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완 (193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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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완
金東完
出生 1935年 2月 10日 ( 1935-02-10 ) (89歲)
日帝 强占期 慶尙北道 金陵郡 농소면 월곡리
(現 大韓民國 慶尙北道 金泉市 농소면 월곡리 )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大韓民國
本館 金海 (金海)
學歷 慶尙北道 金泉 농소국민학교 卒業
慶尙北道 金泉農林中學校 卒業
慶尙北道 大邱工業高等學校 卒業
國際大學校 法律學과 學士
經歷 氣象通報官 出身 政黨人
企業家 兼 隨筆家
文化放送 氣象報道委員
케이웨더 理事長
자민련 黨務委員 兼 慶北 金泉 地區黨委員長
韓國日氣豫報協會 會長
韓國日氣豫報協會 名譽會長
子女 1男 3女
軍服務 1958年 空軍 中士 轉役
正當 無所屬

김동완 (金東完, 1935年 2月 10日 ~ )은 大韓民國 前 氣象廳 通報官 出身의 前 政治人 이다.

生涯 [ 編輯 ]

慶尙北道 金陵郡 농소면 월곡리 에서 出生하였고 지난날 한때 慶尙南道 金海郡 金海邑 회현리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으며 農所初等學校 金泉農林中學校 를 거쳐 1953年 大邱工業高等學校 機械科를 卒業하였다. 그 後 국제대 法律學科에서 學士 學位를 取得하였다. 雅號 (雅號)는 노루(老淚)이다.

放送 活動 以前 [ 編輯 ]

元來 空軍 操縱士가 되고 싶어 대구공고 3學年 때 空軍士官學校 入學 試驗에 應試하여 合格하였으나 最終 選拔過程에서 탈락하였다. 그래서 空軍下士官學校를 나와 助敎를 지낸 後 5年間의 空軍 服務를 마쳤다. 操縱士의 꿈이 무너지자 數學 敎師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1958年 에 軍服務를 마치고 無酌定 서울로 上京하였다. 그는 觀象臺 試驗에 應試해 15代 1의 競爭率을 뚫고 1959年 1月 中央 觀象臺 의 職員으로 合格하였다. 以後 氣象 技術院 養成所에서 敎育을 받고 1959年 12月 24日 金浦國際空港 測候所의 氣象要員으로 發令받게 되었다. 當時 그의 職責은 5級公務員(現在의 9級 水準)으로 氣象 狀況을 觀測하고 氣象 狀況을 整理하는 것이었다.

釜山의 水泳飛行場( 金海國際空港 의 前身)測候所에서 4年 程度 勤務하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觀象臺 豫報官으로 活動했다.

通報官 活動과 副業 [ 編輯 ]

1960年代 中盤부터 放送局들은 날씨報道의 現場感을 살리기 위해 中央 觀象臺 職員이 나와 放送을 하기 始作했다. 卽, 이 일을 公務員인 觀象臺 豫報課 職員이 直接 하게 된 것이다. 하루는 先輩 放送要員이 그만두어 누가 그 뒤를 잇느냐는 論議가 있었다.

김동완은 3日에 한番씩 交代로 돌아가며 하는 放送要員으로 뽑혔으며, KBS 라디오 의 漁業氣象通報(後에 氣象通報로 變更)의 氣象 通報官으로 放送 活動을 始作했다. 通報官이라는 名稱이 생긴 것도 바로 이 무렵이라고 한다.

그는 通報官으로 活動하면서 交代 勤務를 利用해 城北區 삼양동 에 煉炭가게를 내었고,때로는 가파른 階段과 언덕을 오르내리며 煉炭 配達도 하였다. 1968年 여름부터는 돈암동 에 있던 한 택시會社에 就職해 1年 程度를 觀象臺와 택시 運轉을 隔日로 번갈아가며 勤務하였다.

TV 活動 [ 編輯 ]

1972年 4月 MBC 모닝쇼 에서 日氣豫報를 하게 되었고, 그 해 가을에는 KBS 9時 뉴스 에서도 日氣豫報를 하였다.

그러나 1974年 油類 波動 으로 아침放送이 中止됨에 따라 MBC 모닝쇼가 없어졌고,KBS 9時 뉴스의 日氣豫報도 KBS 아나운서를 쓰게 되면서 몇 달 程度는 中央 觀象臺 豫報課에서만 活動하게 되었다. 1974年 下半期쯤부터 東洋放送 에서 言論統廢合 때까지 7年間을 活動하였다.

言論統廢合 以後 1981年 秒에 文化放送 에서 涉外가 들어왔지만, 觀象臺 氣象 通報官을 辭職하는 條件이라서 망설이게 된다. 그렇지만 한동안 서울에서만 勤務하게 되니 循環勤務를 하는 다른 同僚들에게 未安한 마음이 든다. 結局 觀象臺 氣象 通報官을 그만두고 MBC 氣象報道委員으로 活動하기 始作한다. 以後 1992年 3月初에 프리랜서 宣言을 하고 1996年 9月 23日 까지 MBC에서 活動하였다.

한便 그는 1980年 부터 結婚式 主禮로도 活動했다. 1991年 11月까지 大略 150回의 主禮를 봐왔다고 하는데,당초엔 親舊나 親知 等의 要請이 많았지만 좀 지나자 一般 視聽者의 付託도 殺到했다고 한다. [1]

全斗煥 前 大統領과 같은 高等學校 出身이기 때문에 全氏와 어느 程度 因緣도 있다. 그는 이것에 對해 "(全氏가) 百潭寺에 머물 때 처음 만나 '先輩님(24回) 26回 김동완입니다'라고 했더니 어깨를 툭 치며 '(靑瓦臺) 在任期間에 한番 오지 그랬느냐'고 하며 무척 반가워했다. 하지만 곧 '그랬으면 只今쯤 聽聞會에 불려다니겠지'라고 말했다"고 回顧했다. 以後 서울 연희동의 全氏 自宅에서 高校 先後輩間으로 몇次例 만났다고 덧붙였다.

케이웨더 理事職과 그 以後 [ 編輯 ]

MBC 뉴스데스크 의 日氣豫報 자리를 떠난 뒤, 그는 1997年 에 民間 氣象情報 會社인 케이웨더의 理事職으로 자리를 옮겨 2000年 까지 活動했다. [2]

2000年에 國會議員으로 出馬하였으나 落選하였고, 選擧 中에 糖尿를 앓던 아내의 治療時機를 놓쳐 現在는 아내의 뒷바라지를 하며 지내고 있다. [3]

活動한 뉴스 프로그램 [ 編輯 ]

活動한 라디오 프로그램 [ 編輯 ]

放送 出演 [ 編輯 ]

  • KBS 《KBS招待席》
  • MBC 《日曜日 日曜日 밤에》 (日曜스타앨범)/(來週의 日氣豫報)/(몰래카메라)
  • KBS 《TV는 사랑을 싣고》
  • KBS 《TV쇼 眞品名品》
  • KBS 《밤과 音樂사이》
  • KBS 《아침마당》
  • KBS 《KBS人間大學》
  • MBC 《타임머신》 (87回 '비내리는 女人' 于某)
  • EBS 《時代의 肖像》
  • SBS 《日曜日이 좋다 - 옛날 TV》
  • KBS 《비타민》 (360回 偉大한 밥床)
  • OBS 《최양락·이봉원의 나는 傳說이다》
  • OBS 《차인태의 名不虛傳》

CF 出演 [ 編輯 ]

著書 [ 編輯 ]

  • 《날씨 때문에 속상하시죠》(1998년) ISBN   8988349008
  • 《날씨의 神秘》(1999年)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