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釜山 戒嚴司令部 ‘示威原因, 첫째 民生破綻 두番째 YS除名’|東亞日報

釜山 戒嚴司令部 ‘示威原因, 첫째 民生破綻 두番째 YS除名’

  • 東亞日報
  • 入力 2013年 8月 27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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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記者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時代’] <98>馬山抗爭

1979년 10월 20일을 기해 위수령이 떨어진 마산 시내. M16 소총을 든 계엄군이 마산시청 앞에 진주해 있는 모습이다. 동아일보DB
1979年 10月 20日을 期해 衛戍令이 떨어진 馬山 市內. M16 小銃을 든 戒嚴軍이 馬山市廳 앞에 進駐해 있는 모습이다. 東亞日報DB
東亞日報 1979年 10月 18日子는 戒嚴令이 내려진 釜山 市街地 모습을 이렇게 傳하고 있다.

‘18日 午前 釜山市廳 慶南道廳 電話局 等 34個 官公署와 新聞 放送 等 言論機關 正門 앞에는 着劍한 M16을 執銃한 完全 武裝 軍人들이 森嚴한 警備에 臨하고 있다. 學生들의 騷亂이 가장 甚했던 남포동 광복동 進入路 等地에도 武裝을 하고 投石을 막는 防石帽를 쓴 警察官들이 配置돼 있다. 市民들은 이날 午前 7時와 8時 放送뉴스와 新聞을 통해 戒嚴宣布 事實을 알고 平常時처럼 出勤하고 가게 門을 열었다. … 軍人들은 鐵帽에 水桶을 지닌 武裝 차림으로 裝甲車에 搭乘해 萬般의 準備態勢를 갖추고 있다. 釜山市警 앞에도 裝甲車가 動員돼 있고 영도다리 쪽으로 난 陸橋 위에는 戰鬪 警察官들이 올라가 經費에 臨하고 있으며 中心街 골목마다 警察官이 5∼10名 單位로 巡察하고 있다. … 16, 17日 學生 騷擾가 가장 甚했던 광복동 거리 兩쪽에는 武裝軍人 1名씩이 經費에 臨하고 있었다. 國際市場 周邊에는 軍人들의 經費 속에 商人들이 店鋪에 들어가려다 저지당하기도 했다.’

釜山이 숨을 죽인 18日 午前, 馬山의 경남대는 “釜山에 戒嚴令이 宣布되었다”는 消息에 술렁였다. 圖書館 앞 나무와 揭示板에는 “靑年 學徒餘, 거리마다 우리의 맑은 피를 뿌리자!”는 檄文이 붙었다. “只今 釜山에서는 우리 學友들이 維新獨裁에 依해 피를 흘리고 있다. (1960年 4·19를 부른 3·15 不正選擧 抗議 示威인) 3·15 義擧精神을 잊었는가, 나가자!” 외침을 信號로 霎時間에 示威隊 1000餘 名이 모였다.

警察 沮止線을 가볍게 뚫고 都心까지 進出한 경남대生 隊列에 馬山對生들까지 合勢했다. 馬山抗爭 亦是 釜山 때와 마찬가지로 밤이 되자 漸漸 市民抗爭으로 번졌다. 食堂 從業員, 零細商人, 日傭勞動者, 無職者, 구두닦이, 商店 從業員, 高校生 等이 示威를 主導하게 된 것이다. 馬山示威는 釜山보다 더 激烈했다. 與黨인 공화당 黨史가 부서졌고 市內 여러 곳의 派出所가 襲擊당했다. 곳곳에서 朴 大統領 寫眞이 떼어내어져 짓밟혔다.

結局 朴 大統領은 18日 釜山 戒嚴令에 이어 20日 0時를 期해 馬山 昌原에 衛戍令을 宣布한다.

釜山에서는 總 1058名이 連行되어 66名이 軍事裁判에 回附되었고 馬山에서는 505名이 連行되고 59名이 軍事裁判에 넘겨진다.

‘부마 民衆抗爭’은 누구도 그렇게 큰 示威로 發展할 줄 몰랐다는 點에서 非組織的 抗爭이었다. 하지만 大學生이나 少數 名望家들에 局限되어 있던 1970年代 그 어떤 反獨裁 民主化 運動보다도 政權에 致命打를 입혔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抗爭의 原因을 좀 더 深層的으로 짚어 볼 必要가 있다. 優先은 이 地域을 政治 基盤으로 하고 있던 YS의 議員職 除名이 導火線이 된 듯했지만 市民들까지 參與하게 된 데에는 生存이 威脅당하는 經濟的 危機가 있었다.

‘釜山과 馬山은 YS의 政治的 基盤이어서 1979年 여름과 初가을의 政治 事態에 다른 地域 사람보다 더 銳敏한 反應을 보일 수 있었고, YS의 議員職 除名에 對해서는 더욱더 그러할 수 있었다. 當時 앰네스티 釜山地方 幹事였던 허진수度 18日에 (釜山에서) “김영삼 除名 撤回!” 口號가 많이 나왔다고 證言했다. 그렇지만 抗爭 첫날 밤 10時쯤에 광복동에서 “김영삼” 連呼가 터져 나오자 다른 한쪽에서 “여기서 김영삼이가 왜 나와? 우리가 金永三 위해 데모했나?”라는 핀잔 섞인 反論이 나온 데서도 斟酌할 수 있는 바와 같이 金永三 除名에 憤怒해 抗爭에 參與한 市民도 있었지만 除名을 契機로 維新政權에 쌓인 不滿이나 憤怒가 暴發한 市民도 적지 않았다.’(2009년 駙馬民衆抗爭 30周年 記念 學術 심포지엄)

當時 釜山戒嚴司令部 合同搜査班이 實施한 輿論調査에서도 부마抗爭의 1次 原因은 經濟 沈滯에 依한 庶民 商人層의 不滿이었고 YS 議員職 除名은 두 番째였다.

釜山 民心이 維新體制에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은 1978年 12月 總選에서도 如實히 드러났다. 10名의 國會議員 中 5名이 野黨인 신민당 所屬이었고, 한 名은 維新憲法에 反對하며 공화당을 脫黨했던 無所屬 예춘호였다. 當選된 議員 6名이 모두 野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憤怒의 밑바닥에는 바로 ‘經濟’가 있었다. 釜山 馬山 두 곳은 1970年代 後半 불어 닥친 景氣 不況의 直擊彈을 맞았다. 2009年 學術 심포지엄 論文에는 當時 釜山의 經濟狀況이 仔細히 紹介되고 있다.

‘釜山 住民의 總生産 增加率은 1976, 1978年만 해도 各各 30.5%, 16.7%로 全國 國民總生産量의 增加率보다 越等히 높았는데, 1979年에는 5.6%로 急激히 떨어져 不況의 體感이 컸다. 地域別 賃金 隔差도 釜山이 大都市인데도 1979年에 서울을 100.0으로 할 境遇, 74.3으로 全北의 67.6을 除外하면 最下位였다. … 不渡率도 아주 높아 1979年에 全國의 2.4倍, 서울의 3.0倍였다. 釜山은 輸出에 依存하는 經濟인데도 1979年 輸出增加率이 10.2%로 亦是 全國 增加率 18.4%에 훨씬 못 미쳤다.’

1979年 8月 現在 釜山 사상工團 內 休·廢業한 中小企業은 모두 77個社, 總 4100餘 名이 하루아침에 職場을 잃었다.

馬山도 마찬가지였다. 馬山輸出工業團地는 1979年 9月 現在 24個 業體가 휴·廢業에 들어갔고, 이에 따라 5000∼6000名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었다. 日本 닛케이新聞은 1979年 8月 4日子에서 ‘마산수출자유지역에 進出한 日本 企業의 半 以上이 韓國에서 撤收 意思를 表明하고 있다’고 報道했다. 또 8月 8日 마산수출자유지역企業協會 調査에 따르면 ‘入住業體 102個社 中 10個 業體가 廢業했으며 나머지 92個社 中 46個 業體가 赤字 經營을 理由로 東南亞 等 他 地域으로 移動할 움직임에 있다’고 報告했다. 最大 規模의 重化學工業團地의 하나였던 昌原工業地帶에도 不況이 甚했다.

民衆들은 하루아침에 職場에서 쫓겨나 絶叫하고 있었지만 政權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있었다. 정작 朴 政權을 무너뜨린 것은 ‘內部의 敵’이었다.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釜山 #戒嚴令 #維新獨裁 #馬山對 #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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