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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다니던 ‘王勃’ 하형주, 올림픽 金보다 더 기뻤던 瞬間은…[이헌재의 人生홈런]|東亞日報

‘맨발’로 다니던 ‘王勃’ 하형주, 올림픽 金보다 더 기뻤던 瞬間은…[이헌재의 人生홈런]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4月 15日 12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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햐형주 國民體育振興公團 監査가 올初 열린 大賞經綸에서 時總字로 나섰다. 國民體育振興公團 提供

‘王勃’이란 別名으로 한 時代를 風靡했던 柔道 스타 하형주(62)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이뤘다. 22살의 나이에 1984年 美國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金메달을 땄고, 25살의 이른 나이에 大學敎授가 됐다. 母校 동아대에서 40年 가까이 學生들을 가르쳤고, 지난해부터는 國民體育振興公團의 監査로 일하고 있다.

中學校에 다닐 때까지 그의 꿈은 陸士에 進學해 軍人이 되는 것이었다. 運動 選手의 길로 접어들면서 抛棄해야 했던 꿈은 아들과 딸이 職業軍人이 돼 代身 이뤘다. 特히 딸 하늘 氏는 陸士를 卒業한 뒤 ‘韓美聯合司團’에서 만난 美 陸軍 將校 마일스 가브리엘슨 氏와 結婚했다. 歷代 1號 韓美 現役 將校 커플이었다.

하형주가 1984년 LA 올림픽에서 상대 선수를 제압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하형주가 1984年 LA 올림픽에서 相對 選手를 制壓하고 있다. 東亞日報 DB

하지만 그가 꼽은 人生 最高의 瞬間은 올림픽 金메달도, 大學敎授도 아니었다. 中學校 때 큰 누나에게서 신발 膳物을 받았을 때가 가장 기뻤던 瞬間이었다.

慶南 晉州 出身인 그는 어릴 때부터 그는 唯獨 발이 컸다. 現在 310mm짜리 신발을 신는 그는 대아중에 다닐 때부터 ‘王勃’로 有名했다. 當時 學生들은 室內에서 學生化를 신어야 했는데 問題는 그의 발에 맞는 신발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온 學校를 맨발로 다녔다. 運動靴도 접어서 신어야 했기에 親舊들과 공을 찰 때도 맨발로 찼다. 先導不渡 그만은 例外로 봐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釜山 國際市場을 다녀온 10살 위 큰 누나가 美軍들이 신던 稅務 運動靴를 사 왔다. 하형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봤다. 얼마나 좋았던지 한동안 밥 먹을 때도 運動靴를 안고 먹고, 잘 때도 안고 잤다”며 “큰 누나는 내게는 하늘과 같은 存在였다. 運動을 할 때도 메달에 對한 欲心보다는 올바른 精神과 價値觀을 심어주던 분이었다”고 말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 때 북한 계순희(왼쪽)과 함께 공동 성화 점화자로 나선 하형주.   동아일보 DB
2002年 釜山 아시아競技 때 北韓 계순희(왼쪽)과 함께 共同 聖火 點火者로 나선 하형주. 東亞日報 DB

只今은 想像하기 어렵지만 中學生 때까지 그는 발은 컸지만 빼빼 마른 體型이었다고 한다. 몸이 커지기 始作한 건 中學校 3學年 말 씨름을 始作하면서부터다. 晋州商高에 進學해 씨름을 本格的으로 익히면서 實力이 부쩍 늘었다. 晋州는 예전부터 씨름으로 有名했는데 故 최욱진 장사(1960~2011年)가 그의 晋州上告 動機였다. 그는 “動機들에 비해 늦게 씨름을 始作했지만 몇 個月 만에 다 이기게 됐다. 單 한 名 욱津이만 꺾지 못했다. 只今 생각해도 욱津이는 正말 뛰어난 장사였다”고 回想했다.

몇 달 뒤 그는 부산체고로 轉學해 誘導로 轉向한다. “已往 運動을 할 거라면 올림픽 種目을 해보고 싶다”는 게 理由였다. 씨름 技術을 結合한 誘導로 그는 單숨에 誘導界의 强者로 올라섰다. 2學年 때부터 全國大會에서 入賞을 하더니 3學年 때는 그를 相對할 選手가 없었다. 萬若 1980年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지 않았다면 그는 1984年이 아닌 1980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全國體典 레슬링 種目에 出戰한 적도 있다. 當時 부산체고는 柔道部와 레슬링部가 같이 運動을 했는데 레슬링 高重量 種目에 選手가 없다는 理由로 덩치가 큰 그가 代身 出戰하게 된 것이다. 簡單한 規則을 익히고 出戰한 全國體典 레슬링에서 그는 그레코로만과 自由型 두 種目 모두 金메달을 목에 걸었다.

‘유도 전설’ 하형주 국민체육진흥공단 감사가 편백나무를 상대로 밭다리 후리기를 하고 있다. 선수 시절 연습 상대를 찾기 힘들었던 그는 구덕산 편백나무를  연습 파트너로 삼았다.  동아일보 DB
‘柔道 傳說’ 하형주 國民體育振興公團 監査가 扁柏나무를 相對로 밭다리 후리기를 하고 있다. 選手 時節 練習 相對를 찾기 힘들었던 그는 구덕산 扁柏나무를 練習 파트너로 삼았다. 東亞日報 DB
큰 덩치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는 동아대에 다닐 때에도 있다. 함께 練習할 파트너를 찾기 힘들었던 그는 學校 뒤便 구덕산에 있는 扁柏나무를 練習 파트너로 삼았다. 하루 1000番 以上 扁柏나무를 相對로 밭다리 후리기 技術을 硏磨했다.

그런데 어느 날 大學 總長室로 抗議 電話가 걸려 왔더란다. 隣近 寺刹의 스님이 “덩치가 散漫한 어떤 學生이 나무를 못살게 군다”는 것이었다. 總長은 스님에게 事情을 說明했고, 하형주를 불러서는 오히려 用돈을 줬다. 그는 나중에 태릉選手村에 들어와서도 나무에 대고 밭다리 후리기 練習을 이어갔다.

1984年 LA 올림픽에서 그가 金메달을 딴 것은 이 모든 過程이 모두 잘 어우러진 結果다. 特히 運動을 始作할 때 배웠던 씨름 技術이 決定的이었다. LA 올림픽에서 가장 큰 고비는 8强에서 만난 當時 世界 랭킹 1位 미하라 마사토(日本)과의 對決이었다. 하형주는 씨름에서 익힌 들어메치기 技術을 應用해 미하라를 매트 위에 내리 꽂았다. ‘한판’李 明白했지만 審判陣은 ‘折半’을 宣言했다. 그러자 하형주는 이番엔 反對 方向으로 다시 한 番 들어메치기를 성공시켰다. 또 다시 折半 判定을 받았지만 勝利하는 데는 全혀 支障이 없었다.

1984년 LA 올림픽을 마치고 태극기를 들고 금의환향한 하형주의 모습.   동아일보 DB
1984年 LA 올림픽을 마치고 太極旗를 들고 錦衣還鄕한 하형주의 모습. 東亞日報 DB

올림픽 金메달을 따고 錦衣還鄕한 그를 向한 誘惑은 엄청났다. LA 올림픽 選手團 機首를 맡았을 程度로 代表팀의 얼굴이었던 그가 金메달까지 땄으니 그를 데려가려는 實業팀度 많았고, 廣告를 찍자는 會社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選擇한 것은 大學院 進學이었다. 그는 “동아대에 入學한 瞬間부터 漠然히 敎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 誘惑이 있었지만 全혀 흔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金메달리스트인 그가 1984年 大學院 助敎로 들어가서 받은 첫 月給 明細書엔 13萬 5000원이 찍혀 있었다. 그렇게 準備한 끝에 그는 25살의 어린 나이에 ‘敎授님’이 됐다.

敎授의 꿈은 이뤘지만 그에게 如前히 배움이 고팠다. 막상 講壇에 섰지만 學生들에게 가르치기엔 不足하다는 것을 切實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誘導라면 自身 있었지만 理論이나 다른 種目을 가르치기엔 力量이 不足했다.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면서 月給을 받는 게 너무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1990年代에 成均館大 博士課程에 入學해 스포츠心理學을 다시 배웠다. 釜山 동아대에서 學生들을 가르치고, 서울 성균관대에 와서서 學生으로 工夫를 하는 나날이 繼續됐다. 3年 半 만에 博士 學位를 딴 그는 “當時 3時間을 가르치려면 사흘 밤낮을 準備해야 했다”며 “오랜 時間을 들여 꾸준히 하다 보니 이제는 3時間 授業 程度는 가볍게 할 程度가 됐다”며 웃었다.

하형주 國民體育振興公團 監査가 自身의 執務室에서 포즈를 取했다. 이헌재 記者 uni@donga.com

學生들을 指導하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韓國 體育을 위해 奉仕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는 “國家로부터 많은 恩惠를 받았으니 언젠가는 韓國 體育을 위해 奉仕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며 “選手 時節 經驗을 살려 鎭川選手村腸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다 機會가 닿아 國民體育振興公團 監査로 일하게 됐다. 그는 “온 國民이 體育을 즐기면서 健康한 삶, 幸福한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한다”며 “1988年 서울올림픽을 통해 태어난 組織인 만큼 서울 올림픽 精神에 符合되는 政策들을 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釜山에 살 때 그는 가벼운 登山으로 健康을 지켰다. 釜山에는 구덕산을 비롯해 금정산 等 그리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山들이 많다. 그는 “大學에 다닐 때 扁柏나무와 씨름을 하던 구덕산 바로 아래 집이 있었다”며 “틈만 나면 山을 올랐다. 親舊들도 周邊에 많이 있어서 함께 山을 올랐다가 下山한 뒤 막걸리도 한 盞씩 마시곤 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는 職場이 있는 서울 방이동 올림픽公園 近處에 오피스텔을 얻었다. 德分에 隨時로 올림픽公園 이곳저곳을 걷고 또 걷는다. 點心 食事 後 20~30分 散策도 하고, 아침 저녁으로 혼자 걷기도 한다. 그는 “올림픽公園은 世界 어느 나라를 가도 보기 힘든 훌륭한 公園”이라며 “이곳에 스토리텔링을 입히고 흥미로운 國際 大會까지 開催한다면 더 世界的인 名品 公園으로 發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記者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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