寒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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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戶
韓濩
朝鮮의 京畿道 加平郡守
任期 1600年 2月 29日 ~ 1604年 2月 29日
君主 朝鮮 宣祖 이연

朝鮮의 景氣도 흡곡縣令
任期 1604年 2月 29日 ~ 1604年 3月 18日
君主 朝鮮 宣祖 이연

이름
別名 者 경홍 號 石峯
身上情報
出生日 1543年 11月 15日
朝鮮 京畿道 開城府
出生地 朝鮮 京畿道 開城府
死亡日 1605年 7月 1日 (享年 63歲)
死亡地 朝鮮 京畿道 加平
國籍 朝鮮
學歷 1567年 過去(進士試)에 及第
經歷 書藝家 兼 外交官, 詩人
正當 無所屬
父母 한언공(簿), 백인당 紅酒 白氏 否認(某)
配偶者 江陵 崔氏 夫人
子女 長男 한민정(韓敏政)
親姻戚 祖父 한세관(韓世寬)

寒戶 (韓濩, 1543年 11月 15日 ~ 1605年 7月 1日 )는 朝鮮 中期의 文臣· 書藝家 [1] , 詩人이다. 谷山 郡守 한대기(韓大基)의 玄孫이자 한세관(韓世寬)의 孫子이며, 學者 한언공(韓彦恭)의 아들이며, 한민정(韓敏政)의 아버지이다. [2] 최립 과는 姻戚 關係에 있다. [3] 오준 의 書藝 스승이다. [4] 신희남(愼喜男), 靑松 성수침 (聽松 成守琛), 휴암 백인걸 (休庵 白仁傑)의 文人이다.

主要 履歷 [ 編輯 ]

本貫은 安邊 (安邊) 或은 三火(三和), 는 경홍(景洪), 는 石峯(石峯)·廳舍(淸沙)이다. 後世에 書藝의 名人이라 불렸으며, 明나라의 名筆家 駐志向 (朱之香)은 韓濩를 가리켜 “ 王羲之 (王羲之) 및 顔眞卿 (顔眞卿)과 優劣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라고 比喩할 程度로 글 솜씨가 뛰어났다고 傳해진다.

1567年 (明宗 22) 25歲 때 式年科 進士試(進士試)에 3等으로 合格하고 官職에 올라 瓦書別第, 司憲府 監察, 好調 , 刑曹 , 共助 正郞 等을 歷任했다. 그는 明나라 에 使臣이 派遣될 때 隨行員으로 明나라에 다녀왔으며, 明나라에서 使臣이 派遣될 때에도 隨行員으로 明나라 使臣을 接見했다. 1605年 4月 16日 宣撫 原從功臣 (宣武原從功臣) 1等에 錄勳되고, 같은 날 호성 原從功臣 (扈聖原從功臣) 1等에 錄勳되었으며, 事後 增 戶曹參議에 追贈되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寒戶는 1543年 11月 15日 京畿道 開城府 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한언공이고 어머니는 백인당(白忍堂) 白氏(白氏)이며, 할아버지는 兵曹正郞 한세관이다. [5] 그가 태어나자 한 占術家가 말하기를 玉토끼가 東方에 태어났으니, 洛陽(洛陽)의 종이 價格이 높아지겠다.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이름날 것이다(玉?生東, 高洛陽之紙價)라는 豫言을 했다 한다.

아버지는 生前에 官職이 없었고 事後에 韓石峯이 原從功臣 에 錄勳된 功勞로 好調 參判 義禁府 冬至使 追贈 되었다. 3歲에 아버지를 여의고 祖父에게 글을 배웠으나 15歲에 祖父까지 여의었다. 以後 집안의 살림이 매우 가난하였다. 磻溪 유형원 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依하면 寒戶는 어려서 꿈에 꿈에 王羲之 (王羲之)에게서 글씨를 膳物받는 꿈을 꾸었다 한다. 韓濩의 墓碑文에 依하면 꿈에 王羲之 가 나타나 그에게 筆法을 傳授해주는 꿈을 두 番 꾸었다 한다. 그 뒤로 글씨 練習을 繼續 하였다. 12歲에 靈界 신희남 (瀯溪 愼喜男)의 門下에 들어가 글을 배웠다. [6]

나중에 신희남 은 韓濩를 自身의 스승 靑松 성수침 (聽松 成守琛), 휴암 백인걸 (休庵 白仁傑)에게 推薦, 성수침 의 門下와 백인걸 의 門下에 出入하며 20歲까지 글과 性理學 學問을 배웠다.

그는 姻戚인 최립(崔?)과 가까이 지냈는데, 최립의 文集 簡易集에는 寒戶와 주고받은 글, 便紙, 詩 等이 一部 실려 있다. 그는 사람이 重厚하고 술을 잘 마셨다. 이정귀 에 依하면 寒戶는 술을 마셨다 하면 도도한 酒興(酒興)에 겨워 自適하며 詩를 읊고 글씨를 쓰느라 時間 가는 줄 몰랐다 한다. 그는 性品이 너그럽고 남을 猜忌하는 마음이 적어 비록 남의 잘잘못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自身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드러운 말로 남의 脾胃를 맞추지 않았다 한다.

官僚 生活 [ 編輯 ]

1567年 (明宗 22) 25歲 때 式年科 進士試(進士試)에 3等으로 合格하였다. 그 後 그는 1583年 (宣祖 16) 瓦書別第(瓦署別提), 司憲府 監察(司憲府監察)을 歷任하고, 通禮院 仁義(引儀), 司圃署 사포(司圃), 北部 사도(北部司?), 司宰監 主婦, 司憲府 監察(監察), 漢城府 判官, 好調(戶曹)ㆍ刑曹(刑曹)ㆍ共助(工曹)의 正郞(正郞), 宗親府 全部(典簿), 贊意(贊儀) 等을 歷任했다. 그는 글씨를 잘 쓴다 하여 미암 유희춘 의 推薦을 받기도 했다.

1572年 (宣祖 5年) 明나라 에 派遣되는 遠接使(遠接使) 林塘(林塘) 정유길 (鄭惟吉)의 隨行員으로 明나라 에 다녀왔다.

1581年 州廳舍의 隨行員으로 明나라 에 다녀왔으며 歸國 後 1582年 (宣祖 15年) 栗谷 李珥 明나라 에 使臣으로 다녀올 때 다시 隨行員으로 選拔되어 明나라 年庚 을 다녀왔다.

1588年 主簿(主簿)를 지냈다. 1591年 朝鮮 을 訪問한 明나라 使臣 遠接使의 四子管(寫字官)이 되어 이들을 接見했다. 1591年 광국 原從功臣 에 錄勳되었다. 1592年 (宣祖 25年) 壬辰倭亂 때는 宣祖 의 魚價가 義州 播遷 할 때 遂行하였다. 이때 그는 四輔로 王의 行在所(行在所)에 가서 文書關係의 일을 맡았으며, 그해 8月 司憲府 監察이 되었다. 正郞으로 在職 中 1593年 11月 10日 明나라 에 奏請使로 派遣되는 최립 의 隨行員이 되어 明나라 年庚 을 訪問, 이듬해 初 歸國하였다. 1599年 (宣祖 32年) 薦擧로 世子翊衛司 死語(司禦)에 除授되었다. 以後 加平郡守(加平君守)가 되었다.

寒戶는 四子管(寫字官)으로서 國家의 主要 文書 및 外交 文書를 도맡아 作成하며 지냈는데, 그 동안 使臣을 따라 몇 次例 明나라 에 다녀왔다. 使臣을 따라 明나라에 갈 때마다 寒戶는 連席이 벌어진 자리에서 特有의 精巧한 筆法으로 글씨를 써서 東方 最高의 名筆로 아낌 없는 稱頌을 들었으며, 明나라의 여러 高位 官僚들로부터 種種 王羲之 와 比較하는 評判을 들었다. 또한 그는 共助 刑曹 의 懸板, 大成殿(大成殿)의 版額을 쓰기도 했다.

宣祖 는 한號가 쓴 글씨를 恒常 壁에 걸어두고 鑑賞하였으며, 壬辰倭亂과 丁酉再亂 때 朝鮮을 도우러 왔던 明나라 除毒 李如松 (李如松)· 魔鬼 (麻貴) 等도 寒戶에게 親筆을 付託하여 얻어 가지고 갔다고 傳해진다.

生涯 後半 [ 編輯 ]

1601年 此亦(差役)과 稅金 徵收를 잘 處理하지 못해 司憲府 의 彈劾을 받았으나, 宣祖 임금이 추고하고 撫摩시켰다. 1601年 明나라 冬至使 가 派遣될 때, 書狀官 이정귀 의 隨行員으로 年庚 에 다녀왔다. 歸國 後 흡곡縣令(谷縣縣令)으로 赴任했으며, 1604年 功臣 錄券(錄券)을 筆師할 때 漢城府 로 召喚 錄券 必死를 맡았으나, 싫어하는 氣色을 드러내고 故意로 글씨를 잘못썼다 하여 司憲府 의 彈劾을 받고 罷職되었다. 그해 11月 尊崇圖鑑 書寫官(尊崇都監書寫官)이 되어 尊崇 도감(尊崇都監)의 글씨를 筆寫한 功勞로 아마(어린 말) 1疋을 膳物로 받았다.

1605年 4月 16日 宣撫 原從功臣 (宣武原從功臣) 1等에 錄勳되고, 같은 날 호성 原從功臣 (扈聖原從功臣) 1等에 錄勳되었다. 1605年 7月 1日 에 死亡하였다.

事後 [ 編輯 ]

한便 그의 글씨를 탐내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덕형 (李德泂)의 隨筆集 《竹槍韓華(竹窓閑話)》에 依하면 그의 아들, 兄弟 中 그의 筆跡을 가진 者가 있으면 他人에게 빼앗겼다 한다.

原從功臣에 책록되어 事後 贈職 으로 好調 參議 (戶曹參議)에 追贈 되었다. 黃海道 金川郡 안신리(現, 黃海北道 兎山郡 석봉리) 席鳳山 해좌院에 埋葬되었다. 墓碑文은 月沙 李廷龜(李廷龜)가 짓고, 글씨는 이진검(李眞儉)李 썼는데 現在 存在하는 碑石은 1716年 (肅宗 42年)에 세워진 것이며 6代孫 寒柝의 글씨로 썼다.

일화 [ 編輯 ]

어려서부터 스스로 붓글씨를 익혔으며, 타고난 天才에다 피나는 修鍊을 쌓았으므로 해·행·진·초(楷行眞草)의 各體가 모두 妙境에 이르렀다. 그는 돈이 없어서 書堂을 다니기는커녕 먹과 종이도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缸아리나 돌 위에 손에 물을 찍어서 글씨 練習을 하였으며, 每日같이 꾸준히 練習하자 글씨를 쓰는 솜씨가 차츰 나아지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稱讚을 받았다. 이에 그 어머니는 韓濩를 有名한 절로 들여보내 工夫를 하게 하였는데, 韓濩의 스승인 僧侶는 韓濩를 가르치면서 날이 갈수록 實力이 늘어가는 그의 글 솜씨에 感歎해 마지 않았다.

절에 들어가 工夫를 한 지 4年 後, 어느 날 韓호는 어머니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밤에 몰래 절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찾아왔다. 돌아와서 이미 工夫를 많이 해 더는 배울 것이 없다고 하자 어머니는 韓濩를 불을 끈 어두운 房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自身은 칼로 떡을 썰고 寒戶는 글씨를 붓으로 쓰게 하여 둘의 솜씨를 比較해 보자고 하였다. 불을 켜고 보니 어머니가 썬 떡은 크기나 두께가 모두 똑같아 보기가 좋았는데, 한號가 쓴 글씨는 서로 크기가 제各各이고 模樣이 비뚤비뚤하여 보기가 凶했다. 이에 어머니는 韓濩를 크게 꾸짖으며 自身의 떡처럼 눈을 감고도 글씨를 고르게 쓸 수 있게 되기 前까지는 집에 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嚴命을 하여 韓濩를 다시 돌려보내 工夫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傳해 내려져 오고 있다.

石峯 書體의 特徵 및 評價 [ 編輯 ]

韓濩의 蒸溜餘張書帖

寒戶는 王羲之와 顔眞卿의 筆法을 익혔으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繼續 뛰어난 評筆家들의 筆法을 硏究하여 楷書, 行書, 草書 等에 모두 뛰어나게 되었다. 石峯 書體의 特徵은 그가 조송설(趙松雪)體를 쓰면서도 自己 獨特한 체풍(體風)을 세운 데 있다. 그렇게 寒戶는 그때까지 中國의 書體와 西風을 模倣하던 風潮를 깨뜨리고 獨創的인 境地를 開拓하여 石棒類의 豪快하고 强健한 西風을 만들어냈다.

嚴誅(?州) 王世貞 (王世貞)은 〈筆談(筆談)〉에서 石蜂의 글씨를 가리켜 “성난 獅子가 바위를 갉아내고, 목마른 千里馬가 內로 달리는 것같이 힘차다.”라고 했으며, 明나라 한림 住持番 (朱之番)은 “石蜂의 글씨는 능히 왕우군(王右軍)·顔眞卿(顔眞卿)과 어깨를 겨눌 만하다.”라고 하였다.

宣祖 도 그의 대자(大字)를 보고 “氣(奇)하고 腸(壯))하기 한량없는 글씨”라고 讚歎하면서 中士(中使)를 보내어 그 집에 宴會를 베풀었다. 이어 宣祖는 한壁(閑僻)韓 고을 郡守에 임명하면서 “筆法을 後世에 傳하게 하고자 하니 권태로울 때는 구태여 쓰지 마라. 게을리度 말고 서둘지도 마라.”라고 타일렀으며, 宣祖 親筆로 〈醉裡乾坤 筆奪造化(取利乾坤 筆脫調和)〉의 8字를 써 주었다.

그는 안평대군 (安平大君)· 金九 (金絿)· 양사언 (楊士彦)과 함께 朝鮮 初期의 4代 徐가(四大書家)로 꼽힌다. 또한 韓濩의 글씨는 現在까지 傳해지는 親筆 眞本이 거의 없으나 석봉서법이라든가 石峯千字文과 같은 冊이 某刊本으로 傳해지고 있어 그의 痕跡들 더듬어 보게 한다. 그러나 그의 글씨로 碑文이 많이 남아 있어 拓本으로 流行하고 있다.

作詩(作詩)에 能한 차천로 , 作文에 能한 최립 과 함께 松都三絶 로 불린다.

家族 關係 [ 編輯 ]

聯關人物 [ 編輯 ]

關聯 作品 [ 編輯 ]

關聯 文化財 [ 編輯 ]

各州 [ 編輯 ]

  1. 寒戶 - 韓國學中央硏究院
  2. 이정구, 《月沙集》 卷47, 한 石峯 墓碣銘
  3. 최립, 《簡易集》 卷3, 한 경홍 書帖 序文 參照.
  4. 오광운, 《藥山萬古》 卷18, 高祖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禮曹判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五衛都?府都?管世子左賓客府君墓誌銘
  5. 松都三絶의 한名인 간이당 최립 은 簡易集에 自身의 고조인 최盧哥 글씨를 잘써서 折衷 上護軍에 該當하는 祿食을 받았고, 足組人 職强攻 富者와 自身의 아버지 최자羊이 過去試驗場에서 글씨가 뛰어나다는 稱頌이 藉藉했는데 寒戶가 職强攻의 外孫子로 外家의 필제를 이어받았다고 記錄했다.
  6. 김종후, 《본암집》 卷7, 江原道觀察使愼公墓碣銘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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