成俔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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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俔

成俔 (成俔, 1439年 1504年 2月 4日 ( 陰曆 1月 19日 [1] )/ 1月 25日 ( 陰曆 1月 9日 [2] ))은 朝鮮 前期의 代表的인 官僚 文人이다. 本貫은 昌寧(昌寧)으로 知中樞府事(知中樞府事) 廉兆(念祖)의 셋째 아들이다. 字는 경숙(磬叔), 號는 용재(?齋)·虛白堂(虛白堂)·浮休子(浮休子)·국오(菊塢), 諡號는 門大(文戴)다.

1462年(世祖 8年) 式年文科(式年文科)에, 1466年 拔英試(拔英試)에 及第해 博士(博士)로 登用되었다. 이어 史錄(司錄) 等을 거쳐 1468年 藝文館修撰(藝文館修撰)을 지냈다. 맏兄 임(任)을 따라 明나라 使行(使行) 때 지은 紀行詩를 整理해 ≪觀光錄(觀光錄)≫으로 엮었다. 1475年 다시 한명회 (韓明澮)를 따라 明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文科重試(文科重試)에 及第, 大司諫 等을 지냈다. 1485年 千秋使(千秋使)로 明나라에 다녀와 刑曹參判 等을 거쳐, 平安道觀察使를 지냈다. 平安道觀察使로 있을 때 明나라 使臣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이 왔는데 이들과 詩를 주고받아 그들을 歎服하게 했다. 이어 同知中樞府事(同知中樞府事)가 되어 謝恩使(謝恩使)로 明나라에 다녀와 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가 禮曹判書에 올랐다.

燕山君이 卽位하자 工曹判書로 大提學(大提學)을 兼任했다. 죽은 지 數個月 後 甲子士禍 (甲子士禍)가 일어나 剖棺斬屍 (剖棺斬屍)當했다. 뒤에 身元(伸寃)되고, 淸白吏(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特히 音律(音律)에도 밝아 掌樂院製造(掌樂院提調)를 겸하고 유자광(柳子光) 等과 함께 ≪ 樂學軌範 ≫을 編纂해 音樂을 集大成했다. 뿐만 아니라 王命으로 高麗歌謠 <雙花店(雙花店)>, <履霜曲(履霜曲)>, <북전(北殿)>을 改刪(改刪)했다. 代表 著述인 ≪ 慵齋叢話 ≫는 朝鮮 初期의 政治·社會·文化·制度·風俗을 硏究하는 데 重要한 資料가 된다. 이 밖에 ≪ 허백당집 ≫, ≪風衙祿≫, ≪浮休子 談論≫, ≪注意悖說(奏議稗說)≫, ≪金囊行跡(錦囊行跡)≫, ≪상유毘藍(桑楡備覽)≫, ≪風瘙軌範≫, ≪經綸大櫃(經綸大軌)≫, ≪太平通載(太平通載)≫ 等 많은 著述이 있다.

朝鮮 正祖 의 後宮 의빈 姓氏 의 11代 祖父이다.

各州 [ 編輯 ]

  1. 燕山君日記, 燕山君 10年(1504) 1月 19日(紳士) 4番째 記事
  2. 김안국, 「虛白堂先生 城門對共 行長」(『허백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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