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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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이종장 (李宗張)에 關한 說明이다.

  • 異稱聞慶(文卿), 無疆(武剛)分野:朝鮮時代社 類型:人物 時代:朝鮮 性格:무신 性別:南
  • 出生日:1544年(中宗 11)死亡日:1592年(宣祖 25)本館:紅酒(洪州, 只今의 忠淸南道 洪城)經歷宣傳官, 信川郡數, 忠州牧師 關聯事件:壬辰倭亂
  • [本貫은 紅酒(洪州). 字는 聞慶(文卿). 아버지는 僉使 이한(李漢)이다.

生涯 [ 編輯 ]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며, 또 어버이를 至極하게 奉養하여 孝子로서 所聞이 藉藉하였다. 1569年(宣祖 2)에 武科의 重視에 及第하여 宣傳官에 除授되었다. 그 뒤 1589年에 이산해 (李山海)의 推薦을 받은 바 있다. 1591年에는 信川郡數를 지냈다. 이듬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忠州牧師 兼 조방장(忠州牧使兼助防將)을 除授받고서 都元帥 申砬(申砬)을 따라 出征하였다. 이 때 이항복(李恒福)은 朝廷에서 신립의 帽子가 굴러떨어지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 發生하였음을 말해주고, 그에게 都元帥를 잘 輔弼하라는 付託을 하였다. 都元帥 申砬이 달래강[達川]을 뒤에 두고 彈琴臺(彈琴臺)에 背水陣을 쳤는데, 軍士가 겨우 數千名에 지나지 않았다. 이 作戰의 不可함을 그는 김여물 (金汝?)과 함께 都元帥에게 諫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이 戰鬪에서 아들 이희립(李希立)과 함께 盡力하여 倭軍과 싸웠으나 力不足으로 富者가 모두 戰死하고 말았다. 뒤에 兵曹判書에 追贈되고, 靜慮되었다. 諡號는 無疆(武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