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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年째… “北에 잡혀간 동생 生死만이라도”|동아일보

45年째… “北에 잡혀간 동생 生死만이라도”

  • 東亞日報
  • 入力 2015年 6月 5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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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年 6月 海上 交戰中 被拉된 도종무 中士
兄 徒刑囚氏 “政府, 國軍捕虜 送還 나서야”

1970년 6월 6일자 1면.
1970年 6月 6日子 1面.
“동생이 아직 北韓에서 살아 있는지 生死라도 알고 싶습니다. 그래야 平生 동생을 그리워하다 먼저 世上을 떠나신 어머니의 恨을 풀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徒刑囚 氏(74)는 每年 顯忠日 前날인 6月 5日이 되면 동생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1970年 이날 陶 氏의 동생 도종무 中士(當時 24歲·寫眞)가 延坪島 近海에서 北韓軍과 싸우다 被拉된 뒤 아직까지 生死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45年이 흘렀다.

陶 氏는 當時 事件을 報道한 동아일보 記事 스크랩을 只今도 간직하고 있다. ‘國防部는 5日 낮 1時 40分頃 西海 延坪島 西北方 休戰線 南쪽 海上에서 우리 漁船團을 保護하기 위해 配置되었던 우리 海軍放送線 1隻이 北傀 海軍 高速包含 2隻으로부터 奇襲攻擊을 받고 拉北되었다고 發表했다.’(1970년 6月 6日子 1面)

도 中士를 비롯한 乘組員 20名은 15分間 熾烈한 戰鬪를 벌였지만 數에서 밀렸다. 當時 우리 海軍 艦艇은 크게 破損된 채 “北傀 快速 警備艇과 交戰 中”이라는 마지막 無電을 보냈다. 無電을 받고 15分 뒤 空軍 F-5A 戰鬪機가 緊急히 출격했지만 我軍 艦艇은 西海 北方限界線(NLL) 北쪽으로 被拉된 뒤였다.

國防部는 度 中士의 生死를 確認하지 못한 가운데 1976年 그를 國軍捕虜로 認定했다. 砲로 身分으로 10年 以上 지나면 戰死 處理가 可能한 方式으로 1994年 軍 人事法이 改正돼 도 中士는 戰死者로 分類됐다.

陶 氏의 어머니 二水銀 氏는 2013年 99歲의 나이로 世上을 떠날 때까지 끝내 아들의 生死를 알지 못했다. 陶 氏는 “國防部가 積極的으로 北韓에 國軍捕虜의 生死 確認을 要求하고 送還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只今까지 스스로 北韓을 脫出해 韓國으로 온 國軍捕虜는 總 81名이다. 現在 北韓에 500餘 名의 國軍捕虜가 살아있는 것으로 推定된다. 陶 氏의 기다림도 繼續 이어지고 있다.정성택 記者 ne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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