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宗 暗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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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 暗約설 (高宗暗弱說)은 朝鮮 後期의 君主 高宗 이 暗愚(暗愚)하고 柔弱했다는 理論이다.

槪要 [ 編輯 ]

高宗 暗約說은 高宗이 無能했다는 理論인데, 나아가 君主의 無能뿐만 아니라 나아가 나라 全體에 對한 評價가 暗躍했다는 飛躍을 이끌었다. 이웃한 日本帝國 은 서둘러 西洋畫를 이룩하여 富强한 帝國主義 國家로 發展한 反面, 朝鮮은 鎖國 끝에 個國은 하였으나 大院君과 民王后 一族, 守舊黨 開化黨 이 繼續 對立하는 가운데 皇帝마저 無能하여 밀어닥치는 外勢에 제대로 對應하지 못하고 結局 國權을 日本에 내주고 말았다는 結論을 導出하기 위한 理論이다. 이 理論은, 日本 侵略主義者들이 故意로 만들어낸 理論임에도 韓國史의 一般論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고, 植民地 近代化論 의 根據로서 利用되어 왔다.

同時代의 主張으로는 慰安 스카이 , 윤치호 , 黃玹 等의 批判이 存在하고 있고, 이준용 이나 박영효 는 記錄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高宗을 逐出하려는 쿠데타를 企圖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否定的 評價에 對한 第1次 飼料나 論理的 根據에 對한 整理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敎科書를 비롯한 大部分의 書籍은 高宗의 暗約說과 비슷한 論調로 敍述하고 있다. 이는 앞서 말한 慰安 스카이, 윤치호, 黃玹 等의 批判도 마찬가지로 論理的 根據를 밝히고 있지는 않다.

高宗에 對한 外國人의 評價 [ 編輯 ]

마르티나 도이힐러 (Martina Deuchler)는 高宗이 周邊에서 벌어지는 事件들에 對해 受動的이 아니라 能動的으로 眞摯한 努力을 기울였다고 肯定的으로 評價하였다.

反面에 데넷 타일러 (Dennett Tyler)의 見解는 反對로 否定的이다. 그는 1905年 皇帝와 調整 官僚의 乙巳條約 無效化 運動 때 11月 25日子로 데오도르 루스벨트 美國 大統領이 루트(Root) 國務長官에게 보낸 書信과 12月 19日 루트가 민영찬 公使에게 보낸 回信 等을 根據로, 美國의 잘못보다는 大韓帝國의 君主였던 高宗의 잘못이 큼을 力說하였다.

게다가 韓國에서 머문지 10年이나 된 美國 公使 안련은 高宗에 對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韓國 百姓들이 불쌍하다. 내 일찍이 九萬 里를 돌아다녔지만 上下 4000年에 韓國 皇帝 같은 이는 처음 보는 人種이다." [1]

해링턴 (Harrington)은 알렌 (Horace Newton Allen)李 톨레도 에서 쓴 1903年 10月 14日子 日記를 根據로 삼아 高宗을 “유약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해링턴의 意見은 앨런이 쓴 다른 날의 日記에서는 오히려 姑從에 對해 肯定的으로 評價함에도 不拘하고 否定的인 結果만을 根據로 삼았다는 批判을 받고 있다.

스워터트 는 美國人 데니 (O. Denny) [2] 가 남긴 評價, 卽 “高宗은 偉大한 國家의 支配者다운 剛健, 樂觀 및 忍耐를 보였다.”라는 評價를 支持하면서, 위 해링턴 硏究의 잘못을 指摘하였다. 그리고 高宗이 雇聘한 西洋人 拷問 가운데 헐버트 (Homer Hulbert)는 高宗에 對한 否定的 評價를 强하게 否定하였다. 그는 皇帝가 “柔弱하다는 사람은 틀렸다.”라고 하면서 高宗이 主權 守護에 對한 確固한 意志 아래 死生決斷의 措置를 斷行했던 것들을 列擧하였다.

高宗에 對한 西洋人의 評價 [3] 는 1896年 10月에 刊行된 《코리언 레퍼지터리》 3卷 11冊에 실린 〈韓國의 國王 陛下〉(His Majesty, Th King of Korea)의 글이 가장 具體的이다. 只今까지 高宗에 對한 外國人의 評價가 나타난 資料 가운데 客觀的이라고 볼 수 있는 〈韓國의 國王 陛下〉는 姑從에 對해 가장 仔細하며, 또한 매우 肯定的인 內容이 나타나 있다.

또한 英國 의 地理學者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改新敎 宣敎師 언더우드 夫人의 周旋으로 景福宮 에서 高宗 皇帝를 謁見하는 모습을 記錄하면서, “朝鮮의 王은 溫和한 性品으로 有名하며, 성실하고 有能한 君主이지만 너무 착한 사람이다. 그에게 强靭한 性格이 있었다면 훌륭한 統治者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4]

1883年 朝鮮에 進駐한 慰安 스카이 는 朝鮮의 君主를 拜謁하는 자리에서도 起立하지 않을 것이며, 高宗을 ‘昏君(昏君)’이라 稱하면서 廢位를 主張하고 나선다. 朝鮮 政府官僚 스무名을 一擧에 自身의 側近으로 갈아치웠다. 美國公使 포크는 이를 ‘無血 政變’이라고 이름했다. [5]

한便 《코리언 레퍼지터리》에 실린 〈韓國의 國王 陛下〉는 現存하는 高宗에 對한 外國人의 評價 가운데 가장 仔細하면서도 가장 好意的이지만, 비숍의 評價는 日本에서 高宗이 暗鬱 하고 釉藥 한 君主였다는 所謂 “高宗 暗約설”의 根據로 쓰이기도 한다.

高宗 暗君說의 起源과 深化 [ 編輯 ]

暗君說의 登場 [ 編輯 ]

高宗 暗約說은 처음에 高宗 暗君설 이라는 理論이었다. 이는 高宗이 暗愚(暗愚)韓 君主였다는 理論이며, 뒤에 高宗이 柔弱하다는 評價(앞서 말한 테넷 타일러의 論評과 앨런의 日記)가 덧붙여져 高宗 暗約설로 發展한다.

1883年 朝鮮에 進駐한 慰安 스카이 는 高宗을 暗君이라 부르며 高宗의 廢位를 企圖하기도 했다. [5] 윤치호 는 高宗이 어리석은 君主라는 評을 듣고 있다고 보았다. 그가 判斷하기에 다른 사람들도 皇帝를 嫌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卽, 윤치호 는 사람들은 皇帝를 “너무나 憎惡해서 그를 亡身 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歡迎하는 것 같다. 그가 王座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사람들의 嫌惡感이나 正義感을 만족시킬 것 같다”고 보았다. [6]

高宗이 暗愚한 君主였다는 批評은 1907年 헤이그 萬國平和會議 特使 派遣 事件 을 口實로 日本 側이 高宗 皇帝를 强制 退位시킬 때 다시 나왔다. 오사카 마이니치新聞社 京城 支局의 記者였던 나라사키(楢崎桂園)가 그해 12月 出版한 《韓國정미정變死》(韓國丁未政變史)(1907.12, 京城, 日韓書房)에서 言及되는 巖柱(暗主)와 暗愚(暗愚)라는 말을 最初로 使用하였다.

日帝 時代의 高宗 [ 編輯 ]

그 뒤 1910年 10月 韓日 倂合 條約 을 契機로 日本人이 쓴 韓國 近代史 書籍이 나오기 始作하면서 高宗 柔弱설(柔弱說)이 나오게 된다. 倂合한 그해에 日本人이 펴낸 書籍으로는 이케다(池田常太?, 秋旻) 篇, 《日韓合邦素砂》(日韓合邦小史)(1910年 9月 20日 發行, 東京 讀賣新聞日就社)와 日本歷史地理學會 篇, 《韓國의 倂合과 局社》(1910年 10月) 等이 있다. 特히 이케다가 펴낸 《日韓合邦素砂》의 序文이 8月 29日子로, 바로 韓日 倂合 條約이 公布된 날짜이다. 當時 倂合 豫定日이 祕密에 붙여져 있었는데, 編者가 그 날짜를 알고 있었다는 事實은 政府와 密接한 關係를 가지고 冊 出刊을 推進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1910年을 전후하여 日本人이 出版한 韓國 近代史 書籍의 共通點은, 主로 高宗이 卽位하였을 때부터 1907年 强制 退位할 때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高宗에 對한 言及이 매우 微微하다는 데에 있다. 더구나 韓國 近代史를 다루고 있는 責任에도 韓國에 對한 內容보다는 韓國을 倂合한 日本의 榮光을 敍述하는 데에 더 置重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朝鮮과 大韓帝國을 “專制君主”가 다스리는 나라임을 强調하면서도 그 專制君主에 對한 敍述을 意圖的으로 排除하는 緻密함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技術 方法은 그 뒤에 나온 書籍에서도 一貫되이 지켜진다.

이렇듯 日本人이 編纂한 高宗 時代에 對한 專門書籍이나 硏究書에서 日本人이 專制君主 또는 暗君 等으로 描寫한 高宗의 存在를 理由 없이 오랫동안 빼놓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 存在를 빼놓을 수 없게 되었고, 國王이 無能했음을 具體的으로 드러낼 必要가 있게 되었다. 1940年에 나온 다보하시(田保橋潔)의 《近代一線關係의 硏究》 上·下(朝鮮總督府 中樞院)이라는 冊이 그 代表的 例이다. 이 冊에서는 國王이 했던 行爲, 特히 進步的 政策을 大院君과 閔王后 또는 閔氏 戚族이 한 일로 歪曲해 버린다.

結局 1910年 韓日 倂合 當時부터 始作된 高宗에 對한 評價 歪曲 作業은 日帝 强占期 내내 이어졌으며, 1940年代에 이르러서는 高宗 暗君설에 高宗 柔弱설이 합쳐져서 高宗 暗約설로 歪曲이 深化된다. 特히 光武改革의 結果로 이루어진 各種 近代的 機構의 設立과 신문물의 導入을 意圖的으로 貶毁하였다. 甚至於 國王이 主導한 獨立門 建立과 같은 事業을 獨立協會 單獨으로 또는 開化黨(獨立黨)李 單獨으로 推進한 事業으로 歪曲한 일이나 [7] 當時 韓國의 臣民이 姑從에 對해 많은 尊崇心을 가지고 있었다는 事實은 極口 否認하고 있다.

解放 以後 韓國에서 發行된 韓國史 專門서나 敎科書도 高宗의 役割에 對한 日本人의 視角을 無批判的으로 受容하여 高宗 時代를 敍述할 때 高宗에 對한 敍述이 極히 微微하게 되거나 無能한 君主로 誤解하게끔 表現되었다.

反對 意見 [ 編輯 ]

高宗이 暗愚하다는 理論과는 달리 當時 高宗과 그 時代相을 나타내는 여러 資料의 記錄이 여럿 있다. 特히 《獨立新聞》의 論調는 當時 臣民이 國王에 對해 매우 尊崇心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特히 1896年 6月 20日子 《獨立新聞》에서 밝히고 있는 臣民이 國王에 對해 尊崇心을 가지고 있다는 事實과 함께 獨立門을 政府에서 建立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只今까지는 《獨立新聞》의 敍述에도 不拘하고 獨立協會에서 獨立門 建立을 主導했다고 많은 學者가 主張해 왔다.

그밖에 朝鮮의 日本 國서 拒否 事件이나 그에 이어지는 江華島 條約에서도 高宗의 役割을 두드러진다. 뒷날 朝美修好通商條約 을 비롯한 各種 外國과의 條約에서도 亦是 高宗이 重要한 役割을 했음에도 日本人이 敍述한 朝鮮 近代史 前文書에서는 全혀 浮刻되지 않고 있다고 批判한다.

게다가 當代에 日本人이 아닌 外國人이 姑從에 對해 惡評을 한 例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點에서 더욱 姑從에 對해 좋지 않게 敍述한 朝鮮 近代史 書籍의 論調와 背馳된다.

그리고 1895年 에 한성신문 記者로서 乙未事變 에 直接 加害者로 參與하기도 했던 기쿠치 겐조(菊池謙讓)가 쓴 《近代造船社》 上·下(1936年, 1939年, 鷄鳴社, 京城)에서 相當히 다른 意見을 보이고 있다. 기쿠치는 《近代造船社》를 쓰기 前에 《高宗太皇帝實錄》의 編纂委員으로 活動하면서 많은 資料를 모으게 된다. 그의 論調는 大體로 《코리아 레퍼지터리》와 비슷하여, 高宗이 癌軍이 아닌 名君이었으며, 但只 列强에 包圍되어 內定보다는 外交에 힘쓰다가 國稅를 끝내 세우지 못한 不運한 君主라고 描寫하였다. 또한 기쿠치는 다른 日本 學者가 擧論하지 않은 平壤 离宮 造營(造營)에 對해서 다루고 있으며, 그러한 高宗의 治績을 러시아와 日本의 사이가 나빠짐에 對備한 施策이라고 評價하였다. 1903年 8月 15日 高宗 皇帝가 러시아 皇帝에게 親書를 보내어 同盟을 要請하였는데, 그 親書에는 日本이 황성 을 侵奪하게 됨을 高宗이 이미 豫測하였음이 밝혀져 있고, 이러한 同盟 要請을 平壤 离宮 조영의 延長으로 보았다. 그밖에도 高宗 時期에 設置된 各種 近代的 機構나 받아들여진 西洋 文物을 開化派나 獨立協會의 治績으로 보지 않고 高宗의 業績으로 評價하였으며, 오히려 日本에 合倂됨으로써 結實을 보지 못하고 散滅했다고 보았다.

最近, 日本에 依해 高宗이 安重根 義擧의 背後로 指目된 事實이 確認되었는데, 이는 高宗 暗約說을 否定할 수 있는 또다른 根據가 되었다. [8]

暗約설에 對한 反對 論據 [ 編輯 ]

高宗이 이루었던 業績과 日本 侵略主義者들이 主張했던 暗約說에 따라 歪曲되게 알려진 事實 또는 高宗의 業績을 埋沒시키기 爲해 일어난 事件에 對해 列擧하면 다음과 같다.

  • 1868年 부터 1875年 사이에 일어난 國서 拒否 운요호 事件 에 對해 高宗이 아무런 役割도 하지 못했다고 主張하였다. 實際로는 高宗이 나서서 個項을 主導하였으며, 오히려 日本이 妨害하였다.
  • 江華島 條約 을 비롯한 外國과의 條約에 高宗이 關心을 가지고 直接 指示를 내렸다.
  • 1886年 私奴婢 世襲制의 革罷를 闡明하였다.
  • 1896年 2月 11日 러시아 公使館으로 이어하여 主筆(駐?)韓 일을 俄館播遷 이라 부르며 外勢 依存의 亡國的 處事로 보았다. 反面에 《 고종실록 》에서는 아예 “播遷”이라는 말이 없다. 暗約설 支持者들은 高宗이 러시아 公使館에서만 틀어박혀 지낸듯이 主張하지만, 實際로는 러시아 公使館에서 景福宮과 慶運宮을 오가면서 지냈다. 또한 이 期間에 都市改造가 이루어진다.
  • 1896年 獨立門 建立으로부터 始作된 漢陽의 都市 改造 事業을 開化派의 業績 또는 漢城 判尹 이채연 (같은 해 10月 6日 任命)·總稅務司 맥레비 브라운 (같은 해 7月 12日 詔勅을 내려 반드시 그의 決裁를 받아야만 豫算 入出이 可能하게 했다.) 두 사람의 業績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開化派는 俄館播遷이나 慶運宮 還御를 否定的으로 보았으므로 慶運宮 中心의 都市 改造를 했다고 보기 어렵고, 9月 28日 詔勅(內部令 第9號)을 내려 都市改造를 高宗이 命하였음이 밝혀졌다. 《獨立新聞》 1896年 11月 7日 論說에서 이를 “朝鮮이 이제 文明 進步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높이 評價하였다.
    • 1896年 獨立門 의 建立을 高宗 또는 朝鮮 政府가 主導했으나, 이를 獨立協會 또는 徐載弼이 主導한 듯이 歪曲하였다.
    • 慶運宮을 中心으로 放射形 道路와 環狀 道路 및 그 外接 道路를 새로 開通하였으며, 旣存 道路를 整備하였다.
    • 慶運宮 中心體制를 무너뜨리기 위해 1905年부터 1910年 사이에 統監府에서는 南山 밑에 所在한 統監府의 北쪽 正面 方向으로 道路를 놓는 計劃(京城視口蓋垂豫定計劃路線도)을 樹立하였고, 1919年 6月 25日 에 公開된 總督府안(京城視口蓋垂豫定計劃先導)에 따르면, 景福宮에서 南大門을 거쳐 龍山 新市街地를 直結하는 中心道路體系를 構成하였다(이는 오늘날 서울 道路 體系의 根幹이다).
    • 市民公園 또는 市民廣場이 登場했다. 예컨대 탑골公園 도 이 時期에 만들어졌다.
  • 1897年 大韓帝國 出帆을 保守回歸로 보았다. 그러나 初期 獨立協會 活動을 도와준 일이나 萬民共同會를 許容한 일 等을 볼 때 保守回歸로 보기는 어렵다는 主張도 있다.
  • 1898年 에 東아시아에서 最初로 戰車 ( 路面電車 )를 運行하였다. 이를 高宗의 신문물에 對한 넓은 理解와 包容 等은 無視해 버리고, 高宗이 民心을 外面하고 오로지 죽은 王后(明成皇后)만을 생각하여 路面電車를 導入했다고 歪曲하였다.
  • 1902年 6月에 高宗이 設置한 情報機關 第國益文士 를 놓고 “旱祭(韓帝)의 이른바 專制政治란 것은 實狀은 密偵政治·雜輩政治(雜輩政治)의 弊端에 빠진 것”이라고 非難하였다.
  • 1903年 5月 日本의 侵略을 對備하여 陸軍과 海軍의 創設을 위한 準備를 指示한 일을 두고, “民生을 外面하고 皇室의 安危만을 챙긴 君主”라고 酷評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러일戰爭 의 渦中에 日本製國軍은 中立國 大韓帝國의 首都 漢城 을 侵奪한다.
    • 1903年 3月 15日 徵兵制度 實施를 豫定하는 詔勅을 내렸으며, 西洋의 徵兵制와 朝鮮의 5位(五衛) 制度를 折衷하는 새로운 軍制의 一帶 警長을 圖謀할 터이므로 모두 이 일을 위해 뜻과 忠愛와 흥원을 함께 모아 줄 것을 當付하였다. 乙巳條約 以後에 計劃 自體가 없어지고, 及其也 1907年 軍隊가 解散 된다.
    • 1903年 示威隊 1萬2千(最終的으로 1萬6千) 兵力을 갖추고, 용산에 軍部 銃器製造所를 建立하였다.
  • 1905年 (光武 9年) 4月 29日 近代的 형법전人 《 刑法大典 》(法律 第2號)을 編纂하여 頒布하였다. 韓國 最初의 一般刑法煎이며 近代的 形式을 갖춘 형법전으로, 日本의 刑法傳을 計數夏至 않고 以前의 大典會通 ·大明律과 甲午改革 以後의 刑事法令을 參考하여 制定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總 680改造였던 《刑法大典》은 1906年 2月 2日 法律 1號로 第1次 改正하고, 1908年 7月 23日 法律 19號로 第2次 改正을 하여, 總 680改造였던 法律 가운데 100個組를 改正, 252個組를 削除하여 元來 모습을 없애 버렸다. 結局 1910年 《 韓國法典 》에 刑法으로 改名 揷入하였다. 《刑法大典》李 東아시아 에서 最初로 拷問 을 禁止하는 等 民權 伸張의 成果였으므로 도리어 削除해 버렸다.

各州 [ 編輯 ]

  1. 歷史學者, 김기협 (2010年 5月 7日). “한 外人의 歎息 "불쌍한 韓國人…저런 王은 처음 본다 " . 2023年 2月 15日에 確認함 .  
  2. 이태진 (2000年 8月 30日). 〈高宗 暗約설(暗弱說) 批判〉. 《高宗時代의 再照明》 初 2刷판. 서울: 太學士. 98-99쪽쪽. ISBN   89-7626-546-7 04910 |isbn= 값 確認 必要: length ( 도움말 ) . 1886年 5月부터 1890年 2月에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兼 外衙門 掌交司(掌交司) 堂上으로 高宗을 도운 美國人 데니…  
  3. 이태진 (2000年 8月 30日). 〈高宗 暗約설(暗弱說) 批判〉. 《高宗時代의 再照明》 初 2刷판. 서울: 太學士. 99-102쪽쪽. ISBN   89-7626-546-7 04910 |isbn= 값 確認 必要: length ( 도움말 ) .  
  4. 《韓國과 그 이웃나라》,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이인화 옮김, 살림.
  5. 위안스카이 ‘骨髓까지 병든 朝鮮’ 의 最高 權力者 朝鮮日報 2004.03.25
  6. 박지향, 《尹致昊의 協力日記》 (이숲, 2010) 112페이지
  7. 徐載弼은 《 獨立新聞 》 論說에서 獨立門 建立을 政府에서 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8. 日, 安重根 依據 背後로 高宗 指目 , 聯合뉴스, 2009年 8月 29日

參考 資料 [ 編輯 ]

  • 이태진 (2000年 8月 30日). 〈高宗 暗約설(暗弱說) 批判〉. 《高宗時代의 再照明》 初 2刷판. 서울: 太學士. 95~134쪽쪽. ISBN   89-7626-546-7 04910 |isbn= 값 確認 必要: length ( 도움말 ) .  
  • 康俊晩, 《韓國近代史散策 2:改新敎 立國에서 乙未事變까지》 (人物과 思想史, 2006) ISBN   9788959060726 109쪽
  • 위안스카이 ‘骨髓까지 병든 朝鮮’ 의 最高 權力者 朝鮮日報 2004.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