페인 카탈루냐 地方과 런던을 旅行한 道라는 그곳의 줄 지어 선 失業者나 貧民街의 아이들을 記錄으로 남깁니다.

도라 마르, 무제(배급품을 기다리는 파리 노동자들), 1934년 경.
도라 마르, 無題(配給品을 기다리는 파리 勞動者들), 1934年 警.


道라는 피카소와 만나기 前부터 파리 知性들과 交流하고, 社會的 이슈에도 活潑히 參與했습니다. 特히 이 때 유럽은 글로벌 大恐慌으로 苦痛받고 있었고, 이로 因해 파시즘의 亡靈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는데요. 1934年에는 파시즘에 反對하는 聲明 ‘Appel a la lutte’에 이름을 올렸고, 1935年에는 哲學者 조르주 바타유가 이끄는 反파시스트 그룹 ‘Contre-Attaque’에도 參與했습니다.

이런 도라를 만나면서 피카소도 스페인 內戰 問題를 비롯한 當代 政治的 이슈에 對한 關心을 더욱 高調 시켰습니다. 또 피카소에게 寫眞과 版畫를 結合하는 技術인 ‘클리셰 베르’를 알려준 것도 도라라고 합니다.

■ 度라는 왜 숨어들고 말았을까


1年 만에 다시 떠오른 이름 피카소와 도라, 特히 도라의 一生을 곰곰이 되새겨보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첫 番째 寫眞 속 얼굴처럼 그女에게 피카소와의 關係는 그닥 幸福한 事件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피카소와 訣別하고 8年 뒤, 한 電氣 作家와의 電話 通話에서 度라는 “나와 世上의 關係, 내 남은 삶의 關係는 내가 過去에 피카소를 만났다는 것과는 別個의 일”이라고 吐露했다고 합니다. 도라와 만날 때도 피카소는 이미 첫 番째 夫人 올가, 그리고 또 다른 戀人 마리-테레즈 월터와의 關係를 持續하고 있던 狀況이었죠.

어떤 글에서는 피카소가 도라가 그림을 그리려 하는 것을 慇懃히 妨害하거나, 自身이 그리는 큐비즘을 强要했다는 推測도 나오는데요. 道라는 正말로 피카소와 訣別한 뒤 自身만의 그림을 그리기 始作합니다. 그런데 그 그림들을 世上에 내놓지 않아 그女가 죽고 나서야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해요.

피카소를 지우고 싶어했던 度라는 왜 自身의 作品으로 더 活潑히 活動하지 않고, 마치 소라처럼 안으로만 파고 들었던 걸까. 自身의 빛나는 才能을 더 펼쳐 보이지 못했던 걸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愛情 關係는 當事者가 아닌 以上 함부로 推測할 수 없는 正말 複雜한 것이지만, 저는 果然 두 사람의 關係가 한쪽만 抑壓을 當하는 것이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只今은 女性이 主體的인 삶을 살 수 있는 時代가 되고 있지만, 100年 前에는 確然히 달랐을 겁니다. 어쩌면 도라의 마음 한 켠엔 피카소라는 큰 그늘에 기대고 싶은 마음도 자리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過去의 女子에게 男子란 自身을 保護해주는 울타리나 지붕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고요.

그러나 울타리 속 女子로만은 滿足할 수 없었던 깨인 女性이었던 度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비록 먼 곳을 바라보지만 結局 피카소의 곁을 떠나지는 못하는 萬 레이의 寫眞 같은 狀態가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그 理由는 女子가 혼자서는 커리어를 이어가는 것을 想像하기 어려웠던 社會的인 雰圍氣, 그리고 個人的인 理由 等 여러 가지가 複合的이겠지요.

도라 마르, 대화, 캔버스에 오일, 1937년.
도라 마르, 對話, 캔버스에 오일, 1937年.


結局 사람과 사람의 關係란 무엇일까라는 質問까지 해보게됩니다.

人間은 絶對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말에 저는 共感합니다. 모든 사람은 늘 마음 한 켠의 허전한 곳을 누군가가 채워줄 때 기쁨을 느낀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누군가가 채워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剛해질 수록 허전함이 더욱 커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스스로를 채우지 못하면, 永遠히 世上에 存在하지 않을 누군가를 위해 떠돌아 다니며 괴로워하는 狀況이 發生할 수도 있는거죠.

조금은 쓸쓸한 結末이지만,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나를 사랑해줄 수 없다”는 知人의 말이 떠오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懦弱한 人間이지만, 그것에 슬퍼하지 말고 오늘만큼은 혼자서 나의 內面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채워보자. 소라 껍데기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기 보다는 스스로를 사랑으로 채우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다짐해 봅니다.

參考한 資料
테이트( https://www.tate.org.uk/whats-on/tate-modern/exhibition/dora-maar )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Dora_Maar)

가디언( https://www.theguardian.com/artanddesign/2019/nov/15/dora-maar-picassos-weeping-woman )

파이낸셜타임스( https://www.ft.com/content/0ee21c42-05a6-11ea-9afa-d9e2401fa7ca )

아트넷( https://news.artnet.com/art-world/dora-maar-revealed-picassos-muse-guernica-show-1244849 )

김민 記者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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