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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支路-태평로 닦기 위한 土地買收, 日地主들만 呼價 높이며 拒否[염복규의 京城, 서울의 起源]|東亞日報

乙支路-태평로 닦기 위한 土地買收, 日地主들만 呼價 높이며 拒否[염복규의 京城, 서울의 起源]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4月 17日 23時 33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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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齊, 1910年 强制倂合後 道路 整備… ‘植民地民에게 都市文明 誇示’ 意圖
總督府, 남대문로 等 새 대로 닦아
當時 鏡城 定着한 日本人 땅主人들, 賣却 協商 不應하며 끝까지 버티기
朝鮮人은 財産權 제대로 主張못한듯

《都市開發 出發點 ‘始球改正’ 事業


‘每日申報’ 1913年 8月 24日子에는 ‘始球改正과 公共心’이라는 社說이 실렸다.

그 한 대목을 보면 “近來 京城 內 各 道路를 個數함에 따라 自然히 人民의 家屋을 犯하는 곳이 많은지라. 人民된 者는 반드시 公益을 생각하여 當局의 指揮를 따를 뿐이어늘 혹 頑拒(頑拒)하는 者도 있으며 或 價格을 課戶(過呼)하는 者도 있다.

目下 朝鮮人은 이를 깨달아 頑拒하는 者도 거의 없으며 價格을 過戶하는 者도 亦是 없어 道路의 擴張에 조금의 民願이 없을진대, 內地人(內地人)은 무슨 能力을 가졌는지 오히려 頑拒하는 者도 많으며 價格을 過戶하는 者도 많으니 저 文明의 先進으로 自負하는 者가 어찌 이런 치우친 마음을 가졌느뇨?”라고 썼다.》



일제는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직후부터 식민지민에게 ‘문명’을 과시하겠다는 의도로 경성 시내의 도로 정비를 시작했다. 1912년
 11월 6일 ‘조선총독부관보’에 실린 경성 시구개정 노선도. 이 사업으로 골목에 가까웠던 길들이 폭을 넓히고 직선화했다. 
황금정통(을지로), 태평통(태평로), 남대문통(남대문로), 장곡천정통(소공로), 돈화문통(돈화문로), 의원통(창경궁로)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日帝는 1910年 韓日 强制倂合 直後부터 植民地民에게 ‘文明’을 誇示하겠다는 意圖로 鏡城 市內의 道路 整備를 始作했다. 1912年 11月 6日 ‘朝鮮總督府官報’에 실린 京城 始球改正 路線도. 이 事業으로 골목에 가까웠던 길들이 幅을 넓히고 直線化했다. 黃金正統(을지로), 太平桶(태평로), 南大門通(남대문로), 장곡천正統(소공로), 敦化門桶(敦化門로), 議員桶(昌慶宮로) 等이 이때 만들어졌다. 寫眞 出處 國立中央圖書館 디지털컬렉션·國史編纂委員會 電子史料館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염복규 서울시립대 國史學科 敎授
‘每日申報’는 1910年代 唯一한 朝鮮語 新聞으로 總督府 機關紙이다. 內地人은 日本人을 뜻한다. 社說에 따르면 只今 京城의 道路를 整備하기 위해 鳶島 住民의 家屋이나 土地를 買受해야 하는데 買收 協商에서 朝鮮人은 反抗(頑拒)하거나 價格을 過하게 부르는(과호) 사람이 없는 反面 日本人 中에는 이런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社說은 朝鮮人보다 “文明의 先進으로 自負하는” 日本人이 어떻게 이렇게 치우친 마음을 가졌냐고 한다. 卽, 總督府 氣管支가 日本人을 非難하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1910年 韓國倂合 直後부터 總督府는 ‘京城 始球改正’이라는 이름으로 市內의 道路 整備를 始作했다. 이는 日帝强占期 鏡城의 都市 開發, 整備의 出發點이 된다. 市街地의 區劃을 바르게 고친다는 뜻의 始球改正(市區改正)은 다른 都市에서도 實施했다. 그러나 地方 都市의 始球改正은 主로 道廳 所在地에서 制限된 地方費 豫算으로 ‘道廳 앞 대로’ 하나 程度를 整備하는 데 그쳤다. 그에 反해 京城 始球改正은 總督府가 直接 大大的인 工事를 벌였다. 京城은 여러 都市 中 하나가 아니라 植民 統治의 核心 機構가 모여 있는 名實相符한 ‘植民地 首都’였기 때문이다. 總督府는 植民地 首都를 整備하여 그 成果를 보여주는 것이 곧 植民 統治의 ‘正當性’(朝鮮에 近代 文明을 傳播하겠다)을 널리 宣傳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1929년 찍은 경성 시내 조감 사진에서 1926년 준공한 경성부청(옛 서울시청사·실선 안)을 중심으로 정비된 도로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929年 찍은 鏡城 市內 조감 寫眞에서 1926年 竣工한 京城府靑(옛 서울市廳舍·實線 안)을 中心으로 整備된 道路들을 確認할 수 있다. 寫眞 出處 國立中央圖書館 디지털컬렉션·國史編纂委員會 電子史料館
京城 始球改正 事業은 1920年代 末까지 持續되었다. 이 過程에서 朝鮮 時代까지는 ‘골목’에 가까웠던 많은 길의 幅을 넓히고 直線化했다. 또 完全히 새로운 道路도 닦았다. 黃金正統(을지로), 太平桶(태평로), 南大門通(남대문로), 장곡천正統(소공로), 敦化門桶(敦化門로), 議員桶(昌慶宮로) 等이 이때 만들어진 代表的인 道路들이다. 始球改正의 結果 京城 都心部는 朝鮮時代 漢陽과는 根本的으로 다른 바둑板型 空間 構造로 새로 태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形成된 空間 構造는 오늘날까지도 基本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總督府가 보여주려고 한 ‘都市의 文明化’였다. 京城 始球改正 事業을 始作하면서 나온 “어떠한 나라를 莫論하고 于先 道路를 視察하여 訂正油槽(井井有條)하면 그 나라의 文化와 政治는 文明으로 判斷”하기 때문에 “于先 京城의 道路를 直線으로 四通五達(四通五達)하여 訂正油槽케 하여 一帶 模範을 보인다 하니 이는 總督이 朝鮮을 啓發하는 노심努力에서 나옴”이라는 말(每日申報 1912年 11月 7日子 社說 ‘始球改正’)은 總督府가 始球改正을 精力的으로 推進한 背景과 目標를 잘 보여준다.

1930년 발간된 ‘경성시구개정회고이십년’에 실린 1913년 황금정통 공사 모습.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930年 發刊된 ‘京城始球改正回顧二十年’에 실린 1913年 黃金正統 工事 모습. 寫眞 出處 國立中央圖書館 디지털컬렉션·國史編纂委員會 電子史料館

1912年부터 本格的으로 始作한 始球改正 過程에서 가장 먼저 整備에 着手한 道路는 南大門 停車場(서울驛)에서 南大門까지의 짧은 區間이었다. 잇달아 黃金正統, 南大門通 工事가 이어졌다. 汽車에서 내린 사람이 市內로 들어가는 길목인 南大門 停車場에서 南大門까지 이어지는 道路는 ‘서울의 玄關’이라고 할 수 있다. 황금정通過 南大門通은 現在도 그렇지만 當時 京城에서 가장 發達한 商業 가로였다. 이미 많은 商店과 會社가 들어차 있었고, 繼續 增加할 것이 豫想되었다. 鏡城 市內를 整備하여 自身들의 ‘文明’을 植民地民에게 誇示하겠다는 總督府가 優先視할 수밖에 없는 道路들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總督府의 野心 찬 始球改正 事業은 豫期치 않은 難關에 부딪혔다. 道路 敷地를 買收하는데 土地 所有者들이 總督府가 提示하는 價格에 쉽게 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밖에 이들은 大部分 日本人이었다. 예컨대 黃金正統의 境遇 工事를 위해 買受해야 할 土地의 所有者는 總 82名이었는데 그中 19名이 1年 가까이 買收 協商을 拒否했다. 마지막까지 協商을 拒否하여 ‘土地收用令’ 適用을 받은 사람은 마쓰모리(末森富良)라는 者였다. 南大門에서 鐘閣에 이르는 南大門通의 境遇도 事情이 複雜했다. 이 一帶는 朝鮮時代부터 傳統的인 商圈이 있던 곳인데, 1880年代에는 淸나라 商人이 進出하여 자리를 잡았다. 1890年代부터는 日本 商人도 進出하여, 서로 競爭이 熾烈했다. 거기다가 드물게 西洋人 所有 土地도 있었다. 南大門通의 整備를 위해 買受해야 할 土地 所有者는 100餘 名에 達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道路 敷地의 買收 交涉에 繼續 應하지 않는 20餘 名은 日本人들이었다.

앞의 社說에 登場하는 總督府의 交涉에 “頑拒하는” 或은 “價格을 過戶하는” “內地人”이란 바로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大部分 無名의 人士로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 어렵다. 그나마 마쓰모리는 러일戰爭 參戰 軍人 出身으로 除隊 後 다시 朝鮮에 건너와 京城에서 住宅 賃貸業, 土地 信託業 等으로 置簿한 사람으로 確認된다. 1世代 日本人이 朝鮮에 건너오기 始作한 것은 1876年 開港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 釜山, 仁川, 元山 等 開港場에 定着한 日本人은 서울로도 進出했다. 서울에 日本人의 居住를 公式的으로 許可한 것이 1885年頃이다. 이들은 主로 商人이었다. 大槪 변변한 資本 없이 ‘新天地’ 朝鮮에서 成功을 노리는 冒險 商人이 많았다. 當時 이런 者들을 ‘히吐하타龜尾(一旗組·한탕主義者)’라고 부르기도 했다. 러일戰爭 以後 統監府 時期부터는 日帝의 朝鮮 侵略이 本格化하는 것과 櫃를 같이하여 2世代 日本人이 건너오기 始作했다. 이들은 管理, 敎師, 會社員 等으로 1世代에 비해 엘리트層이었다.

要컨대 마쓰모리는 1世代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植民 統治의 代의(?), 植民地 首都의 文明的 整備 따위보다 오직 自身의 財産이 重要할 뿐이었다. 植民地 首都를 整備하여 自身들의 힘을 朝鮮人에게 誇示하려는 總督府와 오직 私益만을 追求하는 個別 日本人의 利害關係는 衝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道路 敷地의 買收 過程에서 不協和音이 일어난 土地 所有者가 大部分 日本人인 것에는 또 다른 側面이 있다. 이들은 支配 民族의 一員이었다. 따라서 비록 總督府 機關紙의 非難은 받을망정 自己 財産權을 主張했다. 그러나 朝鮮人은 그러지 못했던 게 아닐까? “朝鮮人은” “道路의 擴張에 조금의 民願이 없”다는 總督府 機關紙의 稱讚(?)은 植民地라는 ‘기울어진 運動場’의 實體를 逆說的으로 보여준다.

京城 始球改正은 總督府가 追求하는 植民地 首都 整備의 目標, 個別 植民者(日本人) 各各의 私益 追求, 日帝의 一方的 事業 推進을 受容할 수밖에 없는 植民地民의 處地가 부딪치고 뒤엉키는 가운데 進展되었다. 鏡城의 開發과 整備는 但只 空間의 物理的 變形 課程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國史學科 敎授


#都市開發 #始球改正 事業 #道路 整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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