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준
(安邦俊,
1573年
11月 20日
~
1654年
11月 13日
)은
朝鮮
중기의
義兵將
,
文身
,
性理學者
이다. 初名은 三門(三文), 本貫은
竹山
(竹山), 字는 사언(士彦), 號는 은봉(隱峯)·雨傘(牛山)·氷壺子(氷壺子)·雨傘病復(牛山病覆)·銀봉암(隱峰菴)·매환옹(買還翁)·待遇癌(大愚庵)·曰薦擧社(曰川居士)이며, 諡號는 門講(文康)이다. 全羅南道 寶城郡 出身. 雨季(牛溪) 成婚成渾)의 文人이다.
壬辰倭亂
때 湖南義兵으로, 丁卯胡亂과 丙子胡亂에는 湖南義兵將으로 活動하였다. 光海君 때 그를 登用하려 하였으나 辭讓하였다.
仁祖反正
以後 官職에 여러番 除授되었으나
西人
偏向의 調整에 出仕를 拒否하고 後學 養成에 邁進하다가
丙子胡亂
과
丁卯胡亂
때 義兵을 이끌고
淸나라
軍事와 맞서 싸웠다.
孝宗
때 유일로 薦擧되어
司憲府
地平에 任命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後 司憲府 掌令 等을 거쳐
共助
參議
에 이르렀다. 黨色으로는
西人
으로,
金集
과 함께
金堉
의
大同法
을 反對하였다. 湖南地方의 著名한 性理學者로 名聲을 떨쳤다.
事後 1657年(孝宗 8) 嘉善大夫 吏曹參判, 1813年(純祖 13) 資憲大夫 吏曹判書에 追贈되고, 1821年(純祖 21) 門講(文康)이라는 諡號를 받았다.
《三元記事 三寃記事》,《奇妙遺跡老랄搜査 己卯遺蹟老辣?辭》,《社友減髻錄 師友鑑戒錄》,《混晶便錄 混定編錄》,《매환문답 買還問答》, 壬辰倭亂 때의 義兵 活躍相人 《항의신편 抗義新編》, 《李大源展 李大源傳》, 《湖南義兵錄 湖南義兵錄》 等의 著書를 남겼다.
은봉 안방준 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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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3年(宣祖 6) 11月 20日에 寶城郡 오야리(梧野里, 보성읍 우산리)에서 태어남.
1583年(宣祖 16, 11歲)
李滉
(李滉)의 弟子 박광전(朴光前)에게 배움.
1586年(宣祖 19, 14歲)
고경명
(高敬命)의 弟子 박종정(朴宗挺)에게 배움.
1589年(宣祖 22, 17歲) 慶州 鄭氏(慶州鄭氏)
정승복
(鄭承復)의 딸과 婚姻함.
1591年(宣祖 24, 19歲)
成婚
(成渾)의 門下에서 學問에 精進함.
1592年(宣祖 25, 20歲)
壬辰倭亂
에 박광전·
임계영
(任啓英) 義兵幕下에서 從事官 정사제(鄭思悌)와 安邦俊이 參謀로 活動함.
1596年(宣祖 29, 24歲)
第2次 晉州城 戰鬪
를 記錄한 《진주서사(晉州敍事)》를 執筆함.
1613年(光海君 5, 41歲)
조헌
(趙憲)의 《항의신편(抗義新編)》을 編纂함.
1614年(光海君 6, 42歲)
광해군
때
北人
黨의 暴政을 被害 寶城 小뫼(牛山)으로 落鄕하여 雨傘戰士(牛山田舍)에서 講學을 始作함.
1616年(光海君 8, 44歲) 《湖南依錄(湖南義錄)》을 執筆함.
1622年(光海君 14, 50歲) 趙憲(趙憲)의 〈동환奉仕(東還封事)〉를 編纂하여 刊行함.
1625年(仁祖 3, 53歲) 오수도 察訪(獒樹道察訪)에 任命되어 19日 동안 있다가 仕退함. 辭職하고 돌아온 뒤로 漢陽에 발걸음을 끊음.
1627年(仁祖 5, 55歲)
丁卯胡亂
에 倡義하여 湖南 義兵將으로 出兵함.
1632年(仁祖 10, 60歲) 스승 成婚(成渾)의 《위학지방(爲學之方)》을 刊行함.
1635年(仁祖 13, 63歲) 능주 매花亭(梅花亭)에 터를 잡고, 黨爭資料를 모아 《混晶便錄(混定編錄)》을 編纂함.
1636年(仁祖 14, 64歲)
丙子胡亂
에 倡義하여 數百 名을 이끌고 廬山까지 進軍함. 成渾과
李珥
(李珥)를 辯論하는 長文의 上疏를 지음.
1640年(仁祖 18, 68歲) 上疏하여 斥和(斥和)를 主張하고 時局을 批判함.
1641年(仁祖 19, 69歲) 冬服 容顔(龍岸)에서 講學을 펼쳐 多數의 弟子를 排出함.
1642年(仁祖 20, 70歲) 《奇妙遺跡(己卯遺蹟)》을 編纂하여
己卯士禍
의 顚末을 整理함.
1643年(仁祖 21, 71歲) 〈基軸記事(己丑記事)〉·〈雨傘答問(牛山答問)〉을 지음.
1646年(仁祖 24, 74歲) 梅花情에 은봉정社(隱峯精舍)를 짓고 多數의 弟子를 養成함.
1647年(仁祖 25, 75歲) 은봉정史를 찾은
송시열
(宋時烈)에게 〈忠孝傳家서(忠孝傳家序)〉를 지어줌.
1652年(仁祖 30, 80歲) 上疏하여
金堉
(金堉)의 大同法(大同法)을 反對하고, 流民(流民)의 推刷(推刷)를 罷해 주기를 請함.
1653年(孝宗 4, 81歲) 工曹參議에 任命되었으나 赴任하지 않음.
1654年(孝宗 5, 82歲) 11月 13日 은봉정社에서 世上을 떠남.
1656年(孝宗 7) 능주의 儒生들이 倒産社(道山祠)를 세움.
1657年(孝宗 8) 寶城의 儒生들이 大計서원(大溪書院)을 세움.
1670年(玄宗 11) 湖南 儒生들이 冬服(同福)의 桃源서원(道源書院)을 세움.
1687年(肅宗 13) 桃源書院에 賜額(賜額)을 받음.
1704年(肅宗 30) 大計書院에 賜額(賜額)을 받음.
1773年(英祖 49) 大計書院에서 《雨傘선생집(牛山先生集)》을 刊行함.
1821年(純祖 21) 門强攻(文康公) 諡號를 받음.
1864年(高宗 1) 大計書院에서 木活字로 《隱峯全書(隱峰全書)》를 中間函.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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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初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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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僉知中樞府事 안중관(安重寬)이며, 妻는
慶州 鄭氏
判官
정승복
(鄭承復)의 딸이다. 高麗 말에 그의 10代祖 안원형(安元衡)李 門下侍中을 지내고 粥性軍(竹城君)에 封爵된 뒤 그의 家計에는 大小 벼슬아치 여러 名이 쏟아져나왔다. 그의 5代祖 安民(安民)은 武科에 合格하였으나 世祖때
李施愛의 亂
에 殉節하고 訓鍊院 參軍(訓練院參軍)에 追贈되었다. 그런데 安民이 妻家인 全羅南道
寶城
(寶城)에 定着한 以來 그의 家計는 寶城에서 居住하기 始作하였다. 고조인 안犯(安範)은 縣監을 지냈고, 할아버지
安軸 (朝鮮)
(安?)은 牧使(牧使)를 지냈다. 安軸은 中宗 때 過去에 合格한 以來 많은 官職을 除授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김인후
(金麟厚),
임억령
(林億齡)과 함께 어울려 親하게 지냈는데, 一名 '湖南의 세 높은 선비'(湖南三高)란 別名을 받기도 했다.
性理學 數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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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軸에게는 中觀(重寬)·重洪(重洪)·重돈(重敦)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元來 안방준은 長男인 中官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叔父 안중돈이 過去 試驗 途中 갑자기 急逝(急逝)하였기에 死後 그의 養子로 入養가게 되었다. 일찍이 박광전(朴光前)·박종정(朴宗挺)의 門下에서 性理學을 受學하였다. 안방준은 11歲 때 退溪
李滉
의 弟子인 竹川(竹川)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의 門下에 나가서
性理學
을 처음 배웠다. 박광전은 退溪
李滉
(李滉)의 文人으로 學行이 뛰어나
宣祖
때
광해군
이 王子 時節 師傅를 지내기도 했다. 그 뒤 14歲 때 妹兄이었던 亂階(蘭溪) 박종정(朴宗挺, 1555~1597)의 門下에서 出入하여 修學하였다. 이때부터 安邦俊의 學問은 大體로
西人
系列의 影響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첫 스승인 박광전은 동인 系列로 退溪 李滉의 文人이었지만 妹兄인 박종정은 西人 黨員이었다. 그 뒤 妹兄 박종정의 影響으로 1591年 京畿道 坡州의 成渾先生을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나중에 安邦俊이 成婚(成渾)의 뒤를 이을 卓越한 人材라고 評할 만큼 成渾과 關聯이 있었다.
靑年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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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年宣祖 24)
京畿道
破産(坡山)으로 留學, 雨季
成婚
(成渾)의 門下에 찾아가
成婚
의 文人이 되어 修學하였다.
知己(志氣)가 江확하고 節義를 崇尙하여 圃隱
정몽주
(鄭夢周)와
조헌
을 가장 崇拜, 이들의 號에서 包銀의 銀과 中峯의 鳳, 各各 漢字를 따서 自己의 號를 은봉이라 지었다. 다른 號는 雨傘이었다.
1592年
4月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故鄕인 寶城으로 내려가 옛 스승 박광전과 함께 義兵을 일으켜
倭軍
과 交戰하였다. 光海君이 卽位하자
壬辰倭亂
때의 義兵을 優待하는 政策을 펴던
이이첨
(李爾瞻) 等이 그의 名聲을 듣고 그를 여러番 찾아와 起用하려 하였으나 모두 拒絶하였다. 1614年(光海君 6) 寶城 北쪽 雨傘(牛山)에 들어가 後進을 敎育하였다. 일찍부터 性理學에 專念하여 湖南地方의 著名한 性理學者로 名聲을 떨쳤다.
그 뒤 光海君 朝廷의 出仕 要請을 모두 拒絶한다. 1623年 仁祖反正 以後
西人
이 執權하자 同門이며
成婚
門下에 있을 때부터 交遊가 깊던 功臣
김류
等에게 글을 보내 黨爭을 버리고 人材를 登用하여 工事의 區別을 分明히 할 것을 建議하였다. 그는 西人 우계 成渾, 松江
鄭澈
(鄭澈), 趙憲(趙憲) 等의 門下에 出入했던 서인계 사람이었으나 벼슬자리에 戀戀하지 않고 超然하였다.
仁祖 反正 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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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年
人組
卽位 初에
童蒙敎官
(童蒙敎官)에 祭需되고 以後 司圃署別除(司圃署別提) 等에 任命되었으나 모두 辭退, 學問에 專念하였다.
1625年
에는 司圃署 別除, 오수도 察訪(獒樹道察訪) 等을 除授받았으나 亦是 辭讓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丁卯胡亂
이 터지자 檄文을 돌려 全羅道에서 義兵을 일으켰고,
丙子胡亂
이 터지자 亦是 義兵을 일으켜
女眞族
軍隊와 交戰했다. 趙憲을 追慕하여 《항의신편 抗義新編》을 出刊했는데
西人
의 묵재
李貴
(李貴)는 이를 읽고 깊이 感動하여
人組
에게 國家에서 이를 영인과 刊行, 中外에 反射(頒賜)할 것을 建議하여 普及하였다.
以後 學問 硏究와 後學 敎育을 하며 黨論을 中斷하고 폭넓은 人材 中庸을 建議하는 上疏를 올렸다. 人組 後半에 典牲署主婦·察訪·佐郞 等을 除授받았으나 西人 內部의 分派 葛藤과 소현세자 事件 等에 厭症을 느껴 나아가지 않고 仕樣과 拒絶을 反復했다. 거듭 上疏하여 黨爭을 中斷하고 市政(時政)을 改革할 것을 論하였고 壬辰倭亂, 丙子胡亂 後 절의 雛僧活動을 하였다.
出仕와 生涯 後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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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同法
文書를 參考하십시오.
孝宗이 卽位한 뒤 地方의 唯一(遺逸)로 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조극선(趙克善)·權諰(權?)·李惟泰(李惟泰) 等과 함께 左議政 趙翼(趙翼)의 薦擧를 받아 1649年(孝宗 元年) 工造 佐郞, 司憲府地平, 1651年(孝宗 2年) 司憲府掌令, 1653年(孝宗 4) 工曹參議(工曹參議)에 任命되었지만 出仕하지 않고 거듭 上疏하여 市政(時政)을 論하였다.
1652年(孝宗 3年) 안방준은 김자점(金自點)李 光陽(光陽)에 流配된 뒤로 여러 番 便紙를 보내와서 몇次例 往復 書札을 보낸적이 있다면서 스스로 罪를 받겠다는 上疏를 하였다. 그 해 5月 曉鐘에게 上疏하여 右議政 金堉(金堉)李 ‘京畿道에 實施하고 있는 大同法(大同法)을 먼저 湖西 地方에 試驗하고 다음으로 兩南(兩南)에 實施하자’는 大同法의 擴張 實施에 對해서 여러 大臣들은 百姓들의 負役을 가볍게 하고 國家의 財政(財政)을 豐富하게 할 것이라 여겼을 것이나 只今 三南 地方은 繼續되는 凶年으로 좀도둑이 들끓고, 亂離를 겪고 난 뒤 流浪民들이 山으로 들어가 銃으로 짐승을 잡아 生計를 이어가는 者가 數도 없이 많아져서, 百姓들이 怨望과 背反感으로 가득찬 것이 國家의 커다란 걱정인데도, 朝廷의 臣下들은 서울에서 實施할 때 이미 人心을 잃은 大同法만이 오늘날의 第一가는 計策으로 여긴다며 反對했고, 또한 無差別한 遺民의 推刷(推刷)로 因해 流民이 發生하는 理由를 考慮하지 않고 推刷의 命令만 내리면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숨게 된다는 理由를 들어 反對했다.
80 平生을 主로 草野에서 보내면서 始終 性理學에 沒頭하였다. 들어오고 나갈 때를 明確히 하였고, 學問的 傾向과 處身에 있어서 절의(義節)을 높이 崇尙했다. 일찍이 李珥, 成婚, 鄭澈, 趙憲 等 서인계 人士들을 事後에 辯論했고, 尤庵 宋時烈 等에게 尊丈으로 待遇를 받아 政治的으로 西人으로 分類된다.
그러나 명재(明齋) 尹拯(尹拯)의 생각은 달랐다. "'朋黨을 革罷하자[破朋黨]’라는 세 글字를 自身의 所任으로 삼고서 恒常 입으로 말하고 글로 쓰면서 오직 이 세 글字를 闡明하는 일에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努力했던 분"이라며 稱頌했다.
詩文도 많이 남겼는데 그의 詩文은 《隱峯全書》에 收錄되어 傳해지고 있다. 壬辰倭亂 當時 義兵將들의 活躍相과
壬辰倭亂
當時
朝鮮
의 環境을 敍述한 《항의신편 抗義新編》·《李大源展》·《湖南義兵錄 湖南義兵錄》과 黨爭에 關聯된 資料인 《三元記事 三寃記事》, 《社友減髻錄 師友鑑戒錄》, 《魂정록 混定錄》, 《混晶便錄 混定編錄》, 《매환문답》, 《奇妙遺跡老랄搜査》 等의 著書를 남겼다. 그의 編著들은 義兵史·黨爭社 硏究에 重要한 資料가 된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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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7年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宋浚吉)이 그를 褒賞할 것을 請하는 上疏를 올렸고, 1658年 동춘당 宋浚吉의 贈職 上疏를 올려
增
嘉善大夫
李朝
參判
에
追贈
되었다.
송준길
은 그의 道學과 士林이 書院을 建立하여 祭享하게 된 事由를 아뢰고 '朝廷에서도 마땅히 贈職하여 褒賞해야 할 것입니다'하여
李朝
參判
에 追贈되었던 것이다.
仁祖反正
功臣인
西人
김류
,
김자점
,
李貴
等과도 親分이 있었고, 非功臣인 山林係熱
西人
學者인
성문준
(成文濬),
송시열
,
송준길
(宋浚吉) 等과 두루 親交가 있어
西人
執權下에서는 湖南地方을 代表하는 學者로 朝廷에 여러番 薦擧되었다. 그러나 官職은 辭讓할 때와 나갈 때가 있었고 丙子胡亂 以後는 거의 벼슬을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다시 吏曹判書 兼 成均館 祭酒에 追贈되었고, 純祖 때 門講(文康)의 諡號가 내려졌다. 全南 寶城의 大計서원(大溪書院), 和順 冬服의 桃源서원(道原書院), 능주의 度山寺(道山祠) 等에 配享되었다.
1691年(肅宗 17)
남인
이 執權했을 때 한때 湖南인
政務서
(鄭武瑞) 等의 疏廳에 依하여 그의 祠宇(祠宇)가 한때 撤去되기도 했다. 그는 鄭澈과 함께 西人과 男인 政權의 視角과 立場差異에 따라 相反되는 評價가 내려져 褒貶이 反復되기도 하였다.
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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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臨津·精油倭亂과 關聯된 著述
: 「진주서사(晋州敍事)」·「臨政忠節私的(壬丁忠節事蹟)」·「三元記事(三寃記事)」·「湖南依錄(湖南義錄)」·「백사론임진제장사便(白沙論壬辰諸將士辨)」·「釜山記事(釜山記事)」·「노량기사(露梁記事)」·「臨津記事(壬辰記事)」等.
- 『隱峯野史別錄(隱峯野史別錄)』
: 은봉이 1627年에 臨津·精油倭亂과 關聯된 著述 속에서 特別히 「臨津記事(壬辰記事)」·「노량기사(露梁記事)」·「진주서사(晋州敍事)」等 세 篇의 글을 뽑아 編纂한 冊이다. 은봉 事後인 1663年 高興鄕校에서 처음으로 刊行되었는데, 日本에서도 이 冊을 入手하여 읽어오다가 1849年 와타나베(渡邊)가 유호이再(有乎爾齋)에서 再次 刊行하여 日本 社會에 流布했다. 이를 街影本(嘉永本)이라 부른다. 日本人들을 「隱峯野史別錄」을 통해 臨津·精油倭亂의 顚末(顚末)을 詳細히 考察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朝鮮人의 忠節(忠節)을 本보기로 삼아 自國人에 對한 精神敎育을 하려고 했다. 그만큼 이 冊의 史料的 價値는 매우 比重이 높다. 이 冊은 1996年에 成均館大 李尙益(李相益,1964年生)·최영성(崔英成,1962年生) 敎授에 依해 飜譯되어 韓國學界에 紹介된 바 있다.
- 士林精神을 鼓吹한 著述
: 『奇妙遺跡(己卯遺蹟)』·『항의신편(抗義新編)』·「社友減髻(師友鑑戒)」·「雨傘答問 (牛山答問)」等.
- 東西 盆唐과 關聯된 著述
: 『混晶便錄(混定編錄)』·「基軸記事(己丑記事)」·「매환문답(買還問答)」等.
關聯 文化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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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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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祖父 :
안犯
(安範, 1460~1523) -
1483年 生員
. 1507年(中宗 2) 政局原從功臣(靖國原從功臣). 청안(淸安)?鎭安(鎭安)?瘞安(禮安) 세 고을의 縣監으로 選定을 베풀어 ‘안삼안(安三安)’으로 불림.
- 高祖母 : 天安全氏(天安全氏) - 上場(上將) 전유정(全有貞)의 따님.
- 曾祖父 : 안수륜(安秀崙, 1483~1517) -
1507年 眞사
,
1516年 文科
, 成均館 學諭(成均館學諭), 議政府 史錄(議政府司錄).
- 曾祖母 : 居昌신氏(居昌愼氏) - 武科 及第 後 司憲府監察(司憲府監察)을 지낸 新亂動(愼蘭仝)의 따님. 江原道觀察使(江原道觀察使)
신자건
(愼自健, 1443~1527)의 孫女.
- 祖父 :
安軸 (朝鮮)
(安?, 1500~1572) - 號는 둔암(鈍庵),
1531年 生員
·
眞사
,
1542年 文科
, 司諫院正言, 司憲府地平, 羅州牧使, 남원도호부社.
- 조某 : 渡江金氏(道康金氏) - 生員
金約會
(金若晦, 1481~?)의 따님이고, 外祖父는
송연손
(宋演孫, 1460~1508)인데
中宗
이 潛邸에 있을 때 師傅(師傅)였다.
- 叔父(양부) : 안중돈(安重敦, 1541~1565) - 叔父이자 養父.
1561年 生員
·
眞사
合格
- 南原梁氏(南原梁氏) -
양윤순
(梁允純)의 따님이고, 어머니 居昌신氏(居昌愼氏)는
中宗
의 비
단경왕후
(端敬王后, 1478~1557)의 糖質이고 동생이
明宗
의 後宮 貴人신氏(貴人愼氏)이다.
- 否認 : 慶州鄭氏(慶州鄭氏, 1571~1642) - 咸興判官(咸興判官)
정승복
(鄭承復, 1520∼1580)의 따님으로 어머니는연안김씨(延安金氏)는 김엽(金燁)의 따님이다.
- 長男 : 安候地(安厚之, 1590~1664) - 號는 송音(松陰). 左承旨(左承旨)에 贈職.
- 子婦 : 昌寧成氏(昌寧成氏, 1591~1627) -
成婚
(成渾, 1535~1598)의 孫女이고
성문준
(成文濬, 1559~1626)의 따님.
- 孫子 : 安全(安?, 1614~1686) - 號는 소와(邵窩),
1614年 眞사
, 송화縣監(松禾縣監).
- 孫婦 : 全州李氏(全州李氏, 1612~1699) - 私服市井(司僕寺正) 이구(李坵)의 따님.
- 曾孫子 : 안두상(安斗相, 1636~1723) - 號는 樂貧當(樂貧堂), 通政大夫(通政大夫)·折衝將軍 行 龍驤衛 副護軍(折衝將軍行龍?衛副護軍)
- 曾孫婦 : 原州李氏(原州李氏, 1638~1699) - 司憲府地平(司憲府持平)
이빈
(李彬, 1597~?)의 따님.
- 曾孫子 : 안익상(安翼相, 1638~1672) - 通德郞(通德郞)
- 曾孫婦 : 풍천林氏(豊川任氏) - 將仕郞(將仕?) 壬方(任昉)의 따님.
- 曾孫壻 : 오수석(吳壽錫)
- 曾孫壻 : 고응천(高應天) - 本貫은 濟州(濟州). 고세혁(高世爀)의 아들
- 孫子 :
안음
(安?, 1622~1685) - 號는 松村(松村)·退禹(退憂),
1657年 生員
, 保社原從功臣(保社原從功臣) 1等에 錄勳. 通政大夫(通政大夫) 行兵曹參知(行兵曺參知)
- 孫婦 : 海南尹氏(海南尹氏)
윤호영
(尹好英, 1620~1673) - 尹乳房(尹惟方)의 따님.
- 曾孫子 : 안민상(安敏相) - 益胃(翊衛)
- 曾孫壻 : 최麗川(崔與天) - 別除(別提)
- 曾孫壻 : 路饌(盧燦) - 監役(監役)
- 曾孫壻 : 任官(林洸) - 職場(直長)
- 曾孫壻 : 이태래(李泰來) - 本貫은 原州(原州[舊]), 參奉(參奉). 地平 이빈(李彬, 1597~?)의 孫子, 완은(?隱) 이담로(李聃老, 1627~1701)의 아들
- 아들 :
이언렬
(李彦烈, 1680~1719) - 1713年 生員, 1714年 文科, 成均館戰績(成均館典籍).
- 아들 : 이언길(李彦吉, 1684~?) - 1729年 生員
- 아들 : 이언술(李彦述)
- 아들 : 이언철(李彦喆)
- 曾孫壻 : 妊娠(林藎) - 謝過(司果)
- 孫婦(後室) - 未詳
- 曾孫子(庶) : 안氣象(安箕相) - 敎委(校尉)
- 孫子 : 顔回(安??, 1627~1668) -
1651年 武科
, 湖南水軍虞侯(湖南水軍虞候), 刑曹佐郞(刑曹佐郞).
- 孫婦 : 海州崔氏(海州崔氏, 1628~1672) - 通德郞(通德郞) 최정(崔湞)의 따님.
- 曾孫子 :
안수상
(安壽相, 1665~1729) - 동복현감(同福縣監).
- 曾孫婦 : 평산申氏(平山申氏) - 禦侮將軍(禦侮將軍) 신남수(申楠壽)의 따님이고 全羅道兵馬節度使 평해군(平海君) 神만(申漫, 1679~?)의 누나.
- 曾孫婦 : 조양임氏(兆陽林氏)
- 曾孫壻 :
오대관
(吳大寬, 1656~?) - 本貫은 羅州(羅州), 號는 德陽(德陽). 1687年 生員, 成均館戰績
오이규
(吳以奎, 1608~1653)의 孫子이고 通德郞(通德郞) 오영석(吳永錫)의 아들.
- 孫女 : 竹山安氏(竹山安氏, 1611~1678)
- 孫壻 :
민팽령
(閔彭齡, 1614~1668) - 本貫은 여흥(驪興), 越波(月坡). 奉仕(奉事) 민희(閔禧)의 孫子이고 司憲府執義 民旅館(閔汝寬)의 아들.
- 孫壻 : 윤상필(尹商弼) - 本貫은 海南(海南), 윤선창(尹善昌)의 아들.
- 孫壻 : 최처후(崔處厚)
- 子婦(後室) : 光州李氏(廣州李氏, 1606~1684) - 이금수(李錦樹)의 따님
- 次男 : 안신지(安愼之, 1592~1671) - 宣敎郞(宣敎郞)
- 子婦 : 參奉(參奉) 祖武(趙懋)의 딸
- 孫子 : 안희(安??, 1614~1680) - 號는 回程와(晦靜窩).
- 孫婦 : 해미白氏(海美白氏) - 송호(松湖)
백진남
(白振南, 1564-1618)의 孫女이고 越州(月洲) 백상현(白尙賢, 1595~?)의 따님
- 孫子 : 安諭(安?)
- 孫子 : 안필(安{山畢})
- 孫子 : 安謐(安?)
- 孫壻 : 이징원(李徵遠)
- 孫壻 : 양지항(梁之沆) - 本貫은 濟州(濟州),
양위남
(梁渭南, 1574~1633)의 孫子이고
양우전
(梁禹甸)의 아들.
- 孫壻 : 양지한(梁之漢)
- 三南 : 安心地(安審之, 1600~1655) - 宣敎郞(宣敎郞)
- 子婦 : 여흥閔氏(驪興閔氏) - 民事種(閔嗣宗)의 孫女이고 奉仕(奉事) 민희(閔禧)의 따님.
- 孫子 : 안규(安{山奎})
- 孫子 : 安城(安{山成})
- 孫壻 : 홍명기(洪命基)
- 사남 : 안익地(安益之, 1608~1687) - 宣敎郞(宣敎郞)
- 子婦 : 奉仕(奉事) 김의명(金義鳴)의 딸
- 孫子 : 안순(安{山旬})
- 孫子 : 안言(安{山彦})
- 孫壻 : 李瑱(李?)
- 孫壻 : 양우주(梁禹疇) - 本貫은 濟州(濟州). 양도남(梁道南, 1607~1667)의 아들.
- 外曾孫子 :
양득중
(梁得中, 1665~1742) - 號는 덕촌(德村), 同副承旨(同副承旨).
- 外曾孫子 : 양영중(梁瑩中)
- 外曾孫서 : 임규석(林圭錫)
- 外曾孫서 : 조도명(趙道命)
- 孫壻 : 汚水(吳需) - 本貫은 羅州(羅州)
- 外曾孫子 : 傲慢敵(吳萬績)
- 外曾孫子 : 誤在籍(吳再績)
- 外曾孫서 : 안만승(安晩升, 1680~1732) - 이병재(理病齋) 晏如해(安汝諧, 1657~1691)의 아들
- 孫壻 : 최동보(崔東寶)
- 오남 : 안일지(安逸之, 1613~1643) - 宣敎郞(宣敎郞)
- 子婦 : 申平송氏(新平宋氏) - 송익(宋?, 1600~?)의 따님.
- 孫子 : 안참(安?)
- 曾孫子 : 안직상(安稷相)
- 曾孫子 : 안치상(安致相)
- 曾孫壻 : 오흥적(吳興績)
- 曾孫壻 : 長이當(張以堂)
- 曾孫壻 : 백守閨(白受珪)
- 曾孫壻 : 정상익(鄭相益)
- 孫子 : 安危(安?, 1639~1701)
- 孫婦 : 鑛山李氏(光山李氏) - 宣敎郞(宣敎?) 理由(李?)의 따님.
- 曾孫子 :
안후상
(安後相, 1665~1726) - 號는 매계(梅溪).
- 曾孫婦 : 昌寧조氏(昌寧曺氏) - 조이태(曺爾泰)의 따님.
- 曾孫婦 : 密陽朴氏(密陽朴氏) - 박세중(朴世中)의 따님.
- 曾孫婦 : 광산金氏(光山金氏) - 김평(金枰)의 따님.
- 曾孫壻 : 移運視(李耘時) - 本貫은 全州(全州)
- 曾孫壻 : 이태개(李泰開) - 本貫은 星州(星州)
- 孫婦(後室) : 晋州河氏(晉州河氏)
- 曾孫子 : 안제상(安濟相)
- 曾孫子 : 안내상(安?相)
- 曾孫子 : 안택상(安宅相)
- 曾孫子 : 안동상(安東相)
- 曾孫子 : 안여상(安藜相)
- 曾孫壻 : 김창구(金昌九)
- 曾孫壻 : 文이채(文以采)
- 孫壻 : 박세형(朴世亨) - 本貫은 震源(珍原), 滿浦(晩圃)
박근효
(朴根孝, 1550~1607)의 孫子이고 冬季(東溪)
박춘장
(朴春長, 1595~1664)의 아들
- 孫壻 : 양창호(梁昌灝)
- 孫壻 : 최細尖(崔世瞻)
- 사위 : 정창서(鄭昌瑞) - 本貫은 瑞山(瑞山), 龍驤衛副司勇(龍?衛副司勇)
- 사위 : 양일남(梁一南) - 本貫은 濟州(濟州), 通德郞(通德郞)
- 外孫子 : 양우성(梁禹成)/양우규(梁禹規)
- 外孫子 :
양우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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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禹及) - 1651年 武科, 兵馬節度使(兵馬節度使).
- 外孫書 : 白光視(白光時)
- 사위 : 조정유(曺挺有, 1611~1650) - 本貫은 昌寧(昌寧). 宣敎郞(宣敎郞). 父親은 趙昱(曺煜, 1592∼1672)이고 祖父는 生員
조수성
(曺守誠, 1570~1644)이다.
- 生父 : 안중관(安重寬, 1524~1605) - 僉知中樞府事(僉知中樞府事). 領議政
윤두수
(尹斗壽, 1533~1601)가 妻조카.
- 前婦人 : 성주현氏(星州玄氏) - 副司直(副司直) 顯允名(玄允明)의 따님
- 兄 : 안방선(安邦善, 1543~1588) - 彰信校尉(彰信校尉)
- 兄嫂 : 問議朴氏(文義朴氏) - 搜査(水使) 迫害(朴海)의 따님
- 조카 : 안효립(安孝立)
- 조카 : 안제립(安悌立) - 武科에 及第하여 判官(判官).
- 조카 : 안充立(安忠立) - 武科에 及第하여 都摠府 道士(都摠府都事), 抄啓郡守(草溪郡守).
- 姪婦 : 高興劉氏(高興柳氏) - 幼蒙社(柳夢獅)의 따님.
유몽인
(柳夢寅, 1559~1623)의 조카
- 조카 : 안申砬(安信立, 1578~1666) - 禮賓寺 主婦(禮賓寺主簿)
- 姪婦 : 咸陽朴氏(咸陽朴氏) - 參奉(參奉) 박계성(朴繼成)의 따님
- 姪婦 : 여양진氏(驪陽陳氏) - 禮賓寺參奉(禮賓寺參奉) 진순신(陳舜臣)의 따님
- 妹兄 : 남언강(南彦絳) - 本貫은 宜寧(宜寧)
- 妹兄 : 신중경(愼重慶) - 本館 居昌(居昌)
- 妹兄 :
박종정
(朴宗挺, 1555∼1597) - 本館 咸陽(咸陽), 1576年 眞사
- 妹兄 : 이영남(李英男) - 本貫은 光州(廣州)
- 甥姪 : 이정발(李廷發) - 本貫은 瘞安(禮安), 通德郞(通德郞).
- 後夫人(生母) : 震源朴氏(珍原朴氏) - 박이경(朴而儆)의 따님. 1513年 眞사
박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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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의 孫女.
- 次男 :
안방준
(安邦俊) - 叔父
안중돈
(安重敦, 1541~1565)의 養子가 됨
- 妹弟 : 이근(李根, 1577~?) - 本貫은 全義(全義),
1606年 武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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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主婦(主簿).
- 甥姪 :
최계헌
(崔繼憲, 1590~1643) - 本貫은 海州(海州)
- 妹弟 : 송격(宋格 - 本館 申平(新平).
- 妹弟 : 김원(金院)
- 叔父 : 안중홍(安重洪, 1531~1597) - 號는 동암(冬岩), 獻陵 參奉(獻陵參奉).
- 叔母 : 原州元氏(原州元氏) 원천상(元天祥, 1532~?) - 怨言步(元彦輔, 1499~?)의 따님.
元均
(元均, 1540~1597)의 親戚이었다.
- 從弟 : 안방열(安邦說, 1592~1609)
- 從妹夫: 신흡(申?) - 本貫은 高齡(高靈),
- 조카 : 身上審(申尙深)
- 조카 :
신상용
(申尙溶, 1577~1618) - 號는 칠휴當(七休堂)
- 姪婦 : 태원안氏(太原安氏) - 同知中樞府事(同知中樞府事)
岸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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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鵠, 1534~1626)의 따님.
- 從妹夫 : 설호룡(薛虎龍) - 本貫은 淳昌(淳昌)
- 從妹夫: 윤강중(尹剛中) - 本館 海南(海南), 生員
尹孝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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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孝貞, 1476~1543)의 孫子이고 講院監査
尹服
(尹復, 1512~1577)의 長男.
- 조카 :
윤유겸
(尹唯謙) - 1618年 眞사.
윤선도
(尹善道, 1587~1671)의 再從叔.
- 조카 : 尹有益(尹唯益)
- 從妹夫 : 윤욱(尹頊) - 本貫은 咸安(咸安), 윤승서(尹承緖)의 長男.
- 姑叔(姑叔) : 이유창(李惟昌) - 本館 光州(廣州), 忠義衛(忠義衛).
안수잠
(安秀岑)의 사위 理由番(李惟蕃)의 동생.
- 內從四寸 : 이윤남(李允男)
- 內從四寸 : 이신남(李信男)
- 內從四寸 : 이의남(李義男)
- 內從四寸 : 이기남(李奇男, 1567~?) - 1585年 生員
- 內從四寸 : 이태남(李泰男) - 縣令(縣令)
- 從祖父 : 安定(安艇) - 字 강빈(江賓), 號 巽庵(遜庵), 宣務郞(宣務郞)
- 從祖母 : 光州李氏(廣州李氏) : 郡守(郡守) 이지분(李之?)의 딸
- 堂叔(量子) :
안중묵
(安重默) : 義盈庫職場(義盈庫直長), 者 寄顯(基賢), 號 동애(桐崖), 生父 안의(安艤)
- 堂叔母 : 淸風金氏(淸風金氏) : 忠義衛(忠義衛) 김홍한(金弘漢)의 딸
- 從曾祖父 : 안수잠(安秀岑, 1486~?) - 1507年 生員 進士에 合格. 1522年 文科에 及第. 陜川郡守(陜川郡守).
- 從曾祖母 :
太宗
의 서6남
喜令軍
(熙寧君) 利他(李?, 1412~1465)의 孫女이고, 華城郡(花城君) 移監(李堪)의 따님이다.
- 再從大姑숙(사위) : 理由番(李惟蕃) - 本貫은 光州(廣州), 全羅道觀察使
이세정
(李世貞, 1461~1528)의 孫子이고 이수완(李秀莞, 1500~1572)의 次男.
- 再從姑叔(사위) : 양천회(梁千會, 1563~1591) - 本貫은 濟州(濟州), 1588年 生員.
- 從曾祖父 : 안수금(安秀?, 1488~1542) - 1513年 武科 及第. 安東版管(安東判官), 雲山郡守(雲山郡守).
- 從曾祖母 : 全州李氏(全州李氏) 李鐸門(李托文, 1494~?) -
世祖
의 서1남
덕원군
(德原君) 李曙(李曙, 1449~1498)의 따님이다.
- 再從祖父 : 안의(安艤, 1512~1563)
- 再從祖母 : 尙州朴氏(尙州朴氏) - 拍賣(朴梅)의 따님.
- 再從叔 : 眼中무(安重武)
- 再從叔 : 안中位(安重威) - 叔父의 養子
- 再從叔 :
안중묵
(安重默, 1556~1607) - 號는 동애(桐崖). 安定(安艇)의 養子가 됨.
- 再從祖父 : 안朴(安舶)
- 再從祖母 : 光州李氏(廣州李氏) - 吏部(李敷)의 따님.
- 再從祖父 : 雁行(安航)
- 再從祖母 : 장흥조氏(長興曺氏) - 萬戶(萬戶) 조세덕(曺世德)의 따님.
- 再從姑母 : 안효생(安孝生)
- 再從姑叔 : 백승종(白承宗) - 本貫은 해미(海美)
- 아들 : 백민준(白民俊, 1568~?) - 1603年 武科
- 아들 : 백민수(白民秀, 1577~?) - 1603年 武科
- 아들 : 백민角(白民覺)
- 再從姑母 : 안業이(安業伊)
- 再從姑叔 :
박근효
(朴根孝, 1550~1607) - 本貫은 震源(珍原), 1591年 眞사, 竹川(竹川)
박광전
(朴光前, 1526~1597)의 長男
- 아들 : 박세형(朴世亨)
- 사위 : 최홍油(崔弘有) - 本貫은 海州(海州), 通德郞(通德郞), 최경장(崔慶長)의 아들.
- 再從祖父 : 안房(安舫)
- 再從祖母 : 羅州廉氏(羅州廉氏) - 鹽湖(廉浩)의 따님.
- 再從姑母 : 안금개(安金介)
- 再從姑叔 :
문영개
(文英凱, 1565~1620) - 本貫은 남평(南平), 문위지(文緯地)의 아들, 生父는 眞사
문위세
(文緯世, 1534~1600). 宣撫原從功臣(宣武原從功臣).
- 再從大姑母 : 안예종(安禮琮)
- 再從大姑숙 :
정승복
(鄭承復, 1520∼1580) - 本貫은 慶州(慶州), 1544年·1546年 武科, 咸興判官(咸興判官).
- 아들 : 정사안(鄭思安)
- 아들 : 정사익(鄭思翊) - 副司直(副司直)
- 孫子 : 程度(鄭惇) - 辭職(司直)
- 孫婦 : 海州崔氏(海州崔氏) - 兵士(兵使)
최경회
(崔慶會, 1532~1593)의 따님.
- 曾孫子 : 停止秋(鄭之推, 1580~1630) - 1615年 生員.
- 曾孫子 : 정지수(鄭之授) - 正賓(鄭??)의 養子가 됨.
- 孫子 :
正賓
(鄭??, 1566~1640) - 牙山縣監(牙山縣監).
- 孫婦 : 淳昌조氏(淳昌趙氏) - 濕毒(習讀) 祚胤련(趙潤璉)의 따님.
- 曾孫子(量子) : 정지수(鄭之授, 1586~1629) - 1612年 生員
- 孫子 : 정순(鄭恂) - 職場(直長)
- 再從大姑母 : 안의종(安義琮)
- 再從大姑숙 : 정유일(鄭惟一) - 本貫은 河東(河東), 忠義衛(忠義衛)
- 아들 : 정임(鄭任)
- 아들 : 精巧(鄭僑)
- 아들 : 停刊(鄭侃)
- 아들 :
鄭吉
(鄭佶, 1566~1619) - 1606年 生員, 號는 난곡(蘭谷).
- 再從大姑母 : 안臨終(安任琮)
- 再從大姑숙 : 문위지(文緯地) - 本貫은 남평(南平).
- 아들(量子) :
문영개
(文英凱, 1565~1620) - 宣撫原從功臣(宣武原從功臣). 生父는 眞사
문위세
(文緯世, 1534~1600)
- 丈人 :
정승복
(鄭承服)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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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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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生을 主로 草野에서 보내면서 始終 性理學에 沈潛하였으나 일찍이 西人 成婚, 鄭澈, 조헌의 弟子가 되고 그들, 特히 趙憲을 追從하여 政治的 性向은 鉏人便에 섰다. 王朝實錄에 依하면 그는 性品이 慷慨하고 節義있는 人物로 評價된다. 졸기에 依하면 "그는 性品이 강개(慷慨)하고 節義를 崇尙하였다. 平生토록 圃隱(圃隱) 정몽주(鄭蒙周)와 重峯(重峰) 趙憲(趙憲)을 思慕하여 은봉(隱峰)이라고 스스로 號(號)를 붙였다. 비록 시골에 물러나 世上일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여러次例 抗訴(抗疏)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부름을 받았으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朋黨에 反對하고 黨派싸움을 批判하였으나 그럼에도
西人
쪽을 主로 斗頓, 辯護하였다.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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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隱峯全書(隱峯全書) 附錄 卷1~2
- 隱峯全書(隱峯全書) 附錄 卷3 「行長(行狀)」「信徒悲鳴竝書(神道碑銘幷序)
- 안방준, 國譯隱峯全書(신조사, 2002)
- 고영진, 湖南士林의 學脈과 史上(惠人, 2007)
- 이해준, 解除-隱峯先生의 生涯와 著述, 國譯隱峯全書(신조사, 2002)
- 朝鮮大學校, 선비 안방준, 道를 묻고 義를 行하다 (朝鮮大學校 博物館, 2010)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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