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者는 ‘문화일보’의 連載小說 ‘江岸男子’를 읽지 않는다.
예전에 몇 番 보고는 그보다 더 읽어야 할 게 世上엔 널렸다고 깨달아서다. 이는 勿論 오로지 記者의 個人的 見解다.
靑瓦臺와 國政弘報處가 ‘江岸男子’의 煽情性을 理由로 문화일보를 무더기 節독한 것을 두고, 一角에선 “論調가 거슬리는 新聞에 對한 政權의 新種 言論彈壓”이라고 批判한다. 그 對蹠點엔 “綜合日刊紙가 煽情的인 小說을 連載하는 게 合當한가”라는 逆批判도 存在한다.
‘江岸男子’는 分明 煽情性이 짙다. 또한 절독 決定은 購讀者의 權利다. 그런데 말이다. 왜 決코 적지 않은 數의 사람들이 5年 넘도록 그 小說을 耽讀하는 걸까? 몽땅 ‘淫亂書生(淫亂書生)’이어서일까? 무엇 하나 내 마음 같지 않은 世上, 아주 暫時나마 鄙陋한 現實을 잊은 채 反文化的인 ‘판타지 픽션’에 빠지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江岸男子’의 콘텐츠는 絢爛하다. 主人公은 ‘조철봉’이지만 登場人物은 많다. 다양한 캐릭터 德分에 얘깃거리도 豐富하다. 그래서 感歎詞가 濫發되는 뻔한 스토리임에도 ‘낯가죽이 두껍고 뻔뻔스러운’강안남자(强顔男子)는 意外로 新鮮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參與政府의 ‘논픽션’인 ‘盧(盧)의 男子’들은 어떤가. ‘코드 人事’ ‘落下傘 人事’ ‘報恩 人事’ ‘回轉門 人士’…. 每番 새로울 게 없는 人物들의 單調로운 配列이다. 이番에 KBS 社長職 連任이 確實視된 정연주 前 社長을 보라! 그런데도 이 논픽션의 讀者들은 절독할 權利가 없다. 이것이 픽션과 논픽션의 差異인가?
이제야 週末 都心의 숨筒이 좀 트이는가 했더니
그새 原狀復歸다. 11月6日, 各其 12日과 25日로 豫定된 민주노총과 韓國勞總의 서울 都心 大規模 集會 不許 方針을 밝혔던 警察廳이 民主勞總 集會(全國勞動者大會)를 事實上 許容했다. 민주노총이 集會 場所를 光化門 一帶에서 서울廣場으로 옮겨 재신고하자, 警察은 이에 對해 아무런 措置도 取하지 않은 것이다.
集會 參加者들의 거리行進이 深刻한 交通不便을 招來하므로 都心 集會를 制限하겠다는 當初의 趣旨는 어디로 갔는가?
憲法上 保障된 集會·結社의 自由는 重要하다. 하지만 集會와 無關한 個個人의 ‘幸福追求權’도 그에 못지않게 尊重돼야 한다. 오죽했으면 11月8日 어느 市民은 都心 交通을 막은 全國貧民聯合의 群衆과 다투다가 車를 몰고 突進했겠는가. 通行券, 營業權, 騷音에 따른 環境權을 侵害받아야 하는 善意(善意)의 市民들이 이젠 一齊히 클랙슨을 울리는 示威라도 現場에서 急造해야 할 판이다. 警察의 ‘不發彈’ 때문에 이래저래 市民들만 혼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