食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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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 의, 《子息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食人 (食人, anthropophagy)이란 人間의 同族飽食 , 卽 사람이 사람의 고기(人肉)를 먹는 行動, 或은 宗敎的 儀禮로서의 그런 習慣을 말한다.

文化人類學 에서의 「式인 風習」이란, 社會的, 制度的으로 認定된 慣習이나 風習을 가리키며 一時的인 飢餓狀態에서의 緊急하고 避難的인 境遇나 精神異常에 依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生物學 用語로는 終乃飽食(種?捕食), 이른바 '同族相殘' 全般을 가리키며, 마케팅 用語로서 自社 製品이나 브랜드 等이 市場을 서로 侵犯하는 狀況을 가리켜 食人이라고 表現하기도 한다. 週로 前近代의 未開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며 近代化의 後發 走者로서 日本 帝國의 限界點이기도 했다.

言語的 由來 [ 編輯 ]

食人을 가리키는 英語 카니발리즘(cannibalism)은 에스파냐語 의 카니발(canibal)에서 由來하였다. 16世紀頃 서인도 諸島 를 發見했던 에스파냐 사람들은 서인도 制度의 카리브人 들이 人肉(人肉)을 먹는다고 믿었는데, 카리브人을 指稱하는 'carib'라는 말에서 現在의 '食人'이라는 말이 由來하였다. [1] 이 말에는 '西洋 基督敎의 倫理觀에서 벗어난 式인 風習' 卽 '食人 記號'를 나타내는 意味가 剛하다.

發音上 類似性으로 으레 謝肉祭 를 뜻하는 「카니발(carnival)」과 混同되기 쉬운데, 謝肉祭를 가리키는 用語 카니발은 中世 라틴語 의 「carnelevarium(「고기」를 뜻하는 「carn-」과 「가져가다」라는 뜻의 「levare」가 합쳐진 것)를 語源으로 하며, 本來 라틴語에서도 混同되거나 區分되지 않는 境遇가 많아 讀解 때 注意가 必要하다. 한便 「食人」이라는 意味의 單語는 그리스어 에서 由來한 「安土르포破紙(anthropophagy)」가 歷史的으로 더 오래된 用語인데, 「사람」을 뜻하는 「anthropo」와 「먹다」라는 뜻의 「phagy」의 合成語이다.

分類 [ 編輯 ]

'習慣'으로서의 食人은 크게 두 部類로 나뉜다.

  1. 社會的 行爲로서의 食人
  2. 社會的 行爲가 없는, 單純히 먹기 위한 意味로서의 食人

文化人類學的인 食人 [ 編輯 ]

特定 社會의 境遇 對象의 고기를 攝取함으로써 自身에게 특별한 힘 또는 榮譽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境遇가 있다. 으레 그 社會의 宗敎觀(特히 토테미즘 )과 密接한 關聯이 있으며, 食文化보다 文化人類學, 民俗學에 屬하는 議題이다. 自身의 同僚를 먹는 足內(族內) 食人과, 自身들의 敵을 먹는 族外(族外) 食人으로 크게 區分된다.

足內 食人의 境遇 죽은 者에 對한 愛着에서 靈魂을 이어받는다는 意識的 意味가 있음이 指摘된다. 卽 親族이나 知人들이 죽은 者를 먹음으로서 죽은 者의 靈魂이나 肉體를 나누어 갖고, 죽은 者가 生前에 가졌던 智慧와 能力마저도 이어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모든 肉身을 땅에 묻거나(매장) 불태워버리면(화장) 現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므로 이를 애석하게 여겼던 行爲로 볼 수 있다. 日本語에 남아있는 「뼈 씹다(骨?み)」라는 單語도 이런 意味가 包含된 風習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人神供養 (人身供養)으로 볼 것인가 葬禮 儀式의 一部로 볼 것인가에 따라 意味가 달라지지만, 뉴기니섬 의 한 部族들 사이에 流行했던 '쿠루甁'이라 불린 人間 狂牛病은 이러한 足內 食人이 原因이 되었음이 알려져 있다.

族外 食人의 境遇 大部分 復讐 等 憎惡의 感情이 실려 있음이 指摘된다. 足內 食人에서 보이는 것이지만 自身이 먹는, 自身에게 먹히는 者가 가진 힘을 自身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意圖도 指摘되고 있다. 代表的인 事例로 各國에서 報告된 戰場에서의 人肉 食人(食糧 普及이라는 合理的 見地에 따랐던 境遇를 除外하고)을 들 수 있는데, 原住民들에게 잡아먹힌 유럽人 探險隊의 逸話 等도 이에 該當된다.

또한 蛋白質 의 供給源이 不足한(혹은 그렇게 된) 地域에서 人肉을 먹는 風習을 갖는 傾向이 높다는 說이 있다. 實際로 食人이 廣範圍하게 行해진 뉴기니섬의 境遇는 다른 地域보다 돼지 等 家畜의 傳播가 늦었을 뿐더러 그것을 補充할 수 있는 大型 野生 動物도 棲息하지 않았다. 그런 點에서 이들의 族外 食人은 元來는 社會的 意圖에서 이루어진 行爲가 아니었을 可能性을 示唆한다..

藥으로서의 食人 [ 編輯 ]

죽은 者의 피와 살이 强壯劑나 微弱(媚?)李 될 수 있다는 事故는 유럽을 비롯한 全 世界에서 確認되는데, 이것을 足內 食人의 一環으로 說明하는 硏究者도 있다. 人間의 미라 는 一種의 韓方藥으로서 '不老不死'의 藥效가 있다고 여겨져 主로 가루로 빻은 것이 藥으로서 음용되었는데, 日本에까지 藥으로 輸出되기도 했다. 또한 中國이나 日本, 印度에서는 等을 藥으로 攝取하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도 太半이 健康이나 美容을 위해 쓰이는 境遇도 볼 수 있다.

緊急狀況에서의 食人 [ 編輯 ]

緊急한 事態 속에서 食糧이 不足해 生存에까지 支障이 생기는 境遇에서 벌어진 食人은 東西古今을 莫論하고 흔하게 發見되는 것이다. 最近의 大規模 事例는 1972年 에 있었던 우루과이 空軍機 571篇 遭難 事故가 있는데, 遭難된 乘客들은 死亡한 乘客의 屍身을 먹으며 救助될 때까지 72日 동안 살아남았다. 이런 事例는 嚴密히는 食人에 包含되지 않지만, 그것이 常習化될 境遇 食人으로 把握된다. 例를 들어 1846年 美國에서 開拓者들의 對象 行列이 시에라네바다 山脈 山中의 토랏키 湖畔에서 조난당하는 事故가 發生했는데, 救助될 때까지 이미 臺上段 人員 가운데 죽은 者를 먹는다는 緊急 待避措置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惡天候나 當時의 構造 技術의 限界로 인해 그들은 오랜 期間, 몇 次例에 나뉘어 救助되어야 했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으로 救助된 사람의 境遇, 앞서의 救出 作業에서 食糧으로서 傳達된 소의 肝이 있었음에도 不拘하고 함께 남아있던 女性의 고기를 먹었다. 이것은 緊急事態에서의 食人이 '記號'로서 먹기 위한 食人으로 變質된 代表的 事例로서, 그는 殺人 嫌疑를 받았으나 證據 不充分으로 放免되었다.

또 飢饉이나 戰爭 等에 依한 食糧 不足에 依한 사람 肉食도 歷史上 世界 各地에 보인다.

記號로서의 食人 [ 編輯 ]

記號로서의 食人, 卽 人肉 倚息(嗜食)은 특수한 心理狀態에서 이루어진 殺人 事件에서 가끔 보이는, 緊急聖徒 없고 社會的 뒷받침(必要性)도 없는 行爲이다. 大部分의 獵奇 殺人에 隨伴되는 屍體 毁損 等으로 나타나며, 文明 社會에서는 直接 殺人을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屍體 毁損 等으로 罪를 물을 뿐 아니라 倫理的인 側面에서도 容納되지 않는 行爲 터부의 飮食으로 금기시된다. 禁忌로 여겨짐에도 不拘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를 다룬 文學이나 藝術이 많다. 小說 에서는 푸른 두건, 스위니 토드, 한니발 렉터 等이 알려져 있다. 또한 食人은 種種 性的 幻想을 가지고 받아들이며 그러한 페티시즘을 보이는 사람도 多數 存在한다. 實際로 性的인 食人을 한 事例는 連鎖殺人犯 알버트 피쉬, 에드 게인스, 제프리 多머, 프리츠 할먼, 안드레이 치카値로 等이 있으며, 性的인 幻想을 베이스로 하면서도 보다 '食人'의 側面을 重視한 게오르그 카를 그로스만(Carl Großmann), 니콜라이 듀마 가리에프(Nikolai Dzhumagaliev)는 犧牲者 또한 많았다. 파리 人肉 事件의 境遇 犯人인 사가와 잇세이 (佐川一政)는 自身의 冊에서 自身이 프랑스 留學 中에 殺害해서 그 屍體를 먹은 프랑스人 女大生의 고기를 「宏壯하다」거나 「맛있다」고 記述하는 等, 被害者에 對한 憎惡는커녕 憧憬을 보이고 있어, 事件 當時 사가와 自身의 精神狀態는 性的 幻想 속에 있었다고 記述하고 있다. 2001年 에는 獨逸 에 사는 아르民 마이禹에스가 食人 關聯 인터넷 사이트에서 自身에게 먹히고 싶은 男子를 募集하고 이에 應해서 찾아온 男子를 죽여 그 屍身을 먹은 事件이 일어나기도 하고, 2007年 에는 프랑스 北部 뤼仰議 監獄에서 35歲의 男性 受刑者가 다른 男性 受刑者를 殺害하고 胸部 고기와 肺 等 死體 一部를 監房에 備置되어 있던 廚房과 스토브에서 料理해 먹는 事件이 일어났다. 最近에는 러시아의 젊은층에서 食人 事件이 頻發하고 있는데, 2008年 에는 惡魔 崇拜를 標榜한 少年 少女 8名이 또래 4名을 慘殺하고 그 고기를 먹는 事件이, 2009年 에는 메탈 밴드를 結成한 有利 모지노프 等 두 靑年이 自身들의 팬이었던 少女를 죽여 그 고기나 內臟을 먹는 事件이 일어나고 있다. 모두 犯行 動機는 "惡魔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거나 "漫醉한 狀態에서 배가 고팠다" 等 理解할 수 없는 陳述만을 固守하고 있었다.

世界 各地의 食人 [ 編輯 ]

南아메리카 / 오세아니아 / 아프리카 [ 編輯 ]

南美의 原住民들은 宗敎的 或은 最近 硏究 結果로는 조금 理解할 수 없는 理由로 食人에 關聯된 文明을 발전시켰으며 Death Whistle 같은 樂器를 만들기도 했다. 이스터 섬 에서는 1600年頃부터 1700年頃에 걸쳐 人口가 約 70% 減少했다. 그 要因으로 現地 住民의 人爲的인 環境 破壞(모아이 像을 만들기 위한 森林 伐採 等)를 들 수 있지만, 結果的으로 野生 動物의 고기 供給源이 없어지면서 最終的으로는 人肉을 먹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덧붙여 當時의 廢墟로 버려진 住居地 遺跡에서 人骨이 發見되기도 했다. 또한 넬슨 록펠러(當時 뉴욕 州知事)의 아들이었던 人類學者 마이클 록펠러(Michael Rockefeller)가 1961年 뉴기니의 奧地에서 原住民에게 殺害當해 먹혔다는 報道도 있다. 아프리카에서 피그미족은 가까운 民族과도 甚한 差異를 보여서 많은 差別을 받았고 사냥이나 食人을 當하기도 했다. [2] [3]

유럽 [ 編輯 ]

에스파냐 北部의 아타프엘카 遺跡에서 發掘된 「最初의 유럽人」의 遺骨에서 이 時代의 先史 人類들이 人肉 特히 어린아이의 고기를 즐겨 먹었음이 밝혀졌는데, 遺骨 等의 分析에 따르면 무언가 宗敎, 社會的인 意識에서가 아니라 純全히 食用으로서 行해진 食人이었다. 當時 食糧과 물도 豐富했고 멧돼지 , 사슴 사냥도 可能했던 그들이 食糧이 不足해서 食人을 한 것이 아니라 敵對視하던 相對를 죽이고 그 고기를 먹었다는 것이다. 後날 유럽에 傳播된 基督敎 는 食人을 强한 禁忌로 置簿했다, 고 現代의 基督敎 關係者는 主張하고 있지만, 實際로는 戰爭, 飢饉, 宗敎的인 理由로 食人이 널리 施行되었다. 第1次 十字軍 遠征 에서 十字軍 兵力이 시리아 의 마앗라를 陷落시켰을 때(마앗라 攻防戰) 食人이 이루어졌다는 記錄이 남아 있다. 아랍人뿐 아니라 프랑크人(西方) 兩쪽에서 이를 證言하고 있는 點에서 信憑性이 높다. 當時 十字軍의 食糧 事情은 몹시 초라했기에 現地 調達의 一環으로 掠奪 뿐 아니라 現地 住民들을 죽여 그 고기까지 먹었다는 것이다.

1274年 에 死亡한 토마스 아퀴나스 의 屍身은 當時 高價였던 성유물이 흩어질 것을 두려워한 弟子 修道士들에 依해 加工 保存되고 그 머리는 調理되었다고 호이징거는 傳하고 있다. 또한 1315年 부터 1317年 에 걸친 大飢饉 때에 食人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어느 程度 規模였는지에 對해서는 論議가 나뉘고 있으며 近世 以後 難破船 안에서 漂流하는 渦中에 食人이 있었다는 事例가 짬짬이 記錄되고 있다.

15世紀 스코틀랜드 에 살던 소니 빈 家族이 山을 지나는 旅行者들을 먹고 살았다는 記錄도 있지만 19世紀 以後의 記錄으로 信憑性은 낮다.

人肉을 먹은 것은 아니지만, 1805年 트라팔가 海戰 에서 戰死하지 않은 英國 海軍 提督 호레이쇼 넬슨 의 屍身은 腐敗를 막기 위해 럼주 가 든 통에 담가져 本國으로 옮겨졌지만, 偉大한 넬슨을 닮고 싶어한 水兵들이 안에 屍體와 함께 든 럼주를 훔쳐 마시는 바람에 막상 歸國했을 때에는 通이 텅 비어있었다고 한다(이 逸話에서 럼주를 '넬슨의 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北美 大陸으로 移住해 온 유럽 植民地 開拓者들이 제임스 타운에서 食人을 했었다는 硏究 結果도 있다. 新世界에 移住해 온 植民地 移住者들이 嚴格한 生活 環境에 따라 式인 行爲를 강요당했을 可能性은 오래前부터 指摘된 것이다.

「性的인 食人」 項目에서 言及했던 프리츠 하루만, 게오르그 카를 그로스만 等의 犯行이 行해진 時期의 獨逸은 第1次 世界大戰 敗戰의 後遺症이 가시지 않았던 때였다. 極度의 인플레이션에 휩싸인 獨逸에서는 慢性的으로 고기가 不足했는데, 그 渦中에 벌어진 두 사람의 犯行은 性的인 것이 主를 이루는 한便으로 若干의 經濟的 目的을 追求한 面도 있었다(그 經濟的 目的으로 人肉을 市場에 流通시키기 위한 카를 덴거의 '商品 開發' 過程에서 犯行이 드러나 逮捕되었던 것이다). 이들 세 사람의 犯行은 前後 浮浪者로 득시글거리던 當時 獨逸에서 數十 名 單位의 犧牲者가 나올 때까지도 發覺되지 않았다.

그 뒤 獨逸에서는 第2次 世界大戰 中 나치의 收容所 안에서 收監者들이 人肉을 먹는 일이 있었음이 빅토르 프랑클 의 『밤과 안개』에 收錄되어 있다. 禹이크토르는 유대人 醫師로 實際로 나치에 依해 强制 收容所로 보내졌는데, 이것은 그때의 體驗을 바탕으로 한 作品이다.

아시아 [ 編輯 ]

飢饉이나 戰爭으로 사람을 먹는 行爲는 다른 地域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宗敎 意識에서 食人이 行해진 境遇가 注目된다.

헤로도토스 는 自身의 著書 《歷史》에서, 앤도로파고이라는 部族의 式인 風習이나, 미디아 王國의 王 아스튜아게스가 將軍 下르波高스에게 그의 子息을 먹게 한 逸話를 收錄하고 있는데, 이것은 傳說的이나마 유럽의 觀點에서 아시아人(을 비롯한 異民族)의 食人에 關한 技術로 꼽힌다.

印度 에서는 시바교의 一派인 아고리의 行者가 食人을 한다. [4] 그들은 神通力을 얻기 위해 갠지스江 에 水葬된 屍身을 건져 그것을 먹는다. 印度에선 땅이 크고 人口가 많아서 食人種이었던 사람들도 꽤 오래 남아있었다. 社會的 行爲가 아닌 境遇로는 2009年 에 하리야나 州에서 火葬터 職員들이 타고 남은 死體로 저녁 伴奏를 하는 事件이 일어나기도 했다.

티베트 에서도 1930年代에 샴발라를 標榜하는 宗敎 團體가 信徒를 供養해 食人 意識을 했다는 報告가 있다. 中國에서도 式인 行爲가 있었고 食人種들도 存在하였으나 儒學者들에 依해 한족으로 統合되었다.

베트남 에서는 1950年代부터 1960年代에 걸쳐 고딘디엠 남베트남 政府軍이 叛軍勢力 掃蕩作戰에서 사람의 生間이 精力에 좋다는 俗說에 따라 反政府 勢力으로 指目된 베트남 民衆의 肝을 摘出해 먹는 事件도 있었다.

韓國 [ 編輯 ]

韓國에서 食人 文化는 이미 「손가락을 끊고(?指)」, 「허벅지 살을 베어(割股)」 等의 形態로 新羅 時代부터 朝鮮 末期까지 存在했다. 孝道라는 形態 外에도 直接的으로 人肉을 藥으로 삼은 것에 對해서는 《中宗實錄》 中宗 21年 무렵부터 廣範圍하게 퍼져 있었는데, 《宣祖實錄》 宣祖 9年(1575年) 6月에는 산 사람을 죽이고 生間을 꺼내 판 嫌疑로 逮捕된 記錄이 登場하고 있다. 大韓民國 臨時政府 主席 이었던 金九 (金九) 先生은 自身의 自敍傳 《 白凡逸志 》에서 自身의 허벅지 살을 베어 병든 아버지에게 먹였다고 證言하고 있는데(그의 아버지도 自身의 어머니 卽 白凡의 할머니에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해서 사흘을 더 살게 했었다는 逸話가 남아 있다). 當時 朝鮮에서 이러한 民間療法은 日帝 植民地 時代에도 오랫동안 病으로 누운 男便에게 子息을 죽여 生間을 먹이거나 癩病을 고치기 위해 아이를 山에 데려가 죽이고 生間을 빼내려 한 行爲가 發見되기도 한다(물론 이 時代의 朝鮮人 社會에서도 이러한 藥으로서의 食人行爲는 前近代的이고 非科學的인 因習으로 置簿되어 一般的으로는 容納되지 않았다).

그러나 21世紀에도 人肉을 藥으로 믿어 滋養强壯, 回春의 效果가 있다고 믿고 服用하는 境遇도 있다. 特히 中國에서 密輸된 人肉을 同封한 캡슐이 뒷去來로 나도는 것이 2011年 8月 韓國의 稅關 當局에 依해 發表되어 國內外의 큰 問題가 되었다. 韓國의 稅關과 警察, 保健 當局이 團束에 나섰음에도 이미 大量으로 나돌게 된 人肉 캡슐은 摘發이 쉽지 않았고, 1艇에 3萬 원 程度로 去來되고 있었다.

日本 [ 編輯 ]

日本에서 食人은 傳說上의 스이제이 天皇 (綏靖天皇)李 일곱 名을 먹었다는 《信徒집(神道集)》의 告祀를 비롯해 슈텐도지(酒呑童子) 說話의 미나모토노 料理미쓰 (源?光) 一行, 아다치가하라(安達原)의 오니바바(鬼婆)의 집에 들은 나그네 이야기 等 여러 說話에서 食人이 目擊되고 있다. 《逃奴 모노가타리 拾遺(遠野物語拾遺)》第296火와 第299火에서는 逃奴마치(遠野町)에서 5月 5日에 스스키모치(薄?)라는 떡을, 7月 7日에 훗打 素麵(筋太の素?)을 먹는 風習의 由來에 對해서 죽은 愛妻의 살과 힘줄을 먹었던 男子의 이야기를 傳하고 있다. 또한 中國이나 韓國의 食人에서 보이는 '割股'의 風俗은 日本에서도 《鳴梁강범(明良綱範)》 等에서 보이고 있는 이야기다.

센고쿠 時代 의 資料인 《신장空氣(信長公記)》에는 오다 노부나가 의 部長이었던 하시바 히데요시 (羽柴秀吉)가 돗토리 性(鳥取城)을 兵糧攻擊할 때 城안의 兵士들이 풀뿌리며 牛馬를 잡아먹다 못해 性을 脫出하려다 오다군의 銃에 맞아 쓰러진 사람을 먹으려 다투는 이야기가 登場한다.

에도 時代의 隨筆 《新著文集(新著聞集)》에는 겐로쿠 (元?) 年間에 症狀社(?上寺)의 僧侶가 葬禮式에서 죽은 者의 머리를 깎이다가 失手로 頭皮를 若干 긁어 떨어뜨리는 바람에 그것을 감추느라고 自身의 입에 넣었는데, 그것을 몹시 맛있다고 생각하고는 자주 墓地로 나가 무덤을 파고 屍體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으며, 補身 戰爭 (戊辰??) 때에는 幕父側의 總指揮官이었던 마쓰다이라 마사打다(松平正質)가 敵兵의 볼살을 구워 술按酒로 먹었다거나, 사쓰마번 (薩摩藩)의 兵士들이 屍體에서 肝을 꺼내 삶아 먹었다는 記錄도 남아 있다.

가장 確實한 記錄은 에도 時代의 4大 大飢饉 때에 人肉을 먹었다고 하는 것이다. 덴메이 大飢饉 때인 덴메이 (天明) 4年( 1784年 ) 히로사키(弘前)에서 食人 事件이 일어났다고 다치바나 難케이(橘南?)가 《동유기(東遊記)》에 적고 있다.

人肉을 民間療法에서의 治療藥으로 活用한 記錄에 對해서, 에도 時代 處刑된 罪人의 屍體를 相對로 日本도 (日本刀)의 性能을 試驗하는 것을 職業으로 삼고 있던 야마다 아사고에몬(山田?右衛門)이라는 사람이 屍體에서 빼낸 肝을 말린 것을 藥으로 팔고 있었는데, 當時 日本에서 이것은 正當한 藥材로 인정받았으며, 야마다 집안은 이를 通해 다이묘 와도 맞먹을 財力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메이지 維新 以後, 政府는 메이지 (明治) 3年( 1870年 ) 4月 15日子로 사람의 肝, 腦髓 , 陰莖 等의 密賣를 嚴禁하는 邊關 布告를 내렸다. 그러나 이들 人體에 對한 密賣는 如前히 盛行하여 자주 事件으로 立件된 일이 新聞에 報道되기도 했다. 作家 하세가와 始球레(長谷川時雨)는 메이지 中期의 이야기로서 "肺病에는 죽은 사람의 물, 化粧된 사람의 뼈단지 밑에 고인 물을 먹으면 좋은데 이건 腦를 태운 것"이라며 보여준 「靈藥(??)」 꾸러미를 보고 새파래졌던 自身의 體驗談을 이야기한 적도 있다. 쇼와(昭和) 40年代까지 日本 各地에서는 萬病通治藥이라는 俗說을 믿고 埋藏된 屍身을 파서 肝이나 內臟을 摘出하여 불태운 것을 高價에 팔거나 病者에게 먹이거나 한 嫌疑로 逮捕된 일이 新聞에 種種 報道되었다.

이같이 人間의 內臟을 藥으로 삼았던 것에 對해서 아직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마나世 倒産(曲直?道三)의 兩者였던 마나世 겐사쿠(曲直?玄朔)는 醫學書 「日用食性(日用食性)」에서 動物의 고기를 수프나 찜, 回 等으로 調理해 먹으면 各種 疾病을 고칠 수 있다고 解說하고 있으며, 肉食 自體가 約 處方으로 看做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韓方藥(東洋醫學)에서 곰의 쓸개(熊膽)는 膽石症, 膽囊炎, 胃潰瘍 鎭痛, 陳情에 效果가 있다고 해서 最高級 藥品으로 置簿되었다. 에도 中期의 古方派(古方派) 醫師였던 고토 看山(後藤艮山)은 熊膽환(熊?丸)이라는 藥을 調劑 處方하기도 했다. 이러한 藥學的人 생각은 中國이나 印度에서 傳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佛敎 說話 等에도 醫藥的인 人間의 內臟 攝取에 對한 技術이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카트야 두벡, 《죽음에 關한 雜學辭典》, 乙酉, 2004
  2. “콩고叛軍 피그미족 잡아 먹었다” . 2003年 1月 9日 . 2024年 3月 7日에 確認함 .  
  3. “[地球村 現場]피그미 虐殺 現場을 가다” . 2024年 3月 7日에 確認함 .  
  4. “‘힌두敎 食人種’과 함께 人間 腦 먹어…CNN 論難” . 2017年 3月 10日 . 2024年 2月 25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