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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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砬
申砬
朝鮮 의 平安道 兵馬節度使
在任 1590年 11月 11日 ~ 1592年 4月 6日
賃金 朝鮮 宣祖
이름
別號 兒名(兒名)은 新任 (申臨, 宸臨)
立地(立之)
시호 充壯(忠壯)
身上情報
出生日 1546年 11月 16日 ( 陰曆 10月 23日 )
死亡日 1592年 4月 28日 ( 1592-04-28 ) (45歲)
死亡地 朝鮮 忠淸道 忠州 隣近
黨派 無所屬
本館 평산
軍事 經歷
服務期間 1567年 ~ 1592年 4月 28日
最終階級 三道 都巡邊使
指揮 咸鏡北道 兵馬節度使
咸鏡南道 兵馬節度使
平安道 兵馬節度使
삼도도순변사
主要 參戰 壬辰倭亂
徐薰 議政府 領議政 追贈

申砬 (申砬, 1546年 11月 16日 ( 陰曆 10月 23日 ) ~ 1592年 6月 7日 ( 陰曆 4月 28日 ) [1] )은 朝鮮 의 武臣이다. 신숭겸 의 後孫으로 本貫은 평산 (平山)이며, 字는 立地(立之)이다.

武科에 及第하여 五衛都摠府와 晉州判官, 漢城判尹 (正2品) 等을 지냈다. 壬辰倭亂 첫 해에 忠州 彈琴臺 에서 背水陣 을 펼치고 倭軍과 싸우다 戰死한 將軍이다. 諡號는 充壯(忠壯)이다.

仁祖反正 에 加擔한 西人 신경진 과 신경인 兄弟의 아버지이며, 신경희의 獄事 로 죽은 신경희 의 叔父이다. 大韓民國 獨立運動家 政治人 海公 申翼熙 에게는 13代祖가 된다.

生涯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申砬은 明宗 元年(1546年) 10月 23日 평산 신氏 畫局 科 否認 坡平 尹氏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時調 신숭겸 高麗 王建 의 開國功臣으로 그 뒤 朝鮮 前期의 文臣 신개 는 朝鮮 建國 以後 左議政 을 지내고 문희共의 諡號를 받았다. 신개는 신립의 5對照였다.

高調 신자준 은 音步로 起用되어 世宗 27年(1445) 掌令 이 되고, 世祖 元年(1455) 判宗簿寺事로 原從功臣 3等에 책록되었으며 世祖 3年 僉知中樞院使, 世祖 6年 刑曹參議, 世祖 7年 禮曹參議가 되었다. 그 뒤 忠淸道 觀察使를 歷任하고 左參贊에 贈職되었으며, 曾祖 신말평 掌樂院 主婦로 禮曹 板書 成俔 의 命을 받아 掌樂院 製造 류자狂 , 典樂 反哭 김복근 을 도와「악학궤범」편찬에 貢獻하였다. 연산군 司憲府 監察을 歷任했다.

할아버지 身上은 京畿道, 全羅道, 慶尙道 觀察使와 刑曹判書 (正2品)를 지냈으며 諡號는 文節이다. 身上은 타고난 性格이 勇猛한 것에 비해 和平하고 容恕를 잘 하였으며 또한 官吏의 才幹이 있었다. 아버지 신화국은 성균 生員으로 傳說, 別檢에 任命되었으나 就任하지 않았다. 後에 아들이 功臣이 됨으로 平柱府院君 領議政으로 贈職되었다.

武科 及第와 官僚 生活 [ 編輯 ]

日戰解圍도(一箭解圍圖)

1567年 ( 宣祖 卽位年 ) 22歲로 科에 及第했으며, 宣傳官을 거쳐 都摠府道使(都摠莩事), 都總(都摠), 道士(都事), 經歷(經歷)을 지내고 晉州判官(晉州判官)에 任命되었다. 이때 眞珠牧師 양응정 (梁應鼎)李 “자네는 큰 人物이니 工夫를 해야 한다.”라고 하자 그는 이에 양응정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 後 여러 벼슬을 거쳐 量産郡守(梁山郡守)를 지냈고, 다른 벼슬을 더 거친 뒤 1583年 은성府使(穩城府使)가 되었다. 이 무렵 女眞族 니탕개 (尼湯介)가 쳐들어와서 여러 고을을 뒤흔들었으나 將軍들은 모두 싸움에 지고 말았다. 니탕개는 宣祖 初年부터 6陣(六鎭)에 자주 드나들며 恭順(恭順)의 뜻을 보였으므로 政府에서 貫祿(官祿)을 주고 厚待했으나, 眞藏(鎭將)의 待遇가 좋지 않다는 名分을 내세워 附近의 여러 不足을 糾合, 敬遠部에 侵入하고 牙山步(阿山堡)와 안원보(安原堡)를 占領했다. 이에 申砬은 起兵 5百餘 基를 動員, 僉使 身上節(申尙節)과 함께 勳戎陣을 攻擊하던 軍士 1萬 名을 물리치고, 女眞族이 咸鏡道를 侵略할 때 經由하는 안두리 部落을 불태웠다.

1584年 3月 17日 宣祖가 申砬과 移轉 (李?)을 20日에 擧行할 濕疹(習陣) 行事의 大將으로 임명하도록 命令했다가 備邊司의 말에 依하여 道路 罷했다. [2]

1587年 흥양(興陽)에 倭寇 가 侵入하자 右防禦使(右防禦使)가 되어 軍士를 引率하여 討伐에 나섰다가 이미 倭寇가 撤收했으므로 돌아오던 中 兩家의 處女를 妾으로 삼았다는 三四 (三司)의 彈劾 으로 罷職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咸鏡南道 兵馬節度使 에 다시 登用되었으나, 卒兵을 慘殺한 罪로 中樞府 冬至使의 閑職으로 轉任되었다.

壬辰倭亂 [ 編輯 ]

1590年 (宣祖 23年) 여름 平安道 兵馬節度使 兼 寧邊大都護府社에 補職되고 [3] , 이듬해 漢城府 判尹 을 거쳐, 1592年 (宣祖 25) 4月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三道 都巡邊使(三道都巡邊使)로 任命되어 싸움터로 떠날 때, 宣祖 (宣祖)가 檢(劍)을 하사하면서 激勵해 주었다. 特히 要請하여 김여물 (金汝杖)을 데리고 가고, 途中에서 兵丁을 募集하여 忠州 에 到着하였다. 申砬은 忠州에서 防禦陣을 갖추고 倭敵을 遮斷하고자 하였으나 到着한지 不過 사흘만에 全滅하고 말았다. 申砬은 部下 將帥들의 挽留에도 不拘하고 彈琴臺에 陣을 치고 騎馬戰術을 試圖하였다. 그러나 倭軍이 몰래 侵入해 온 줄도 모르고 放心하다가 忠州性을 빼앗겼고, 마을에서 불길이 일어난 다음에서야 말을 달려 反擊에 나섰으나 慘敗하였다.

1592年 4月 26日 忠州에 到着한 申砬은 兵力을 단월役 에 駐屯시키고 鳥嶺 (鳥嶺)에 올라갔다가 尙州에서 敗하여 쫓겨 온 巡邊使(巡邊使) 이일 (李鎰)을 만났다. 申砬은 그를 死刑에 處하려 하였으나 재주를 애석히 여겨 先鋒에 나서 싸워 贖罪하도록 容恕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毒이 되어 신립의 麾下 兵力들이 크게 動搖했다. 이날 作戰會議에서 從事官 金汝岉은 鳥嶺 (鳥嶺)에 陣地를 構築하자고 建議했다. 그러나 申砬은 北方에서 騎兵을 통해 大勝을 거뒀던 經驗이 있었으므로 自身의 特技인 騎兵을 利用하여 日本軍을 무찌르기로 決定하고, 마침내 彈琴臺 近處에 達川(達川)을 뒤에 두고 背水의 陳(背水之陣)을 쳤다.

4月 27日 倭敵이 侵入하여 斥候를 나갔던 巡邊使 이일과 忠州牧師 이종장 이 山속에 孤立되었다. 이때 申砬이 信任하던 部下 軍官이 이 事實을 報告하였으나 群衆을 眩惑시킨다하여 斬首하였다. 그리고는 倭敵이 아직 喪主에 머무르고 있다고 狀啓를 올렸다.

4月 28日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가 指揮하는 大規模 兵力이 忠州에 當到하였다. 敵軍은 部隊를 여럿으로 나누어 一部는 山을 넘어 東쪽 깊숙히 侵入해 들어가고, 一部는 達川을 따라 侵入하였으며, 一部는 防備가 허술한 충주성에 侵入하였다. 倭軍은 祖靈을 넘어 山과 들에 가득차고, 칼빛이 번쩍번쩍 하였다. 뒤늦게 倭軍이 侵入해온 事實을 알아차린 申砬은 急히 말을 채찍질하여 주성으로 달려나갔으나, 마을 間隔이 狹小하고 논이 많아 제대로 反擊하지 못하고 陣營이 흐트러졌다. 이때 城中의 敵이 號角소리를 信號로 一齊히 출격하여 我軍을 包圍하였다. 申砬은 麾下의 여러 部隊를 손수 指揮하여 두 番이나 敵陣(敵陣)을 突破하려 하였으나, 結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더욱이 倭軍은 迂廻作戰(迂廻作戰)으로 그들의 右側에 進出하여 東西에서 壓倒的인 勢力으로 挾攻하였다.

最後 [ 編輯 ]

이에 그는 彈琴臺(彈琴臺)에 돌아가서 김여물더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짓게 하여 이것을 部下에게 주어 調整에 달려가서 바치게 하고는 김여물과 함께 敵陣에 突進해서 單身으로 싸우다 힘이 다하여 江가로 몰리게 되었다. 그는 降伏을 하는 代身에 江물에 몸을 던져 自決하였고, 部長이였던 김여물 (金汝物) 亦是 따라 投身 自決하였다. 이때 將軍의 나이는 享年 47歲였다.

事後 [ 編輯 ]

신립장군墓 》는 京畿道 光州市 곤지암읍 신대리 산15-1번지에 있다. 夫人 全州 崔氏와의 合葬墓로 앞에는 床石과 香爐石이 있고, 그 앞에 長明燈(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等)이 있으며 左右로 童子石·望柱石·文人石이 各 1雙씩 配列되어 있다. 墓碑는 墓의 왼쪽에 있는데 碑文은 宋時烈이 짓고, 신익상이 글씨를 써서 肅宗 29年(1703)에 세운 것이다. 1986年 9月 7日 京畿道의 記念物 第95號로 指定되었다.

事後 議政府 領議政 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充壯(忠壯)이다.

家族 關係 [ 編輯 ]

  • 할아버지 : 身上 (申?)
  • 할머니 : 全州 李氏 - 世宗 의 8男 계양군 의 孫女
    • 아버지 : 신화국(申華國, 1517 ~ 1578) - 申師任堂 의 8寸 동생
    • 어머니 : 坡平 尹氏 - 윤회정(尹懷貞)의 딸
      • 누나 : 평산夫婦인 神志向(申芝香, 1538 ~ 1622) - 인헌왕후 의 어머니이자 人組 의 外祖母
      • 兄 : 신잡 (申?, 1541 ~ 1609)
      • 兄 : 迅急(申?, 1543 ~ 1592)
      • 男동생 : 新할(申?, 1548 ~ 1592)
      • 女同生 : 신단향(申檀香, 1550 ~ ?)
      • 女同生 : 신계숙(申季淑, 1553 ~ ?)
      • 前妻 : 全州 李氏 - 이담명(李聃命)의 딸
      • 後妻 : 全州 崔氏 - 최필新(崔弼臣)의 딸
        • 長男 : 신경진 (申景?, 1575 ~ 1643)
        • 며느리 : 淳昌 조氏 - 僉知(僉知) 조정현(趙廷顯)의 딸
          • 孫子 : 神俊(申埈)
          • 孫子 : 신해(申垓) - 신경인에게 養子로 入籍 - 신익희 의 11代祖
        • 次男 : 신경유(申景裕, 1581 ~ 1633)
        • 三南 : 신경인 (申景?)
        • 長女 : 郡夫人 신제순(郡夫人 申悌順, 1578 ~ 1622) - 宣祖 의 4男 신성군 의 政府인
        • 次女 : 평산 신氏 - 이이첨 의 次男 光州 李氏 이대엽에게 出家

申砬과 申欽 과는 12寸間이면서, 各其 子女들을 통해 宣祖 의 査頓이 되었다.

後孫 [ 編輯 ]

조카 신경희 광해군 정원군 의 아들 능창군 을 王位로 推戴하려 했다는 嫌疑를 받고 신경희의 獄事 로 死刑당했다. 그 뒤 신경희의 死刑에 怨恨을 품은 신경진 1623年 仁祖反正 에 加擔하여 광해군 을 廢黜시키고 능양대군 人組 로 推戴한다. 以後 그의 後孫들은 黨色으로는 西人 老論 , 少論 에 屬하게 되었다.

海公 신익희 는 다른 아들인 신경인 의 12代孫이다. 後날 그를 追慕하는 碑石은 彈琴臺 열두臺 어귀에 세워졌고, 六堂 최남선 이 글을 지었다.

關聯 傳說 [ 編輯 ]

處女 鬼神 [ 編輯 ]

신립장군이 젊은 時節에 사냥을 나갔다가 山賊에게 拉致된 處女를 救出해준적이 있다. 젊은 處女는 申砬에게 거둬주기를 請했지만 申砬은 이를 拒絶했다. 그 直後 그 處女는 自殺했다. 以後 壬辰倭亂 이 터져 都巡邊使로 任命된후 倭軍을 막기 위해 忠州로 간 申砬 將軍은 天然要塞人 조령에서 싸우려 했지만 어느 날 그 處女의 魂靈이 나타나 “彈琴臺에서 싸우세요.”라고 했다. 申砬은 이 말을 듣고 彈琴臺 에서 싸웠지만 敗北해 戰死하고 말았다. 이 傳說은 申砬 將軍이 彈琴臺 戰鬪 에서 敗한 것을 그의 能力이 不足해서가 아니라 冤鬼의 탓으로 돌려 敗北에 따른 劣等感을 克服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으며, [4] 다른 한便으로는 신립장군의 能力에 비해 너무 일찍 抑鬱하게 죽은 것에 對한 原因을 解明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5]

基치미 고개 [ 編輯 ]

彈琴臺 戰鬪 에서 살아남은 兵士들이 신립장군의 屍身을 收拾하였는데, 將軍은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던지 두 눈을 부릅뜨고 當場이라도 號令할 것같은 氣勢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6] 또한 屍身을 棺에 넣고 서울로 移送하는 途中에 ‘將軍님’ 하고 부르면 官屬에서 ‘오냐’ 하는 對答소리가 났다고 한다. 利川市를 지나 雪峯山 隣近 고개에 이르러 ‘將軍님’ 하고 부르니 ‘에헴’ 하는 기침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이 고개를 申砬 將軍의 넋이 기침을 한 고개라 하여 旗幟美고개라고 부르기 始作했다. 京畿道 이천시와 光州市의 境界를 이루는 赤山 隣近 고개에 이르러 또다시 ‘將軍님’ 하고 부르니까 그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 고개를 將軍의 넋이 아주 떠난 고개라 하여 넋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7]

신립장군의 墓 [ 編輯 ]

18世紀에 製作된 解凍指導나 光여도를 살펴보면 昆池岩은 예로부터 四通八達(四通八達) 交通의 要地였음을 알 수 있다. [8] 이런 昆池岩에 申砬 將軍의 屍身을 移送하는 兵士들이 到達하자 棺이 땅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7] 그래서 現在의 곤지암읍 신대리 산15-1번지에 屍身을 安葬하고 墓를 만들었다. 墓가 있는 山등성이에서는 昆池岩 邑內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이런 場所에 墓를 쓴 것은 신립장군의 棺이 이 地域에서 멈추어선 理由가 將軍의 冤魂이 昆池岩 하늘을 떠돌며 忠州防禦線을 뜷은 日本軍들이 곤지암을 지나 서울로 向해가는 것을 監視하고자 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昆池岩 [ 編輯 ]

京畿道 文化財資料 第63號로 指定된 ' 昆池岩 (昆池岩)'은 큰 바위와 작은 바위 2個로 構成된 花崗巖인데, 이 바위에는 신립장군과 關聯된 傳說이 傳해내려오고 있다. 신립장군의 遺骸를 昆池岩에 葬事지낸후부터 이 地域에서는 異常한 일이 일어났다. [9] 墓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양이를 닮은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누구든 말을 타고 이 앞을 지나려고 하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아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10] 그러던 中 어느 한 將軍이 近處를 지나다가 신립의 墓所를 찾아가 지나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要請했다. 그러자 갑자기 暴雨가 쏟아지더니 큰 천둥과 함께 벼락이 바위를 내리쳐서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바위周邊에 큰 蓮못이 생겼다. 그後로는 怪異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큰-연못-바위라는 뜻을 가진 ' 昆池岩 (昆池岩)'이라고 불렀다. [11]

申砬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各州 [ 編輯 ]

  1. 申玩, 《경암집》 卷6, 高調 增 純忠積德 病의 補助功臣 領議政 平壤府院君 行 판윤부군가장
  2. 계갑일록 萬曆 12年 甲申(萬曆十二年甲申) 〈宣祖 17年, 1584年〉
  3. 《寧邊地》, 官師表 pp.139
  4. [네이버 知識百科] 申砬 (韓國民俗文學辭典(說話 便))
  5. [네이버 知識百科] 「申砬 將軍 舌禍」 [申砬將軍說話] (韓國鄕土文化電磁大展) .....1988年 富川市社編纂委員會에서 刊行한 『富川市社』에 실려 있는 이 傳說은 全國的으로 널리 傳承되고 있는 說話(說話)이다...(중략)....주요 모티프는 ‘신립의 恩惠 베品’, ‘狼藉의 所願과 죽음’, ‘狼藉의 怨恨’ 等이다. 壬辰倭亂 當時 안타깝게도 自身의 才能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夭折하게 된 原因을 解明하고 있다. 申砬 將軍이 그 才能에 비해 너무도 일찍 夭折했기 때문에 後代에 이러한 內容이 添附되어 傳承된 것으로 볼 수 있다.
  6. [네이버 知識百科] 昆池岩 (文化原形百科 漢江 生活文化, 2006., 文化原形 디지털콘텐츠) ....達川地域에서 고니시의 數 萬名 倭軍과 싸우다 慘敗를 當하자 江물에 빠져 죽고 말았는데,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던지 兵士들이 물속에서 끌어낸 그의 모습이 두 눈을 부릅뜨고 當場이라도 號令할 것같은 氣勢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7. [네이버 知識百科] 申砬 將軍 墓 [申砬 將軍 墓] (두산百科)
  8. [네이버 知識百科] 昆池岩 [昆池岩, Gonjiam] (韓國地名由來집 中部便 指名, 2008. 12., 김기혁, 옥한석, 성효현, 양보경, 전종한, 권선정, 김용상, 박경호, 손승호, 신종원, 이기봉, 이영희, 政府매, 조영국, 김정인, 박승규, 손용택, 심보경, 정암)
  9. [文化財廳, 國家文化遺産포털] 京畿道 文化財資料, 昆池岩 (昆池岩, Gonjiam Rock)
  10. [네이버 知識百科] 昆池岩 (文化原形百科 漢江 生活文化, 2006., 文化原形 디지털콘텐츠)
  11. [네이버 知識百科] 昆池岩 [昆池岩] (두산百科)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壬辰倭亂〉"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