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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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휘소 리
Benjamin Whisoh Lee
이휘소
이휘소
出生 1935年 1月 1日 ( 1935-01-01 )
日帝 强占期 朝鮮 京畿道 京城府
死亡 1977年 6月 16日 ( 1977-06-16 ) (42歲)
美國 一理노이州 헨리群 케와니
居住地 美國 일리노이州 글렌 엘린
宗敎 不可知論
主要 業績 自發的으로 對稱性이 부서진 게이지 理論의 再規格化
맵시 쿼크 質量의 豫測
物理宇宙론 리-와인버그 警戒 의 計算
受賞 國民勳章 동백장
分野 醬의 量子論
粒子物理學
理論物理學
所屬 펜실베이니아 大學校
프린스턴 高等硏究所
뉴욕 州立 大學校 스토니브룩
페르미 國立 加速器 硏究所
시카고 大學校
博士 敎授 에이브러햄 클라인
博士 學生 강주상
影響을 받음 에이브러햄 클라인
시드니 메슈코프
影響을 줌 스티븐 와인버그
헤라르뒤스 엇호프트
압두스 살람

벤저민 휘소 리 ( 英語 : Benjamin Whisoh Lee , 1935年 1月 1日 ~ 1977年 6月 16日 ) 또는 韓國名 이휘소 (李輝昭)는 日帝 强占期 朝鮮 에서 태어난 韓國系 美國人 理論物理學者 이다.

20世紀 後半 粒子物理學 에서 自發的으로 對稱性이 깨진 게이지 理論 再規格化 問題의 解決에 決定的인 役割을 하였고, 맵시 쿼크 의 質量을 豫測하여 그 探索에 貢獻하였다. 物理學者로서 本格的인 活動을 始作한 以來 約 20年間 모두 110篇의 論文 을 發表하였으며, 이 中 77篇의 論文이 學術誌에 揭載됐다. 10回 以上 引用된 論文은 이 中 69篇에 達하며, 500回 以上 引用된 論文은 모두 8篇이다. 2013年 10月 基準 그의 모든 論文들은 13,400回 以上 引用되었다. [1]

生涯 [ 編輯 ]

幼年期 [ 編輯 ]

日帝强占期 였던 1935年 1月 1日 , 京城府 遠征(모토마치, 元町 , 現 서울特別市 龍山區 원효로 )에서 아버지 이봉춘, 어머니 박순희의 3男 1女 中 맏아들로 태어났다. 母親 박순희는 遠征(모토마치)의 《慈惠病院》( 慈?病院 지케이 뵤人 [ * ] )에서 醫師 로 勤務하고 있었다. 父親 이봉춘 또한 醫師 免許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治療하는 것을 싫어하여 開業醫 活動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집안 生計는 母親이 도맡아 꾸려나갔다. 父親이 暫時 小學校 敎師로 일하던 時期가 있었는데 母親과는 이때 師弟之間으로 처음 緣을 맺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2]

일곱 살이던 이휘소는 1941年에 경성사범학교 附屬第1國民學校에 入學하였다. [週 1] 이 學校에 試驗을 치러 入學하였고, 이휘소가 在學할 當時 이곳에는 朝鮮人이 두 名쯤 在學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이휘소 一家는 모토마치에서 神設定(身世쓰마치, 新設町 )로 移徙했다. 이는 只今의 서울特別市 東大門區 新設洞 城北區 普門洞 에 該當하는데, 이휘소 一家가 移徙한 곳은 神設定 中에서 特히 只今의 성북구 보문동에 該當하는 地域이었다. 母親은 이곳에서 小兒科와 産婦人科를 專門으로 하는 《慈愛議員》( 慈愛?院 지아이 異人 [ * ] )을 開業하였다.

이휘소에게는 當時 민희식이라는 富裕한 집안을 가진 親舊가 있었는데 그의 집에는 光復 後 日本人 들이 남기고 간 冊이 많았고, 이휘소는 그의 집에서 日本語 書籍을 자주 빌려 읽곤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冊은 月刊誌 《 어린이 科學 》( 日本語 : 子供の科? 高度모노 가가쿠 [ * ] )이었다고 傳한다. 國民學校 4學年 在學 中에 光復 을 맞이하였고 光復과 함께 경성사범학교가 廢止됐기 때문에, 1947年에 卒業할 무렵에는 서울대학교 師範大學 附屬國民學校 所屬이었다. 그 해에 景氣中學校 에 進學하였고 中學校 時節 化學班에서 主로 活動하였다. [2]

靑少年期 [ 編輯 ]

이휘소가 中學校 4學年 [週 2] 때인 1950年에 韓國 戰爭 이 勃發하였다. 이휘소 一家는 暫時 서울 近郊 광릉의 親戚 집으로 옮겨 지내다가 9.28 서울 收復 以後 다시 집에 돌아갔지만, 1·4 後退 때 다시금 忠淸南道 公州市 에 있는 父親의 옛 故鄕 집으로 避難을 갔다. 母親은 이곳에서도 病院을 開業하여 活動하였으며, 이휘소는 그런 어머니를 도와 이웃 都市 大戰 까지 나가서 病院 運營에 必要한 藥品을 사오곤 했다.

以後 父親의 어느 小學校 弟子의 勸誘로 慶尙南道 마산시 로 옮겼다. 이때 父親은 昌原保健所長으로서 公職生活을 始作하였다. 馬山에서 昌原 까지는 出退勤을 할 만 한 距離가 아닌 탓에 그는 昌原保健所에서 主로 지내다가 週末 무렵에야 馬山의 집에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그는 職場 生活이 1年 남짓 되던 1951年 12月의 어느 날 밤에 歸家하던 中 개울 둑에서 발을 헛디뎌 死亡하였다. [2]

한便 이휘소는 서울에서 公主, 馬山으로 避難 生活을 이어가면서 學校에 못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學校 敎育에 對한 展示 訓令이 發效돼 이휘소는 委託生 身分으로 隣近 마산중학교에 臨時 編入할 수 있었다. 얼마 後 景氣中學校가 釜山으로 옮겨와 學校로 돌아갈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5學年 課程을 마쳤다. [2]

大學 入學 [ 編輯 ]

그 後 이휘소는 檢定考試 를 치러 大學 入學 資格을 얻고, 入學試驗을 통해 1952年 서울大學校 工科大學 化學工學科에 首席으로 入學하였다. 當時 서울대학교는 只今의 釜山廣域市 西區 대신동에 該當하는 地域의 假建物로 옮겨 와 있었는데 서울大學校만 따로 있지 않고 ‘ 戰時聯合大學 ’이라는 이름으로 全國의 모든 大學校가 한 곳에 모인 狀況에서 授業만 學校別로 따로 받도록 돼 있었다. 서울대학교는 大韓民國軍이 서울을 收復한 以後에 서울대학교 師範大學 附屬中學校 [週 3] 자리에 臨時 敎師를 세웠다가 以內 美軍 撤收 以後에 泰陵으로 옮겨갔다. 이휘소는 한 放에 10名씩 收容하는 臨時 寄宿舍에서 自炊生活을 始作하였다. 서울대학교 工科大學에서 한 學期 授業을 받은 後 이휘소는 物理學에 큰 興味를 느꼈고 以後 數次例에 걸쳐 文理科大學 物理學科로 轉科하는 것을 試圖하였다. [2]

美國 留學記 [ 編輯 ]

하지만 서울대학교는 그가 當時 在學 中이던 工科大學 化學工學科에서 文理科大學 物理學科로의 前科를 許諾하지 않았다. 그는 學校 授業과는 別途로 獨學으로 物理學을 工夫하고는 있었지만 數 次例에 걸친 試圖가 모두 失敗로 끝나 큰 失望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渦中에 韓國戰 參戰 美軍 將校 婦人會의 後援을 받는 留學奬學生에 選拔됐다. 그래서 좋아하는 物理學을 실컷 工夫하지 못하게 하는 서울대학교를 박차고 나와 美國으로 留學을 떠나기로 하였다. 그는 오하이오州 옥스퍼드 市의 마이애미 大學校 로 編入하기로 決定했다. 1955年 1月 26日 아침에 이휘소는 汝矣島 飛行場을 離陸하였다. [週 4] 그는 도쿄 , 하와이 , 샌프란시스코 , 시카고 를 經由하여 1月 31日에야 겨우 目的地 마이애미 大學校에 다다를 수 있었다. [2]

이휘소는 1955年 1月에 오하이오州 마이애미 大學校 物理學 科에 編入하였다. 編入 前까지 서울대학교에서 받았던 成跡을 考慮하여 모두 70單位가 認定됐는데, 70單位는 當時 美國 大學校 學制 基準 約 2年 半 程度에 該當하므로 3學年 課程에 바로 進學할 수 있는 셈이었다. 이휘소는 每日 아침 7時 以前에 일어나 7時 10分에 아침 食事를 하고, 8時부터 學校 授業을 듣기 始作했다. 또 授業이 끝나면 圖書館에서 課題를 모두 끝내고 子正이 넘어 寄宿舍로 돌아오는 生活을 反復하였다. 美國으로 건너온 지 1年 半 만인 1956年 6月에 物理學科를 最優等( summa cum laude 숨마 쿰 라우데 [ * ] )으로 卒業하였고, 學科長 等의 推薦으로 피츠버그 大學校 大學院에 進學하였다. [2]

大學院에 進學하기까지 여름放學 期間은 아주 자유로웠는데 인디애나주 퍼듀 大學校 大學院의 여름學校( summer school [週 5] ) 課程에 登錄하여 工夫하였다. 이때 自動車 運轉도 배웠다. [2]

이휘소는 여름放學이 끝난 1956年 8月부터 피츠버그 大學校 大學院에서 生活을 始作하였다. 그는 敎育助敎 (TA) 奬學生이어서 工學科와 醫豫科 學生들의 物理學 實驗 TA를 擔當하였다. 이듬해 가을學期부터는 硏究助敎( Research assistant )와 TA를 겸하게 됐고, 實驗 指導만 하지 않고 이제는 正式으로 江의 하나를 配定받게 됐다. 가을學期에 受講하던 몇 個의 講義 中 原子核 理論 講義를 擔當했던 시드니 메슈코프( Sydney Meshkov )는 以後 이휘소의 進路에 큰 影響을 끼쳤다. 이 무렵 이휘소는 物理學에서 本格的으로 粒子理論物理學, 正確히는 兩者章論 의 專攻을 希望했다. [2]

피츠버그 大學校의 博士 學位 資格試驗에서 次點 合格者와 總點이 20點 以上 벌어지는 높은 點數로 首席 合格하였다. 以後 몸이 衰弱해져 氣管支炎으로 苦生하였다. 몸을 추스른 後 바로 碩士 學位 論文에 邁進하여 한 달 餘만에 完成하였다. 學位 論文 題目은 〈 産卵行列 의 解釋的 特性과 그 應用〉( On the Analytic Properties of the S-Matrix with Some Application )이었는데, 이것으로 1958年에 碩士學位를 取得하였다. 그는 碩士 學位 論文을 좀 더 다듬어서, 그해 12月에 《 피지컬 리뷰 》에 寄稿하기도 하였다. [3] 이휘소는 이미 피츠버그 大學校의 博士 進級을 앞두고 있었지만 메슈코프는 그의 才能을 아까워하며 그를 名文 펜실베이니아 大學校 의 에이브러햄 클라인( Abraham Klein )에게 推薦하였다. 클라인은 이휘소의 才能을 認定하여 펜실베이니아 大學校의 博士 學位 資格試驗인 豫備試驗을 免除해주었으며, TA 및 RA 奬學金보다도 더 惠澤이 좋은 해리슨 硏究奬學金( Harrison Fellowship )을 周旋해주기까지 했다. [2]

博士學位 取得 當時의 모습.

클라인은 當時 서른 세 살의 젊은 敎授였는데, 이휘소는 클라인과 함께 共同 硏究를 遂行하면서 自身의 博士 學位 論文에 조금씩 다가갔다. 그러다 1960年 11月에 〈K + 中間子와 核子 産卵 現象의 二重 分散 關係〉( Study of K + Scattering in the Double Dispersion Representation )으로 物理學 博士 ( Doctor of Philosophy ) 學位를 받았는데 이때 나이는 不過 25歲였다. 그가 博士 學位證을 公式的으로 받은 것은 1961年 2月 4日이었다. 博士 論文 디펜스가 끝난 11月부터 1961年 8月까지, 이휘소는 펜실베이니아 大學校 의 博士後 硏究員 및 專任 講師로 任用됐다. [2]

以後 이휘소는 프린스턴 高等硏究所 의 硏究會員으로 招聘됐는데 그 任期는 1年이었다. 任期가 끝난 後부터의 職場 生活을 생각해야 했지만, 그는 클라인의 配慮 德分에 1961年度부터 펜실베이니아 大學校의 助敎授로 任用됐다. 이휘소는 助敎授로서 프린스턴 高等硏究所의 硏究會員에 房門 硏究를 할 수 있어서, 프린스턴 高等硏究所의 任期가 끝난 以後의 걱정을 할 必要가 없었다. [週 6] 이휘소는 프린스턴 高等硏究所로 떠나기 前에, 美國 各地 大學의 敎員으로 任用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될 또래 同僚들과 함께 記念 삼아 群論을 아원자 粒子 理論에 應用하는 것에 關한 共同 論文을 執筆하였고, 이를 《 리뷰 오브 모던 피직스 》에 寄稿하였다. [2] [4]

프린스턴 高等硏究所 및 펜실베이니아 大學校에서 [ 編輯 ]

프린스턴 高等硏究所

1961年 가을, 이휘소는 韓國人으로서는 最初로 프린스턴 高等硏究所 自然科學部의 硏究會員이 됐으며 프린스턴 高等硏究所의 아인슈타인 가 31番地에 位置한 未婚者用 耆宿 아파트에 살았다. 이휘소는 저녁 食事나 술자리 같은 私的 모임에 거의 參席하지 않고 밤낮없이 硏究室에만 붙어 있었다고 傳해진다. 이 무렵, 이휘소는 量-밀스 理論 의 量子化에 큰 關心을 가지고 있었다. [週 7] [2]

이듬해 2月에 뉴욕 맨해튼 컬럼비아 大學校 의 主任敎授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 가 이휘소에게 直接 電話를 걸어 컬럼비아 大學校의 助敎授로 採用하고 싶다고 提案해 왔다. 그러나 이휘소는 프린스턴 高等硏究所에 오기 前부터 이미 펜실베이니아 大學校 助敎授로 任用돼 있었기에 혼자 決定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휘소는 自身을 助敎授로 만들어줬던 클라인에게 連絡하여 이 問題에 關해 相議하였다. 클라인은 이휘소의 프린스턴 高等硏究所 任期를 經歷으로 認定하여 펜실베이니아 大學校로 復歸하는 대로 副敎授로 昇進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約束하였고, 이에 이휘소는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의 提案을 鄭重히 拒絶했다. [2]

이휘소는 필라델피아 를 떠나 프린스턴 으로 올 무렵 말레이시아 華僑 인 마리안 文 칭 審과 交際를 始作하였고, 프린스턴 高等硏究所에 勤務할 때 한 달에 한두 番 程度의 週末에 필라델피아로 돌아가서 마리안과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다 1962年 3月에 두 사람은 約婚하였고 美國 移民國에서 이휘소의 永住權이 나오는 대로 結婚하기로 했다. [週 8] 이 해 5月 7日에 이휘소는 워싱턴에서 마리안과 結婚式을 올렸는데 當時 나이는 27歲였다. 그女 사이에 아들 제프리 파운틴 리와 딸 아이린 앤 里를 두었다. [2]

1962年 6月 初, 이휘소는 國際 原子力 機構 가 主催하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理論物理學 세미나( Seminar on Theoretical Physics )에 參席할 10人의 美國 代表團 一員으로 選出됐다. [週 9] 트리에스테 理論物理學 세미나는 1962年 7月 16日부터 8月 25日까지 開催됐다. 이 무렵 이휘소는 젊은 硏究者로서 美國 內에서 無視 못할 名聲과 뛰어난 才能을 가지고 있던 것은 事實이지만, 아직은 큰 成果를 내지는 않았다. 그의 重要한 學問的 成果는 모두 1970年代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始作한다. 그러므로 '60年에 中盤에 이미 노벨賞을 주어야 했다'거나 '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지만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는 等 몇몇 小說들에서 나타난 描寫는 지나치게 誇張된 것으로 事實과 다르다. [2]

1963年에 이휘소는 앨프레드 P. 슬론 財團 의 硏究會員職을 遂行하였다. [5] 또한 이 해에 프린스턴 高等硏究所 에서 펜실베이니아 大學校로 復歸했고 클라인의 約束대로 바로 副敎授로 昇進하였다. 當時 그에게는 世界 各國에서 열리는 重要한 物理學會를 비롯해 여러 大學과 硏究所에서 講演 招請이 줄을 이었기 때문에 出張이 잦았다. 1965年에 그는 다시 鄭敎授 로 昇進하였는데 이는 比較的 빠른 便이었다. [週 10] [2]

뉴욕 州立 大學校 스토니브룩 在職 時期 [ 編輯 ]

양전닝

1965年 가을에 프린스턴 高等硏究所의 敎授로 在職하고 있던 양전닝 이 이휘소를 찾아왔다. 그가 뉴욕 州立 大學校 스토니브룩 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碩座敎授( Albert Einstein Professorship of Physics )로 옮겨가게 됐는데 이휘소에게도 함께 가자고 勸誘하기 위해서였다. [週 11] 이휘소는 1966年 5月 16日에 뉴욕 州立 大學校 스토니브룩에 訪問 敎授로 招請돼 8月 31日까지 在職하였으며, 가을學期가 始作되고 9月 25日부터 양전닝 理論物理學 硏究所 의 正敎授로 赴任하였다. [週 12] [2]

當時에는 論文 原稿를 提出하여 審査가 끝나 學術誌에 揭載될 때까지는 最小 半 年 程度가 걸렸으며 《 피지컬 리뷰 레터 》만 해도 最小 한 달 以上은 覺悟해야 했다. 하지만 粒子物理學은 硏究 템포가 그 어떤 學問보다도 빠른 便이었다. 그래서 論文 한 篇을 學術誌에 發表할 때도 그 論文이 나오기 前까지 時間이 많이 걸리기에 누군가 反論을 提起하거나 이 反論을 引用한 論文을 이미 썼을 可能性이 充分했다. [週 13] 이 때문에 學術誌에 실리기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關心을 가진 學者들에게 硏究 內容을 미리 알릴 必要가 있었다. [週 14] 當時에는 모든 物理學者들이 스탠퍼드 線形 加速器 센터 에서 運營하는 스탠퍼드 物理學 情報 檢索 시스템 에 寫本을 보내 登錄하고 그 곳에서 發刊하는 프리프린트 리스트를 定期的으로 購讀하였다. 그러다가 리스트에서 關心이 가는 論文을 發見하면 著者에게 葉書를 띄워 寫本을 要請하고, 그러면 그 著者의 好意로 寫本을 겨우 받아볼 수 있는 形態로, 論文을 받아보기까지는 時間이 꽤 걸렸다. 當時 이휘소는 엄청난 分量의 프리프린트 모음집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를 바탕으로 世界 各國의 碩學들을 찾아다니며 交流하고 共同 硏究를 遂行하며 많은 知識을 쌓았다고 傳해진다. [2]

스티븐 와인버그

1967年 11月에 스티븐 와인버그 는 《피지컬 리뷰 레터》에 짧은 論文 [6] 을 發表했고 이휘소는 論文 揭載 審査를 依賴받아 이를 읽었다. 와인버그는 이 論文에서 弱한 相互 作用에 關한 說明을 試圖하였다. 弱한 相互 作用은 自然系의 네 가지 相互 作用 中 하나인데, 이러한 네 가지 相互 作用들을 媒介하는 役割을 하는 것이 電子 , 글루온 等의 게이지 보손 이다. 이들은 모두 게이지 對稱性이 있는데, 이 對稱性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一旦 게이지 보손 의 質量이 0이어야 한다. 그러나 弱한 相互 作用을 媒介하는 弱한 보손만큼은 質量을 가지고 있다는 事實이 알려졌으며 이는 그때까지의 생각으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또 弱한 相互 作用에 關해서는 現象으로만 整理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 무렵 스티븐 와인버그는 이 게이지 對稱性이 自發的으로 깨졌다 고 하여 거기서부터 게이지 粒子의 質量을 자연스럽게 얻으려는 獨創的인 試圖를 하고 있었다. 그는 비록 그 論文에서 모든 計算에 成功하지는 못했지만 이 方法이 맞을 거라는 妥當한 根據를 提示하고 있었다. [週 15] [2]

이휘소는 1968年에 美國 市民權을 取得하였다. [週 16] 그는 美國 市民이 된 直後 이듬해인 1969年까지 구겐하임 펠로십 ( 1968年에 授與된 구겐하임 펠로십의 目錄 , No.128)으로 일했는데 이 期間에 그는 프랑스 에서 家族과 함께 休暇 를 보내면서 파리 第11代學校 에서 세미나를 갖기도 하고, 프랑스 高等硏究實習원 에서 자유롭게 硏究를 遂行했다. 이곳에서 그는 自發的으로 對稱性이 부서지는 現象 과 그에 依한 嬾夫-골드스톤 보손 에 깊은 關心을 가졌으며, 머리 겔만 과 모리스 레비( Maurice Levy )가 定立한 線形 시그마 模型 再規格化 에 關한 몇 篇의 論文을 執筆하였다. [2] [7] [8]

1970年 6月, 이휘소는 코르시카 카르제스 여름學校에 講演者로 招請됐다. 이곳에서 이휘소는 시그마 模型의 自發的으로 부서진 對稱性과 그 再規格化 에 關해 講義하였다. 當時 네덜란드의 젊은 大學院生 헤라르뒤스 엇호프트 는 指導敎授였던 마르티뉘스 펠트만 과 함께 量-밀스 理論 의 再規格化에 關해 硏究하고 있었고, 그도 여기서 이휘소의 講義를 들었는데 이것이 決定的인 도움이 되었다고 後날 回顧하였다. [9] 카르제스 여름學校에서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서는 소비에트 聯邦 키예프 에서 열린 第15回 高에너지 物理學 國際會議 에 參加하며 共産圈 國家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이 會議는 8月 26日부터 9月 4日까지 開催되었다. [2] [10]

1971年 前半期에 이휘소는 머리 겔만 의 招請으로 로스앤젤레스 近處 패서디나 에 있는 캘리포니아 工科大學校 의 交換 敎授로 5個月間 在職하였다. 이 해 여름에 이휘소는 當時 한국과학원 정근모 副院長과 함께 大韓民國에서 物理學 여름 學校를 定期的으로 開催하는 事業을 積極 推進하고 있었다. [週 17] 그의 構想은 相當히 具體的이었지만 大韓民國에서 獨裁體制가 强化되는 것에 큰 憂慮를 표하면서 모두 없었던 일로 하는 便紙를 보내게 됐다.

衛戍令 發動, 學生運動 彈壓 等 最近 韓國에서 일어나고 있는 一連의 事態로 우리가 推進中인 여름 學校 事業을 再考하게 됩니다. (中略)… 여름 學校의 責任을 맡게 된다면 내가 韓國의 現 政權과 그 抑壓 政策을 支持하는 것으로 보일까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難處한 立場입니다. 한便으로는 韓國의 科學 發展을 위하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 다른 한便으로는 民主主義의 原則을 無視하는 이러한 處事들에 失望되어 反對 意思를 分明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韓國 政府에서 이에 關한 招請이 오더라도 受諾하지 않을 決心입니다. 엉뚱한 짓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韓國 國民의 將來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擇할 수 있는 唯一한 길입니다.

 
— 1972年 初, 정근모에게 보낸 書信
헤라르뒤스 엇호프트

한便, 헤라르뒤스 엇호프트 는 카르제스 여름學校의 이휘소에게서 얻은 아이디어를 利用하여 마르티뉘스 펠트만 과 함께 量-밀스 理論 의 再規格化에 成功하였고, 이를 1972年 여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의 粒子物理學 國際學術會議에서 發表하였다. 하지만 當時 이들의 設計는 一般的인 境遇에 모두 適用되지 않았고, 當時 物理學者들이 쉽게 理解하기 힘든 內容이었다. 이휘소가 팔을 걷고 나서 이를 알기 쉽게 풀어쓰고 經路積分 形式 等의 다른 設計까지 擴張하여 敍述하여 그제서야 많은 物理學者들이 理解할 수 있었다. [11] [12] [13] [14] 엇호프트와 펠트만은 이러한 功績을 認定받아 1999年에 노벨 物理學賞 을 受賞했다. [2]

1972年 10月에 朴正熙 가 自身의 獨裁를 위한 維新 憲法 을 宣布하자 이휘소는 外國人 同僚를 對하기가 부끄럽다고 가까운 韓國人 親舊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강경식 前 브라운 大學校 敎授는 當時 在美韓人科學技術者協會 副會長이었고, 가끔 母國 訪問 學術會議나 下溪 심포지엄의 年事 招請의 受諾을 이휘소에게 勸誘하곤 했는데 그 때마다 이휘소는 朴正熙가 獨裁를 繼續하고 있는 限은 말도 꺼내지 말라고 斷乎히 拒絶하곤 했다. [2]

이휘소의 代表的인 弟子로 강주상 高麗大學校 物理學科 名譽敎授가 있다. 그는 이 무렵 뉴욕 州立 大學校 스토니브룩에서 이휘소에게 博士 學位 論文 指導를 받고 있었고, 이휘소가 客員敎授로 캘리포니아 工科大學校 에 있을 때에도 한 學期 동안 그를 따라가서 硏究하기도 했다. 이휘소는 美國 市民이 됐지만 大韓民國에 對한 關心은 한時도 버리지 않았고 강주상과 함께 韓國의 政治, 經濟, 社會 問題를 자주 이야기하였다. 어느 날에는 核武器 에 關한 이야기가 話題가 됐는데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自身의 立場을 분명하게 披瀝하였다고 강주상은 記憶하고 있다.

核武器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特히 獨裁가 行해지고 있는 開發途上國에서의 核武器 開發은 決코 許容해서는 안 된다. [2]
 
— 이휘소

1972年 가을學期에 이휘소는 뉴욕 州立 大學校 스토니브룩에서 게이지 理論에 關한 大學院 講義를 했는데 이 講義錄을 어네스트 S. 에이버스라는 젋은 大學院生이 整理하여 이휘소와 함께 《 피직스 리포트 》에 單行本 形式으로 發表하였다. [2] [15]

페르미 硏究所 在職 時期 [ 編輯 ]

페르미 硏究所

이휘소는 1973年 9月에 페르미 硏究所 의 理論物理學 部長으로 赴任하였고, 이 해 9月부터 1975年 8月까지 브룩헤이븐 國立硏究所 高에너지 諮問 委員을 맡았다. 이 무렵에는 곳곳에서 그를 스카우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매사추세츠 工科大學校 는 1973年 5月 23日子로 그에게 物理學科 敎授職을 提案한다는 便紙를 보냈고, 페르미 硏究所에서도 理論 物理學 部長( Head of the theoretical physics department )職을 提案하였다. [週 18] 이휘소는 양전닝 과 相議한 끝에 페르미 硏究所로 移職하기로 했다. 그는 페르미 硏究所의 理論物理學 部長에 就任하면서 1974年 4月부터 시카고 大學校 의 敎授도 兼任하기로 했다. 俸給은 페르미 硏究所에서 받고, 시카고 大學校에서는 一種의 아르바이트로 일하기로 했는데 이휘소만 願한다면 언제든 專任敎授가 될 수도 있었다. 뉴욕 州立 大學校 스토니브룩 에서는 1966年 8月 31日부터 이휘소를 休職 處理해주며 1974年 9月 25日부터 物理學科 先導 敎授( leading professor )에 任用하는 特別 待遇를 해주어 그를 떠나보내는 아쉬운 마음을 代身하였다. [週 19] 페르미 硏究所의 理論物理學 部長으로 在職하며 이휘소는 이곳에서 거의 모든 理論 硏究에 關與하고 實驗 計劃 樹立에도 參與하였다. 1974年 6月부터는 스탠퍼드 線形 加速器 센터 의 科學政策委員會 諮問委員을 맡았다. 이 任期는 1978年 8月까지였다. [2]

韓國의 基礎科學育成을 力說하는 이휘소 博士

1974年에 이휘소는 英國 런던 에서 7月 1日부터 7月 10日까지 開催된 第 17回 高에너지 物理學 國際會議 에 參加하였다. [16] 그는 全體 會議의 演士로 招請되어 煎藥 理論의 그 때까지의 發展 狀況을 整理하여 發表했다. 이 무렵 와인버그의 1967年 論文 [6] 은 相當히 有名해져서 煎藥 理論은 一般的으로 ‘와인버그 理論’이라고 불렸지만, 이 會議에서 이휘소는 煎藥 理論에 對한 압두스 살람 의 貢獻을 認定하고 自身의 發表에서 이 理論을 ‘와인버그-살람 理論’이라 불렀다. 以後 學界에서는 이휘소의 命名을 尊重하여 와인버그-살람 理論이라는 名稱이 널리 쓰이게 됐고, 이 德에 압두스 살람은 스티븐 와인버그 , 셸던 글래쇼 와 함께 1979年 노벨 物理學賞 을 共同 受賞하게 됐다. [2]

1974年에 이휘소는 20餘 年 만에 잠깐 歸國을 한다. 美國 國際開發廳 借款에 依한 서울大學校 援助 計劃의 美國 側 評價委員 資格이었다. 評價委員들의 援助 妥當性 調査 事業은 그 해 9月 1日부터 10月 2日까지 한 달 동안 進行됐다. 朴正熙 의 獨裁 政權이 繼續되는 韓銀 決斷코 大韓民國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던 이휘소가 어떻게 USAID의 評價委員 委囑을 受諾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大韓民國 側에서 推薦하였다는 理由로 美 國務部가 說得했을 수도 있고, 그래도 最小限 韓國의 科學 敎育 만큼은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周圍 同僚들의 勸誘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2]

표트르 레오니圖비치 카피차

소비에트 聯邦 의 物理學者로 표트르 레오니圖비치 카피차 가 있다. 그는 1918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工科 大學校를 卒業하고 1930年代에 大英帝國 케임브리지 大學校 等에서 活躍하며 名聲을 떨쳤다. [週 20] 자연스럽게 當時 蘇聯 共産黨 書記長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 은 優秀한 人材인 그가 母國에서 硏究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蘇聯에 抑留될 것을 念慮한 카피차는 身邊 保障이 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며 拒絶했는데 스탈린은 이에 直接 身邊 保障 覺書를 써주면서까지 母國 訪問을 慫慂했다. 그렇게 하여 카피차는 每年 여름 스탈린의 覺書를 받고서 蘇聯을 訪問하게 됐는데 어느 해에는 카피차의 여름 訪問 時期가 다가오는데도 不拘하고 스탈린의 身邊 保障 覺書가 到着하지 않았다. 하지만 大使館 官吏는 行政 處理가 늦어지고 있는 것일 뿐이니 걱정 말고 于先 蘇聯으로 出發하라고 재촉하였다. 이미 여러 番 蘇聯을 往來한 바 있는 카피차는 別 疑心 없이 歸國길에 올랐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 길로 結局 蘇聯에 抑留되고 말았고 꼼짝없이 平生을 그곳에서 지내면서 硏究할 수밖에 없게 됐다. [2]

이휘소는 이 事件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朴正熙 獨裁政權 下衣 大韓民國 訪問에 對해 더더욱 警戒心을 갖고 있었다. [週 21] 하지만 이番에는 個人 資格이 아니라 美國 政府 代表團의 一員으로 訪問하는 것이기 때문에 朴正熙는 스탈린이 카피차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음대로 이휘소에게 손을 뻗지는 못할 狀況이었다. 그럼에도 이휘소는 萬全을 期하여 身邊 保障이 確實한 駐韓美軍 龍山基地 옆의 駐韓 美國 大使館 職員 宿所에 묵기로 하였으며, 그래도 安心이 되지 않았는지 自身이 大韓民國을 訪問하는 동안 萬에 하나 朴正熙가 自身에게 손을 댈 境遇 반드시 卽時 도움을 要請해야 할 곳들의 連絡處를 페르미 硏究所의 祕書에게 단단히 일러두고서야 겨우 大韓民國으로 떠났다. [週 22]

그는 1976年에 다시 프린스턴 高等硏究所 硏究會員으로 招請됐으며, 또한 이 해에 美國 藝術-科學 아카데미 의 會員으로 選出됐다. [17]

交通事故 [ 編輯 ]

이휘소는 1977年 6月 16日 午後 1時 22分 警, 一理노이州 케와니 近方의 80番 주간 高速道路 床에서 交通事故로 숨졌다. 當時 그는 페르미 硏究所의 여름 硏究 審議會에 參加하기 위해 家族들과 함께 콜로라도州 애스펀 으로 向하던 中이었다. [18] [19]

《科學과 技術》 1994年 1月號에 실린 〈내가 아는 故 이휘소 博士〉라는 강경식 前 브라운 大學校 敎授의 特別寄稿文에는 當時 이휘소의 祕書가 事故 直後 강경식에게 電話를 걸어 說明한 事故 當時 狀況이 실려 있다. 이휘소는 1977年 6月 16日 12時가 되기 前에 家族들을 태우고 콜로라도州 아스펜 詩로 出發했고, 그로부터 約 1時間 30分 間 일리노이州 內의 高速道路 I-80 아이오와州 境界로부터 約 30마일 떨어진 地點까지 正規速度 55마일로 運轉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午後 1時 22分 警, 건너便 內部高速道路線을 東쪽으로 달리던 大型 트레일러의 타이어 가 터지면서 中心을 잃어 調整을 못하고 中央分離地域을 넘어와 西쪽으로 달리고 있던 이휘소의 車輛의 運轉席을 덮쳤다. 이 事故로 이휘소 家族들은 輕微한 負傷을 입었지만, 本人은 卽死했다. [20] 한便, 事故 經緯를 이휘소의 同僚의 傳言 形式으로 報道한 1977年 6月 18日子 뉴욕 타임스 訃告 記事는 이휘소 一家가 탄 車輛의 對向 車線에서 달려오던 트럭의 타이어에 펑크가 났고, 트럭이 高速道路 中央의 中央分離帶를 미끄러져 가다가 午後 1時 22分頃에 마주 오던 이휘소 一家의 乘用車와 衝突했다고 傳하고 있다. [21]

또한 KBS 의 取材로 發見된 일리노이州 警察署에 保管돼 있는 當時 事故 記錄에 依하면 이휘소의 車輛은 1975年型 닷지 다트 [22] 로 幅이 約 20미터인 잔디밭 中央分離地帶를 가로질러온 36톤級 탱크 트럭 [週 23] 과 衝突하였다. 當時 加害 트럭運轉士 존 L. 루이스는 트럭에서 큰 소리가 나더니( heard a noise ), 트럭이 오른쪽으로 꺾였다가( swerved to right ), 다시 왼쪽으로 꺾였다( swerved to left )고 陳述했는데 大德大學 自動車學部 이호근 敎授는 그 큰 소리의 原因을 타이어의 펑크라고 推測하였다. [23]

타이어의 펑크에 있어서, 큰 트레일러와 같은 境遇에는 危險性이 더욱 커지고, 專門 敎育을 받지 않은 一般人들은 唐慌하면서 핸들을 過激하게 造作하거나 特히 急브레이크를 밟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車가 統制 不能 狀態에 빠진다. [23]

? 이호근(大德大學 自動車學部 敎授)

또한 事故 記錄에는 트럭의 앞部分과 뒷部分이 直角으로 꺾였다고 記錄돼 있다. [週 24] 이 狀況에서 트럭이 20미터를 미끄러져 對向 車線을 侵犯하게 된 理由에 對해 이호근 敎授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23]

아스팔트 나 시멘트 道路에서의 摩擦 係數는 制御가 可能하지만, 잔디 위에 올라타게 되면 거의 스케이트 타듯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한番 미끄러지면 그 狀況에서는 方向 轉換 等이 絶對 不可能하고 進行 方向으로 곧게 나간다고 봐야 한다. [23]

? 이호근(大德大學 自動車學部 敎授)

또한 意圖的으로 펑크를 내어 이휘소의 車를 덮칠 可能性을 알아보기 위해 KBS 取材陣과 大德大學 自動車學部 側이 數次例에 걸쳐 意圖的인 펑크 實驗을 했는데 펑크 直後의 車의 軌跡은 일정하지 않았다. 이 實驗 結果와 함께, 이호근 敎授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23]

高速道路 中央에 緩衝 地帶 가 路面 才質이 다른 잔디로 되어 있고, 또 對向車線에서 오는 車輛의 速度도 不明確하고, 또 어느 車線으로 올지도 不明確하며(80번 주간 高速道路는 當時 往復 4車線), 또 트럭 自身이 車線을 離脫해서 中央分離帶를 넘어가는 狀況에서 反對便에서 오는 車가 急브레이크를 밟을 지 車線을 變更할지 모르는 狀況이다. 이런 狀況에서 統制 不能 狀態로 對向 車線의 自動車를 意圖的으로 價格해서 衝突시킨다는 것은 理論的으로 不可能한 狀況이다. [23]

? 이호근(大德大學 自動車學部 敎授)

事後 [ 編輯 ]

이휘소는 1977年 10月에 國民勳章 동백장 에 追敍됐으며, [24] 2006年에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에 依해 韓國科學技術人 名譽의 殿堂에 憲政(2005年度 憲政 對象者)됐다. [25] 이휘소의 事後, 小說家 김진명 에 依하여 이휘소의 生涯를 主題로 한 小說 《 無窮花 꽃이 피었습니다 》가 出版됐는데, 이에 對해 이휘소의 未亡人( Marianne Mun Ching Sim , 中國語 : 沈曼菁 ) 等 遺族에 依하여 小說에서 이휘소 博士의 日記, 便紙 等을 無斷 轉載하거나 引用하여 著作權과 프라이버시가 侵害되었다.

또 이휘소 博士가 交通事故로 死亡하였음에도 小說에서 大韓民國의 核開發과 關聯하여 美國의 情報機關에 依한 工作에 依하여 殺害된 것으로 描寫하여 故人의 名譽가 毁損됐다는 點을 理由로 小說의 出版 및 販賣 禁止 等 假處分申請이 있었으나, [26] 法院에서는 原告의 請求를 棄却하였다. [27]

業績 [ 編輯 ]

自發的으로 對稱性이 깨진 게이지 理論의 再規格化 [ 編輯 ]

이휘소

1964年에 이휘소는 그의 指導敎授 클라인과 自發的인 對稱性 깨짐 에 關한 論文 [28] 을 發表, 基本 粒子의 質量의 存在를 糾明하는 힉스 메커니즘 이 登場하게 하는 데 寄與하였다. 基本 粒子들은 게이지 粒子를 共有하면서 相互作用을 하는데, 이때까지 세워진 게이지 理論 만으로는 自然스럽게 質量의 存在를 說明할 수 없었다. 局所 게이지 對稱性을 갖는 라그랑地言 에는 게이지 보손의 質量 項이 없고, 任意로 만든다고 해도 局所 게이지 變換에 對해 不變이지 않아 局所 게이지 對稱性을 違反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게이지 보손은 質量이 없어야 한다는 結論이 나온다. 한便 20世紀 中盤, 嬾夫 요이치로 제프리 골드스톤 等에 依해 “반드시 對稱的인 狀態만이 가장 安定的이지는 않으며, 境遇에 따라서는 對稱的인 狀態보다도 더 安定的인 狀態가 있을 수 있고, 萬若 그렇다면 自然系는 스스로 對稱을 깨서라도 더 安定的인 狀態가 되는 쪽을 選擇한다”는 自發的으로 對稱性이 깨지는 可能性이 提起됐다. 그리고 골드스톤의 定理에 依하면 自發的으로 對稱性이 깨진 理論에는 반드시 무質量 粒子가 存在하며 그러한 粒子를 골드스톤 보손 이라 定義한다. 이휘소와 클라인은 對稱性의 自發的인 깨짐의 例로서 當時 有名했던 超傳導體 와 하나하나 比較해가며 무엇이 골드스톤 步손이 될 수 있는지를 論했고, 結局 무質量 粒子로서 追加的인 스푸리온( Spurion )이 必要하다고 提起하였다. 이 論文이 쓰여질 當時에는 힉스 보손 의 存在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論文은 힉스 메커니즘과 같은 理論의 登場을 促進하는 役割을 한 셈이다.

1969年에는 自發 對稱 깨짐을 論할 때 장난감 模型으로서 代表的으로 愛用되고 있는 시그마 模型 再規格化 에 成功하였다. [7] [8] 이런 가운데 當時 네덜란드 의 大學院生이던 헤라르뒤스 엇호프트 는 힉스 메커니즘을 量-밀스 理論 에 適用하여 非可換 게이지 理論의 局所 對稱性이 自發的으로 깨지는 模型을 硏究하고 있었다. 그는 1970年 프랑스領 코르시카 카르제스 여름學校에서 이휘소의 講義를 들었는데 이때 그는 그의 學位 論文 主題였던 自發的으로 對稱性이 깨진 非可換 게이지 理論 의 再規格化에 對해 決定的인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마침내 이에 成功하게 된다. [29] 엇호프트는 이 業績으로 1999年에 當時 自身의 指導敎授였던 펠트灣과 함께 노벨 物理學賞 을 受賞하였다. [30] [31] [週 25]

데이비드 폴리處 는 그의 2004年 노벨賞 受賞 講演에서 이휘소가 煎藥 理論에 對한 엇호프트의 硏究結果를 再解釋하여 알기 쉽게 풀어 쓴 德分에 當時 學者들이 그 重要性을 認識하게 됐다고 말하였다. [32] 여기서 폴리妻家 말하고 있는 것은 이휘소가 뉴욕 州立 大學校 스토니브룩 에서 1972年 가을學期에 講義했던 內容을 大學院生 어네스트 에이버스와 함께 整理해서 《 피직스 리포트 》에 單行本 形式으로 發表한 〈게이지 理論〉 [15] 이라는 論文이다. 이것은 헤라르뒤스 엇호프트가 서울大學校 이수종 敎授에게 보낸 便紙에도 仔細히 言及돼 있다. [9]

맵시 쿼크의 質量 豫測 [ 編輯 ]

아원자 粒子 베타 崩壞 와 함께 그 殿下 를 바꾸게 되는데, 아주 드문 境遇이지만 베타 崩壞를 하고 나서도 電荷가 變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을 中性 保存類 라 한다. 하지만 硏究 結果 奇妙도 를 가진 粒子가 베타 崩壞를 하면 언제나 中性 保存類가 없다는 흥미로운 結論이 내려졌다. 이것을 說明하기 위해 셸던 글래쇼 , 이오아니스 一理誤풀로스 , 累差노 마이아니 는 1970年에, 맵시 쿼크 (或은 참쿼크)라는 또다른 쿼크 의 存在를 假定하여 이를 說明하였다. 이에 이휘소는 1974年 여름에 메리 게일러드 (Mary K. Gaillard), 조너선 로즈너와 함께 〈참쿼크를 찾아서〉 [33] 라는 論文에서 케이온 의 섞임과 崩壞에 該當하는 量을 計算하여 맵시 쿼크가 存在한다면 그가 가질 수 있는 質量 範圍를 豫測하였다.

이 論文을 指針書로 삼아 探索 作業이 이뤄졌는데 이 論文이 저널에 실리기도 前인 이 해 11月 11日, 스탠퍼드 線形 加速器 센터 버튼 릭터 硏究陣과 브룩헤이븐 國立硏究所 새뮤얼 差誤 衝 팅 硏究陣이 맵시 쿼크와 그 反쿼크가 結合해서 이루어진 제이/프시 中間者 가 發見되었다. 따라서 맵시 쿼크의 存在가 間接的으로 確認되었다. 이것이 可能했던 理由는 이휘소 等이 論文을 저널에 寄稿하면서 프리프린트 [34] 로 公開하였고, 맵시 쿼크 探索 實驗의 指針書로 使用된 것은 正式 出版된 論文이 아니라 프리프린트였기 때문이다. 이휘소가 USAID 評價委員으로 母國에 一時 歸國하기 直前에 作成해서 프리프린트로 公開한 것이 서울大學校 評價가 끝난 後 美國에 돌아와 채 두 달도 걸리지 않아 發見된 셈이다.

物理宇宙論的 리-와인버그 警戒의 計算 [ 編輯 ]

1977年에 이휘소는 스티븐 와인버그 와 함께 〈무거운 뉴트리노 質量의 宇宙論的 最小 境界値〉라는 題目의 論文을 發表하였다. [35] 이 論文에서 그들은 初期 宇宙 膨脹의 痕跡으로 雙消滅을 통해 이윽고 다른 粒子로 바뀌는, 充分히 무거우며 또한 安定的인 粒子가 남아있다면 그들의 相互作用의 세기는 最小限 2 GeV 일 것이라고 豫想하였다. 여기에서 이들이 다룬 粒子는 윔프 이다. 윔프의 質量이 작아질수록 그 雙消滅 反應 斷面的 의 크기도 작아져야 하는데, 이는 大略 ? m 2 / M 4 程度이다. 여기서 m 은 윔프의 質量이며, M Z보손 의 質量이다. 이것은 初期 宇宙에서 豐富하게 生産된 윔프들 中 가벼운 윔프는 무거운 윔프보다 보다 일찍 相互作用을 그만둔, 卽 宇宙의 溫度가 보다 더 높았을 때에 相互作用을 그만둔 윔프라는 것을 意味한다. 이휘소와 스티븐 와인버그의 計算에 依하면, 윔프의 質量이 ~ 2 GeV보다도 가볍다면 그 痕跡의 密度는 宇宙의 스케일을 뛰어넘는, 卽 있을 수 없는 값을 갖게 된다. 윔프의 質量이 더 以上 작아질 수 없는 이 境界를 리-와인버그 警戒 라고 한다.

이 論文은 《 피지컬 리뷰 레터 》가 1977年 5月 13日에 接受되었고, 1977年 7月 25日에 第 39卷의 네 番째 號에 실렸다. 그러나 이휘소는 그해 6月 16日에 交通事故로 숨졌기 때문에 이 論文의 出版을 볼 수 없었고 이 論文은 事實上 그의 遺作이었다. 이와 같은 因緣은 스티븐 와인버그가 크리스 퀵과 함께 直接 피직스 투데이에 이휘소의 訃告 論文 [18] 을 쓰게 된 하나의 契機가 됐다. 크리스 퀵은 이휘소의 뒤를 이어 페르미 硏究所 의 次期 理論物理學 部長이 됐다.

家計 [ 編輯 ]

  • 아버지: 이봉춘 (李逢春)
  • 어머니: 박순희 (朴順姬)
    • 둘째 女同生: 二嶺自 (한 살 아래)
    • 셋째 男동생: 이철웅 (네 살 아래)
    • 막내 男동생: 이무언 (여섯 살 아래)
  • 配偶者: 마리안 文 칭 審 ( Marianne Mun Ching Sim , 中國語 : 沈曼菁 )
    • 아들: 제프리 파운틴 리 ( Geoffrey Fountain Lee )
    • 딸: 아이린 앤 리 ( Irene Anne Lee )

著書 및 論文 [ 編輯 ]

著書 [ 編輯 ]

論文 [ 編輯 ]

  • 이휘소 (1958年 12月). “Dispersion Relation for Nonrelativistic Potential Scattering” [非相對論的 포텐셜 産卵에서의 分散 關係]. 《 피지컬 리뷰 》 (英語) 112 (6): 2122?2124. doi : 10.1103/PhysRev.112.2122 .  
  • 에이브러햄 클라인; 이휘소 (1964年 3月). “Does Spontaneous Breakdown of Symmetry Imply Zero-Mass Particles?” [對稱性의 自發的 부서짐은 무質量 粒子를 의미하는가?]. 《 피지컬 리뷰 레터 》 (英語) 12 (10): 266?268. doi : 10.1103/PhysRevLett.12.266 .  
  • 이휘소 (1968年 6月). “Chiral Dynamics of Octet Baryons and Nonleptonic Decays of Hyperons” [옥텟 바리온, 그리고 하이페론의 렙톤答紙 않은 崩壞에 있어서의 손知己 力學]. 《 피지컬 리뷰 》 (英語) 170 (5): 1359?1364. doi : 10.1103/PhysRev.170.1359 .  
  • 이휘소; 腸 陳-주스탕 (1972年 6月). “Spontaneously Broken Gauge Symmetries. II. Perturbation Theory and Renormalization” [自發的으로 부서진 게이지 對稱性 II. 攝動 理論과 再規格化]. 《 피지컬 리뷰 D 》 (英語) 5 (12): 3137?3155. doi : 10.1103/PhysRevD.5.3137 .  
  • 이휘소; 腸 陳-주스탕 (1972年 6月). “Spontaneously Broken Gauge Symmetries. III. Equivalence” [自發的으로 부서진 게이지 對稱性 III. 等價性]. 《 피지컬 리뷰 D 》 (英語) 5 (12): 3155?3160. doi : 10.1103/PhysRevD.5.3155 .  
  • 이휘소; 腸 陳-주스탕 (1973年 2月). “Spontaneously Broken Gauge Symmetries. IV. General Gauge Formulation” [自發的으로 부서진 게이지 對稱性 IV. 一般 게이지 形式]. 《 피지컬 리뷰 D 》 (英語) 7 (4): 1049?1056. doi : 10.1103/PhysRevD.7.1049 .  
  • 이휘소; 腸 陳-주스탕 (1973年 12月). “Erratum: Spontaneously Broken Gauge Symmetries. II. Perturbation Theory and Renormalization” [訂正: 自發的으로 부서진 게이지 對稱性 II. 攝動 理論과 再規格化]. 《 피지컬 리뷰 D 》 (英語) 8 (12): 4654?4654. doi : 10.1103/PhysRevD.8.4654 .  

關聯 資料 [ 編輯 ]

텔레비전 프로그램 [ 編輯 ]

圖書 [ 編輯 ]

各州 [ 編輯 ]

內容主 [ 編輯 ]

  1. 當時 경성사범학교에 附屬된 國民學校는 모두 세 곳으로, 原則的으로 日本人만이 入學할 수 있지만 朝鮮人의 入學도 아주 不可能하지는 않은 附屬第1國民學校, 그리고 普通 朝鮮人들이 入學하는 附屬第2國民學校, 그리고 主로 敎生들이 가르치는 시골 學生들을 對象으로 하는 單級 國民學校가 그러하였다.
  2. 現在의 學制로 高等學校 1學年에 該當한다.
  3. 區 京城女子師範學校 附屬 女子國民學校이다.
  4. 當時에는 제트機가 普及되지 않았기에 그가 탄 것은 프로펠러 飛行機였다.
  5. 日本語 : 若手夏の?校 와카테 나쓰노 各코 [ * ]
  6. 當時 젊은 硏究者로서 이휘소가 가진 位相을 斟酌할 만한 대목이다.
  7. 非可換 게이지 理論 인 양-밀스 理論까지도 아닌, 量子 電氣力學 과 같은 可換 게이지 理論의 量子化 問題만 하더라도 정준 量子化 로도, 經路積分 量子化 로도 相當한 테크닉을 요하는 高難度 作業이다.
  8. 마리안은 當時 머크 社 硏究所의 세균학자로 勤務하면서 女子 醫科大學 入學을 準備하고 있었는데 交換 비자(J-1 비자)로 美國에 왔기 때문에 滯留 期間이 2年으로 限定돼 있었다. 하지만 이휘소가 美國 永住權을 取得하게 되면 이휘소의 配偶者로서 마리안 또한 自動으로 居住 許可가 나도록 돼있었다. 以後 마리안은 醫科大學에 入學 許可를 받았지만 이휘소의 內助에 專念하기 위해서 醫科大學을 卒業하기만 하고 따로 開業醫 活動은 하지 않기로 했다.
  9. 이 때는 아직 國籍上으로 美國人이 아니었음에도 美國 代表團에 選拔된 것이다.
  10. 1964年에 다시 1年間 프린스턴 高等硏究所의 硏究 會員을 지낸 것을 또 다른 經歷으로 인정받은 結果였다.
  11. 이에 펜실베이니아 大學校 側에서는 그의 殘留를 希望하였으나, 클라인 敎授는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라는 便安한 對答을 해주었다고 傳해진다.
  12. 뉴욕 州立 大學校 스토니브룩으로 轉職하면서 처음으로 單獨住宅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自宅은 硏究室에서 自動車로 10分 程度의 距離에 있었으며, 뉴욕 州立 大學校 스토니브룩은 맨해튼 옆의 롱아일랜드 섬 에 位置해 있었기 때문에 自動車로 15分 程度만 달리면 大西洋 에 이를 수 있었다. 또한 한 時間 程度 달리면 맨해튼에도 接近할 수 있었다.
  13. 또한 잘못된 論文으로 判明될 可能性도 있었다.
  14. 인터넷 이 普遍化된 요즘에야 arXiv 라는 웹사이트가 存在하여 全 世界의 인터넷이 使用 可能한 어떤 物理學者들도 거의 모든 프리프린트 들을 쉽게 찾아서 곧바로 내려 받아 읽어볼 수 있게 됐지만 인터넷이 普及되기도 훨씬 前이었던 當時에는 arXiv 와 같은 惠澤은 꿈도 꿀 수 없었다.
  15. 方法이야 어찌됐든 이것이 醬의 量子論 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또한 再規格化 가 可能함도 보여야 한다. 하지만 위크 保存이 큰 質量을 가졌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正常的인 게이지 對稱性을 가지고 있지 못한 狀況이기 때문에 再規格化는 그리 쉬운 問題가 아니었다.
  16. 이 市民權 取得 審査 때 그의 博士後 硏究員이었던 윌리엄 A. 바딘( William A. Bardeen )이 이휘소의 人性(人性) 證言을 하기도 했다.
  17. 이러한 制度는 이미 유럽과 美國, 日本에서 活潑히 進行되고 있었다.
  18. 甚至於는 이미 페르미 硏究所로 移職한 몇 個月 後인 11月 29日에는 펜실베이니아 大學校 에서 게이롤드 P. 및 메리 루이지 한웰 夕座敎授職( Gaylord P. and Mary Louise Harnwell Professorship )으로 招聘한다는 便紙를 보내오기도 했다.
  19. 이와 같은 措置는 1976年 8月 30日까지 繼續됐다.
  20. 카피차는 極低溫 物理學界에서 活躍하여 當時 世界 最初로 液體 헬륨 을 生成해내는데 成功하였으며 後日 그것의 超流動性을 發見하기도 했다.
  21. 1973年에 모처럼 日本 교토 大學 을 訪問했을 때도 朴正熙 獨裁政權을 警戒하여 일부러 歸國하지 않고, 多少의 不孝이긴 하나 母親을 日本에 모셔서 그 곳에서 帽子 相逢을 했을 程度였다.
  22. 그는 學術會議, 硏究訪問 等으로 外國旅行이 頻繁했지만 이 母國 出張 件처럼 直接 細心하게 챙긴 적은 以前에도 以後에도 없었다고 알려진다.
  23. KBS의 取材에 依하면 그 程度의 크기의 트럭은 當時 탱크 트럭이라는 別名으로 불리고 있었던 듯하다.
  24. 美國에서는 이른바 ‘잭나이프’( jackknifed )라 불리는 狀況이다.
  25. 이들 두 사람은 또한 次元 正則火 를 考案한 것으로도 有名하다. 醬의 量子論 에 있어 運動量 積分을 할 때, 파인만 다이어그램이 루프를 包含하고 있는 境遇, 흔히 積分은 無限大로 發散해 버린다. 이러한 不必要한 無限大를 制御하기 위해 再規格化가 必要한데 再規格化를 遂行하기 以前에 루프 積分을 잘 定義된( well-defined ) 形式으로 풀어 내야 한다. 이와 같은 過程을 ‘正則火’( regularization )라고 한다. 正則化에는 파울리-非야스 正則火( Pauli-Villars regularization ), 자외 컷오프 正則火( ultraviolet cutoff regularization ), 格子 正則火( lattice regularization ) 等이 있는데, 特히 次元 正則化는 자외 發散을 ‘次元의 틈’에 가둔 것이 特徵이다. 다른 正則화들은 者外發散을 多少 거친 方法으로 다루느라 게이지 對稱性을 깨트리기 일쑤이지만 次元 正則化의 境遇에는 形式的으로 任意의 d次元에 對해 臺數가 잘 定義되기 때문에 4次元에서 若干 모자란 任意의 d次元에서 積分을 遂行한 後, 次元을 4次元으로 接近시키는 極限을 適用할 수 있다. 이 方法으로 게이지 對稱性을 깨트리는 일 없이 不必要한 無限大를 次元의 틈에 잘 가두는 것이 可能하다. 이때 不必要한 無限大의 監獄 노릇을 하는 것이 감마 函數 이다. 다만, 4係 完全 反對稱 텐서만큼은 任意의 d次元이 아닌 4次元에서밖에 定義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 텐서가 들어갔다면 次元正則火를 使用하더라도 게이지 對稱性을 지키는 것은 不可能하다.

參照週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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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參考: 강주상 (2011) 에서는 1962年부터 1966年까지라고 나와 있으나, 이 記錄에 依하면 1963年 한 해만 確認됨.
  6. 스티븐 와인버그 (1967年 11月). “A Model of Leptons” [렙톤 模型]. 《 피지컬 리뷰 레터 》 (英語) 19 (21): 1264?1266. doi : 10.1103/PhysRevLett.19.12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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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故 李輝昭博士 著作權 訴訟 첫 心理” . 《 聯合뉴스 》. 1994年 9月 16日 . 2015年 6月 11日에 確認함 . 재미 核物理學者 故 李輝昭博士의 中國系 未亡人 沈曼菁氏等이 假處分 申請을 냈다.  
  27. “小說 '無窮花 꽃이 피었습니다' 剽竊 아니라고 判決” . 《 中央日報 》. 1997年 7月 10日 . 2016年 2月 26日에 確認함 . 朴正熙時代 狀況 描寫 部分은 客觀的 事實을 引用한 것일 뿐 剽竊이라 볼 수 없으며 孔氏 冊을 引用한 部分은 出典을 밝힌데다 아이디어를 盜用하였다는 主張은 認定하기 어렵다.  
  28. 에이브러햄 클라인 & 이휘소 (1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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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