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航空 YS-11期 拉北 事件
(
英語
:
Korean Air Lines YS-11 hijacking
)은
1969年
12月 11日
大韓航空
의
YS-11
旅客機가
北韓
의 指令을 받은
憲兵
出身 固定間諜에 依해 空中 拉致돼
함흥시
隣近의
善德飛行場
에 强制 着陸한 事件이다.
事件의 進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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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年
12月 11日
午後 12時 25分頃 乘客 47名과 乘務員 4名을 태우고
江陵
을 出發하여
서울
로 向하던
大韓航空
의
YS-11
國內線 雙發 旅客機는 離陸한 지 10餘分 後에
江原道
大關嶺
(
平昌郡
,
江陵市
) 一帶 上空에서 乘客으로 僞裝하여 타고 있던 間諜 조창희에 依해 空中 拉致되어 午後 1時 18分頃
北韓
의
善德飛行場
에 强制 着陸했다.
平壤放送
은 事件 發生 後 約 30時間 뒤인
12月 13日
새벽, KAL
YS-11
機가 操縱士 2名의 自進 入北에 依해 北韓에 到着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12月 22日
板門店
에서
유엔
의 要請에 依하여 '軍事停戰委員會 祕書長會議'가 열려 拉北된 사람들과 旅客機 氣體의 送還을 要求했지만 이에 北韓은
UN軍
이 介入할 事案이 아니라는 理由를 들며 拒否하였다.
大韓民國
은
日本 赤十字社
및
國際赤十字委員會
의 도움을 받아 北韓과의 協商을 성사시키려 하였지만 北韓은 이에 應하지 않았고 事件 以後
大韓民國
各地에서 北韓을 糾彈하는 示威가 벌어졌으며 12個國 主要 航空社에서 이 事件에 對해 糾彈한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자 北韓은
1970年
2月 5日
拉北者들을 送還하겠다고 公表했으나 이 中 乘務員(操縱士 2名 等 總 4名)과 乘客 8名(犯人 조창희 包含)은 送還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大韓民國
政府는 全員 送還을 要求하며 送還 協商을 벌였다. 그러나 結局
2月 14日
板門店
을 통해서 乘客 39名만 送還받고 事件이 終結되었다.
이 事件 以後
大韓民國
政府에서는 國務會議 議決로 '航空機 搭乘客에 對한 檢問檢索 强化', '空港 職員에 對한 司法權 附與', '民間航空機 乘務員들의 武器 携帶 許容', '航空機 乘客의 匿名 및 他人 名義의 使用 禁止' 等의 한層 强化된 航空機 保安 對策을 樹立하였다.
2001年
2月
에는 送還되지 못한 乘務員 中 한 名이었던 성경희가 제3차
離散家族
訪北團으로
平壤
을 訪問한 自身의 어머니를 만나기도 하였다.
搜査 結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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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1970年
2月 15日
中央情報部
와 治安局은
陸軍
憲兵
準位
로 除隊한 後 北과 接線한 조창희가 '한창기'라는 假名을 使用해
大韓民國
에서 固定 間諜 活動을 하다가 北韓의 指令을 받고
航空機 拉致
越北을 計劃했으며, 乘客으로 飛行機 앞쪽 座席에 앉아있다가 離陸한 지 約 10分 後 操縱士를 拳銃으로 威脅해 拉北했다는 事實이 드러났다고 發表했다. 이는 送還된 被拉者들에 對한 調査 結果 밝혀졌다.
[1]
[2]
大韓民國 內務部
治安局은 事件 直後인
1969年
12月 15日
搭乘者들의 家庭 環境과 過去 行跡에 關한 機關의 身上調査, 特히 이른바 '
容共
' 査察 等을 聚合한 後, 北韓 放送이 '操縱士 유병하가 拉北을 主導했다'고 밝힌 것과는 달리, '乘客 中 江陵에서 病院 運營을 하던
서울大
醫大 出身 채헌德'李 犯人이라며 '그가 乘客 조창희와 副操縱士 최석만을 꾀어 旅客機를 拉北시켰다'고 發表했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된 搜査가 이뤄지지 않은 채 越南人 出身이고 北에 家族이 있어서 機關에 連行된 적이 있는
空軍
軍醫官 出身 菜氏를 主謀者로 몰고 다른 2名의 軍出身者를 엮어 짜맞추기로 結果를 내린 엉터리 發表였다.
[3]
1970年
2月 15日
發表에서는 主犯으로 指目됐었던 채헌덕과 副操縱士 최석만은 全혀 言及되지 않았다.
[2]
[4]
조중훈
當時
大韓航空
社長은 內務部의 初期 搜査 發表 다음날인
12月 16日
記者會見을 통해 "內務部長官과 治安局長이 '確證은 없으나 推理에 依한 推定이다. 15日 發表는 搜査進行 狀況을 非公式的으로 밝힌 것 뿐'이라고 내게 말했다. 최석만 副操縱士는 決코 拉北事件에 關聯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警察 發表를 反駁했고, 이는 2個月 後 送還 被拉者 調査 發表로 確認되었다.
[5]
當時 野黨이었던
新民黨
은 "이 事件이 間諜 조창희의 單獨 犯行임이 드러남으로써 그동안 當局이 벌였던 搜査나 拉北 直後의 發表가 얼마나 拙劣했느냐는 것이 證明되었다"며 內務長官과 搜査 責任者들의 問責을 要求하였다.
[6]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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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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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標(‡) 標示: 搭乘客 全員 死亡 事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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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航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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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나航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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低費用 航空社
및 地域 航空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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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에 運航한 外國 航空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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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 事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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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用機 事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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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育訓鍊機 事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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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年代 ~ 197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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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年代 ~ 200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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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年代 ~ 現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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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글씨
는 搭乘客 全員 死亡事故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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