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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過剩[왕은철의 스토리와 治癒]〈255〉|東亞日報

슬픔의 過剩[왕은철의 스토리와 治癒]〈255〉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8月 10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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信仰心이 깊은 사람도 때로 極甚한 슬픔 앞에서는 平靜心을 잃는다. 世界的인 基督敎 辨證가인 C S 루이스도 그러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자 神을 怨望하기까지 했다. “왜 그분은 우리가 蕃盛할 때는 司令官처럼 君臨하시다가 患難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인가.”

平生 글을 써온 學者답게 그는 그러한 懷疑와 不信과 苦痛을 記錄하기 始作했다. ‘헤아려 본 슬픔’(原題 ‘A Grief Observed’)이라는 冊이 그 結果物이다. 더 正確히 말하면 슬픔 앞에 定冠詞 A가 붙었으니 題目은 ‘헤아려 본 하나의 슬픔’이라고 해야 옳다. 슬픔의 一般論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至極히 私的인 슬픔의 記錄이라는 意味다. 그는 다른 사람이 自身을 알아보지 못하게 N W 클러크라는 假名을 使用함으로써 그것을 더 內密한 記錄으로 만들었다. 그가 著者라는 것이 알려진 것은 몇 年 後에 그가 죽고 나서였다.

그것은 아내를 잃은 사람이 느끼는 슬픔의 記錄이다. 그는 平生 獨身으로 살다가 五十代 後半에야 結婚했다. 아내가 아프다는 事實을 알고 한 結婚은 3年 만에 끝났다. 그러자 그는 地獄처럼 입을 벌리는 슬픔에 壓倒當했다. 누구도 그를 慰勞할 수 없었다. 그런데 妙하게도, 그가 느끼는 激情的인 슬픔과 눈물이 그를 죽은 아내와 連結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떼어 놓았다. 逆說的이게도 그는 아내의 죽음을 덜 슬퍼할 때 그女를 가장 또렷이 記憶했다. 너무 많이 울면 앞이 잘 안 보이는 것과 같은 理致였다. “눈물로 눈이 흐려져 있을 때는 어느 것도 똑똑히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哀悼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슬픔의 過剩이 眞正한 哀悼의 方式인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離別로 世上이 무너지는 것 같은데 어찌 感情이 過剩되지 않을까. 그러나 지나친 슬픔과 눈물, 自己憐憫이 마음의 눈을 가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沮害한다는 말은 注目을 요한다. 苦痛을 통해 얻어진 智慧의 소리랄까.


왕은철 文學評論家·전북대 碩座敎授
#왕은철의 스토리와 治癒 #슬픔의 過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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