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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菜食 爲主 規則的 生活로 라이브 可能… 後輩들 歌詞傳達力 높여야”[파워인터뷰]|동아일보

“菜食 爲主 規則的 生活로 라이브 可能… 後輩들 歌詞傳達力 높여야”[파워인터뷰]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11月 12日 23時 59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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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歌手 最初 金冠文化勳章
‘韓國歌謠의 傳說’ 李美子

올해 데뷔 64주년을 맞은 가수 이미자 씨는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노래는 물론이거니와 무대 의상을 고를 때에도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가수로서 팬들에게 완벽하게 준비한 모습을 선보이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올해 데뷔 64周年을 맞은 歌手 이미자 氏는 徹底한 原則主義者다. 노래는 勿論이거니와 舞臺 衣裳을 고를 때에도 한 치의 誤差를 許容하지 않는다. 그는 “歌手로서 팬들에게 完璧하게 準備한 모습을 선보이는 것이 當然한 道理”라고 말했다. 신원건 記者 laputa@donga.com
《“헤∼일 수 없이/수많은 밤을/내 가슴 도려내는/아픔에 겨워…”(‘동백아가씨’ 中)


‘열아홉 純情’ ‘동백아가씨’ ‘섬마을先生님’ ‘기러기 아빠’…. 애절함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大衆의 삶과 時代의 哀歡을 달래준 歌手 이미자 氏(82). 올해 데뷔 64周年을 맞은 그가 大衆音樂人 最初로 지난달 金冠文化勳章을 받았다. 金冠文化勳章은 政府의 文化勳章 中 가장 等級이 높다.

자그마한 體軀를 지닌 그는 ‘작은 巨人’이다. 大衆歌手에겐 許可되지 않던 世宗文化會館 公演을 1989年 當時 櫜鞬 서울市長과 直接 面談해 성사시켰고, 2002年 南韓 歌手 最初로 北韓에서 單獨 公演을 했다. 1965年부터 5年間 베트남戰爭 派兵 國軍을 위한 慰問公演에 參與했다.

여든을 넘어서도 豐富한 聲量과 변함없는 목소리로 觀客과 呼吸하는 그를 9日 서울 鍾路區 東亞日報社에서 만났다. 特有의 맑고 가느다란 목소리에 溫和한 微笑를 짓는 그는 少女 같았다. 》



―大衆歌手 最初로 金冠文化勳章을 받은 所感이 어떤가요.

“2009年 歌手로선 처음으로 銀冠文化勳章을 받은 데 이어 金冠文化勳章까지 받았습니다. 더없는 榮光이고 幸運이죠. 60年 넘게 저를 좋아해주신 팬들이 안 계셨다면 받을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애쓴다고 다 사랑받을 순 없잖아요. 저는 運이 좋은 사람이에요.”

―男女老少 모두가 좋아하는 歌手로 오랜 길을 걸어왔습니다.

“제가 데뷔해 ‘동백아가씨’로 사랑받았을 時節만 해도 우리나라는 開發道上國이었어요. 많은 분들이 베트남戰爭으로 派兵을 가거나, 돈을 벌기 위해 獨逸 中東 等 外國도 마다하지 않고 나가셨죠. 그분들이 계셨기에 只今의 우리나라가 있다고 믿어요. 힘겨운 삶과 家族에 對한 그리움을 제 노래로 달랬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感謝하고 또 監査하죠. 그런 父母님을 보고 자란 젊은 世代도 자연스럽게 저를 알아봐 주셔서 고마워요.”

―只今도 라이브 公演을 하십니다. 健康 管理를 어떻게 하시나요.

“특별한 管理는 안 해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사는 게 가장 重要하다고 봐요. 아침 7時에 일어나 밤 11時쯤 자요. 飮食은 나물 等 菜蔬 爲主로 먹어요. 튀긴 거나 但 건 안 좋아해요. 커피는 하루 딱 한 盞만 마시고요. 군것질은 안 합니다. 따로 運動하지 않는데 60年 넘게 몸무게 48∼50kg을 維持하며 목 컨디션도 지킬 수 있는 건 이렇게 지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이 셋(딸 둘, 아들 하나)을 키운 것도 規則的인 生活을 하게 만들었고요.”

―바쁜 歌手 生活을 하면서도 宗家집 맏며느리로서 집안 大小事를 直接 챙기셨습니다.

“慶南 昌寧 광산 金氏 宗家의 맏며느리예요. 우리 時代엔 내가 바쁘더라도 맏며느리 役割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當然히 道理를 해야 한다 여겼고, 가슴에 늘 참을 人(忍)字를 새기며 살았어요. 飮食은 다 제 손으로 했고요. 저도 힘들었지만, 男便 亦是 ‘이미자의 男便’으로 불리며 사람들의 視線을 견뎌야 했어요. 그게 只今도 未安해요.”(그의 男便은 KBS 製作支援局腸을 지낸 金昌洙 氏다.)

―1965年 베트남戰爭 派兵 國軍을 위한 慰問公演을 갔다가 交通事故를 當하셨습니다. 當時 事故로 이마와 왼쪽 볼에 흉터가 생겼지만 成形手術을 안 하셨습니다.

“제가 주변머리가 없어 手術은 생각도 안 했어요. 寫眞 찍을 때 흉터가 있는 왼쪽은 잘 안 보이게 하려 해요. 成形을 하면 자연스럽지 않아요. 皮膚 施術도 마찬가지고요. 있는 그대로, 나이 드는 모습 그대로를 지키자는 게 제 主管이에요.”

―베트남戰爭 當時 慰問公演 舞臺에 다섯 番이나 섰습니다. 2002年엔 南韓 歌手 史上 첫 平壤 單獨 公演을 하는 等 記錄이 참 많습니다.

“南北韓 歌手 통틀어 北韓과 南韓 放送에서 同時에 單獨으로 콘서트를 中繼한 건 처음이었어요. 紀念碑的이었죠. 公演 前날 緊張해서 잠을 거의 못 잔 記憶이 나요. 베트남戰爭 派兵 慰問公演 出演者는 當時 朴正熙 大統領이 直接 決定하셨어요. 靑瓦臺 祕書官이 公演團 團長이었고, 金浦에서 出發해 홍콩을 들러 남베트남 首都 사이공에 들어갔죠. 以後 5年間 每年 越南 慰問公演 舞臺에 올랐어요.”

―大衆歌手에게 壁이 높았던 世宗文化會館 公演 成事를 위해 서울市長을 찾아가 談判 지을 생각은 어떻게 하셨나요.

“1989年은 데뷔 30周年인 해였어요. 제 代表曲 中 하나인 ‘동백아가씨’가 2年 前인 1987年에 解禁됐고요. 22年 만이었죠. 30周年 舞臺에서 맘껏 부를 수 있었기에 世宗文化會館에서 꼭 하고 싶었어요. 當時 世宗文化會館에 對官 申請을 했는데 ‘이미자 公演을 하면 名譽의 殿堂이 고무신짝들의 판으로 轉落한다’며 拒絶했다더라고요. 그게 너무 가슴에 맺혔어요. 서울市廳에 勤務하는 知人의 周旋으로 櫜鞬 市長을 만나 自初至終을 말씀드렸어요. 結局 그해 10月 16∼18日 公演 許諾을 받아냈죠.”

―當時 與野 4黨 總裁들이 모두 參席했습니다.

“제가 當時 與野 4黨 總裁들을 黨舍로 찾아가 招待했어요. 民政黨에선 朴浚圭 代表가 오셨고,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總裁 內外분도 모두 오셨죠. 當時 김대중 總裁께선 公演 날짜인 1989年 10月 16日을 적어 揮毫를 써주셨어요. 公演 끝난 뒤 額子에 넣어 집으로 보내주시기까지 했죠.”

―또 記憶에 남는 舞臺가 있나요.


“2013年 勤勞者 派獨 50周年을 맞아 獨逸 프랑크푸르트에서 公演을 했어요. 當時 派獨 鑛夫였던 분들이 제게 ‘坑道 안에 작은 카세트 하나 들고 내려가 壁에 붙여놓고 ‘동백아가씨’를 들으며 곡괭이질을 했다. 德分에 버틸 수 있었다’고 하셨어요. 너무 뭉클했죠. 廢鑛이 된 坑道에 直接 들어가서 現場도 봤습니다. 제 노래가 그분들에게 慰勞가 됐다는 말에 제가 더 感謝했어요.”

―콘서트에서 앙코르 曲까지 27曲假量을 모두 라이브로 부르십니다. 힘들진 않나요.

“舞臺에 오르기 前까진 힘들어 죽겠는데도, 稀罕하게 舞臺에 ‘新’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第 觀客들은 大部分 70, 80代이고 젊은 분들이 50, 60대세요. 그분들이 제 舞臺를 보겠다고 먼 길을 苦生해서 오시는데 이분들 反應이 거의 아이돌 팬덤 水準이에요. 熱氣가 어마어마해요. 그분들의 氣를 받아서 그런지 힘이 나요. 舞臺에 설 때마다 神이 제게 ‘너는 태어나서 平生 歌手로 살 八字’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요.”

―來年이 데뷔 65周年입니다. 記念 公演 計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직은 없어요. 저는 樂團 밴드 라이브 伴奏에 맞춰 노래하는 사람이에요. 完全 아날로그죠. 그래야 純粹한 音樂이 完成된다고 생각해요. 萬若 콘서트를 하게 된다면 樂團 演奏가 可能한 公演場이어야 해요. 65周年 公演보다 더 하고 싶은 公演이 있긴 해요. 1960年代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우리 國民 10萬餘 名이 縫製일을 하러 갔어요. 現地에 남은 분들을 慰勞하는 公演을 여는 게 저의 남은 宿題예요.”

―後輩 歌手들에게 하고 싶은 助言이 있나요.

“各 時代를 代辯하는 것 中 하나가 大衆歌謠라고 생각해요. 時代別 노랫말이나 멜로디가 있죠. 요즘 歌手들은 歌詞 傳達이 잘 되지 않는 境遇가 많아 안타까워요. 가끔은 字幕을 보지 않으면 우리말인데도 都統 알아들을 수가 없더라고요. 슬픈 歌辭인데 웃으며 노래하는 境遇도 있고…. 定石으로 노래 부르는 歌手들이 傳統歌謠의 脈을 지켜나갔으면 좋겠어요.”

―隱退 時期를 생각한 적이 있는지요.

“隱退 생각은 없어요. 觀客이 나를 찾지 않으면 그게 隱退죠. 저는 斷定해 決定 내리는 것을 안 좋아해요. 그래서 隱退 時期를 못 박지 않죠. 觀客이 저를 찾는 한 舞臺에 서고 싶어요.”



李美子 略歷
△1941年 서울 出生
△1959年 ‘열아홉 純情’으로 데뷔
△1965年 베트남戰 派兵 國軍 위한 첫 慰問公演
△1967年 無窮花勳章 垂訓
△1973年 베트남 最高 文化勳章 垂訓
△1989年 大衆 歌手 最初 世宗文化會館 單獨 公演
△2002年 南韓 歌手 最初 平壤 單獨 公演
△2009年 大衆 歌手 最初 銀冠文化勳章 垂訓
△2023年 大衆 歌手 最初 金冠文化勳章 垂訓




金正恩 記者 kimje@donga.com
#李美子 #金冠文化勳章 #最初 #동백아가씨 #受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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