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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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海
宋海( 2019年 )
出生 1927年 4月 27日 ( 1927-04-27 )
日帝强占期 朝鮮 黃海道 載寧郡
死亡 2022年 6月 8日 ( 2022-06-08 ) (95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江南區 도곡동
國籍 大韓民國
活動 期間 1955年~2022年
學歷 海州藝術專門學校 聲樂科( 中退 ) [1]
配偶者 석옥이(1934年~2018年)
家族 사위 김학수, 양희천
外孫주 양정우, 김혜림, 糧政下
署名
웹사이트 宋海 - 韓國映畫 데이터베이스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宋海 (宋海, 1927年 4月 27日 ~ 2022年 6月 8日 )는 大韓民國 歌手 , 喜劇 俳優 이자 放送人이다. [2] 音樂 競演 TV 프로그램 《 全國노래자랑 》의 進行을 34年間 맡아서 司會者(TV presenter)로 活動했다.

大韓民國 의 最高齡 歌手 , 喜劇 俳優 1955年 창공 樂劇團으로 데뷔한 以來 2022年 96歲로 故人이 될 때까지 現役으로 活動하였다. [3] [4] 2022年 6月 8日 午前 8時 30分頃 서울 도곡동 같은 아파트 위層에 사는 딸에 依해 自宅 化粧室에서 쓰러진 채 發見되었고, 緊急 出動한 消防隊員에 依해 現場에서 死亡이 確認된 以後 病院으로 移送되었다. 午前 8時 45分, 病院에서 死亡이 公式 確認되었다. 宋海는 2022年 1月 5月 健康 異常으로 病院에 入院했으며, 3月 코로나-19 에 確診되기도 했다. 6月 10日 서울대학교病院 에서 永訣式을 마치고 종로구 낙원동 宋海길, KBS 를 거쳐 慶北 金泉市 素材의 火葬場에서 化粧된 後, 故人의 遺骸는 大邱廣域市 達城郡 玉浦邑 기세리 546(宋海公園 隣近)에 安葬되었다.

2022年 初 健康上 理由로 ' 全國노래자랑 ' 下車를 苦悶하기도 했고, 製作陣과 스튜디오 錄畫로 放送에 繼續 參與하는 方案 等을 論議해 왔으나 以後 野外 錄畫로 프로그램 製作 日程이 定해지면서 臨時 下車 後에 다시 進行한 方向으로 變更되었다. 하지만 野外 錄畫를 始作한지 얼마되지 않아 單獨 MC였던 송해의 갑작스러운 別世로, 正式 進行者가 定해질 때까지 作曲家 이호섭과 KBS 아나운서 임수민의 더블 MC 體制로 프로그램이 編成되었다.

學歷 [ 編輯 ]

  • 海州藝術專門學校 聲樂科
  • 平壤 國立音樂學校 聲樂科

生涯 [ 編輯 ]

1927年 4月 27日 黃海道 載寧郡 載寧面에서 出生했으며, 本貫은 恩津 宋氏 이다. 1949年 海州藝術專門學校 聲樂科에 入學해 公演을 始作으로 노래를 始作했다. 1950年 6月 韓國 戰爭 이 勃發했고, 이듬 해 1.4 後退 當時 美軍의 脫出善을 타고 越南했다. 宋海는 當時 人民軍의 徵集을 避해 몇 次例씩 洞네 山자락으로 올라가 避身으로 돌아가는 生活을 反復했는데, 3番째로 避身했을 때 狀況이 惡化되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南쪽으로 向하는 脫出線에 오르게 되었다. 송해의 母親은 집을 떠나는 宋海에게 "얘야, 이番에는 操心하렴" 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母親과 나눈 마지막 對話가 되고 말았으며, 宋海는 2015年 發表한 노래 <流浪靑春>에서 이 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歌詞를 실었다. 脫出善을 타고 내려오며 只今의 '宋海'(宋海)라는 藝名을 지었는데 越南 過程에서 타고 있던 船舶 안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넓은 바다와 같은 世上을 품겠다는 마음을 갖고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釜山에 到着한 宋海는 大韓民國 國軍 에 入隊하여 休戰 때까지 通信兵 으로 服務했으며 1953年 7月 27日 締結된 韓國 軍事 停戰에 關한 協定 通信 門을 모스 符號 로 電送하는 役割을 擔當했다. [5] 大邱 달성공원에서 通信兵으로 服務할 當時 軍隊 選任 上司의 女同生 석옥이 女史를 처음 만났고, 이듬해에 結婚하였다.

除隊한 直後인 1955年 蒼空樂劇團에서 歌手로 正式 데뷔했으며, 1963年 映畫 《YMS 504의 水兵》에 端役으로 出演하며 映畫 俳優 로 데뷔했다. 이 後 1960年代 後半부터 코미디 프로그램에 出演하며 放送 MC로 轉換해 活潑한 活動을 펼치며 人氣를 얻었다. 구봉서 , 배삼룡 , 이주일 , 남성남 等과 함께 1970~1980年代 各種 코미디 프로그램과 放送 MC로 活動하였으며 1970年代 까지는 TBC 에서 活動하다가 1980年 言論統廢合 措置로 TBC가 强制 廢局된 以後엔 KBS 2TV 로 넘어와 活動하였다.

宋海는 東洋放送 - KBS 第2라디오 에서 아침 交通 라디오 放送 <街路樹를 누비며> 를 1972年 부터 1989年 까지 17年 동안 進行했다. 하지만 1986年 에 自身의 외아들 송창진이 漢南大橋 (當時에는 第3한강교)에서 오토바이를 運轉하다 交通事故로 死亡하며 큰 衝擊을 받아 暫時 放送 活動을 中斷하였으며, <街路樹를 누비며> 亦是 3年 뒤인 1989年 에 完全히 下車했다. [6] 宋海는 외아들의 事故死 以後, 2022年 6月 에 他界할 때까지 平生 漢南大橋 近處로 다니지 않았다. [7] <街路樹를 누비며>에서 下車한 것도 아들의 事故死 以後 騎士들의 安全 運轉을 督勵하는 交通放送 을 進行하는데 精神的으로 스트레스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2018年 1月 에 夫人과 死別했다.

全國노래자랑 進行 [ 編輯 ]

宋海는 1988年 부터 KBS 1TV 全國노래자랑 을 進行해 왔다. 1988年 부터 別世하기 22日前인 2022年 5月 까지 總 34年 을 進行하였으며, 1994年 改編으로 暫時 進行을 中斷한 6個月을 除外하면 連續 進行으로는 總 27年 동안 MC로 出演하였다. 1994年 KBS 봄 改編 當時 暫時 宋海가 下車하고 KBS의 金善東 아나운서로 MC가 交替된 적이 있는데, 視聽者들의 抗議와 이로 인한 視聽率 下落으로 不過 6個月 뒤인 1994年 10月 에 宋海가 復歸했다. 전국노래자랑은 로스앤젤레스 , 도쿄都 , 베이징 , 뉴욕 , 런던 等 海外에서도 여러次例 公開放送을 가졌으며 特히 大韓民國에서 航空便으로 27時間이 걸리는 파라과이에서 公開放送을 進行해 話題가 되기도 했다.

2003年 에 宋海는 平壤 에서 全國노래자랑 特輯 <平壤노래자랑>에 出演했다. 6.25 戰爭 中이던 1952年 에 越南한 以後 51年만에 訪北길에 오른 것이었는데, 當時 北韓 側에서는 송해의 越南 履歷을 問題삼아 滯留 許可를 내주지 않아 企劃 過程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當時 조선중앙TV 아나운서 전성희 와 함께 進行하였으며, 宋海는 마지막 曲으로 <다시 만납시다> 가 合唱으로 흘러나오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宋海는 放送을 마친 後 뒤풀이 자리에서 自身의 故鄕인 載寧에 對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晩餐에 同席한 보위원이 "時間이 오래 흘러 거기 안 계신다" 라는 말을 했다. 이 때 宋海는 自身이 越南한 지 52年의 歲月이 흘렀음을 實感했으며, 더 以上 母親을 만날 수 없다는 事實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故鄕인 黃海道 載寧郡 에서 全國노래자랑 錄畫를 하고 싶다는 意向을 여러 次例 밝혀왔으나, 結局 그가 故人이 될 때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90歲가 넘은 高齡으로 2010年代 까지 全國노래자랑을 進行하며 野外 錄畫까지 無理 없이 消化하였으나, 2020年 에 全 世界를 强打한 코로나19 의 餘波로 野外 錄畫가 中斷되어 스튜디오에서 스페셜 放送으로 錄畫를 이어 나갔다.

2022年 5月 23日 에 그는 最高齡 TV 音樂 競演 프로그램 進行者(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로 기네스북 에 올랐다. [8] 그 後, 송해의 健康도 惡化되면서 結局 2022年 5月 , 製作陣에게 더 以上 進行이 힘들다며 下車 意思를 밝히기도 하였다. [9]

他界 [ 編輯 ]

2022年 6月 8日 아침, 서울特別市 江南區 도곡동 自宅에서 他界했다.

死因은 自宅 浴室에서 갑작스러운 落傷으로 쓰러져 他界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해 6月 10日 서울特別市 鍾路區 연건동 서울대학교病院 葬禮式場에서 永訣式이 擧行됐다.

엄영수 放送코미디언協會腸이 永訣式을 進行했다. 엄영수 는 "先生님은 ' 全國 노래자랑 '에서 出演者와 그냥 對話만 하신 게 아닙니다. 先生님이 거친 그곳들은 在來市場이 되고, 무·배추밭이 되고, 화개場터가 됐습니다. 모두가 춤추고, 노래하고, 흥겹게 노는 자리를 깔아주신 우리 先生님은 할아버지·할머니를 靑春으로, 出演者를 스타로 만드는 魔術師였습니다."라며 故人의 業績을 기렸다.

尹錫悅 大統領은 송해의 訃告 消息을 듣고 매우 안타까움을 表示하며 박보균 文化體育觀光部 長官을 보내 弔問을 하였다. 이어 文化藝術人 最高 勳章인 金冠文化勳章을 追敍했다.

後輩 코미디언 李龍植 은 "이 곳에서 全國노래자랑을 많은 사람과 힘차게 외쳤지만, 이제는 수많은 별 앞에서 ' 天國 노래자랑' 을 외쳐달라"며 "先生님이 다니시던 국밥집, 언제나 앉으시던 椅子가 이제 우리 모두의 椅子가 됐다. 安寧히 가시라"고 作別人事를 傳했다. 故人의 영구는 後輩 喜劇 俳優 최양락 , 양상국 , 조문식 , 劉在錫 , 姜鎬童 等이 運柩를 맡았다.

같은 날 午後, 鍾路區 낙원동 宋海길을 거쳐 한국방송공사 本館 앞에서 路祭가 擧行됐다.

김의철 KBS 社長은 "宋海 先生님, 들리십니까. 大韓民國 全國 公園에서, 널따란 運動場에서 '전국노래자랑'의 딩동댕 소리가 울렸습니다"라며 "先生님의 작은 巨人 같은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고, 國民들과 웃던 그 場面이 走馬燈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부디 世上의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便히 永眠하소서"라며 故人을 追慕했다. [10]

그는 生前 인터뷰에서, "나는 舞臺에서 始作해서 舞臺에서 죽을 사람이다. 다른 길로 가면 百 番 지게 되어있다. 죽는 날까지 TV에 나오고, 全國노래자랑을 進行하겠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마지막 TV 出演일이 2022年 5月 15日 이었고, 24日 後인 6月 8日 世上을 떠났으니, 舞臺에서 죽겠다는 生前에 했던 約束을 지키고 世上을 떠난 셈이 되었다.

쉐보레 트래버스 葬儀車가 運柩한 故人의 遺骸는 慶尙北道 金泉市 에서 化粧된 後, 기세리 葬地에 到着했다. 宋海는 6.25 戰爭 當時 通信兵으로 參戰했기 때문에 國立墓地 安葬 對象者이지만, 그의 遺言대로 大邱廣域市 達城郡 玉浦邑 기세리에 있는 석옥이 女史의 곁에 安葬되었다. 墓所는 大邱廣域市 達城郡 玉浦邑 기세리 宋海公園 內 宋海記念館 건너便의 野山에 있으며, 간경리와 용연사 사이에 宋海公園이 있다.

出演作 [ 編輯 ]

TV [ 編輯 ]

映畫 [ 編輯 ]

  • 2020年 《宋海 1927》

特別出演 [ 編輯 ]

藝能 [ 編輯 ]

映畫 [ 編輯 ]

  • 1963年 《YMS 504의 水兵》
  • 1966年 《腰絶腹痛 007》
  • 1968年 《男子 美容師》
  • 1968年 《單벌 神社》
  • 1968年 《어머니는 强하다》
  • 1969年 《男便》
  • 1969年 《내 八字가 上八字》
  • 1969年 《身世 좀 지자구요》
  • 1969年 《特等祕書》
  • 1970年 《할아버지는 멋쟁이》
  • 1970年 《求婚 作戰》
  • 1970年 《運數大通 一步直前》
  • 1986年 《彷徨하는 별들》
  • 2002年 《울랄라 氏스터즈》
  • 2003年 《東海물과 白頭山이》
  • 2013年 《 全國노래자랑

드라마 [ 編輯 ]

CF [ 編輯 ]

  • 1970年 三立食品(하이면)
  • 1970年 한국존슨(에프킬라)
  • 1985年 한스制約(까스파파)
  • 1985年 ~ 1993年 東國製藥 (인사돌)
  • 1986年 농심 (새우깡)
  • 1987年 모나리자
  • 1992年 韓華L&C(둥둥富者)
  • 2000年 ~ 2011年 名人制約(이가탄)
  • 2012年 IBK企業銀行
  • 2013年 SK텔레콤(LTE-A)
  • 2013年 DTV코리아
  • 2013年 대농바이오營農組合法人 만품산삼가득 生 막걸리
  • 2015年 千年固守 尙州곶감
  • 2015年 2015 槐山世界有機農産業엑스포
  • 2015年 나르지오
  • 2016年 동양화학 이끌림샤시
  • 2018年 우리觀光
  • 2018年 片薑한放硏究所(口傳鹿茸)
  • 2019年 達成郡廳
  • 2022年 야놀자

송해를 演技한 俳優 [ 編輯 ]

藝能 [ 編輯 ]

TV 드라마 [ 編輯 ]

뮤지컬 [ 編輯 ]

受賞 [ 編輯 ]

垂訓 [ 編輯 ]

特異事項 [ 編輯 ]

各州 [ 編輯 ]

  1. https://www.bbc.com/korean/news-61715050
  2. “宋海 "混亂 있는데 난 1927年生. " . 조이뉴스24. 2015年 1月 22日.  
  3. https://www.yna.co.kr/view/AKR20220608106900001?input=1195m
  4.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206080958001
  5. 놀러와 300回 特輯, 2010年 8月 2日 放映分
  6. < 街路樹를 누비며 >는 1965年 부터 2001年 까지 放送한 아침 交通專門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7. 같은 境遇로는 인디歌手 요조 가 있다. 2007年 8月 에 동생이 寫眞學科 實技 準備를 위해 淸凉里驛 에 갔다가, 穿孔機 顚覆 事故로 숨지고 말았다. 이 事故의 餘波로, 요조 는 平素 동생이 志望해 온 學校인 중앙대학교 近處로는 絶對로 오가지 않는다고 한다.
  8.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1/0004057193
  9. https://www.mk.co.kr/star/broadcasting-service/view/2022/05/433134/
  10. https://www.yna.co.kr/view/AKR20220610011151005?input=1195m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