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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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립
朝鮮 의 文人

이름
別名 字는 立地(立之), 號는 肝이(簡易)·동고(東皐)
身上情報
出生日 1539年 5月 20日 ( 陰曆 5月 3日 )
出生地 朝鮮 京畿道 開城
死亡日 1612年 8月 9日 ( 陰曆 7月 13日 )
死亡地 朝鮮
國籍 朝鮮
學歷 明宗 16年 式年文科 壯元
父母 眞사 최자양/霧淞尹氏
配偶者 瘞安李氏/計杯 한산우氏
子女 최동망
職業 政治가,문인
宗敎 儒敎 ( 性理學 )

최립 (崔?, 1539年 5月 30日 ( 陰曆 5月 3日 ) [1] ~ 1612年 8月 7日 ( 陰曆 7月 11日 ) [2] )은 朝鮮時代 中期의 文人 兼 文身이다. 는 立地(立之), 는 肝이(簡易)·동고(東皐), 本館 通川 (通川) [1] . 栗谷 李珥 等과 함께 宣祖 때의 8代 名文章家로 꼽히며, 外交文書의 代價로, 名聲은 中國에까지 알려졌다. 黨色으로는 西人 이며, 《東醫寶鑑》을 著述한 許浚 [3] 과 名筆로 알려진 石峯 韓호 [4] 와는 切親한 사이였다.

尤庵 송시열 의 아버지 수옹 송갑조 는 그의 文人이었다. 栗谷 李珥 의 文人이다.

生涯 [ 編輯 ]

幼年期 [ 編輯 ]

1539年(中宗34)開城에서 父親인 眞사 최자양의 아들로 出生하였다. 그의 8代祖는 高麗末 朝鮮初의 名匠 최운해 이고, 世宗大王 時代에 4軍 6陣 國境을 開拓한 최윤덕 將相의 後孫이다. 5代祖 [5] 최로 는 名筆로 알려졌고, 折衷上護軍으로 端宗 忠臣團에 配享된 人物이다. 최립은 붓을 잡을 만한 나이때부터 글씨를 쓰고 詩를 지었다고 한다. 當代의 大學者 李珥 의 門人으로 學問의 造詣를 넓혔으며, 1555年 (明宗 10年)에 進士試 에 合格해서 眞사 가 되었다.

入潮 [ 編輯 ]

1561年 (明宗 16年)에는 式年文科 에 壯元及第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詩文과 學識으로 當代 여러 文士들의 稱頌을 얻었으나, 當代의 선비들을 認定하지 않는 態度를 指摘 받기도했다.

壯元及第한 後 長淵縣監을 거쳐, 1571年 (宣祖 5年)에는 甕津縣令이 되었고, 1576年 (宣祖 10年)에는 載寧郡數에 任命되었다. 1577年 (宣祖 11年)에 宗系辨誣를 위한 州廳舍(奏請使)의 質正官(質正官) 資格으로 나라에 다녀왔다. 名에 다녀온 뒤 다시 載寧郡數에 任職하였다. 이때 海州에 隱居 中이던 李珥 (李珥)와 交遊했다.

1581年 (宣祖 14年)에 黃海道 載寧郡數에 在任 中, 飢饉으로 괴로워하던 百姓을 救濟하는 데 힘써 宣祖에게서 表裏(賃金이 臣下에게 내린 옷의 겉감과 안찝)를 下賜받았다. 같은 해에 다시 州廳舍 김계희 의 質正官이 되어 明나라에 다녀왔다.

1584年 (宣祖 17年)에는 僉知에 再任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初 그가 尊敬했던 同僚이자 切親한 벗이기도 하였던 이이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586年 (宣祖 19年)에는 護軍 으로 前任하여 있다가 官吏들의 詩文과 學識을 試驗했던 吏文庭試 에 壯元을 하여 僉知中樞府事(正3品 堂上)에 오르고 嘉善大夫(종2品)에 加資되는 榮光을 누렸다.

1587年 (宣祖 20年)에는 掌禮院判決事로 憲府에서 訟事를 잘못 處理하였다 하여 追告를 請하는 바, 같은해 1587年 (宣祖 20年)에 外職人 眞珠牧師로 轉任되어 6年間 在任하면서 십가근체를 編纂하였다. 1591年(宣祖 21年)에는 日本이 朝鮮을 威脅하여 大明으로 쳐들어가려 한다는 事情을 進駐하는 注文을 짓기도 하였다.

壬辰倭亂 [ 編輯 ]

1592年 (宣祖 25年), 壬辰倭亂 이 勃發하던 이 해 9月 9日에 公州牧使 에 任命되었으나, 赴任하기 前인 9月 13日에 다시 全州府尹으로 轉任되어 이듬해인 1593年 (宣祖 26年) 5月에까지 全州府尹 을 지냈다. 以後 承文院 製造가 되어 戰爭 中에는 平壤과 義州의 臨時調整에 있으면서, 明나라로 보내는 外交文書를 많이 執筆했는데, 그 文章의 實力이 可히 따라올 者가 없어 큰 名望을 얻었다. 그해 11月에는 奏請使兼 謝恩使가 되어 名에 다녀왔다. 지은 글들이 明나라 官僚들과 學者들에게 높히 評價 받고 尊敬을 받았다. 1594年 (宣祖 27年) 8月에는 아예 州廳舍의 府使로 明나라에 가서 外交를 맡았으며, 世子의 冊封을 위해 또 한番의 州廳舍의 府使로 情事 윤근수와 明나라에 갔다. 이때 여러篇의 詩를 首唱하며 윤근수와 平生을 交遊하였다. 明나라에서 歸國한 直後인 1595年 (宣祖 28年)에는 掌禮院判決事에 올랐고 같은 해에 承文院提調를 兼職하였다. 그리고 다시 한番 世子冊封文書의 첫머리말을 썼다. 같은해 承文院提調 辭任上疏를 올렸으나 允許되지 않았다. 以後 承文院 製造를 겸하면서 벼슬은 행호群, 행부호군이 되었다.(벼슬앞에 붙이는 行은 높은 品階의 管理가 낮은 職級의 벼슬에 遞任될 時 붙였다.) 1597年 (宣祖 30年)에는 안변부사로 在職하다 다시 掌禮院 判決社가 되었다. 1598年 (宣祖 31年)에는 中國使臣迎慰使의 職任을 名 받았으나 病으로 辭職하고 통진에 머물렀다.

壬辰倭亂 以後 [ 編輯 ]

1598年 (宣祖 31年) 壬辰倭亂과 丁酉再亂 이 모두 終了된 뒤에는 承文院提調 에 올라, 세 番이나 明나라 首都 北京 의 禮部에 가서 글을 올렸는데, 明나라 學士들조차도 최립의 文章에 크게 歎服했다고 한다.

壬辰倭亂 以後 1599年 (宣祖 32年)에 外職人 行驪州牧師로 赴任하였다. 1600年 (宣祖 33年)에는 용산에 寓居하여 當代 名士들과 交流하다, 다시 1601年(宣祖 34年)에는 平壤에 간이당을 지어 그곳에 머물렀다. 1602年(宣祖 35年) 다시 調整으로 돌아와 承文院提調 兼 校正廳 堂上이 되어 ≪周易≫校庭의 職任을 名 받았으나 意見이 맞지 않아 主役校正廳의 堂上 職責을 辭職하는 소를 올렸다.

黨派싸움 中心에서 [ 編輯 ]

최립은 西人의 領袖로 推戴된 栗谷 李珥 의 知人이었으며, 西人의 中心人物 이었던 尹斗壽, 윤근수와도 親交도 두터웠다. 尹斗壽의 文集인 <<五音遺稿>>에도 최립과 交流한 記錄만도 10餘 次例에 이른다. 벼슬에 나서 壬辰倭亂 初期까지만 하여도 文章에 對한 評價는 좋았고 團地 先代가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한 것이 重히 쓰이지 못한 理由였다. [6]

門閥이 重要한 職任에 오르는 重要한 要素였다는 것을 端的으로 보여주는 것은 壬辰倭亂 當時 30代에 宰相의 班列에 오른 李恒福과 李德馨의 아버지가 모두 堂上官 以上의 높은 官職을 歷任했다는 것이다. [7] 또한 親交가 있었던 윤두수 윤근수 兄弟를 비롯하여 當時 操縱에서 重要한 職任에 올랐던 人物들을 보면 더욱 뚜렷하게 알 수 있다.

비슷한 處地로 當時 人物 中 父親이 높은 직임에 있지 않은 人物中에 高官이 된 人物이 바로 天才로 이름을 떨친 이이다. [8] 先祖가 그렇게 아꼈던 이이도 社稷을 여러番 했던 影響까지 있어서 46歲에 이르러 情2品職이 되었다. 47歲에 種1品 右贊成이 되기도 했지만 死亡時까지 大部分을 判書職에 머물렀다.

同人과 西人으로 나뉘어 本格的인 黨爭이 始作되는 時期가 되자 文章에 對한 險談과 時期가 始作된다. 1586年(宣祖 19年)에는 吏文庭試에 壯元을 하여 國法에 따라 官職은 僉知中樞府事에 오르고 官品은 種2품下人 嘉善大夫로 가자 되었으나 嘉善大夫로의 가자가 過하다는 上疏가 實錄記事에만 無慮 5番이나 登場하는데 宣祖가 番番이 물리치기도 하였다. [9] 이런 先祖의 異例的 措置가 오히려 牽制가 심해진 契機가 된 듯하다.

젊은 時期에는 寒微한 家門 때문에 請要職이나 出世길의 길목에 있는 벼슬을 지나쳤다 하더라도 學問的으로 國家에 認定을 받는 吏文庭試에 壯元을 하고도 學問에 關한 官廳에는 한番도 在任하지 못한다. 當時에 學問에 關한 官廳은 重要 要職으로 나아가는 길목이었으며 此際에는 鄭2品 以上의 高官이 되는 必須코스라고 할 수 있는 職任이었다. [10]

壬辰倭亂 中 同人들의 主導하는 當時 朝鮮 朝廷에서 갈수록 寒微한 家門이라는 險談과 文章에 對해서도 險談이 많아졌다. 이러한 險談은 아들인 최동망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中央調整에서 重要職責에서 除外되고, 學問과는 距離가 먼 官僚職을 받았다. [11] 이런 狀況에서 壬辰倭亂 以後에는 冊의 著述을 위해 數次例 辭職하거나 外職으로 나가던 것을 反復하였다. [12] 그러나 外交文書를 맡을 만한 出衆한 人物이 없다 하여 다시 中央 調整으로 任官 되는 等, 이러한 現象은 老後의 死亡年까지 反復되었다.

實錄에 나타난 최립의 評價 [ 編輯 ]

明나라 官吏 硫黃上(劉黃裳) 은 朝鮮의 士大夫 家臣들과 甚至於 王에게도 不遜한 態度를 보였으나, 최립의 글을 읽을 때 만큼은 손을 씻고, 香을 쏘인 後에 恭遜하고 경건히 文書를 읽을 程度로 였다고 한다.

" 公의 글은 基는 乖崖 김수온보다 못하지만 法은 더뛰어나고, 이는 佔畢齋 김종직 보다 뒤지지만 사는 더 낫다. 長點을 取하고 短點을 補完하면 거의 定立의 形局이다. 나머지 서너 분들은 사달이면 그저 좋을 따름이다" 라는

論評으로 최립의 글을 높히 評價하였다.


死後에 英祖 7年 (1731年) 6月10日 <承政院日記>에 記錄된 英祖 박문수 間에 對話中 최립에 對한 言及이 나온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

이와 같은 사람은 터무니없는 論議와 世俗의 見解로 待遇해서는 안 됩니다.”

瑕疵, 床이 이르기를, ( 抽象, 王을 말한다)

“武弁을 三曹(三曹 戶曹, 刑曹, 共助)에 임명한 것은 옛날에도 있었다. 志望이 懸隔히 差異 나지 않는다면

오직 才能만을 보고 登用해야 할 것이다. 어찌 世俗의 行態만을 따라서야 되겠는가.

옛날에 최립(崔?) 또한 顯達한 家門 出身이 아니었다.”


하니, 金在魯가 아뢰기를, “中人(中人)입니다.”

瑕疵, 床이 이르기를, “ 이러한 때에 최립이 있다면 쓰지 않겠는가?”

하니, 朴文秀가 아뢰기를, “최립과 같은 人物을 世上에서 어찌 쉽게 얻겠습니까마는 [13] -後略-


死亡으爐部處 한참이 지난 君臣의 對話에 登場한 최립은 文脈上 家門의 유명함을 가리지 않고 重히 쓰기에 不足함이 없는 人材였다는 回顧의 對話이다. 그러나 이 <承政院日記> 漢文글을 한글化 飜譯한 現代의 譯者는 2018年 主席글에 " 顯達한 家門 出身이 아니었다.” 라는 部分에 對한 잘못된 主席의 說明하였는데, 이는 造成王朝實錄속 史官의 括弧안의 글을 貶毁 引用한 탓이다. 造成王朝實錄亦是 漢文으로 造成된 글의 現代의 한글로 풀이하면서, 史學者가 '門閥이 微賤하다'는 士族 解釋글을 풀이 해두었는데, 이를 引用해서, 마치 歷史書에서 최립의 家門을 貶下하여 重히 登用치 않은것처럼 意味를 反轉하고 있다.

그러나 歷史記錄上의 內容을 앞뒤로 明確히 보면, 보시다시피 최립은 家門의 勢力이 弱하고 사람이 드물어도 , 登用해서 國政에 큰 도움이 되는 人材였다는 反證의 境遇로서 최립이 膾炙된 것이고, 後代의 國政에 오랫동안 큰 影響力을 남겼다는것을 볼수 있다.

數百萬名이 죽어나간 壬辰倭亂 國難의 時期에 明나라 外交文書에 對한 重要性 때문에도 여러番의 辭職 上疏를 올렸음에도 末年까지 官職을 反復配定을 받았고 , 官職을 쉬고 文人으로서의 著作 活動에만 專念 하고자하는 뜻은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當代에 많은 文人들과 學者들이 能力과 名聲을 認定했고, 宣祖在位 40年(1607年) 許筠은" 뜻이 깊고 死語가 卓越하다"는 稱頌을 했을 程度이다. 實錄 속 졸기 (死亡을 記錄하는 府顧問)에 "家勢가 寒微하나 爲人이 교만하였다" 라고 풀이 되어 있으나, 生前에 1595年 承文院提調 辭職 上訴에는 '스스로가 微賤하고 文字도 虛名' 이라며 自身을 낮추었고, 以後의 上疏에도 한결같이 自身을 낮추는 글이 存在하여 [14] , 史觀들 險談의 程度가 매우 激烈 하였고, 黨派의 敵對感이 史料에 그대로 실려나갈만큼 强烈한 貶毁를 담았다는것과 現代的 解釋의 歪曲을 알 수 있다.

<光海君日記>의 拙劣한 글을 그대로 옳기자면

" 최립의 文章은 날카로운 意志와 淡泊한 醫師로 그 格調가 자못 뛰어나, 醫師가 지나치게 깊은 것이라면 차라리 감추고 말이 지나치게 奇異한 것이라면 차라리 難澁하게 하여 드디어 一家의 體度를 이루었다. 그 缺點을 論한다면 좀 狹窄한 느낌이 있으나, 法規를 準하면 實로 獨特하고 眞摯한 功(工)이 있다. 詩 또한 驕蹇(矯健)韓 韻致가 있어 黃酸曲(黃山谷)과 眞後産(陳后山)의 結句 方法을 얻었는데, 意味의 附與가 너무 깊고 修飾語를 除去하면서 오직 眞言(陳言)을 없애는 데만 힘쓰므로 梗塞限 말이 많아 詩人의 風致는 없었다. 晉州 牧師(晉州牧使)로 있던 6年 동안 다만 1首의 律詩를 짓고 돌아갔으니, 그의 다듬질과 修正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怪石(怪石)을 時祭로 한 絶句詩를 지었는데, 그 詩에, 窓門 사이에 달린 이 한 마리만한 돌 3年 만에 수레바퀴처럼 컸네 나에게 주먹만한 돌 한 개 火山을 向하여 앉지 않네 라고 하였다. 큰 韻致가 이와 같았다. [15] "

라고 敍述되어 있다.

實錄의 원글은 漢文이므로, 이렇게 한글로 풀이되는것에 史學者의 個人 感性이 크게 실리는 影響力도 크다. 게을러서 詩文도 6年間 1篇이나 지乙똥 말똥하고, 詩人의 風致가 없다고 냉혹히 平價 切下가 되어 있지만, 이러한 깍亞내리기 描寫와는 다르게 實際로는, 최립의 一生에서 數 많은 事大文書와 詩와 散文들이 創作되어 後代 인종대에 9卷의 冊으로 엮어 編纂하고, 編纂後 印刷本으로까지 만들어 남길만큼 活潑한 著述活動의 痕跡이 여러 古文書에 남겨져 있다. 여러 史料에서의 최립의 글의 痕跡을 볼때, 末年의 赴任 6年間 單 한個의 律詩를 지었다는 訃告글이 얼마나 사람을 偏狹히 謀略하고 歪曲한 것 인지 明確히 알 수 있다.

韓石峯과 함께 아름다운 글씨體를 가진 3代 文章家로 손꼽히며, 創作力을 인정받던 八代 文章家로도 매우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 先祖인 崔潤德 將軍이 朝鮮王朝 實錄의 500年 歷史에 數없이 膾炙되었듯이, 최립 亦是 死後에도 繼續 治績을 言及받던 人物이다.

그러나 明나라 外交文書를 專擔하고 朝鮮뿐 아니라 中國까지 널리 알려진 有名 門戶에 對한 記錄 이라고 말하기에는, <광해군 日記> 속의 陰害的 졸기 文章들은, 名聲이 無色한 程度로 지나치게 惡의 敵이다. [16]

최립은 朝鮮中後期를 代表하는 文人이었고. 官僚 로서의 能力이 반복해 膾炙될정도로 龜鑑이 되는 人災였다. 朝鮮의 歷史에 커다란 影響力을 남긴 사람이다. 日帝感情期에 搬出된 3萬點 넘는 古文書들과 國內에 흩어지고, 解釋되지 못한 數 많은 古典 史料들을 聚合할 境遇, 뚜렷한 業績을 찾을수 있는 人物이지만 아직까지 朝鮮의 古典 文學들을 중대히 發掘하고 系譜를 잇는 努力은 進行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21世紀에 古典文學飜譯員이 推進한 飜譯作業에서조차 當代의 政治的 펌훼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壬辰倭亂의 患亂에 5살 子女를 잃고 꿈에서 만난 일을 描寫한 市에서, 그리고 戰爭中의 我軍의 勝戰譜를 기뻐하는 市에서 , 朝鮮歷史 中 가장 慘澹했던 時代를 버텨내던 文學家의 時代 情緖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老年期 [ 編輯 ]

1603年 (宣祖 36年) ≪周易諺解≫의 編纂이 이루어진 以後 主役 의 矯正을 위해 外職을 請하여 行間性郡守가 되어 杆城에 赴任하여 3餘 年의 時間이 지나 主役校庭을 完了했지만, 赴任 初期에 이 校正作業을 지나치게 重視하여 고을의 일을 돌보지 않아 百姓들로부터 不滿섞인 소리를 듣기도 했다. 主役校庭을 마친 後에는 제대로 政務를 遂行하였으며, 任期를 마치고 나서는 다시 中央 調整으로 復歸하여 刑曹參判 에 올랐으며, 1606年 同知中樞府事 兼 承文院 製造의 職責에 올랐다. 1607年(宣祖 40年)에 다시 江陵府使가 되어 外職으로 나갔다. 1608年(宣祖 41年) 70歲 이르러 病으로 辭職을 請하였다. 以後 벼슬을 내놓고 漢陽 自宅에서 지내다가 開城으로 옮겨가서 餘生을 보냈다. 1612年 (光海君 5年) 7月 11日에 74歲를 一期로 開城에서 世上을 떠났다.

事後 1631年(仁祖 9年)年 月沙 이정귀 等의 周旋으로 그의 自筆文集이 9卷이 發刊이 되었고, 以後 병자 胡亂等으로 遺失을 겪으며 1643(仁祖 21年)에 文集 9卷이 木版 活字本으로 다시 發刊되어 現在 국립중앙박물관에 保存되고 있다.

評價 [ 編輯 ]

간이당 최립의 親筆(中央圖書館所長)

宣祖朝에는 朝鮮의 8文章家로 최립, 李珥, 李山海, 崔慶昌, 백광홍, 윤탁연, 송익필, 이순인을 꼽았다. 朝鮮과 明나라에서 文章으로 이름을 떨친 그는 뛰어난 時在와 顧問을 본뜬 擬古文體로 有名했으며, 글씨는 松雪體 를 잘 썼다. 本來 漢陽사람이었으나 開城에서 隱居했기 때문에, 開城 出身인 차천로 寒戶 (韓石峯)와 함께 "松都三絶(松都三絶)"로 일컬어졌다.

同甲내기인 醫學者 許浚 과는 莫逆한 親舊로 지냈으며, 1610年 (光海君 3年)에 許埈珥 東醫寶鑑 을 完成시키고 復權되어 調整으로 돌아올 때 지은 그 感懷의 詩들이 文集 簡易集 (簡易集)에 남겨지기도 했다. 晩年에는 歐陽脩 의 글을 尊敬하여 恒常 지니고 다녔으며, 初期에는 班固 韓愈 의 글을 좋아하여 본받으려고 했다고 敍述되어있다.

生存 當時에는 文章으로 明과 朝鮮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사람들에 따라서는 難澁하고 여렵다 하여 酷評도 받았다하나 , 後代 肅宗 때 編纂된 官撰選本人 別本(別本) ≪東文選(東文選)≫은 勿論 西劉備가 編纂한 ≪同門八哥선(東文八家選)≫, 송백옥의 ≪동문집性(東文集成)≫, 남공철의 ≪四君子門初(四君子文?)≫, 홍길주의 ≪大同門準(大東文雋)≫ 等 社가(私家)의 選集에도 고루 著作이 收錄되었다. 또한 김창협·김창흡·안석경을 비롯해 여러 古文家들의 論評 對象이 되기도 했는데, 中國의 文章만을 主로 다루어왔던 當代의 時代情況에 비춰보자면 이는 相當히 異例的인 것이다.

詩에 對해서도 一家를 이루었다는 評價를 받았다. 그의 詩는 黃庭堅과 진사도를 본받은 精巧하고 세련된 詩風을 特徵으로 하고 있는데, 許筠 홍만종 은 散文보다 더 낫다고 評價하기도 했다.

眞珠牧師 6年 在任期間동안 지은 (< 怪石>(怪石) )이란 題目의 詩는 다음과 같다.

窓間懸一?
目定車輪大
自我得此石
不向華山坐


窓틈에 이 한 마리 달아 놓고
뚫어져라 보면 수레바퀴처럼 커 보이네
이 돌을 얻고서는
火山(華山) 쪽으로 앉지도 않는다네


2014年에 言論社를 통해 紹介된 최립의 限時 雨後(우후) 에대한 한글化는 다음과 같다


朝來風急雨?? 錦繡千林一半空 (조내풍級友몽몽 金數千림一般公)

已作漫山秋色了 殘紅與泛碧溪中 (移作滿山秋色料 盞洪女汎壁系中)


거센 바람 부는 아침 부슬비 내리더니

緋緞같이 수놓은 수풀 折半 비었구나

온 山은 가을빛 거두고 푸른빛만 띄우는데. [17]


漢詩를 한글로 풀어내는것은 한글 文章力을 附與하는 것이기에, 話者의 뉘앙스를 正確히는 담을 수가 없다.

外國語를 飜譯하는것 만큼이나 다른 結果가 될 수 있으며, 그만큼 誤譯의 可能性도 매우 크다.

通川 崔氏 家門 系譜의 後孫 [18] 이 直接 다듬은 한글 詩文은 다음과 같다.


"아침 바람에 이슬비가 방울 방울 , 緋緞 위를 수 놓듯 千 個의 나무 위로 떨어져 앞이 折半이 지네

이미 온 山은 가을의 色을 마쳤건만 , 남은 붉은 잎들이 푸르른 溪谷 물을 두루 물들이네"

誤譯의 問題

위의 한글詩文들은 17番 링크 原文에서 確認하다시피, 이 글은 최립이 直接 만든 創作 詩 句節이지만,

題目에서 " 우리始祖로 푼 限時"라며, 記事 題目부터 著作物을 中國 出저로 誤認시키는 誤謬를 犯하고 있다.

최립의 家門에 對한 失足의 司書의 括弧 四足글도 '韓美" 라는 글字였는데, 차가울 '韓'과 드물 '美' 를 門閥에 對한 卑下로

誤譯하고 있는 問題가 있다. 原書에 없는 '가난한 家門 ' 이란 解釋은 잘못된 , 飜譯에서 비롯되고, 잘못된 한글 飜譯을

여기저기 이동시키며, " 반한한" 또는, "元來부터 가난한 "이라는 等의 原文의 뜻과 다른 誤譯들이 人物 說明에 累積 反復 되었다. 通川최氏 一家는 高麗朝에 내내 名武家門이고 朝鮮初期에도 立地가 든든下에 세종대왕의 培養功臣에 첫 臣下가 될정도로 오래 이어진 名門家門이었다. 단종애사에 連累되었으나 최립의 家門自體의 名聲과 先代에 對한 膾炙가 朝鮮王朝 내내 反復되었던 만큼, " 寒微한 家門中에 있다"는 글을 經濟的 窮乏이나 家門의 微賤함으로 풀이하는데 物議가 있다. 이는 近者의 言論報道에 실린 최립의 限時 풀이 에서도, 誤譯의 過程을 살펴볼수 있다.

已作漫山秋色了 殘紅與泛碧溪中 의 句節에 對해 " 온 山이 가을빛 거두고 푸른빛만 띄운다"는 풀이는, 深刻한 歪曲이다.

싯귀 原文에 盞洪 (殘紅)이란 글字를 아예 없는것으로 取扱하고, 市內 界(溪)도 無視하여, 싯귀에 담긴 色彩 마저 正反對로 訛傳해버렸다. 常識的으로 '가을色을 中斷한 (了)山이란, 가을 다음 季節인 겨울이어야 하기 때문에, 겨울 山이 푸르게 남을 理가 萬無하다. 甚至於 최립이 創作 意圖에 담지 않은 50代, 60代라는 年齡的 說明을 싯귀 解釋에 끼워넣어서 " 話者가 老年의 詩人이 푸르른 젊음을 그리워하는 所望을 담고 있다"는 等의 險難한 妄想的 解釋까지 덧대면, 元來의 詩의 意味를 알아볼수 없게 된다. 現代時代에 잘못된 史學者의 손에 싯귀의 毁損이 이리 甚한 水準이고, 이程度까지 原文의 意味를 訛傳 하기에 正常的인 評論도 이룰 수가 없다.따라서 含蓄하거나 漏落하는 解釋은 自重되어야 한다.

飜譯과 解釋文은 再創作이 아니기 때문에. 飼料의 解釋은 明視性을 쫒아야 한다.

  • 《簡易集(簡易集)》
  • 《主役本意口訣附設(周易本義口訣附說)》
  • 《한사열前哨(漢史

기타 [ 編輯 ]

벼슬에 對하여 [ 編輯 ]

通川최氏 家門이 계유정란과 死六臣 事件으로 滅門의 被害를 입은 來歷을 考慮할 때, 官僚로서 벼슬의 記錄은 꽤 仔細히 남이 있다. 宣祖實錄에서 "다만 宰相의 班列 [17] 에 오른자가 職務를 疏忽히 한다."는 彈劾上疏가 있었다고 적고 있으나, 이것은 狀況을 너무 誇張한 것이다.

朝鮮時代의 平均 壽命을 훌쩍 넘어 年老한 文官이 官職을 反復 仕樣에도 不拘하고 朝廷에서는 繼續 任官 하였고, 司憲府의 追告를 받을 當時엔 이미 還甲의 나이였다. 東部中樞府使로서 迎慰使의 量祖靈에 再修 되었을때에는 病이 들어 官職을 위한 運身이 어려운 때였고 司諫院의 彈劾은 任命을 撤回하는 通商 節次로 생각할수 있다. 記錄으로 볼때 一般的 意味의 '罷職' 이라 보기엔 힘들 程度로 卽刻的 任官 記錄이 이어진다. 彈劾과 罷職이 言及된 해에도 驪州牧師, 從事官職에 任命되었고 1602年(宣祖35年)에도 당상직에 任命되었단 記錄이 있다. 黨下直'이 아니라 '당상직'이다,

1605年 杆城 郡守로 있으며 編纂한 <主役本位口訣附設> 現在 서울對 奎章閣 韓國學 硏究院에도 남아있다


流失된 任官記錄들

壬辰倭亂의 初期에 최립의 벼슬이 낮다하여 外交文書에 벼슬을 높여 보낸것 때문으로 보이는데 [18] , 《簡易集》4卷 蛇行門錄에 外交文書들이 收錄되어 있고, 벼슬은 吏曹參判과 禮曹判書라고 記錄하였다. 公式記錄이라 할만한 實錄에는 鄭2品 以上의 벼슬을 한 記錄이 한番도 없다는 旣存 敍述은 揭示物 內의 內容에서도 反論의 餘地가 確認된다. 日本의 侵略 戰爭을 두番 거치며 수 없이 消失되고 어렵게 남은 殘餘 朝鮮時代記錄을 偏頗的으로 確認하여 高官職을 하지 않았다고 하기엔 認定이 어렵다. 堂上官이 鄭1品에서 鄭3品 까지의 上位 官僚 品階이고, 參判 또한 判書의 補佐官으로 '製造'의 業務를 겸했다는 記錄을 보아도, 또 여러番 薦擧 敍述이 있는 實錄속의 記錄과, 多廻車 乘務員 製造 任命 記錄을 보아도, 그 指摘은 內容이 크게 어긋 난다. .

情2品 以上의 管理가 死亡했을시에 받게 되는 시호 記錄이 없으며, 外交文書에 벼슬을 올려적은 일은 이미 알고 있었던 事實인데도 宰相의 班列이라 한것과, 死亡 以後인 仁祖朝에 《簡易集》을 刊行하면서 在神이라 한것과 肅宗組에 최석정의 上疏文에 參判이라 記錄하였는데 이러한 記錄도 實錄에는 없다는 旣存의 敍述 主張 또한, 事實로 確認할 수 部分들은 宣祖時代 40餘年의 期間에 對한 相當히 部分 記錄이 消失 되었다는것 뿐이다.

現存하던시대로부터 4百年 넘는 時間과 많았던 戰爭들 그리고 36年間의 日帝感情機 期間에 數없이 搬出당하고 流失 當했던 韓國 古文書들을 不幸을 생각할때 최립의 벼슬職에 諡號를 받지 못했다거나, 事實이 아닌거같다는 疑懼의 提起는 것은 매우 番外的이며, 생각할 內容이 아니다.

壬辰倭亂은 朝鮮王朝가 가장 貴히 여겼던 祖上을 모시는 '宗廟' 조차 불태워 全燒 當했던, 엄청나게 激烈했던 戰爭이었다. 推算 100萬名 以上의 人口가 죽고 10萬名 以上 被拉되었으며 , 7年 넘게 이어진 戰爭과 國家의 機能 喪失의 時間에 民族歷史의 根幹을 너무 많이 收奪 當하였고, 오늘 날도 適正히 回收를 못하여, 史料를 중요히 지키지 못하고 있다.

최립은 明나라에서 留學하여 漢文學을 工夫하고 倭亂을 避해 逃亡간 朝鮮 王朝를 代辯하여 兵力을 要請하던 歎願 文書를 보내던 外交官이었다. 壬辰 倭亂 當時 '全州府尹' 職은 現在로 치면 '市場' 또는 '長官' 水準의 官職이고, 臣僚들의 對話에서 湖南領土의 크기와 人口에 重大性이 强調되어 任官이 愼重히 論해졌던 자리인 任官市의 對話가 그대로 存在한다. 戰亂 中에도 朝鮮을 求하고자하는 마음으로 明나라에 보낸 呼訴文들은 後代 人造臺에 整理한 文集에 內容이 남아있다. 또한 但只 中國에 軍事를 빌리는 目的으로 굽신 垈地만은 않고, 國家의 體身을 重히 다루며 긴박히 論한 君臣의 對話들은 宣祖와의 謁見 記錄에 그대로 남아있다.

朝鮮時代의 領土가 只今의 南韓 北韓을 합친 크기의 領土 인데다가, 現在의 오키나와가 류큐王國으로 分離된 國家로 存在하며 日本 本土軍과 聯合으로 戰爭에 參與했단 것을 생각하면, 그 當時 明나라가 朝鮮을 分割 하려하거나. 王仁 宣祖가 急迫한 戰爭 狀況에 廢位하려 했단 狀況에 최립과 같이 明나라에 疏通窓口가 되는 官僚가 너무나 重要했던 時代 狀況이었다는것은, 두 말할 必要가 없는 것이다. 現代的으로 풀어서 쓰면 日本이 쳐들어오는데, 中國語에 能하고 中國 政府를 說得할만한 文章力에, 中國龍 外交文書를 精巧히 쓸 줄 아는 唯一無二한 外交官이 바로 文官 최립 이었던 것이다. 그 能力에 重大함이 다뤄지고 벼슬을 쫒지 않아, 任官을 願치 않았던 최립의 行步는 黨派와 權力을 쫒던 臣僚들에게 疾視의 對象이 되기에 充分한 것 들이었다. 當時에 明나라와의 疏通이 너무나 重要했을 것 이고 이런 人材가 國家 存立에 크게 關與 되어 있는데 明나라로 보낸 文書에 言及된 벼슬이 事實인지 아닌지 吏曹參判을 했던 鄭2品 品階記錄이 안남아서 課長인지를 거짓인지를 疑心하는 品階 論爭을 21世紀에 試圖하고 있단것은 , 後世에겐 너무나 慌忙하고 어이없는 敍述이다.

최립의 外交 文書로 侵略 當하는 朝鮮의 狀況을 說得하여 明나라로부터 4萬名의 軍士를 出征 支援받고 名과 聯合軍으로 日本 侵略 戰爭에서 最終 勝利를 거두어 朝鮮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 때의 朝鮮人들은 數 없이 많은 죽음과 戰爭 被害의 慘狀을 겪었고, 5살에 죽은 子息을 他地에 묻고 避難을 가던 최립의 處地 亦是 安穩치만은 않았다. 그 後로 數 十年 지나 1626年에 發付된 號牌廳의 集計가 겨우 226萬名일진데 號牌를 發付치 않는 女性과 어린이 老齡層을 두세倍로 合算해도 顚仆해서 千萬名度 채 안되었을 人口數의 朝鮮 時代에, 長期的 戰爭으로 얼마나 많은 목숨이 잃어진건지는 두 말할 必要가 없다. 어느 드라마에서는 360萬名의 死傷者라고 言及하기도 하였는데, 두 番의 患亂中에 公職에 매여 戰爭을 고스란히 치르던 文人의 벼슬任官 記錄들이 하나하나 穩全히 남아 있길 바라는것 부터가 相當한 無理이다. 旣存 글에 壬辰倭亂 前에 情2品의 品階 記錄이 없다는 是非가 있었으나, 1584年(宣祖 17) 護軍(護軍)으로 있을 때 이문(吏文) 定試(庭試)에 首席을 차지하여, 種2品 嘉善大夫(嘉善大夫)로 陞品(陞品)되었다는 記錄이 存在하며 이 안에도 敍述 되어있다. 記錄者들의 人物 硏究에 좀 더 많은 確認이 必要하다. 朝鮮王朝實錄만이 唯一한 史料는 아니며 , 朝鮮時代의 承旨 또한 個人이기에 朝廷에서 言及된적없는 士族의 글을 人物評價로 擴大하는것은 物議가 있고, 承旨의 記錄이 컴퓨터 記錄처럼 明確히 할수 있던 時代가 아님을 于先 考慮해야 할 것이다.

壬辰倭亂 中 記錄遺失은 광해군 4年에 최립이 死亡하고, 以後 後代에 仁祖가 卽位하고, 두番 胡亂을 겪으며 더 많은 記錄들이 遺失되어 버린것으로 判斷할 수 있다. [19]

[ 編輯 ]

가을을 보내며

朝來風急雨?? / 거센 바람 부는 아침 부슬비 내리더니
錦繡千林一半空 / 수놓은 緋緞 같던 수풀 折半은 비었네
已作漫山秋色了 / 이미 온 山은 가을빛을 거두고서
殘紅與泛碧溪中 / 남은 붉은 잎을 푸른 물에 띄우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이선, 《지號집》 卷11, 簡易堂崔公行狀
  2. 《光海君日記》(中草本) 卷55, 光海君 4年(1612年) 7月 11日(癸卯) 7番째 記事
  3. 최립과 許浚은 둘 다 1539年 生이다. 최립, 《簡易集》權8, 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 여기서 '同庚'은 桐甲, 卽 같은 나이를 말한다.
  4. 최립과 寒戶는 姻戚 關係로, 寒戶는 職强攻 崔瑩(崔泳)의 外孫子다. 최립, 《簡易集》 卷3, 韓景洪書帖序.
  5. 그의 文集인 <<簡易集>>에는 高調라고 記錄하고 있으나 通川최氏大同譜에는 최로는 11歲 최립은 16歲로 5代祖가 된다.
  6. 宣祖實錄에는 1581年 明나라 州廳舍의 質正官이 될 때 ,【敬命曾爲侍臣, 坐父累就散。 ?以門地寒微, 不顯用。 二人皆能辭令, 故特?之。】 라고 적은 史官의 主席이 작은글씨로 덧붙여 달려있다. 朝鮮王朝 實錄 사이트의 史學者 解釋은 이部分을 【警名은 屍身(侍臣)이었는데 아버지의 罪에 連坐되어 散官(散官)이 되었었다. 崔岦은 門閥이 微賤하였으므로 顯著하게 登用되지 못하였다.】 라고 달아놓았는데, 이 解釋에는 相當한 誤譯의 問題가 있다. 一旦 앞部分은 解釋은, 최립과 함께 薦擧된 고경명(高敬命)을 單숨에 逆賊의 子孫과 殺人者로 만드는 怪常한 解釋이다. 屍身 侍臣卽, 가까운 臣下였는데 아버지의 罪에 連坐되어 아버지 喪을 當했단는 異常한 풀이는, 理致에 맞지 않다. 大韓民國 政府가 運營하는 사이트가 中世의 朝鮮王朝 記錄에 對해 이렇게 까지 實力없는 史學者의 解釋을 그대로 두고 있다는 點에서, 相當한 歷史 歪曲 的인 問題가 있다. 이 文章의 바른 解釋은 "薦擧된 高敬命이 臣下로 지냈지만 父親의 죽음으로 辭職을 한 狀態 " 라고 解釋을 해야 한다, '散官'은 喪을 當하여 公務를 中止한 官僚를 意味 하기 때문이다. 최립에 對해 地寒微가 "門閥이 微賤하다" 라고 쓴 한글풀이 亦是 誤譯에 不過하다. 通川 崔氏는 이미 高麗朝와 朝鮮의 個國을 도운 相當히 오래된 名文가고, 이때는 단종애사로 인한 身分制約을 풀어서 復權이 된지 한참 지난 狀態이기 때문이다. 朝鮮時代는 財産보다 名望를 더 重視하였고 兩班家門, 卽 士大夫에 對한 傳統的 儒敎 待遇 觀念上, 由緖 깊은 家門을 "微賤하다"라고 承政院이 添言 했다고는 全혀 볼 수 가 없다. 四足글 '韓美'는 현대에서 誤用하고 있는 가난하고 微賤하다는 풀이가 아니라, "사람이 드물어 勢力이 不足한 家門" 이라는 뜻으로 理解하는것이 맞을 듯 하다.
  7. 李恒福의 아버지인 이몽량은 鄭2品의 議政府 參贊에 李德馨의 아버지인 이민성度 情 2品의 知中樞府事를 歷任했다.
  8. 이이는 生員,進士試 等 總 9番의 科擧試驗에 壯元을 하였다고 한다.
  9. 《宣祖實錄》宣祖 19年(1586) 10月 1日, 3日일 記事
  10. 壬辰倭亂 當時 重要 要職을 맡았던 人物中에 이러한 官職에 몸을 담지 않는 人物이 없을 程度였다. 최립보다 20餘 年이나 어리면서도 30代에 제상의 班列에 올랐던 이항복 이나 이덕형 도 모두 當時 宣祖의 信任을 받고있던 李珥의 推薦으로 이러한 官職을 젊은 時期에 거쳐갔다.
  11. 壬辰倭亂 이듬해인 1593年에 種2品인 全州府尹에 올랐고 死亡할 때까지 約 20餘 年 동안 種2品인 同知中樞府事였다. 承文院提調 3番, 刑曹의 掌禮院判決事만 數次例를 하였다.
  12. 《宣祖實錄》,《光海君日記》
  13. 《承政院日記》 英祖7年 신해 6月10日
  14. 《宣祖實錄》宣祖 28年(1595) 10月 29日 承文院提調 辭職上疏
  15. 《光海君日記》光海君 4年(1612) 7月 11日 7番째記事 全 同知中樞府事 최립의 졸기
  16. 그러나 死後 20餘 年이 지난 後 西人勢力이 執權하는 仁祖朝에는 그의 文集이 木版으로 刊行되고 評價도 "近代 文人의 作品 가운데 後世에 傳할 만한 것으로는 이 사람의 作品같은 것이 없다."는 極讚이 보인다. 《仁祖實錄》 仁祖 9年(1631) 10月 26日 3番째記事
  17. 넓은 意味의 宰相의 意味는 堂上官 以上의 管理를 宰相이라 하였으나 , 現實的인 宰相의 班列이란 議政府와 六曹를 包含한 鄭2品職 官吏들을 指稱한다.
  18. 《宣祖實錄》宣祖 26年(1593) 10月 22日 1番째記事
  19. 보통의 實錄은 王이 死亡한 以後 臨時官廳이 設置되고 王의 帝位동안 記錄된 史草들을 整理하여 草稿를 完成하여 檢討한 以後 添削이 必要한 部分에 修正이 加해지고 最終的인 實錄이 編纂되는데 壬辰倭亂으로 인해 當時의 많은 記錄이 流失되었다. 壬辰倭亂이 일어나기 前인 1584年에 이이가 死亡한때에 보통의 實錄에 나타나는 拙氣가 없이 簡單히 '이이가 졸하였다.'라는 記事만이 보인다. 또한 鄭2品 以上이 되지 않았던 人物들이 간간히 받았고, 鄭2品 以上의 官吏들에게 基本的으로 事後에 내려졌던 시호조차도 宣祖實錄에는 言及이 없다가, 40年 宣祖實錄의 곳곳에서 不實이 보이기 때문이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