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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第1代 大統領 選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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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大韓民國 第1代 大統領 選擧

←  1948年 7月 20日
1952年  →

國會議員 198名 中 197名 出席
當選을 위해 131票 必要
 
候補 李承晩 金九
正當 大韓獨立促成國民會 韓國獨立黨
得票數 180 13
得票率 91.8% [a] 6.7% [a]

大統領 當選者

李承晩
大韓獨立促成國民會

대한민국
大韓民國 第1代 副統領 選擧

←  1948年 7月 20日
1951年  →

國會議員 198名 中 197名 出席
當選을 위해 132票 必要
 
候補 이시영 金九
正當 大韓獨立促成國民會 韓國獨立黨
得票數 133 62
得票率 67.5% [a] 31.5% [a]

副統領 當選者

이시영
大韓獨立促成國民會

大韓民國 第1代 情·副統領 選擧 1948年 7月 20日 制憲 國會議員 들의 間接選擧 에 依해 李承晩 을 제1대 大統領으로, 이시영 을 제1대 副統領으로 各各 選出한 選擧이다. 大統領選擧는 午前 10時에 始作되었고, 副統領 選擧는 午後 2時에 始作되었다.

選擧 節次 [ 編輯 ]

  • 當時의 憲法 第53條에 依據하여 國會 에서 間接選擧로 實施되었다.
大統領과 副統領은 國會에서 無記名 投票로써 各各 選擧한다.
在籍議員 2/3 以上의 出席과 出席議員 2/3 以上의 贊成投票로써 當選을 決定한다. 單, 3分의 2 以上의 得票者가 없는 때에는 2次投票를 行한다. 2次投票에도 3分의 2 以上의 得票者가 없는 때에는 最高得票者 2人에 對하여 決選投票를 行하여 多數得票者를 當選者로 한다.

컷오프 導入 論議 [ 編輯 ]

制憲 憲法이 公布된 7月 17日 午後, 國會는 第32次 會議를 갖고 鄭·副統領 選擧의 節次를 論議하였다. 김도연 等 12名의 院內 常任委員長들은 먼저 7月 19日 豫備選擧를 치러 情·副統領 選擧 候補者를 確定하고, 다음날인 20日 鄭·副統領 選擧를 치를 것을 提案하였다.

豫備選擧는 國會 全員委員會 會議에서 非公開로 進行하되 在席 議員의 1/3 以上을 得票한 候補만 본 選擧에 진출시키고, 國會 本 會議에서 進行될 본 選擧에서는 豫備 選擧를 通過한 候補者에 對해서만 투표할 수 있게 하는 方式이었다.

본 制度를 提案한 委員長들은 情·副統領 選擧를 하루만에 치르면 候補 및 政派 間에 交涉을 할 時間도 없고 候補들을 綿密히 熟考하기도 어려움으로 본 選擧 前에 主要 候補들을 確認할 豫備 選擧가 必要하다고 主張하였다. 또한 憲法에 따로 立候補制가 規定돼 있지 않아 選擧 結果 當選者가 受諾을 拒否하는 不祥事가 생길 수 있는 바, 豫備 選擧 結果 本選 進出이 確定된 候補者가 미리 承諾 與否를 밝힐 時間的 餘裕도 確保된다는 點을 披瀝하였다.

그러나 大多數 議員들은 全員위에서 非公開 會議를 통해 候補者를 미리 確定해놓는 豫選 制度는 非民主的이고 不必要한 時間 浪費라며 豫選 없이 國會 本會議에서 한 番에 鄭·副統領을 選擧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結局 擧手 投票 結果 在席 議員 189名 中 139名의 贊成으로 全院委 豫備 選擧 없이 國會 本會議에서 바로 鄭·副統領 選擧를 치를 것이 議決되었다. [1]

情·副統領 選擧일 分離 論議 [ 編輯 ]

制憲 憲法에는 大統領과 副統領의 選擧日에 對하여 현임자의 任期가 끝나기 30日 移轉이라는 것 外에 詳細한 規定이 없었음으로, 두 選擧를 어느 날짜에 치를지와 같은 날 치를지 다른 날 치를지 亦是 甲論乙駁이 벌어졌다.

一部 議員들은 大統領과 副統領은 서로 뜻이 맞는 사람들이어야 함으로, 먼저 大統領을 選擧한 後 그 當選者가 自身이 願하는 副統領 候補를 交涉할 時間이 必要하다고 主張하였다. 또한 國會議員들도 大統領 選擧 結果에 따라 支持할 副統領 候補에 對한 決定을 深思熟考할 時間이 必要하다고 主張하였다. 이같은 理由로 大統領 選擧와 副統領 選擧를 적어도 하루의 期間을 두고 進行하자는 案이 提議되었다.

그러나 多數 議員들은 이미 大統領 當選者가 (李承晩으로) 事實上 確定돼 있음으로 大統領 選擧 結果가 發表된 後 心境에 變化가 일어날 議員은 없을 것이라고 反駁했다. 또한 議員들은 大統領 當選者가 願하는 副統領 候補를 指目하고 國會議員들이 마치 下命 받듯이 그를 選出하는 것도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며, 하루 速히 政府를 構成키 위해서라도 鄭·副統領을 같은 날 모두 選出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代身 大統領을 午前에 選擧하고 副統領 選擧는 午後에 選擧해 그 사이 몇 時間 동안 交涉 및 支持 候補 決定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案이 支持를 얻었고, 擧手 投票 結果 在席 議員 179名 中 117名의 贊成으로 그대로 通過되었다.

選擧일로는 火曜日인 7月 20日이 選擇되었는데, 憲法이 公布된 날이 土曜日이었으므로 國民들에게도 選擧에 對한 消息이 新聞을 통해 알려질 時間이 必要하다는 判斷 下에 月曜日이 아닌 火曜日로 定한 것이었다. [1]

派閥別 狀況 [ 編輯 ]

制憲 國會는 大韓獨立促成國民會 , 한국민주당 , 그리고 韓國獨立黨 契를 中心으로 한 無所屬 議員들 等 3代 派閥이 主導하고 있었는데, 大統領과 副統領의 選擧, 國務總理를 비롯한 初代 內閣의 構成 亦是 이들 세 派閥의 至大한 影響을 받을 것으로 觀測되었다.

當時 大統領으로는 制憲 國會 의 第1代 國會議長 을 맡고 있던 李承晩 博士가 가장 有力한 狀況이었다. 李承晩 博士는 南韓 單獨 政府 樹立 및 憲法 制定을 主導해온데다, 臨時政府 勢力부터 한국민주당 까지 超黨派的인 支持를 받고 있었다. [2]

一角에서는 金九 韓國獨立黨 黨首나 서재필 博士를 大統領 或은 副統領으로 支持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두 사람은 모두 積極的으로 拒絶한데다 特히 徐載弼 博士는 美國 國籍者로 아예 被選擧權이 없어 모두 水泡로 돌아갔다. [3]

結局 大統領으로는 事實上 唯一하게 出馬 意思를 밝힌 李承晩 博士의 當選이 確實視되었고, 院內 各 派閥들은 大統領보다는 副統領과 國務總理에 누구를 支持할지를 두고 神經을 곤두세웠다.

이화장界 [ 編輯 ]

李承晩 博士는 오세창   大韓獨立促成國民會 會長, 조만식 조선민주당 黨首, 이시영 大韓民國 臨時政府 財務總長 等 세 사람을 副統領 및 國務總理 候補로 檢討하고 있었다.

그 中 오세창 會長은 85歲의 高齡이란 理由로 漸漸 除外됐고, 李承晩 博士와 그 側近들은 代身 조만식 副統領·李始榮 國務總理 案을 積極的으로 推進하였다. 南北 統一을 祈願하는 意味에서 當時 以北에 있어 내려올 수 없는 狀況이던 曺晩植을 副統領으로 選出하고 그 職을 公席으로 두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國家의 2人者 자리를 公席으로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자칫하면 北에 있는 曺晩植의 身邊의 安全을 위태롭게 하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는 輿論이 澎湃해 이는 實現되지 못하였다. [4]

한국민주당 [ 編輯 ]

院內 第2의 交涉團體이던 한민당 은 1948年 7月 18日 緊急 中央常任委員會를 召集하고 이시영 前 臨政 財務總長을 副統領으로 支持할 것을 宣言하였다. [5] 李始榮은 한민당 뿐 아니라 大韓獨立促成國民會 및 一部 無所屬 議員들에게도 支持를 받아 副統領 當選이 確實視됐다. [4]

한민당은 또한 金性洙 한민당 黨首를 國務總理로 내세웠다. [6] 그러나 李承晩은 金性洙 總理說에 微溫的인 反應을 보였다. [7]

無所屬 [ 編輯 ]

韓獨黨 契를 中心으로 한 無所屬 議員들은 1948年 7月 17日과 18日 連달아 모임을 갖고 金九 韓獨黨 黨首를 副統領으로, 趙素昻 韓獨黨 副黨首를 國務總理로 支持할 것을 宣言했다. [5] 그러나 金九 副主席은 南韓 單獨의 政府에는 어떤 形態로도 參與하지 않겠다고 宣言해 신한국의 大統領도, 副統領도 맡을 意思가 없음을 分明히 했다. [4] [8]

結果 [ 編輯 ]

大統領 選擧 [ 編輯 ]

7月 20日 午前 實施된 大統領 選擧에는 在籍 國會議員 198名 中 李承晩 · 최봉식 두 議員을 除外한 196名이 參與했으며, 當選에 必要한 得票數는 131票였다. 이 中 國會議長이던 李承晩 博士는 本人이 當選될 豫定임을 勘案해 選擧 開始를 宣言한 後 議長席을 김동원 副議長 에게 넘기고 議事堂을 빠져나갔다. [9]

投票 結果는 開票를 끝내고 한꺼번에 發表하는 方式이 아니라, 감표委員이 한 票 한 票를 큰 소리로 읽는 方式으로 發表됐으며, 다른 감표委員들은 그때마다 큼지막한 揭示板에 實時間으로 候補別 票數를 標示하였다.

그러던 途中 獨立運動家 徐載弼에게 投票된 票가 하나 나왔는데, 徐載弼은 58年 前인 1890年 美國人으로 歸化한 터라 被選擧權이 없었음으로 徐載弼의 票는 無效 處理되었다. 議長을 맡고 있던 김동원 副議長은 徐載弼 博士가 美國 國籍者라는 事實을 確認해보고 午後에 無效票 與否를 決定하려 했으나, 多數 議員들이 徐載弼 博士가 틀림없이 自身은 美國 國籍者라 公職을 맡을 수 없다고 發言했었다며 迅速히 無效 處理 해줄 것을 要求해 그 자리에서 無效를 宣言하였다.

開票는 繼續되었고, 最終 結果 李承晩 博士가 全體 投票數의 2/3를 得票한 李承晩이 大統領으로 當選되었다. [10]

大韓民國 第1代 大統領 選擧 1次 投票
有權者數: 198名
候補 正當 得票 得票率 當落 備考
李承晩 大韓獨立促成國民會 185票
92.5%
當選
金九 韓國獨立黨 13票
6.5%
安在烘 無所屬 2票
1%
合計 195票 無效票: 1票

午前 11時 半, 김동원 副議長은 신익희 副議長과 서정희 議員을 보내 李承晩 博士에게 選擧 結果를 알리고 議事堂으로 모셔오도록 하였다. 李承晩 博士는 約 20分 後 다른 議員들의 우레 같은 拍手를 받으며 議事堂에 登場했으며, 簡單한 當選史를 한 뒤 各 團體들에서 보낸 花環을 받았다. 以後 서정희 議員의 船艙으로 國會議員들과 傍聽客들이 "大統領 李承晩 博士 萬歲"와 "大韓民國 萬歲"를 三唱하였으며, 李承晩 博士가 國會議長 資格으로 12時 10分 會議 中止를 宣言해 大統領 選擧 節次는 모두 끝이 났다.

副統領 選擧 [ 編輯 ]

午後 2時 다시 開會한 國會 本會議는 바로 副統領 選擧 節次에 들어갔다.

李承晩 博士는 選擧 開始 前에 發言權을 얻고 當時 가장 有力한 副統領 候補였던 이시영 · 조만식 · 오세창 等 세 사람에 對해 自身의 見解를 밝히는 時間을 가졌다. 李承晩 博士는 李始榮은 大衆的 人氣가 높고 政治權에서도 딱히 싫어하는 이가 없는 圓滿한 사람, 吳世昌은 기미 獨立 宣言書 에도 參與 한 만큼 透徹한 獨立 鬪士이고 民意를 忠實히 따를 사람, 曺晩植은 名望도 높지만 以北 同胞들에게 손을 내미는 意味에서도 副統領으로 뽑으면 좋을 사람이라고 各各 評하고, 셋 中 누가 當選돼도 自身은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세 사람이 모두 最小 70代의 老人들이라는 點은 憂慮된다고 指摘했다.

李承晩 博士의 發言이 끝나고 續行된 投票 結果 1次 投票에서는 全體의 2/3을 得票한 사람이 없어 2次 投票를 하게 되었고, 2次 投票 結果 李始榮이 副統領으로 當選되었다. 大統領 選擧 結果와 달리 副統領 選擧 結果는 開票를 完了한 뒤 한꺼번에 最終 結果를 發表했다.

大統領 選擧 때 退場했던 李承晩 博士가 이番에는 投票에 參與하여 副統領 選擧의 總 投票數는 197名이었다.

1次 投票 [ 編輯 ]

大韓民國 第1代 副統領 選擧 1次 投票
有權者數: 198名
候補 正當 得票 得票率 當落 備考
이시영 大韓獨立促成國民會 113票
57.4%
金九 韓國獨立黨 65票
33.0%
조만식 조선민주당 10票
5.1%
오세창 無所屬 5票
2.5%
장택상 無所屬 3票
1.5%
서상일 한국민주당 1票
0.5%
合計 197票

2次 投票 [ 編輯 ]

大韓民國 第1代 副統領 選擧 2次 投票
有權者數: 198名
候補 正當 得票 得票率 當落 備考
이시영 大韓獨立促成國民會 133票
67.5%
當選
金九 韓國獨立黨 62票
31.5%
이구수 無所屬 1票
0.5%
合計 196票 無效票: 1票

選擧 以後 [ 編輯 ]

李承晩 大統領과 李始榮 副統領은 7月 24日 正式으로 就任하였으며, 8月 15日 에는 大韓民國 政府 樹立 이 國內外에 宣布되었다. 이로써 大韓民國은 1910年 8月 29日 大韓帝國 一齊 强制 倂合 된지 38年만에 자주 國權을 完全 回復하였다.

國務總理 認准 [ 編輯 ]

背景 [ 編輯 ]

國務總理 指名을 앞두고 國會의 3代 派閥인 督促, 한민당, 韓獨黨系 無所屬 議員들은 各各 신익희 國會副議長, 金性洙 한민당 黨首, 趙素昻 韓獨黨 副黨首를 支持하고 있었다. 그러나 李承晩은 이들 세 사람에 對해 微溫的인 反應을 보였다. [7]

李承晩은 7月 22日 記者會見을 갖고 國務總理로는 "意外의 人物"을 內定했다고 밝혔는데, 이 發言이 傳해지자 各 派閥들은 크게 唐慌한 모습을 보였다. 이시영 亦是 7月 23日 午後 李承晩과 만나 1時間 半 동안 彫刻 問題를 論議하고 나온 뒤 記者들에게 李承晩이 "國務總理는 意外의 人物"이라고 했다며, "그 人物이 어떠한 人物인지는 모르겠다"고 말해 궁금症을 자아냈다. [11]

이윤영 指名 [ 編輯 ]

李承晩이 말한 "意外의 人物"은 平安北道 出身의 이윤영 조선민주당 副黨首로 推定되었다. 李承晩은 副統領 選擧 때도 統一을 다짐하는 意味에서 조만식 조선민주당 黨首를 支持하려 했던 만큼, 總理라도 以北 出身을 指名해야 한다는 判斷에서 이와 같은 決定을 내린 것으로 점쳐졌다. [12]

事實 이는 李承晩이 院內 主要 團體의 候補를 일부러 忌避한 結果이기도 했다. 한국민주당 側 人士를 指名할 境遇 탄탄한 院內 基盤을 바탕으로 强力한 國政 運營이 可能하지만 閑民界에 對한 비토 輿論이 워낙 强하기 때문에 深刻한 國論 分裂이 豫見되고, 韓國獨立黨 系列의 人士를 起用하면 多數의 臨時政府 人士들이 새 政府의 臨政 法統 繼承을 否定하는 狀況에서 名分 및 國民 支持를 다질 수 있으나 臨政系와 비임정계의 葛藤이 激化될 수 있다는 問題가 있었다. [12]

結局 李承晩은 7月 27日 國會를 直接 찾아가 이윤영을 國務總理 指名者로 發表하고 認准을 要請했다. 李承晩은 앞서 擧名된 세 사람 모두 훌륭한 분들이나 特定 黨派의 人事를 指名할 境遇 國論이 分裂될 것을 憂慮해 巨大 黨派에 所屬되지 않은 이윤영 議員을 임명하게 됐다며, 新生 大韓民國의 가장 時急한 課題는 南北 統一인 만큼 以北 代表를 國務總理로 하는 것에 支持를 표해 달라고 呼訴했다. 그러나 곧바로 無記名 票決을 進行한 結果 總 投票數 193票 中 贊成 59票, 反對 132票, 棄權 2票로 李允榮 總理 任命 承認案은 否決되었다. [13]

李承晩은 7月 28日 이화장에서 談話를 發表하고 한민당과 韓獨黨이 各自 自己 系派 出身者가 指名되지 않은 것에 反撥해 이같이 否決시킨 것이라고 主張하며, 議員들이 政府 樹立도 前에 陣營 論理에 陷沒돼 國家 再建을 妨害하고 있다고 批判했다. [14] 이에 野黨系 國會議員들은 自身을 180票로 뽑아줄 땐 國會議員들이 民意를 代辯한 것이고, 132票로 總理 任命을 否決시킬 땐 黨派 싸움에 精神이 팔린 것이냐며 批判하였다. [15]

이범석 指名 [ 編輯 ]

이윤영 任命 承認案이 國會에서 否決된 後 李承晩 大統領과 院內 各 派閥은 2次 總理 指名을 두고 熾烈한 神經戰을 벌였다. 李承晩 側에선 이범석 朝鮮民族靑年團 腸을 內定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한민당 議員들은 7月 28日, 29日, 30日 會合을 갖고 金性洙 黨首를 끝까지 支持하기로 決意했으며, 韓獨黨系 無所屬 議員들도 7月 28日과 30日 會合을 갖고 趙素昻 副黨首를 끝까지 支持할 것을 宣言했다. [16]

結局 李承晩은 7月 31日 李範奭을 國務總理로 임명하였으며, 이는 8月 2日 國會에서 承認되었다. 國務總理 指名者를 祕密로 했다가 國會에서 깜짝 發表한 지난 番과 달리 國會에서 承認案을 論議하기 며칠 前에 候補者를 임명한 것은 지난 認准案의 敗着이 系派 間 折衝 및 候補者에 對한 公論化가 이루어질 時間的 餘裕가 없던 탓이라는 判斷 때문이었다. 이 날 國會는 總 投票數 197票 中 贊成 110票, 反對 84票, 無效 3票로 國務總理 이범석 任命 承認案을 通過시켰다. [17] 李範奭 總理 任命이 可決된 것에는 無所屬 議員들이 贊成票를 던진 것은 勿論, 國務總理 候補 中 한 사람이던 金性洙 한민당 黨首가 直接 한민당 議員들에게 이범석 支持를 慫慂한 結果로 알려졌다.

就任日 論難 [ 編輯 ]

1952年 第2代 大統領 選擧 를 앞두고 李承晩 大統領의 第1代 大統領으로서의 任期 開始日이 언제였는지를 두고 論難이 벌어졌다. 制憲 憲法에는 이에 關聯한 規定이 明示되지 않았으므로, 第1代 大統領의 任期가 끝나고 第2代 大統領의 任期가 始作되는 날짜에 對해 甲論乙駁이 벌어진 것이다. 政府는 내내 就任式이 열린 7月 24日을 제1대 大統領의 任期 開始日로 看做해왔으나, 一部 議員들은 當選일인 7月 20日 任期가 始作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主張했으며, 다른 한便으로는 政府가 樹立된 8月 15日 大統領의 任期도 始作한 것이라는 主張도 나왔다. 이 같은 論難은 拔萃 改憲 波動으로 大統領 選擧가 遲延돼 到底히 7月 中으로 大統領 選擧를 치를 수 없는 狀況이 되자 國會議員들이 8月 15日을 大統領 任期 開始日로 하기로 合意하며 終熄되었다.

各州 [ 編輯 ]

  1. "第1回-第32號 國會會議錄". (1948年 7月 17日)
  2. “이 大統領 當選에 各 團體 담” . 《東亞日報》. 1948年 7月 21日 . 2019年 5月 24日에 確認함 .  
  3. “서재필 博士 聲明 發表 - 大統領 立候補 意思 없다” . 《東亞日報》. 1948年 7月 6日 . 2019年 5月 11日에 確認함 .  
  4. “今日 選擧는 어떻게 落着 - 大統領에 李 博士, 副統領에 李始榮 氏” . 《東亞日報》. 1948年 7月 20日 . 2019年 5月 11日에 確認함 .  
  5. “各人各色으로 推戴 - 副統領과 總理 物望에 오른 諸氏” . 《京鄕新聞》. 1948年 7月 20日 . 2019年 5月 11日에 確認함 .  
  6. “正當 스케치 - 민주國民黨” . 《京鄕新聞》. 1952年 9月 14日 . 2019年 5月 23日에 確認함 .  
  7. “李承晩 記者會見談, 總理 問題는 不及” . 《京鄕新聞》. 1948年 7月 17日 . 2019年 5月 23日에 確認함 .  
  8. “本然의 姿態로 돌아간 兩金氏 (共同聲明) - 南北協商 手紡機, 北朝鮮 憲法을 排擊” . 《京鄕新聞》. 1948年 7月 20日 . 2019年 5月 24日에 確認함 .  
  9. “大韓民國 政府 代表 決定” . 《東亞日報》. 1948年 7月 21日 . 2019年 5月 24日에 確認함 .  
  10. "第1回-第33號 國會會議錄". (1948年 7月 20日)
  11. “總理 問題에 鄭副統領 合意 - 意外 人物은 누구?” . 1948年 7月 24日 . 2019年 5月 24日에 確認함 .  
  12. “難重難 總理 積載, 金性洙·趙素昻·申翼熙 氏 等 外 이윤영 氏 亞鉛物望에” . 《京鄕新聞》. 1948年 7月 23日 . 2019年 5月 24日에 確認함 .  
  13. "第1回-第35號 國會會議錄". (1948年 7月 27日)
  14. " 民族이 願한 길 따른다" 總理 認准 否決 後 이 大統領 담” . 《東亞日報》. 1948年 7月 29日 . 2019年 5月 24日에 確認함 .  
  15. "第1回-第36號 國會會議錄". (1948年 7月 30日)
  16. “問題의 國務總理 任命, 이범석 氏 有力視” . 《東亞日報》. 1948年 7月 30日 . 2019年 5月 24日에 確認함 .  
  17. "第1回-第37號 國會會議錄". (1948年 8月 2日)
  1. 有效票 數가 아닌 投票 數를 基準으로 得票率을 計算함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