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종 (1959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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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종
出生 1959年 4月 3日 ( 1959-04-03 ) (65歲)
大韓民國 全羅南道 康津郡
居住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性別 男性
學歷 성균관대학교 法學士
職業 우리마당 代表
웹사이트 우리마당 - 公式 블로그
김기종
出生 1959年
全羅南道 康津郡
罪名 殺人未遂 等
業務妨害
刑量 懲役 12年
現況 收監 中
收監處 서울拘置所

김기종 (金基宗, 1959年 4月 3日 ~ )은 大韓民國 의 文化運動團體인 '우리마당'과 萬石中놀이保存會 代表이다. 大韓民國의 外交使節인 시게이에 都市노리 駐韓 日本 大使 마크 리퍼트 駐韓 美國 大使 를 襲擊했다. [1]

生涯 [ 編輯 ]

젊은 時節 [ 編輯 ]

김기종은 1959年 全羅南道 康津郡 군동면 쌍덕리 에서 태어나 光州廣域市 에서 成長했다. 1978年 錦湖高等學校 , 1984年 성균관대학교 法律學科를 卒業하고, 숭실대학교 統一政策大學院에서 《南韓社會 統一文化運動》의 課題로 碩士 論文을 썼다.

1980年代 活動 [ 編輯 ]

1980年代에 國樂모임 ‘한가락’, 劇會 ‘甓돌’ 等을 創立하며 文化界에서 活動했다. 그가 所屬된 우리마당은 1982年 當時 성균관대 法大 在學 中이던 김기종의 主導로 6個 小모임이 "7千萬이 우리 되어 全 半島를 마당 으로 만들자"는 뜻으로 꾸려졌다. 1983年 10月에 《우리마당》이라는 이름으로 公式 活動을 始作했고 1984年 3月에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에 空間을 마련했다. 以後 演劇 公演, 國樂講座, 탈춤·風物敎室, 文藝심포지엄을 主催하는 等 文化活動을 이어가면서 1984年 서울大學校, 高麗大學校 等 5個 大學 總學生會 執行部와 함께 總學生會長 認定 等 14個 要求條件을 내걸고 ' 민정黨舍 '를 占據하였고, [2] 1985年 8月에는 會員 內部 組織을 結成, 美 大使館의 星條旗 燒却을 試圖하는등 時局 事件에 介入하였다. [3] [4]

이에 對해 우리마당은 홈페이지에서 "1986∼1987年 軍事政權의 護憲에 맞서 直選制 改憲運動의 中心役割을 遂行하며 所謂 '6月抗爭'의 塹壕가 됐다"며 박종철 烈士의 49題, 100日制 等을 主管執行했다"고 紹介하고 있다. [5]

1997年 以後 [ 編輯 ]

1997年부터 2007年까지 성공회대학교 敎養學部의 外來敎授를 지냈으며 97年 서울市民文化團體連席會議, 98年 우리마당 統一文化硏究所를 만들었다. [6] 2001年 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 諮問委員으로 委囑되었으며 2007年까지 活動하였다.또한 2005年 5月 任期 2年의 大韓民國 統一部 統一敎育委員으로 委囑되었고, 2007年 4月에 한 次例 連任하여 2009年 4月까지 4年間 活動했으며 [7] 2006年부터 2007年까지 《民族和合運動聯合》이라는 團體의 一員으로 8回에 걸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 訪問했다. [8] [9] 2006年 '우리마당 獨島지킴이'를 創立하였고, 이어 그해 5月에는 4週 동안 日本大使館 앞에서 1人 示威를 하면서 獨島 守護 關聯 聲明書를 傳達했으며, 韓國挺身隊問題對策協議會 와 共同으로 日本政府 謝過를 要求하는 聲明을 發表했다. [10] 2006年 獨島를 지키겠다며 同僚 6名과 住所를 獨島로 옮겼다. [11]

2006年 여러 市民·社會團體가 主軸이 되어 構成한《 韓美 FTA 沮止 汎國民運動本部》의 西大門區 運動本部 代表者 會議에도 參席하는 等의 活動을 하였다하였다. [12] 特히 2009年 1月 龍山慘事 眞相糾明委員會가 主催하는 《 龍山慘事 追慕 集會》에 參席해 "80年代부터 여러 撤去民 同志, 勞動者 同志와 꾸준히 鬪爭한 活動家"라고 本人을 紹介하면서 "龍山慘事는 우리 社會가 眞情으로 더불어 사는 社會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훌륭한 敎訓을 남겼다"며 "鬪爭을 永遠토록 하자고 敢히 提案한다"는 內容의 自由發言을 했다.

日本의 集團的 自衛權 行使와 韓美軍事訓鍊 糾彈 等의 示威 活動을 하면서 《韓美 키 리졸브 練習》에 反對하며 " 平壤 占領을 想定한 雙龍 訓鍊을 中斷하라"라는 피켓을 들고 示威를 했던 김기종이 所長으로 있는 《우리마당統一文化硏究所》는 2010年 天安艦 沈沒 事件 에 對해서 "南北 共同調査를 하자"고 主張했다. [13]

2011年 12月 26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金正日 國防委員長이 死亡하자 김기종은 國家保安法 被害者 모임 會員 一部와 서울 德壽宮 앞 空터에 焚香所 設置를 試圖하였고, [14] 그것을 沮止하려는 保守團體와의 對峙 過程에서 10餘名으로부터 集團 暴行을 當해 隣近 病院으로 移送되었다. 김기종은 블로그 글에서 自身이 2011年 12月 26日 德壽宮, 2011年 12月 30日 事務室, 2012年 2月25日 光化門 네거리에서 세次例에 걸쳐 保守 性向의 團體인 어버이聯合 으로부터 全治 4週의 暴行을 當했으며 이 事件에 對해 告訴하였으나 檢察이 證據 不充分으로 公訴權 없음 處分을 내렸다고 主張했다.그리고 告訴狀 3張 接受 끝에 略式起訴를 통해 罰金刑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그 後 김기종은 어버이聯合 이 入住한 建物 앞에서 暴力集團 어버이聯合 解體하라 는 피켓을 들고 1人示威를 했다. [15] [16] [17]

2014年 12月 19日 大韓民國 憲法裁判所 에 依해 違憲政黨으로 解散된 統合進步黨 , 法院이 利敵團體로 規定한 祖國統一汎民族聯合 (범민련) 等과 함께 《戰爭反對 平和實現 國民行動》의 一員으로 活動했다. [18]

2013年 5月 9日 서울市 홈페이지에 한겨레 新聞 25周年 行事에 參加 豫定인 朴元淳 서울市長을 相對로 "나는 한겨레 新聞 創刊을 가장 말 없이 準備했다. 朴元淳 市長은 한겨레 新聞 創刊 當時 全혀 다른 일을 하고 있었으며, 軍事政權 時代 檢査를 한 朴 市長은 行事에 參與할 資格이 없다"는 內容의 글을 올렸다. [19]

事件 [ 編輯 ]

우리마당 被襲 事件 [ 編輯 ]

1988年 8月 17日 새벽4時頃, 4名의 怪漢이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신촌역 附近 우리마당 事務室을 襲擊 [20] 해 자물쇠를 부수고 이 團體 男子 會員을 角木 等으로 集團毆打 , 失神시킨 뒤 이들 中 1名이 또 다른 女子會員을 性暴行했다고 알려진 事件이다. 當時 警察은 "事務室 안에 金品이 없어 도둑이나 强盜가 侵入할 理由가 없으며 犯人들이 指揮者인 듯한 1名의 指示에 따라 一絲不亂하게 行動했고 4名 모두 머리를 짧게 깎은 端正한 차림이었으며 事務室 안의 書類만을 뒤진 點 等으로 미루어 單純 强盜犯의 所行으로 보기에는 釋然찮은 點이 많다"는 것이 現場 初動 搜査의 結論이었지만, 事件發生 直後 單純 强盜犯들에 依한 偶發的인 犯行으로 推定, 周邊 不良輩와 同一手法 前科者 等 虞犯者들을 相對로 한 搜査에만 焦點을 맞춘 채 特定 目的의 組織的인 犯行 可能性은 初動 搜査 段階에서부터 排除했다.

김기종氏는 "이 事件이 8.15 南北學生會談이 끝난 直後 事件이 發生했으며 우리마당이 在野文化團體로는 最初로 統一마당 큰잔치 行事를 開催할 計劃을 세운 直後에 일어났다는 點에서 極右勢力에 依한 被襲日 可能性이 높은데도 警察은 이 部分에 對한 搜査는 하지 않고 있다"고 主張했다.한편 이 事件과 關聯, 自身을 中央經濟新聞 오홍근 部長 襲擊 事件 [21] 을 言論에 提報한 사람이라고 밝힌 한 市民이 9月 27日 西大門警察署 記者室로 電話를 걸어와 우리마당 被襲事件度 特殊組織의 緻密한 事前計劃에 依해 저질러진 테러였다고 主張해 非常한 關心을 모았다. [22] 當時 警察은 提報에 나온 人物들의 身元 確認 結果 이들이 加工의 人物일 可能性이 큰 것으로 보고 提報의 信憑性이 떨어지는 것으로 判斷했지만, [23] 野黨인 평민당 側에선 提報를 土臺로 襲擊事件이 陸軍情報司 所屬 軍人의 所行이라는 主張을 하면서 政治問題化하였고, 盧武鉉 前 大統領은 이 事件의 眞相調査와 法律支援을 自願하였다. [24] [25] 結局 野黨 國會議員들은 1988年 10月8日 陸軍 情報司에 對해 史上 첫 國政監査를 벌여 우리마당 被襲事件에 對한 情報司 介入與否를 따졌다. 答辯에 나선 情報司令官은 "提報者가 우리마당 事件에 介入했다고 主張한 下士官 4名과 將校 1名의 實際 勤務與否를 確認한 結果 이름이 類似한 사람은 2名으로 이中 1名은 下士官,1名은 將校였다."고 밝혔다.정보사령관은 그러나 "이들 두名은 모두 階級이 달랐으며, 그런 일과 無關한부서에 勤務하고 있다"고 우리마당 事件 介入 所聞을 正式으로 否認했다. [26] [27] [28] [29] [30]

2004年에 公開된 情報司 所屬 前職 북파工作員의 證言에 따르면 우리마당 事件은 現役 情報司 職員이 아닌, 情報司의 使嗾를 받은 豫備役 북파工作員이 저질렀으며 이 때문에 事件이 迷宮속으로 빠지게 됐던 것이라는 主張이 提起됐다. [31]

우리마당 被襲 抗議 焚身 [ 編輯 ]

事件이 終結되고 나서 오랜 期間이 지난 2007年 에 김기종은 "1988年에 發生한 '우리마당 襲擊事件'의 眞相 糾明"을 要求하며 靑瓦臺 앞에서 1人 示威를 벌이던 途中 焚身을 試圖하여, 全身에 深刻한 火傷을 입었다. [32]

韓美 軍事訓鍊 反對 [ 編輯 ]

김기종은 駐韓 美國大使에 對한 攻擊을 하기 前에도 韓美 軍事 訓鍊을 反對하는 活動을 해왔다. 그는 2015年 3月 2日 밤 11時47分 自身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오늘부터 始作하는 ‘키리졸브·禿수리 訓鍊’의 問題點은 深刻하다”며 “一旦 南北 서로가 新年辭에서 밝혔던 對話 雰圍氣가 얼어붙었다. 訓鍊이 끝나는 4月 末까지 對話가 이뤄질 수 없는 雰圍氣”라고 밝혔다. 그는 이番 襲擊 事件을 저지른 理由를 韓美 軍事 訓鍊 때문이라고 主張했다. 그는 2015年 2月 24日 美國大使館 앞에서 “南北 對話 가로막는 戰爭訓鍊 이제 그만”이라는 손牌말을 들고 示威하는 寫眞을 揭載하기도 했다. 그는 2015年 3月 3日 自身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도 설날 離散家族 相逢이 霧散된 理由는 키 리졸브 練習 과 禿수리 訓鍊 탓”이라고 主張했다. [33]

日本 大使 襲擊 [ 編輯 ]

獨島`自國領土 表記에 關하여 抗議와 質疑를 數十`番 하였으나 答辯 하나 없는 日本 大使館의 行政的 不誠實과 無視하는 態度에 憤怒하고 있던 김기종은 2010年 7月 7日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特別 講演會에서 시게이에 都市노리 (重家俊範) 駐韓 日本 大使 가 "東北亞 平和를 위해 韓國과 日本이 協力.主導하자"는 內容의 講演을 하자 그 裏面의 팩트는 "北을 排除한 日本과 韓國의 關係蟻垤을 높혀 南韓에 對한 日本의 掌握力을 더욱 높히고, 北을 고립시키며 南北共助를 排除한 채 南韓을 日本化한 政治經濟 權力으로 東北亞에 데뷔시키겠다"는 속내가 보이는 發言으로 받아들여져 平素 쌓였던 鬱憤과 憤怒로 주머니에 간직하고 다니던 동도, 西道를 象徵하는 獨島 시멘트 模型(지름 約 10cm와 7cm) 2個를 特別講演會 途中 駐韓 日本 大使 에게 던진 嫌疑 等으로 拘束 起訴됐다. 以後 法院에서 懲役 2年 執行猶豫 3年刑을 宣告받았다. [34] [3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은 2010年 8月 24日 對南宣傳用 웹 사이트 ' 우리民族끼리 '에서 大韓民國 政府 가 그에게 '不當한 彈壓'을 하고 있다고 主張하며 김기종을 極讚했다. [36]

日本 大使 襲擊과 關聯해 김기종은 온라인 카페 ‘우리마당 獨島지킴이’에 “테러를 하려했다면 쇠뭉치를 던져야했다”, “빨간藥만 바르면 될 傷處에 4週 診斷을 받을 것은 理解가 가지 않는다”는 글을 남기며 反省의 幾微를 보이지 않았다. 또한 " 김장훈 이 領置金이라도 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글도 남긴 바 있다. [37]

公務執行 妨害 [ 編輯 ]

2015年 1月 30日 서울 西大門區 현대백화점 신촌店 앞에서 열린 그룹 ' 엑소 (EXO)'의 公演 行事에서 팬클럽 會員들과 是非가 붙었다. 김기종은 아이돌 팬클럽이 行事를 위해 붙여 놓은 傳單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騷動을 부리다가 行事 點檢 次 隣近에 있던 西大門區廳 公務員과 昇降이를 벌이던 中 이들을 暴行하고, 道路로 뛰어들어 運行하던 市內버스를 막아서기도 했다. 結局 서울 西大門警察署는 김기종을 公務執行妨害와 業務妨害 嫌疑로 不拘束 立件, 2015年 2月 17日 事件을 서울西部地檢으로 送致했다. [38]

美國 大使 襲擊 [ 編輯 ]

事件 展開 [ 編輯 ]

김기종은 2015年 3月 5日 午前 7時 40分頃 世宗文化會館 세종홀에서 열린 ‘ 民族和解協力汎國民協議會 ’(민화협) 主催 朝餐 講演會에서 메인 테이블에 앉아 講演을 準備 中이던 마크 리퍼트 駐韓 美國 大使 에게 다가가 25cm길이의(손잡이 包含) 로 襲擊하여 오른쪽 얼굴에 12cm, 왼쪽 손목과 팔 部位 等 總 다섯 군데에 傷處를 입혔다. [39] 김기종은 犯行 直後 現場에서 制止하는 사람들에게 깔린 채 "油印物을 나눠주십시오. 제가 3月 2日 만든 油印物입니다. 訓鍊 反對해서 만든 油印物입니다."라면서 油印物 配布를 외쳤다. 油印物에는 '南北 對話 가로막는 戰爭訓鍊 中斷하라! 우리나라에게 展示作戰統制權을 還收시켜라!'라는 文句가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40] 犯行 動機를 묻는 記者들의 質問에 김기종은 "戰爭訓鍊 反對합니다", "離散家族이 못 만나는 理由가 戰爭訓鍊 때문이라 그랬습니다", "戰爭訓鍊 中斷합시다, 키 리졸브…"라고 말했다. [41] 김기종은 張倫碩 等에 依해 制壓 [42] 된 以後 警察에서 "2010年 日本 大使를 콘크리트 덩어리로 攻擊했을 때 別로 威脅的이지 않아 果刀와 커터 칼을 準備했다"면서 犯行을 열흘 前부터 혼자 準備했다고 말했다. [43] 美國 國務部 는 김기종 襲擊 事件 發生 直後 駐韓美國大使館 等 現地 公館을 通해 事件 經緯와 마크 리퍼트 臺詞의 狀態를 把握한 뒤 1時間 30餘 分만에 論評을 통해 "우리는 리퍼트 大使가 韓國 視角으로 5日 午前, 講演을 하던 途中 被擊을 當한 事實을 確認한다"며 "우리는 이 같은 暴力行爲를 强力히 糾彈한다"고 밝혔다. [44]

민화협은 김대중 政府時節 出帆한 統一運動 常設協議體로서 김기종이 代表로 있는 서울市民文化團體連席會議는 創立初期 민화협에 會員團體로 加入하였고 그에 따라 團體에게 招待狀이 發送되었으며, 이 團體의 代表인 김기종은 別途의 參席 意思를 通報하지 않은 채 講演場에 온 것이다. 當時 現場 實務陣이 會員 團體 代表이자 顔面이 있던 김기종을 立場시키고 名札을 配付했는데, 警察 關係者가 金 氏의 參席을 問題 삼자 措置를 取하려던 中 事件이 發生하였다. [4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은 迅速한 論評을 통해 마크 리퍼트 臺詞의 被襲 事件이 戰爭狂 美國에 加해진 應當한 懲罰이라고 主張했다. 朝鮮中央通信 은 "南朝鮮 美國 大使 마크 리퍼트 가 한 講演會場에서 南朝鮮 市民團體 聲援으로부터 懲罰을 받았다."며, "戰爭狂 美國에 加해진 應當한 懲罰"이라고 論評했다. 또한 김기종의 凶器 攻擊을 "正義의 칼 洗禮"로 美化하며 金氏를 積極 擁護하였다. [46]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은 김기종의 襲擊을 安重根 義士의 義擧로 比喩하며 擁護했다. [47]

警察·檢察의 搜査 [ 編輯 ]

2015年 3月 6日 警察은 리퍼트 美國 大使에게 凶器를 휘두른 김기종에 對해 殺人未遂와 外交使節 暴行, 業務妨害 嫌疑 等 세 가지 嫌疑로 法院으로부터 拘束令狀을 받부받아 拘束했다. "2011年 金正日 焚香所 設置 試圖와 그間의 反美 集會, 講演 發言 等을 볼 때 그가 北의 主張에 同調하고 宣傳할 目的으로 利敵表現物을 所持한 걸로 判斷된다"고 밝힌 警察의 김기종 住居地와 事務室에 對한 押收搜索으로 押收한 '利敵性이 剛하게 疑心되는' 文件 30點에 對해 外部機關人 大學 所屬 硏究所 等 7個 機關에 鑑定을 依賴한 結果 [48] 金正日 의 《映畫藝術論》, 利敵 團體 범민련 의 《民族의 進路》, 主體思想 學習 資料인 《政治思想 講座》, 옛 統合進步黨 等이 參與한 《戰爭反對 平和實現 國民行動 會議錄》 等 13件을 移籍 文件으로 分類했으며 搜査 過程에서 김기종이 "김일성은 抗日運動을 했고 38線 以北을 接受한 뒤 自己 國家를 建設해 現在까지 잘 이끌어오는 걸 봤을 때 20世紀 훌륭한 民族 指導者로 생각한다" "(南에는 김일성만큼 훌륭한 사람이) 없다" "우리나라는 反植民地 社會, 北韓은 自主的인 政權"이라고 말하고 北의 指令으로 2005年 맥아더 銅像 撤去 示威를 벌인 利敵 團體인 우리民族 聯邦制統一推進會議 代表인 김수남과 1年間 60餘 次例 通話한 事實도 確認하여 國家保安法 嫌疑 適用을 檢討하고 있다. 김수남은 김기종을 面會하러 가서 "김기종은 從北이 아니며 옳은 일을 했다"고 말했다. [49] [50] [51]

3月 14日 午前 警察로부터 身柄을 넘겨받은 서울중앙지검 特別搜査팀(팀長 이상호 2次長檢事)은 金氏의 犯行 動機와 背後 等을 調査를 始作한 가운데 3月 23日 午後에 警察이 檢察 搜査官 參觀 下에 김기종과 行事 主催 側인 民族和解協力汎國民協議會 關係者와 目擊者, 事件 現場에 있었던 警察官 等 10餘名을 불러 移動 動線 等 事件 當時의 具體的인 狀況을 檢證할 豫定이었으나 警察의 說得에도 不拘하고 大使를 攻擊하는 過程에서 오른쪽 발목 복사뼈가 骨折됐고, 왼쪽 팔에 輕傷 [52] 을 입는 等 "몸이 不便하다"는 理由로 現場檢證을 拒否한 채 서울拘置所로 되돌아간 김기종을 除外한 가운데 現場檢證을 했으며 檢察은 이날 滿了되는 김기종의 拘束期間을 4月 2日까지 延長했다. [53]

"國保法 違反 嫌疑의 押收搜索令狀을 받아 確保한 物品이 아닌데도 바로 證據로 認定될 수 있느냐"는 部分에 對하여 論難이 있는 가운데 "夷狄물 素地가 國家의 存立·安全이나 自由民主的 基本秩序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金氏가 充分히 알고도 이를 保管했기 때문에 夷狄물 所持의 目的性이 認定된다"고 보는 서울중앙지검 公安1部(백재명 部長檢事)는 金氏 自宅에서 確保한 김정일이 쓴 '映畫藝術論'을 비롯해 北韓 原電 6點 等 總 19點의 書籍과 油印物들이 國家保安法 7兆5項의 利敵表現物 所持 嫌疑에 對해 따로 押收搜索令狀을 請求하지 않고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 適用을 檢討하였으나 4月 1日 殺人未遂·外國使節 暴行·業務妨害 嫌疑로 拘束起訴하면서, " 駐韓 美國 大使 가 南北統一을 妨害하는 美國을 象徵하고 있다"며 리퍼트 大使를 攻擊하고 "韓美 聯合軍事訓鍊인 키리졸브를 反對"하는 等 "北韓과 類似한 主張을 하고 있는 點이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 適用 根據가 될 수 있다"고 判斷하여 一旦 起訴 後 補强搜査를 거쳐 證據物을 確保하여 利敵表現物 所持, 利敵同調 嫌疑로 追加 起訴하는 方案을 檢討하겠다고 밝혔다. [54] [55] [56]

法院의 裁判 [ 編輯 ]

서울중앙지법 刑事合議25部(部長 김동아) 審理로 4月 23日 열린 첫 裁判에서 김기종은 “分斷 70年을 맞아 離散家族 相逢을 하기로 돼 있었는데, 軍事訓鍊 때문에 갑자기 中斷됐다. 來日모레 끝나는데, 자랑을 하려는 것은 아니고 보람차다고까진 할 수 없겠지만 나 때문에 하루 訓鍊이 中斷됨으로써 많은 사람이 다치지 않았다. 그런 部分을 參酌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며 김기종의 辯護人은 外交使節 暴行과 業務妨害 嫌疑에 對해서는 有罪를 認定하면서도 “美國이 韓半島에서 하는 訓鍊에 感情을 갖고 現場에서 卽興的·衝動的 憤怒에 依해 벌인 것으로 被告人의 表現으론 一種의 퍼포먼스이지 殺害 意圖는 없었다”라고 말하여 殺人未遂에 對해 無罪를 主張했으나, [57] 9月 3日 열린 結審公判에서 檢察은 “準備해 간 文具用 칼과 過度 中 殺害가 可能한 果刀를 犯行道具로 選擇했고 生命과 直結된 얼굴과 목을 겨냥해 反復的으로 攻擊했다”며 “韓美同盟의 象徵인 美國 大使 殺害 試圖는 다른 어떤 利敵同調 行爲보다 實質的 危險性이 크고 國家 安全에 미치는 影響이 重大하다”고 하면서 “殺人의 意圖가 殺人未遂의 未畢的 故意가 認定되고 北韓 主張에 同調한 行爲가 重大해 重刑이 不可避하다”며 懲役 15年과 資格停止 5年을 求刑瑕疵 김기종은 “殺害 意圖는 全혀 없었고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도 말이 안 된다”며 殺人未遂와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를 否認하면서 “過渡에 依한 暴行 事實은 認定하고 2010年 日本大使를 攻擊한 前歷이 있어 再犯으로서 相當한 罰을 받을 마음의 準備가 돼 있다”고 말하며 外交使節 暴行 嫌疑를 是認했다. [58]

이에 對하여 裁判部는 9月 11日 "韓美 聯合 訓鍊 中斷 等 김기종의 主張이 北韓과 같은 點이 있다고 해도, 그 主張 自體만으로 大韓民國의 國家 存立이나 自由 民主主義 秩序를 威脅한다고 볼 수는 없다"며, 國家保安法에 對하여 無罪로 보고 殺人 未遂와 外國 使節 暴行, 業務 妨害 嫌疑를 有罪로 認定해 懲役 12年型을 宣告했지만 當初 15年을 求刑했던 檢察은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 無罪 判決과 刑量 等에 同意하지 않는다며 抗訴했다. [59]

서울高等法院 刑事5部(部長判事 김상준)는 11月 5日 殺人未遂 및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로 起訴된 김기종에 對한 抗訴審 첫 公判에서 過去 日本 大使를 向해 甓돌을 던진 嫌疑로 處罰받았던 事實을 言及하며 "主張을 表現하는 方法을 두 番째 잘못 選擇했다"고 指摘하면서 이어 "自身의 主張을 表現하는 方法을 適切하게 選擇하지 못하는 것이 情緖的인 데서 起因한 問題가 아닌지 볼 必要가 있다"며 "虛心坦懷하게 醫師에게 속내를 率直히 드러내기를 바란다"고 밝히자 被告人인 김기종은 "1980年代 初부터 (市民社會運動) 現場에서 活動했고, 그 成果가 많다 보니 優越感에 빠져 있었다"며 "그러다 보니 日本이나 美國 大使가 특별하게 보이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고 스스로 診斷한다"고 말했다. 이날 裁判部는 被告人에게 衝動 調節 與否에 對하여 問題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職權으로 精神鑑定을 依賴하였으나, [60] [61] “持病은 있지만 事物 辨別能力에 障礙가 없고 精神病歷의 狀態는 아니라는 結果가 나왔다. 被告人은 오히려 IQ가 높고 判斷能力이나 狀況把握能力이 普通 사람보다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앓고 있는 持病에 對한 擧論이 있었는데 이 亦是 事件에 큰 影響을 주지 않았다"는 鑑定結果를 서울高等法院 刑事5部(部長判事 允準) 審理로 3月 3日 열린 抗訴審 2次 公判期日에서 公判節次를 更新하면서 確認하였고 3月 22日 열린 3回公判에서 檢察은 "이 事件은 高度의 反美鬪爭 一環으로 인한 事件이며 衝動으로 인한 事件이라 置簿해선 안 된다. 김기종의 犯行은 國家保安法上 利敵同調罪의 構成要件을 모두 充足한다. 1審이 無罪로 判斷한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에 對해서도 有罪를 내려달라"며 懲役15年을 求刑했다. [62] 4月 26日에 열린 抗訴審 4次 公判에서 裁判部는 "拘置所에서 亂動을 피우는 等 業務妨害 嫌疑로 起訴된 金氏에게 原審이 懲役 1年6月을 宣告한 事件을 倂合한다"고 밝히자 被告人의 辯護人은 "김기종이 拘置所에서 矯導官을 暴行한 嫌疑를 認定하지만 지난 1月 서울 신촌에서 버스技士의 運轉을 妨害하는 等의 嫌疑는 否認한다"고 主張했고 檢察은 "1審 量刑이 不當하다"고 抗訴 理由를 說明했으며 裁判部가 美軍 駐屯과 韓美合同軍事訓鍊에 對한 質問을 하자 김기종은 "韓國의 軍事情報가 빠져나갈 수 있는 合同軍事訓鍊은 反對하지만 美軍 駐屯을 反對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북한의 主體思想 等에 對한 質問에도 "槪念을 正確하게 解釋하지 못해 哀惜하게도 뭐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다"고 答辯을 하면서 "講演會에 參席하지 않는다고 들었던 리퍼트 大使가 갑자기 나타났고 警護員도 제대로 없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꼴不見으로 보여 뿔이 나 事故가 일어나게 됐다"고 말했다. [63]

裁判部 2016年 6月 16日에 열린 抗訴審 宣告公判에서 "被告人 主張 一部가 北韓 主張과 一致된다고 해서 反國家團體 活動에 同調한 것으로 보는 것은 國家保安法 을 擴大 適用하는 것"이라며 國家保安法에 對해 1審과 같이 無罪로 判斷하였지만 "自身의 主張을 알리기 위해 리퍼트 大使를 犯行對象으로 選擇해 숨질 수도 있었고, 拘置所에서 服役하던 中 矯導官을 暴行했다"면서 "被告人이 韓美聯合 軍事訓鍊 中斷을 主張하며 駐韓 美國 大使를 對象으로 犯行했지만, 眞摯한 反省을 하지 않고 있다"고 指摘하며 殺人未遂, 外國使節 暴行, 業務妨害 等 嫌疑에 對해 有罪로 認定餘 懲役 12年을 宣告하였다. [64] [65] 宣告가 끝나자마자 傍聽客을 向해 "이番 事件은 歷史가 審判할 것"이라고 외치다가 끌려나갔다.

大法院 1部(主審 이기택 大法官)는 2016年 9月 28日 殺人未遂와 外國使節暴行, 業務妨害, 國家保安法違反 嫌疑로 起訴된 金氏에게 懲役 12年을 宣告한 原審을 確定했다. [66]

周邊人物 反應 [ 編輯 ]

  • 2010年 7月 日本大使 콘크리트 投擲 事件 때 김기종의 辯護를 맡았던 朴燦鍾 辯護士는 “그 때에는 完全히 抗日民族主義者였다”며 “그 뒤로 5年 동안 反美主義者로 외骨髓가 돼버린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67]
  • 김기종의 大學 後輩인 兪銀惠 새政治民主聯合 代辯人은 김기종에 對해 "極端的 民族主義者에 가까운 것 같다"고 評價했다. "金氏는 學校 다니면서 많은 文化運動, 獨島지킴이 運動 등을 세게 해왔던 분"이라며 "日本大使館에 콘크리트 조각을 던져서 檢擧된 적도 있고 焚身을 하는 等 個人的으로도 突出行動을 反復하기도 했다"고 傳했다. 柳 代辯人은 "大學 卒業 後 30餘年 동안 繼續 獨島 署名運動 等을 했는데 突出行動을 反復하다보니 信賴感을 充分히 주지 못해 活動하는데 어려움도 겪었을 것"이라고 傳했다. [68]
  • 이웃과 知人들은 金氏가 "平素 周邊에서 認定받지 못하고 突發行動을 일삼았다"고 입을 모았다. 90年代 初부터 傳統그림자劇인 '萬石中놀이' 復元 作業을 함께 했다는 A氏는 金氏에 對해 "몸과 精神이 많이 아프다"며 "特히 精神分裂症勢가 있는 것 같았다"고 말하면서 金氏가 傳統 文化 復元과 獨島지키기, 統一 推進 等 뜻 깊은 일에 앞장섰으나 成果가 없어 인정받지 못했다고 傳했다. 親한 先後輩 사이에서 대놓고 '그만하라'고 挽留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傳해졌다. A氏는 "世上 사람들이 自身 말을 듣지 않으니 極端的인 選擇을 한 듯 하다"며 "스스로 獨立鬪士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69]
  • 東亞日報 송평인 論說委員은 김기종에 對해 "短簫 하나 제대로 불지 못하는 實技猛(盲)이었다. 그렇다고 뛰어난 理論家도 아니었다. 말은 感情이 앞서 散漫했으며 論理라는 것도 盲目的 ‘우리 것’ 主義에 가까웠다. 그가 남다른 點은 熱情이었다. 다만 온갖 우리 것에 對한 關心으로 堪當할 수 없는 일을 벌여놓고는 收拾은 잘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70]

背後 論難과 政治性向 [ 編輯 ]

김기종이 襲擊을 저지른 場所가 민화협 朝餐 講演會란 點을 들어 現 민화협 代表議長이자 親朴系 政治人인 홍사덕 前 議員이 배후일 것이라는 推測도 存在한다. 그러나 김기종의 서울市民文化團體連席會議가 민화협에 加入한 時期는 홍사덕 前 議員이 代表議長으로 있던 最近이 아니라 민화협 創立 初期이고, 민화협은 그에 따라 加入團體에 自動으로 招待狀을 發送한 것이다. 게다가 민화협은 保守性向의 團體도 아니며 金大中政府時節 出帆한 統一運動 常設協議體로서 政黨, 進步, 保守, 市民團體 等 政治的 性向의 區分없이 銃181個 團體를 網羅한 汎國民協議會이다. [71] [72] [73] 政府의 支援金으로 運營되며 [74] 政權에 따라 代表議長度 바뀌어 왔다. [75] 이렇듯 다양한 團體로 構成된 協議會의 代表議長이 홍사덕 前 議員인 것이고, 그가 代表議長이기 때문에 構成員이 저지른 犯罪의 背後라는 論理는 現在 박근혜 政府에 稅金을 納付하고 있는 다양한 市民들 가운데 일어나는 犯罪行爲의 背後가 朴槿惠 大統領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襲擊의 背後가 홍사덕이라는 一部 推測은 蓋然性이 없다.

그는 블로그에서 數次例 李明博, 朴槿惠 政府의 對北政策을 批判하고 있다. 김기종은 自身의 個人 블로그에 '消息 칼럼'이라는 글을 쓰면서 自身의 政治的 性向을 드러냈다. 이는 保守團體로부터 從北으로 疑心받을 수 있는 內容을 담고 있다.

"結局 採擇까지는 수많은 難關 가로막으며 버티고 있었지만 6.15 宣言 이라는 열매로 南北은 새로운 局面을 열어줍니다. 이제 南北 오고가는 過程에서 統一의 꿈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5.24 措置 라는 怪物이 불쑥 登場하면서 여러 狀況들을,다시금 中斷의 狀態로 되돌려 놓고 맙니다. 따라서 現 政權의 選擧 公約부터 되새길 必要가 있습니다.나름대로 平和信賴이면 充分했는데, 프로세스란 外來말도 複合됨이 疑訝했던 結果가 政策執行에 그대로 反映됩니다." [76]

"그런데 現 政權의 政策 韓半島 信賴프로세스 입니다.과연 平和와 信賴,單語에서의 差異點은 무엇일까요? 유엔에서 27日 우리 外交를 擔當하는 윤병세 長官이 北韓에서 經濟開發과 核武器 開發 竝行하는 路線을 抛棄한다면 南韓에서 도와줄 用意가 있다고 떠드니-전임정권, 이명박 當時 非核開放三千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果然 어느때 長官인지 理解되지를 않습니다." [77]

"우리民族끼리 서로 힘을 합쳐 自主的으로 解決하기로 하며 統一 原則을 確認했던 615共同宣言 記念日 1달 남았습니다.(중략) 넓은 바다 被害,좁은 우리 半島를 감싸며 訓鍊하는 意圖는 무엇이며 어떻게 判斷해야할지 안타깝고 어처구니없습니다. 북을 刺戟, 核武器 實驗 名分 안겨주었던 軍事訓鍊 强行으로 가장 많은 利益을 얻은 國家와 損害를 본 國家는 어디일까요?" [78]

" 天安艦 眞實, 南北 共同調査로 밝히면 된다. 平和統一 위해 南北 輕俠의 열매 맺으려던 努力들에 分斷의 悲哀 天安艦 事件이 또다시 確認되었습니다.이 事件을 빌미로 政府가 取한 524措置 結果입니다.즉 北側에 비해 4倍 넘는 經濟 損失 檢證되었습니다.(중략)천안함 46名 死亡 原因, 南北共同調査로 糾明하자는 바램을 멀리하고, 아직까지 一方的 主張만 한 탓이-" [79]

"그렇다면 北녘으로 삐라撒布하는 主體가 果然 누구일까요? 一旦 言論에 報道된 것처럼, 脫北 同胞라고 認定해 봅시다. 그들은 北녘에서 追放된 것이 아니라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鎭靜 보다나은 삶을 追求한다면 自身들이 居住하는 곳에서 苦悶하면서 實踐하여 보다 알찬 社會를 만들었어야 됩니다." [80]

한便, 박대출 새누리黨 代辯人은 2015年 3月 8日 論評에서 "野黨 國會議員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記者會見을 한 일도 여러 次例인 김기종이 어엿한 市民運動家로 行世한 데는 野黨 議員들과의 交流가 한몫 했다"면서 "金氏는 國會 마이크를 잡고 反體制 主張을 펼치는, 一般人은 想像도 할 수 없는 特惠를 받았다"라는 內容으로 批判하였고 다음날 새누리黨 서청원 最高委員은 最高委員會議에서 "從北勢力에 對한 관리를사법당국이 徹底히 해야 하고, 强力한 對策이 나와야 한다"면서 "어느 政治權이 뭐라고 하든 이番에 背後를 徹底히 가려내 이런 勢力이 이 땅에 더 存在하지 않는 그런 斷乎한 對處가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새누리당 初·再選 議員들의 모임인 '아침소리'에서도 野黨을 겨냥한 攻擊的 發言이 잇따르자 새政治民主聯合 은 "새누리당이 第1野黨을 從北宿主라고 몰아붙이고, 김무성 代表는 政治爭點化에 汨沒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면서 "野黨을 從北宿主라고 論評한 것에 對해 公式的인 謝過를 要請한다"라고 했다. [81] [82]

論難 [ 編輯 ]

  • 김기종은 2001年부터 3年間, 2005年부터 2年間 總 5年에 걸쳐 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 諮問委員으로 活動했다. 그런데 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는 大統領이 議長으로 있고 委囑狀을 주는 憲法機關으로서 諮問委員이 되려면 政黨이나 國會議員等의 推薦을 받고 身元照會를 通過해야 한다. 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 關係者는 當時 資料가 다 破棄돼 누가 김기종을 推薦했는지 確認하기 어렵다는 立場을 밝혔다. 또한 김기종은 2005年부터 國民을 相對로 統一敎育을 하는 任期2年의 統一部 敎育委員으로 연이어 委囑되었다. 當時 統一敎育院 서울協議會에서 김기종을 推薦하자 統一部는 별다른 審査없이 그대로 임명했다. 金氏가 6次例 訪北한 時期도 統一部 敎育委員으로 活動하던 時期였다. [83]
  • 河泰慶 새누리黨 議員이 김기종의 辯護士에 對해 김기종보다 더 한 從北, 民辯 辯護士라며 批判하자 [84]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 모임 側은“김씨의 辯護人인 황상현 辯護士는 民辯 會員인 적이 없다”고 하면서 “辯護士 倫理章典에는 ‘辯護士는 依賴人이나 事件의 內容이 社會 一般으로부터 非難을 받는다는 理由만으로 受任을 拒絶해서는 안 된다’고 規定하고 있다”고 밝히며 “河 議員이 말하는 從北論爭은 批判과 討論을 抹殺하고 魔女사냥式 便 가르기를 통해 政治的·思想的 줄세우기를 强要한다”며 “河 議員의 最近 言論 等 發言에 對해 別途로 法的 責任을 물을 것”이라고 强調했다. [85]
  • 김두연 서울地方警察廳 保安2課長은 브리핑에서 “金氏 逮捕 後 訪北 行跡 및 反美 集會를 열거나 從北 活動을 한 것이 確認돼, 利敵表現物 等이 있을 것으로 判斷하고 令狀에 表記하려 했다”며 “檢察에서 押收搜索 後 檢討하자고 해 漏落된 것”이라고 밝혔지만 警察이 押收搜索 令狀에 記載돼 있지 않은 嫌疑로 證據品을 確保한 뒤 事後에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를 適用하기로 해 便法 搜査 論難이 있다. [86] [87]
  • 서울市立 남서울生活美術館에서 열린‘SeMA 藝術家 길드 아트페어’에서 홍성담 作家의 展示作品人 리퍼트 大使 襲擊 描寫 '김기종의 칼질'과 關聯하여 테러를 擁護한 것 아니냐는 論難이 있다. [88] [89]

矯導官 暴行 [ 編輯 ]

  • 5月19日 새로운 患者服을 달라는 自身의 要求에 바로 對答해주지 않았다는 理由로 矯導官, 醫務官을 暴行하고 [90] 5月 20日 "발목 治療를 위해 警察病院에 보내달라"고 要求했으나 拘置所 側에서 自體 治療가 可能하다며 받아주지 않자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殺人未遂者다, 가만히 안 두겠다"고 말하는 等 辱說을 하며 醫務官과 矯導官을 잇따라 暴行한 嫌疑를 받아 公務執行妨害 追加 立件되었다. [91] 11月 23日 서울중앙지법 刑事17單獨 박사랑 判事 審理로 열린 業務妨害 및 公務執行妨害 嫌疑 1次 公判에서 김기종은 "火傷 等 負傷을 입어 팔을 제대로 쓸 수 없다"며 "擧動이 不便해 矯導官 等을 暴行할 수 없다"고 말했고 김기종의 辯護人은 "當時 金氏는 公務員으로부터 身分證을 제대로 보지 못 했다"며 "이로인해 相對方이 公務員인지 몰랐다"며 公務執行 妨害 嫌疑를 否認했다. 이에 檢察은 "目擊者 等을 證人으로 申請하겠다"며 嫌疑를 立證할 計劃을 밝혔다. [92]

이 事件은 지난 1月 서울 서대문구에서 橫斷步道 앞에 無分別하게 傳單紙를 붙여 놓은 것을 發見하고 市內버스의 琉璃窓을 손으로 치는 等 通行을 妨害하고 公務員들이 제대로 管理를 하지 않는다는 理由로 公務員을 暴行한 事件과 倂合하여 審理한 서울중앙지법 刑事17單獨 박사랑 判事는 3月 23日 業務妨害 및 公務執行妨害 嫌疑에 對해 "眞摯한 反省보다는 犯行을 否認하면서 自己 行動의 正當性만 强調하고 있다. 拘置所 服役 中에 저지른 公務執行妨害 等은 그 違法性에 비춰볼 때 罪責이 가볍지 않다"며 懲役 1年6月을 宣告했다. [93]

이 事件은 4月 26日에 열린 駐韓 美國大使에 對한 殺人未遂 抗訴審 4次 公判에서 倂合되었다.

學歷 [ 編輯 ]

經歷 [ 編輯 ]

著書 [ 編輯 ]

  • 2009年 : 《獨島와 우리 그리고 2010年》 ISBN   978-89-965871-9-4
  • 2010年 : 《萬石中놀이》 ISBN   978-89-965871-1-8

같이 읽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리퍼트 美大使 테러 2007年 訪北뒤 極端 行動… 靑瓦臺 앞 焚身(2007年)·김정일 焚香所 設置 試圖(2011年) 犯人 김기종은 누구
  2. 민정黨舍의 學生 籠城
  3. 우리마당 김기종, 어떤 活動과 主張? Archived 2015年 4月 2日 - 웨이백 머신 ,TV朝鮮,2015-03-07
  4. 1985年 5月 星條旗 燒却 事件 記事
  5. 김기종氏 代表 '우리마당'은...미 大使館 星條旗 燒却 事件 벌이기도 ,國際新聞, 2015-03-05
  6. 리퍼트 駐韓 美 大使 被襲...波長 '一波萬波' ,YTN,2015-03-05
  7. 김기종, 盧政府 統一部 委員 活動…9次例 訪北 Archived 2015年 4月 2日 - 웨이백 머신 , 채널A, 2015-03-05
  8. 統一部 "김기종 8次例 訪北".. 두 次例 民主平統 地域委員度 맡아"
  9. 김기종 ‘統一敎育委員’ 經歷 論難 ,國民日報,2015-03-06
  10. '우리마당 獨島지킴이' 代表 김기종, 리퍼트 美大使 過去 行跡보니… , 아시아經濟, 2015-03-15
  11. 襲擊·焚身試圖까지…'대사 常習 테러' 김기종은 누구? JTBC,2015-03-05
  12. 美大使 襲擊 김기종, 옛민노당 集會서 "永遠히 鬪爭" , SBS뉴스, 2015-03-05
  13. 김기종이 몸 담고 있는 우리마당統一文化硏究所는 어떤 곳?
  14. 김기종, 金正日 焚香所 設置에도 關與 ,國民日報,2015-03-05
  15. 리퍼트 大使 被襲, 容疑者 '우리마당 代表' 김기종은 누구 ,데일리韓國,2015-03-05
  16. 김기종의 블로그
  17. 이지헌 (2011年 12月 26日). “大漢門 앞 金正日 焚香所 設置 霧散” . 聯合뉴스.  
  18. 김기종, 統進黨 '戰爭反對 平和實現 國民行動' 一圓
  19. 美 大使 테러 김기종, 지난 2013年엔 朴元淳 서울市長 테러 威脅 , 朝鮮日報, 2015-03-06
  20. 文化運動團體에 새벽 怪漢 亂入 ,한겨레,1988年 8月 18日
  21. 오홍근 記者 테러 容疑者 軍人 4名 身柄 確保
  22. 東亞日報 1988年 9月 27日子
  23. 우리마당 被襲提報 信憑性 없어 原點搜査 , 京鄕新聞, 1988-09-29
  24. '우리마당 事件' 트라우마?…김기종, 極端 行動들
  25. '우리마당 事件 徹底히 파헤치자' 平民서 政治問題化 ,東亞日報,1988-09-30
  26. 情報司 政治介入 與否 追窮 ,한겨레,1988-10-09
  27. 文化運動團體에 새벽 怪漢 亂入 ,한겨레,1988-08-18
  28. "우리마당 事件도 情報司 所行 平民,提報 發表 이규홍准將指示" ,한겨레,1988-10-01
  29. 情報司 '우리마당' 事件과 無關 陸軍解明 , 한겨레, 1988-10-01
  30. "우리마당 襲擊은 軍特殊要員 犯行" 평민당 主張 ,京鄕新聞,1988-09-30
  31. “북파工作員 動員해 政治 테러 저질렀다” . 2015年 4月 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3月 15日에 確認함 .  
  32. 美大使 襲擊 김기종…過去 反日→最近 反美 集中 , 聯合뉴스, 2015年 3月 5日
  33. 리퍼트 美國 大使 襲擊한 김기종은 누구? , 한겨레 , 2015年 3月 5日
  34. 美大使 테러 김기종,過去 日臺詞에도 시멘트 덩어리 던져 , 聯合뉴스 , 2015年 3月 5日
  35. 檢察 獨島 지킴이 김기종氏 拘束 起訴.
  36. 北韓, 2010年 日本 大使 테러 當時 김기종 擁護 , 聯合뉴스 , 2015年 3月 5日
  37. '테러犯' 김기종, 過去 拘置所서 김장훈 支援 期待 , 이데일리, 2015年 3月 5日
  38. “김기종, '常習 亂動' 事實 드러나.. 前科 6犯 電力” . 2015年 3月 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3月 5日에 確認함 .  
  39. 리퍼트 駐韓 美國 大使, 怪漢 攻擊 받아 負傷 當해 , 朝鮮日報 , 2015年 3月 5日
  40. 김기종, 油印物 所持 "戰爭訓鍊 中斷ㆍ戰作權 還收하라" , 聯合뉴스TV, 2015年 3月 5日
  41. 美大使 攻擊 김기종 "戰爭訓鍊 中斷시키려 열흘間 計劃" , 聯合뉴스 , 2015年 3月 5日
  42. 張倫碩 議員이 美國大使 테러犯 制壓
  43. "김기종, 10日 前부터 리퍼트 攻擊 準備" ,YTN,2015-03-15
  44. 美國 當局 '리퍼트 大使 被襲'에 衝擊..言論 緊急 報道 , 聯合뉴스 , 2015年 3月 5日
  45. 우리마당 김기종, 參席 名單 없이 어떻게 立場했나 봤더니… 驚愕
  46. 北, 리퍼트 被襲에 “美國에 加해진 應當한 懲罰” , KBS News, 2015年 3月 6日
  47. 北韓, ‘安重根 依據’ 빗대 김기종 또 擁護 , KBS, 2015年 3月 8日
  48. “警察, 김기종 利敵性 疑心書籍 30點 鑑定 依賴” . 2015年 4月 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3月 10日에 確認함 .  
  49. 김기종 ‘殺人未遂’ 拘束令狀…國保法 違反도 檢討 , KBS News, 2015年 3月 6日
  50. 김기종, 治療 받기 위해 警察病院 移動
  51. 김기종 "金日成, 20世紀 훌륭한 民族 指導者" , 朝鮮日報, 2015-03-10
  52. “오늘 退院…心境 묻는 質問에 默默不答” .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9年 9月 13日에 確認함 .  
  53. '美大使 襲擊' 김기종, "몸 아프다" 現場檢證 拒否
  54. 檢, 김기종 夷狄물 證據能力 論難에도…'국보법 證據' 採擇
  55. 檢察, 김기종에 國家保安法 '利敵 同條' 適用 檢討
  56. 檢察, 김기종에 國家保安法 '利敵 同條' 適用 檢討
  57. “내 德에 한·美 訓鍊 하루 中斷… 參酌을” ‘리퍼트 襲擊’ 김기종 法廷서 荒唐 主張
  58. 檢察, 美大使 襲擊 김기종…懲役 15年 求刑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59. 法院, ‘美 大使 襲擊’ 김기종 1審서 懲役 12年 宣告
  60. 抗訴審 裁判部 職權으로 決定…"情緖的인 問題 있는지 알아봐야"
  61. ' 駐韓美國大使 殺人未遂' 김기종 精神鑑定 結果…"問題 없다 " . 2016年 4月 2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6年 4月 6日에 確認함 .  
  62. '리퍼트 美大使 襲擊' 김기종氏 2審서도 懲役15年 求刑
  63. ' 美國大使 被襲' 김기종…"리퍼트 大使에 뿔났다 " . 2016年 6月 1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6年 5月 3日에 確認함 .  
  64. 美國 大使 襲擊' 김기종 2審 懲役 12年
  65. [1]
  66. “大法院에서 確定” . 2017年 10月 1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7年 10月 18日에 確認함 .  
  67. 김기종 辯護했던 朴燦鍾 "2010年엔 抗日運動家였는데..."
  68. 兪銀惠 "김기종, 極端的 民族主義者에 가깝다"
  69. "'美大使 襲擊' 김기종, 北韓사람도 30分 以上 對話 못할 것"
  70. 내가 大學生 때부터 본 김기종
  71. 민화협, 對國民 謝過..."김기종에 招請狀 發送" ,YTN,2015-03-05
  72. '김기종 制壓' 張倫碩 議員 "犯人과 뒹굴면서, 등허리 올라타…" ,JTBC,2015-03-15
  73. 리퍼트 大使 招請限 '민화협'…어떤 團體 ,MBN,2015-03-05
  74. 丁世鉉 민화협議長 "辭退 要求 받아" ,YTN,2008-06-05
  75. 민화협 歷代 代表常任議長 Archived 2015年 3月 20日 - 웨이백 머신 ,民族和解協力汎國民協議會
  76. 2014年 9月 8日에 쓴 自身의 블로그 '2014年 9月1日 消息 칼럼
  77. 2013年 10月 22日 블로그에 '2013年 9月30日 消息 칼럼'
  78. 2013年 5月 13日 消息 칼럼
  79. 2013年 12月 26日 남긴 '2013年 11月 4日 消息 칼럼'
  80. 2014年 11月27日에 블로그에 남긴 글인 '11/3 우리마당消息 칼럼母音'
  81. 與 "美大使테러, 野黨 從北宿主 懺悔錄 쓸때" ,YTN,2015-03-08
  82. 與 "從北勢力 剔抉" vs 野 "종北몰이 안돼, 二重잣대"
  83. 민주평통 諮問委員·統一敎育委員…김기종 미스터리 , TV朝鮮, 2015-03-06
  84. 河泰慶 “김기종 辯護 맡은 황상현 辯護士 더 從北 性向”
  85.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091751431&code=940301 民辯 “김기종氏 辯護人 民辯 所屬 아니다” 디지털뉴스팀]
  86. 김기종氏 押索 令狀에 警察, 保安法 表記 詩도… 檢察선 “搜索 後 判斷”
  87. 김기종에 押收搜索 令狀에 없는 國保法 違反嫌疑 檢討 論難
  88. 리퍼트 大使 襲擊 描寫 '김기종의 칼질' 論難…安重根 醫師에 빗대
  89. 홍성담 "'김기종의 칼질' 테러 擁護作 아니다"
  90. “美 大使 襲擊 김기종 '矯導官 暴行' 嫌疑 否認” . 2015年 11月 2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11月 23日에 確認함 .  
  91. '美 大使 襲擊' 김기종氏 拘置所서 矯導官 暴行
  92. “美 大使 襲擊 김기종 '矯導官 暴行' 嫌疑 否認” . 2015年 11月 2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11月 23日에 確認함 .  
  93. '拘置所 亂動' 김기종, 懲役 1年6月 實刑
  94. 리퍼트 大使, 오른쪽 턱 위 12cm 팔部位 等 總 5군데 刺傷..."手術 마쳤다"
  95. 민화협 "김기종 이끄는 서울市民文化連席會議 除名"
  96. 美大使 테러 “김기종 授業 10年前 閉講됐지만…” 抗議받은 聖公會大 公式 立場 , 國民日報, 2015年 3月 6日
  97. 김기종, 統一敎育委員 委囑·活動履歷 適切性 論難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