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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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浚
許浚
허준박물관에 있는 허준 사진(2010년 7월)
許浚博物館 에 있는 許浚 寫眞(2010年 7月)
朝鮮 의 內醫院 堂上官
在任 1590年 ~ 1596年
賃金 朝鮮 宣祖
朝鮮 의 中樞院 知中樞府事
在任 1601年 ~ 1608年
賃金 朝鮮 宣祖
朝鮮 光海君
領議政 류성룡
이름
請願(淸源)
구암(龜巖)
身上情報
出生日 1539年 [1]
死亡日 1615年 10月 9日 ( 陰曆 8月 17日 ) (享年 77歲)
國籍 朝鮮
職業 議官(醫官), 韓醫師 (韓醫師)
黨派 無所屬
本館 陽川 (陽川)
父母 虛論(簿)
靈光 金氏 妾室(某)
尹氏 夫人(嫡母)
日直 孫氏 妾室(庶母)
兄弟姊妹 異服兄 허옥(許沃)
同腹동생 허징(許徵)
配偶者 貞敬夫人 安東 金氏
子女 아들 파릉群 허겸(巴陵君 許謙)
學問 活動
分野 醫學, 性理學
主要 著作 東醫寶鑑

許浚 (許浚, 1539年 ~ 1615年 10月 9日 )은 朝鮮 중기의 議官 ·醫學者이다.

東醫寶鑑 을 作成하였으며, 東醫寶鑑 外에도 宣祖 의 命을 받아 壬辰倭亂 終結 後, 各種 中國 醫書와 旣存 醫書의 復元, 編纂 및 整理에 힘썼다. 그밖에도 한글 로 된 醫書인 《 諺解痘瘡集要 (諺解痘瘡集要)》, 産婦人科 關聯 醫書인 《 諺解胎産集要 》, 基本 家庭醫書인 《 諺解救急方 (諺解救急方)》 等도 執筆하였다. 한때 1543年 生으로 알려졌으나 文章家 최립(崔笠)의 文集 《簡易集(簡易集)》에 收錄된 症송동경 代의 虛楊平郡 丸彫子의주(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自義州)에서 최립이 그가 義州로 귀양가게 되던 1608年頃의 일을 記錄하면서, 許埈珥 自身과 同甲내기인 1539年生이라는 것을 言及한 事實을 言及한 것이 發見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生涯 [ 編輯 ]

그의 出生 年도는 한때 1543年 , 1546年 으로 알려졌고 1990年 代의 韓國 의 人物 辭典에도 그 두 說 中의 하나를 取하였다. 그러나 최립(崔笠)의 文集 著書인 《簡易集(簡易集)》李 解釋되면서, 여기에 收錄된 症송동경 代의 虛楊平郡 丸彫子의주(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自義州)에 自身과 同甲이라 言及한 것이 알려져, 2000年 以後에는 1539年生으로 通商 敍述하고 있다.

京畿道 長湍郡 대강면 우근리(現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張豐郡 )에서 出生하여 지난날 한때 平安道 龍泉 京畿道 陽川 京畿道 坡州 를 거쳐 京畿道 漣川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다. 그의 故鄕 京畿道 長湍郡 대강면 우근리라는 곳은 韓國 戰爭 以後로 休戰線에 隣接하여 가까스로 以北地域이 되어 休戰線 以北 張豐郡에 編入된다. 양천 許氏 의 始祖인 虛線門(許宣文)의 20歲손으로 할아버지 허곤(許琨)은 武官으로 經常右水使를 지냈고, 許浚의 아버지는 용천부社 虛論(虛論)이었다.

議官 出仕 [ 編輯 ]

1570 (宣祖 3年) 6月 그의 나이 31歲 되던 해 副提學 유희춘 (柳希春)의 夫人을 治療하기 위해 漢城府 로 가, 유희춘 夫人의 病을 고쳤다. 유희춘 이 許浚을 언제 처음 만나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희춘은 그해 陰曆 6月 3日 吏曹判書 홍담 에게 許浚을 紹介하였다. 1569年 吏曹判書 홍담 (洪曇)과 미암 유희춘 의 薦擧로 內醫院 에 들어가 宮中 醫師, 곧 議官 으로서 出仕했으며, 1570年 에는 柳希春의 病까지 治療하게 되어 漢城府 長安에서 高官大爵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면서 名聲을 높였다. 許浚 關聯 傳說과 民間 戰勝, 그리고 이를 素材로 하여 쓰여진 各種 小說과 드라마에서는 그가 醫科 及第者로, 1574年 醫科에 及第하였다고 描寫하고 있으나, 實際로 醫科 及第者 記錄인 放牧에는 許浚의 이름이 없다.

1572年 (宣祖 5) 當時 種4品 內醫院 僉正에 在職 中에 있었다는 記錄이 最初로 보이며, 1573年 에는 情3品 通訓大夫와 內醫院 情에 올랐다. 비록 醫科에 應試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同僚 衣冠들보다 뛰어난 醫術을 지니고 있었다는 事例라고 할 수 있다. 1578年 9月 許浚은 內醫院添丁으로 있을 때 當時에 새로 出版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 (新刊補註銅人?穴鍼灸圖經)을 임금으로부터 膳物로 下賜받았다.

1578年 (宣祖 11)에는 갑자기 心身이 허약해진 宣祖 임금의 健康이 回復되어 수고로 內醫院 責任者와 語義들이 모두 褒賞을 받았다. 이때 許浚은 太醫 양예수 (楊禮壽)· 안덕수 (安德秀) 等과 함께 사슴가죽 1張을 膳物로 下賜받았다. 以後 구안와사에 걸려 입이 돌아간 공빈 金氏 의 男동생을 진료하여 完快시켰고, 1590年 許埈珥 王子 신성군 ( 인빈 金氏 의 아들)을 살린 공으로 堂上官(正3品 通政大夫 以上을 말함)으로 昇進했다. 許埈珥 堂上官에 가자(되자) 司憲府 , 司諫院 , 弘文館 等 三四와 義禁府 에서 一齊히 나서서 彈劾, "王子를 治療한 것은 醫館으로서 當然히 해야 할 일이고 비록 功이 있다 해도 醫官에게 黨相議 加資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取消할 것"을 王에게 여러 番 懇請했으나 宣祖는 듣지 않았다.

壬辰倭亂 以後 [ 編輯 ]

1592年 (宣祖 25年)에 壬辰倭亂 이 일어나 宣祖 가 義州까지 避身하는 事態가 벌어졌다. 先祖를 扈從하여 [2] 그의 健康을 돌본 功勞로 許浚은 뒷날 功臣의 隊列에 끼게 된다. 1596年 王世子 광해군 의 病을 맡게되어 이를 고친 功勞로 許浚은 鄭2품下溪 資憲大夫로 가자되고 김응탁 (金應鐸)· 정예남 (鄭禮男)은 昇級되었다. 이어 許浚은 鄭2품상계 正憲大夫와 中樞府의 情2品 지 中樞府 社에 올랐다. 그가 正憲大夫에 오르자 卽時 三社의 肝員들이 나서서 彈劾, 衣冠들의 加資를 取消할 것을 請했으나 宣祖가 "功勞가 있는 者들이다"라고 하여 듣지 않았다.

1595年 (宣祖 28年) 왕이 별全篇房에 나와 鍼治療를 施術하였다. 이때 內醫院(藥房이라는 別稱으로도 불림) 都提調 김응남 , 製造 紅塵 , 副提調 오억령 等이 參與하였다. 1596年 以後 許浚은 留意 정작 (鄭?)과 太醫 양예수 · 김응택 · 이명원 (李明源)· 정예남 等과 偏國을 設置하고 醫書를 編纂, 要點을 잡아가는 時點에 97年 丁酉再亂 이 일어나 衣冠들이 흩어져 作業은 自然히 中止되었다. 이에 宣祖가 許浚을 다시 불러 許浚 혼자 責任지고 새로운 醫書를 만들라고 하면서 內臟房서 500卷을 내어주며 參考하도록 措置했다.

1600年 (宣祖 33年) 情2品 知中樞府事를 兼職하던 數의(실직으로서 內醫院의 最高序列) 양예수 가 兵士함에 따라 許浚이 內醫院 最先任者로 壽衣가 되었다. 1604年 壬辰倭亂 當時 御駕 扈從의 功勞로 扈聖功臣 3等에 오르게 되고, 이때 衣冠으로서는 처음으로 情1品 楊平府院君에 올랐으나, 臺諫들의 反對로 인해 種1品 楊平郡(陽平君) 强擊되었다. 軍(君)은 王의 庶子나 堂上(堂上)의 位階에게 주어지는 夫君(府君)의 官爵을 말한다. 種1品嘗系인 崇祿大夫(崇祿大夫)에 올랐다가 1606年 이어 王室의 病을 다스린 功勞로 情1품下溪인 輔國崇祿大夫(輔國崇祿大夫)로 가자되었으나, 輔國崇祿大夫는 堂上官의 文官이 받는 位階라는 理由로 또 한 番 臺諫들의 反對를 불러 白紙化되었다. 1607年 에는 임금의 病이 危重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許埈珥 藥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連日 朝廷에서 數의 許浚을 벌주어야 된다는 輿論이 剛했으나 宣祖가 罰을 주기보다 醫術을 다하게 해야 한다며 撫摩시켰다.

流配와 末年 [ 編輯 ]

1608年 陰曆 2月 宣祖가 病勢가 急迫하다가 갑자기 死亡하게 되자 從來의 例에 따라 調整 臣下들의 갖가지 責任 追窮을 當한 끝에 結局 3月 17日 罷職당하고 공癌(孔巖) 으로 門外黜送되었다. 門外黜送(門外黜送)이란 流配의 一種으로, 罪를 지은 사람을 漢城府의 四大門 밖, 곧 地方으로 追放하는 刑罰이었다. 광해군 은 許浚을 빠른 時日內에 復歸시키려 하였으나 三社의 反撥로 霧散되었다. 그러나 許浚은 이런 渦中에도 이미 1596年 부터 王命으로 編纂하고 있던 1610年 (光海君 2年) 當時의 모든 醫學 知識을 網羅한 臨床醫學 百科事典 人 《 東醫寶鑑 》을 15年餘의 硏究 끝에 便술을 繼續, 1609年 11月 22日 광해군 이 釋放 命令을 내릴 때까지도 繼續 執筆하였다.

《東醫寶鑑》은 朝鮮 韓方 醫學의 發展에 큰 影響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8世紀 에는 日本 淸나라 에서도 刊行될 만큼 높이 評價되었으며, 只今도 여러 나라에서 飜譯 出版되고 있다. 《東醫寶鑑》을 광해군 에게 바친 以後 그 해 陰曆 11月 22日 (陽曆 1611年 1月 5日 ) 귀양이 풀리고 身元(伸?)되어 內醫院에 復職하였다. 그 뒤 許浚은 後進 養成과 醫書 編纂 및 醫書 修理 等을 맡다가, 1615年 陰曆 8月 17日 (陽曆 10月 9日 )에 77歲를 一期로 世上을 떠났다. 그러나 다른 설에는 日本人 쓰기무라(三木榮)의 《朝鮮意思年表 (朝鮮醫事年表)》 p.337에는 許埈珥 1615年 8月 17日에 死亡했다는 설을 提起하기도 했다.

1615年 11月 光海君은 許浚의 官爵을 그의 生前에 保留되었던 輔國崇祿大夫(輔國崇祿大夫, 情1品 下溪) 楊平府院君으로 追贈하였다.

事後 [ 編輯 ]

許浚의 故鄕인 京畿道 坡州市 振動面 하포리의 民間人統制區域(DMZ) 안에 許浚과 否認 安東 金氏 그리고 生母의 墓所가 位置해 있다. 이 墓所는 6.25戰爭 以後 放置되어 있다가 1991年 9月 27日 軍事 協調 아래 書誌學 및 繪畫史學者 이양재의 調査活動으로 다시 發見되어, 9月 31日 KBS 取材陣과 許浚先生記念 事業會 創立準備委員會 任員들에게 처음 公開되었으며 以後 再整備되었다. 隣近에는 許浚의 8代孫 허규의 墓所까지 所在海 있다. 1992年 6月 5日 京畿道의 記念物 第128號 《 許浚墓 》로 指定되었고, 2006年 5月 軍事安保 觀光 區域으로 公開되었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公園인 구암公園 이 造成되어 있다.

家族 關係 [ 編輯 ]

  • 할아버지 : 허곤(許琨)
    • 아버지 : 허륜(許?)
    • 嫡母 : 해평尹氏(海平尹氏)
      • 異服兄 : 허옥(許沃)
    • 生母 : 靈光 金氏 (靈光金氏) - 김욱짐(金郁?)의 딸
      • 同腹아우 : 허징 (許徵)
      • 祭需 : 光州盧氏(光州盧氏) - 領議政 노수신 (盧守愼)의 딸
    • 庶母 : 日直孫氏(一直孫氏)
      • 否認 : 貞敬夫人 安東金氏(安東金氏)
        • 아들 : 허겸(許謙)

評價 [ 編輯 ]

許埈珥 主治醫로서 모셨던 宣祖 는 그를 가리켜 "制書(諸書)에 널리 通達하여 藥을 쓰는 데에 老鍊하다." 라고 評價한 바 있으며, 朝鮮 中期의 學者 이수광 은 "許埈珥 저미고 란 藥으로 많은 사람들의 痘瘡 을 고쳤으며, 近來에 양예수 , 許浚, 박제가 , 손사명 , 안덕수 等이 議員으로 이름이 있을 뿐이다." 라고 評價했다.

日本 에서는 그를 가리켜 “韓國杏林(韓國杏林) 便窓(扁倉)”, 卽 韓國에 나타난 편작 · 창공 이라 稱하였고, 中國 에서는 “天下(天下)의 洑(寶)를 만든 사람”이라며 稱頌하였다.

誤解 [ 編輯 ]

TV 드라마에 許浚이 유의태라는 人物로부터 醫術을 배웠다고 알려졌지만, 實存人物 유이태를 유의태로 脚色한 캐릭터일 뿐이다. 유이태는 山淸郡 생초면 出身의 名義로 『마진便』·『人庶聞見錄』·『實驗單方』 等을 著述한 朝鮮後期 衣冠이다. 許浚보다 100年 뒤에 活動한 유이태는 許浚의 後輩 또는 弟子라 할 수 있다. [3] 또 드라마엔 許埈珥 平安道 용천에서 태어나 慶南 산음(山淸) 자란 것으로 돼 있지만, 實際로 京畿道 양천에서 出生했다고 한다. 各種 記錄에 '陽川人(陽川人)'이라고 적혀 있으며 宣祖로부터 楊平郡(陽平君)이란 品階를 받은 것을 根據로 들었다. [4]

論難 [ 編輯 ]

出生 時期 論難 [ 編輯 ]

오늘날 許浚의 出生 年度를 1539年으로 認定하고 있으나, 1991年 까지는 양천許氏宗親會議 族譜에 記載된 1546年 出生이었다는 說이 支配的이었다. 같은 해 이양재가 許浚의 墓所를 發見한 以後부터 차츰 許浚의 出生 年度에 關한 여러 學說이 提起되기 始作했다. 當代 官撰 書籍을 除外한 여러 書籍에서 1546年 (明宗 2年), 1547年 (明宗 3年) 等으로 出生年度에 對한 記錄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가장 처음 許浚의 出生 年度에 對한 異議를 提起한 사람은 이양재 敎授로, 以後 이양재를 爲始한 史學者들이 1999年 에 朝鮮 中期의 儀禮 書籍 中 하나인 《 太平會盟도 》에 그의 出生 年度가 己亥年(己亥年), 卽 1539年 (中宗 34年)生이라는 記錄이 發見되고, 같은 時代를 살았던 文章家 최립 (崔笠)의 文集(文集) 《 簡易集 (簡易集)》에서, 최립이 自身의 親舊 許埈珥 義州로 귀양가게 되던 1608年 警의 일을 記錄하면서, 許埈珥 自身과 同甲내기인 1539年 生이라는 것을 言及한 事實을 밝혀냈다. 이 記錄은 하나의 詩文으로 실려 있었는데, 그 題目은 “내 同甲내기 親舊 太醫 楊平郡 許埈珥 義州에서 調整으로 돌아오는 데에 부쳐”라는 意味의 《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自義州(症송동경 代의 虛楊平郡 丸彫子의주)》이다.

또한 서울特別市 강서구에 位置한 許浚博物館 에 保管되어 있는 內醫院 名簿인 《 內衣先生案 (內醫先生案)》에는 許浚의 出生年度가 1537年 丁酉年(丁酉年)이라고 記錄되어 있다. 許浚博物館의 김쾌정 館長은 當時 內醫院의 記錄이 太平會盟도의 記錄보다 더 正確할 것이라는 見解를 밝힌 바 있다. 《內衣先生案》은 1605年 에 著述된 冥府로 許埈珥 直接 序文을 달았으며, 許浚의 仙界(아버지 론, 祖父 곤, 曾祖父 지) 直系가 실려있다. 또한 許浚의 享年(享年)李 77歲라고 記錄하고 있다. 《 太醫院先生案 》에서도 亦是 許浚의 出生年度를 1537年 精油年으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許埈珥 1537年生이라면 1615年 에 숨을 거둘 當時 그의 나이는 79歲여야 하므로 이는 《內衣先生案》의 記錄과는 다르다.

許浚 庶出 關聯 論難 [ 編輯 ]

양천許氏族譜에서는 許浚을 庶子로 記錄해 놓고 있다. 그리고 大部分의 사람들이 許浚의 生母가 虛論의 妾인 日直 孫氏 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許浚의 生母는 事實 虛論의 再娶夫人 靈光 金氏이다.

許浚을 內醫院에 薦擧한 미암 유희춘 의 日記 《 眉巖日記 》에 따르면 金氏흡 이라는 人物을 擧論하며 許浚의 外三寸이라는 記錄을 남기고 있다. 여기에서 書簡學者 이양재는 金氏洽意 技術을 “敵(嫡) 外三寸”이라고 記錄한 것에 依據하여, 虛論의 再娶夫人 靈光 金氏도 庶女로서, 許浚은 庶子라고 主張했다. 그러나 敵(嫡)이라는 表現은 許浚의 生母인 靈光 金氏에게 冬服男妹의 男子 兄弟 말고도 서자 男子兄弟가 있었다는 意味로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許埈珥 庶子였다는 事實을 立證할 수는 없다. 또한, 許浚의 同腹동생으로 알려진 허징 1586年 에 文科 謁聖試 丙科에 及第하여 그 이름과 父母關係가 當時의 記錄인 國朝榜目 에 남아 있다. 庶子는 門과, 卽 大過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 部分이야말로 許浚의 生母 靈光 金氏가 적실 所生이며, 許浚(許浚)과 허징(許?) 兄弟 亦是 庶子가 아니라는 主張이 可能하다.(문과방복에 허징을 檢索해보면 文科에 及第한건 맞으나 따로 庶子라고 標示되어있다. 朝鮮時代엔 庶子도 文科를 볼 수 있었다. 올라갈수있는 品階가 制限되어있었을뿐) 許埈珥 1573年 에 이미 鄭3品 內醫院情을 지냈다는 記錄이 남아있고 1575年 에 先祖의 語義로 任命되었으므로, 허징이 過去를 치렀던 1586年 時點에는 이미 그 어머니와 許浚의 同腹동생人 허징 또한 中人 出身이 아닌 班家의 血族으로 인정받았을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許浚이 實際로 堂上官 班列에 오른 것은 1590年 警의 일로 허징이 過去에 及第한 1586年보다 4年 뒤의 일이기 때문에 이 대목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議官 出仕 以前 韓醫師 敎習 關聯 與否 論難 [ 編輯 ]

앞서 言及한 事案처럼 小說을 비롯하여 民間 傳承에서는 그가 慶尙道 산음縣의 傳說的 醫師인 유의태(柳義泰)라는 人物에게서 醫術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의태 그가 肅宗 치世紀의 韓醫師라는 說이 있거나 或은 實存 與否 確認이 不可能하여 萬若에 유의태 그가 肅宗 치世紀의 韓醫師라 하더라도 그의 스승이 될 수 없고 그와 비슷한 同名異人인 韓醫師 유이태(劉以泰, 또는 劉爾泰)는 正祖 치世紀의 韓醫師로 또한 그의 스승이 될 수는 없다.

許浚 肖像畫 關聯 論難 [ 編輯 ]

許浚은 壬辰倭亂 때의 功臣이었 으므로 朝廷에서는 肖像畫가 作成되었다. 그러나 失傳되어 傳하지 않는다. 許浚의 實際 肖像畫로 推定되던 作品 또는 許浚의 肖像畫로 傳하던 作品이 1980年 初 양천許氏大宗會에 入手되었다. 그러나 當時 美術人協會의 任員인 韓醫師 某 氏가 肖像畫에 許埈珥라 써 있지가 않았으니 假짜라고 하였다. 이 肖像畫는 뒤에 行方이 사라졌고, 寫眞이 傳한다.

그려진 年代를 正確히 알 수 없으나 1900年代 以前 누군가 許浚을 想像하여 그린 想像 肖像畫가 傳했으나 亦是 사라지고 傳하지 않는다. 現在의 許浚 標準肖像畫는 哲宗 의 御眞 復元에 參與한 최광수가 그린 想像畫이다. 許浚의 肖像畫로 傳하는 肖像畫 中 하나는 2001年 신동원 이 낸 冊 《朝鮮사람 許浚》에 收錄되어 있다.

許浚의 外貌를 描寫한 것은 宣祖 의 庶女 正案翁主 의 男便인 焚書 朴瀰 (汾西 朴?)인데, 焚書집 에 許浚의 外貌에 對해 남긴 評으로는 許浚은 非擇(肥澤)하여 佛敎 僧侶 모습과 恰似했고, 늘 입을 열면 옅은 微笑를 지었다고 한다.

許浚의 後孫 關聯 論難 [ 編輯 ]

許浚에게는 외아들 허겸(許謙)이 있었다. 허겸은 文科에 及第하여 府使를 거쳐 以後 파릉群(巴陵君)에 封爵받았다. 以後 19代 肅宗 때에는 그의 曾孫子 허진(許?)李 派春軍(巴春君)의 綽號를 받았으며, 허진의 아들이자 許浚의 高孫子인 허육 (許堉)은 量興群(陽興君)의 綽號를 받았다. 허육의 아들이자 許浚의 5代孫인 虛線 (許銑)은 21代 英祖 때에 양원군(陽原君)에 올랐으며, 허선의 아들로 許浚의 6代孫인 허흡 (許?) 亦是 英祖 때 量銀群(陽恩君)에 封爵받았다. 이렇게 累代에 걸쳐 後孫들이 朝廷의 官職을 歷任했으며, 先代가 살던 京畿道 長湍郡 우근리(現在 京畿道 坡州市)에 代代로 居住했다. 以後 朝鮮 後期에 許浚의 10代孫 虛度 (許堵 / 1827~1884)가 黃海道 海州로 移住했으며, 13代 宗孫 허형욱 (許亨旭 / 1924年生)李 1945年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以後 그의 直系 宗孫은 現在까지 北韓에서 살고 있으며, 現在 南韓의 양천 許氏 中 許浚의 後孫을 自稱하는 사람들은 事實 許浚의 眞짜 後孫이 아니라는 事實을 양천許氏宗親會에서 直接 밝히기도 했다.

主要 著書 [ 編輯 ]

文化에 나타난 許浚 [ 編輯 ]

드라마 [ 編輯 ]

映畫 [ 編輯 ]

기타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兩班官僚의 文化"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