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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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광
劉守光
五代 十國 時代 燕나라 皇帝
在位 911年 9月 8日 [1] [2] [3]
~ 914年 1月 4日 [1] [4] [5] [週 1]
이름
유수광(劉守光)
年號 應天(應天, 911年 9月 8日 ~ 914年 1月 4日 )
身上情報
出生日 未詳
出生地 唐나라 心柱(深州, 只今의 河北省 兄嫂視 現級視 審注視 ) 落水(樂壽, 只今의 河北省 窓注視 軒懸 )?
(아버지 有人工 본적 )
死亡日 914年 2月 16日 [1] [4] [5]
死亡地 秦나라 太原部
王朝 年(燕)
父親 有人工
配偶者 二皇后
軸皇后
子女 아들 有界位 (劉繼威)
아들 유계순(劉繼珣)
아들 有界房(劉繼方)
아들 유계조(劉繼祚)
아들 有鷄雍 (劉繼?)?
其他 親姻戚 유수문 (劉守文)
동생 유수기 (劉守奇)

유수광 (劉守光, ? ~ 914年 2月 16日 ( 陰曆 1月 19日 ) [1] [4] [5] )은 中國 五代 十國 時代 初期에 活躍했던 軍閥 이었다. 그는 아버지 有人工 으로부터 盧龍群 (盧龍軍, 本部 는 只今의 북경시 에 있었다) 번진(藩鎭)의 支配權을 빼앗고 兄 유수문 을 물리친 後, 盧龍軍과 의창군(義昌軍, 本部 는 只今의 河北省 窓注視 에 있었다) 두 번진을 支配하였다. 그는 911年 燕나라 皇帝 를 自稱하였으나, 이존욱 에 依해 敗하여 處刑되었고, 이존욱은 燕나라를 秦나라로 吸收合倂시켰다.

生涯 [ 編輯 ]

心柱(深州) 사람으로 盧龍節度使 有人工 의 아들이다. 誘引共에게 愛妾 羅氏(羅氏)가 있었는데, 유수광이 羅氏를 取하자 火가 난 誘引功은 수광을 때리고 쫓아내었다. 이에 수광은 개평 元年( 907年 ) 誘引功을 攻擊하여 붙잡고, 스스로 盧龍節度使를 稱하였다. 兄 유수문 이 이 消息을 듣고 수광을 討伐하려고 하였으나 敗北하였고, 이듬해 붙잡혀 죽임을 當하였다. 남은 勢力이 유수문의 아들 年祚(延祚)를 推戴하여 抵抗하였으나 끝내 投降하였다.

元來 心性이 庸劣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알려진 유수광은 이 일로 더욱 교만해져 暴惡한 일을 저질렀다. 乾花 元年(911年) 8月에 스스로 大宴皇帝(大燕皇帝)라 稱하고 年號를 應天 (應天)이라 바꾸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辰王(晉王) 이존욱 의 侵攻을 받아 아버지 人工 等과 함께 붙잡혔다가, 太原의 太廟 앞으로 끌려가 慘殺되었다.

背景 [ 編輯 ]

유수광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有人工 의 아들이었다. 誘引功은 件녕 元年( 894年 ) 當時 그의 君主 였던 河東(河東, 本部 는 只今의 山西省 太原視 에 있었다) 節度使 李克用 盧龍群 번진(藩鎭)을 征服한 後, 그 이듬해인 件녕 2年( 895年 )에 盧龍群 節度使 가 되었다. [6] [7] [8] [9] 件녕 4年( 897年 ), 誘引功은 結局 李克用과 訣別하고 獨自的인 軍閥 이 되기에 이르렀다. [10] [11] 유수광의 出生이 언제부터 이러한 事件들과 關聯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誘引共의 다른 아들인 유수문 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던 反面, [12] [13] 또다른 아들인 유수기 (劉守奇)는 그보다 더 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 [15]

天福 3年( 903年 )經, 誘引功은 유수광을 平柱(平州, 只今의 河北省 秦皇島視 ) 自社 에 임명하였다. 어느 날(具體的인 時點은 未詳), 거란 耶律阿保機 가 그의 妻男 술率아발(述律阿? 또는 述律阿鉢)을 보내어 平柱를 攻擊해 오자, 유수광은 거란과 和親을 請하는 척하며 술率아발과 다른 거란의 主要 將帥들을 위해 城 밖에 宴會場을 차려놓고 잔치를 벌였다. 잔치가 무르익는 사이에, 그는 宴會場 周邊에 埋伏시켰던 軍士들에게 거란 將帥들을 사로잡게 한 다음, 그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猝地에 自身들의 隊長들을 잃어버린 거란軍은 크게 痛哭하였고, 結局 거란 側에서 莫大한 量의 몸값을 支拂하고 나서야 사로잡힌 거란 장수들은 겨우 풀려나 돌아갈 수 있었다. [16] [17]

天佑 4年( 907年 )의 어느 때부터인가(구체적인 時點은 未詳) 또는 그 以前 무렵, 유수광은 誘引공이 寵愛하는 羅氏(羅氏)와 바람을 피웠다. 이 事實을 안 誘引功은 유수광을 매를 쳐서 집에서 내쫓아 버리고 더 以上 그를 아들로 認定하지 않았다. 그 해 3月 6日 ( 907年 4月 21日 ), [1] 軍閥 宣撫群(宣武軍, 本部 는 只今의 河南省 開封時 에 있었다) 節度使 朱全忠 은 그의 將軍 人 薄酒(?州, 只今의 安徽省 박주시 ) 自社 이사안(李思安)을 北路行軍都統(北路行軍都統)으로 삼아 軍隊 를 거느리고 가서 盧龍群 수도 幼主 를 攻擊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여름 4月 3日 ( 907年 5月 17日 ), [1] 이사안이 指揮하는 宣撫軍은 곧바로 柳州 밑에 이르렀다. 이때 誘引功은 代案山(大安山, 只今의 북경시 防産區 에 있는 으로, 當時 流注性 西쪽에 있었다)에 있는 別莊 에 있었는데, 流注性은 理事안의 攻擊에 對備하지 못하고 거의 陷落될 뻔한 事態가 일어났다. 유수광은 城 밖에서 軍隊를 整備하여 城안으로 들어와서 城을 지켜냈다. 그는 이어 城 밖으로 兵力 을 출동시켜 이사안이 指揮하는 宣撫軍과 交戰 끝에 그들을 敗退시켰다. 그 後, 유수광은 節度使를 自稱하고 그의 部長(部將) 遠行欠 과 이소희(李小喜)를 보내어 代案山에 있는 誘引共의 別莊을 攻擊하게 하였다. 誘引功은 軍士들을 보내어 이에 맞서려 했지만, 이소희는 그를 무찌르고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유수광은 誘引功을 家宅 年金 시키고, 平素 自身의 마음에 들지 않던 誘引共의 여러 將帥들과 幕僚 들, 側近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이에 유수기와 有人共의 外孫子 人 銀箶簶指揮使(銀胡?指揮使) 王사桐 , 産後八軍巡檢司(山後八軍巡檢使) 이승約(李承約)은 河東 번진으로 逃亡쳤다. [14] [15]

後涼 의 臣下로서 [ 編輯 ]

皇帝 로서 [ 編輯 ]

死亡 [ 編輯 ]

親族 關係 [ 編輯 ]

各州 [ 編輯 ]

內容主 [ 編輯 ]

  1. 여기서 유수광의 統治 가 終結된 時點의 날짜는 유수광이 逃走 中에 사로잡힌 後 이존욱 에게로 押送된 날짜로 쓰였다. 또, 燕나라 수도 幼主 가 이존욱에게 陷落되면서 유수광이 그곳을 脫出한 913年 12月 24日 을 그의 統治가 終結된 時點으로 보는 視角도 있다. [1] [4] [5]

參照週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前任
有人工
盧龍群 節度使
907年 ~ 911年
後任
이존욱
前任
유수문
의창군 節度使
910年 ~ 911年
後任
有界位
前任
없음
(새 稱號 )
燕나라 皇帝
911年 ~ 914年
後任
없음
( 政權 滅亡)
前任
後涼 太祖 朱全忠
中國 의 統治者( 北京 · 天津 地域) (名目上)
911年 ~ 914年
後任
이존욱
前任
後涼 太祖 朱全忠
中國 의 統治者( 창주 地域) (名目上)
911年 ~ 912年
後任
後涼 末弟 주진
前任
有人工
中國 의 統治者( 北京 · 天津 地域) (事實上)
907年 ~ 914年
後任
駐德威
前任
유연조
中國 의 統治者( 창주 地域) (事實上)
910年 ~ 912年
後任
장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