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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무 되살리는, 타르콥스키의 ‘希望’[석영중 길 위에서 만난 文學]|東亞日報

죽은 나무 되살리는, 타르콥스키의 ‘希望’[석영중 길 위에서 만난 文學]

  • 東亞日報
  • 入力 2022年 1月 28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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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예술의 한 장르로 승격시킨 천재로 평가받는 옛 소련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映畫를 藝術의 한 장르로 昇格시킨 天才로 評價받는 옛 蘇聯 映畫監督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석영중 高麗大 露語路文學科 敎授
《옛 蘇聯의 映畫監督 안드레이 타르콥스키(1932∼1986)는 映畫를 藝術의 한 장르로 昇格시킨 天才로 評價받는다.

政府와의 不和와 癌 鬪病, 貧困으로 點綴된 삶을 살아가며 일곱 篇의 卓越한 映畫를 남긴 그에게는 ‘映像의 詩人’ ‘映畫界의 殉敎者’ 等 修飾語가 따라다닌다.

그의 映畫 大部分은 ‘롱테이크’와 深刻한 臺詞를 特徵으로 하는 만큼 形言할 수 없이 深奧한 同時에 당혹스러울 程度로 지루하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作品 ‘犧牲’은 深奧함이나 지루함과는 다른 次元에서 觀客과의 特別한 疏通을 提案한다.

그것은 監督 自身의 表現을 빌려 “寓話 같은 映畫”이기 때문이다.》

現代文明은 ‘虛無 덩어리’

映畫의 內容은 比較的 簡單하다. 主人公 알렉산더는 前職 演劇俳優로 아름다운 夫人, 딸, 그리고 늦둥이 꼬마 아들과 함께 호젓한 바닷가 田園住宅에서 살고 있다. 오늘은 그의 生日이다. 生日 祝賀 카드가 날아오고 몇몇 知人이 到着한다. 그런데 그들이 生日 晩餐을 始作하기도 前에 뉴스에서 核武器를 使用하는 第3次 世界大戰이 勃發했다는 報道가 흘러나온다. 모든 사람이 패닉 狀態에 빠진다. “이 戰爭이 마지막 戰爭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勝者도 敗者도, 都市도 마을도 풀과 나무도 우물물도 하늘의 새도 다 사라질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난生처음 神에게 救援의 祈禱를 바친다. “未來의 生命力과 希望을 잃은 사람들을, 不安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終末이 다가옴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救해주소서.” 그는 神이 오늘 아침과 같은 世上을 되돌려준다면 사랑하는 家族과 집을 버리겠노라고 盟誓한다.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그의 盟誓는 沈默 書院으로 이어진다. “平生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살겠습니다.” 날이 밝자 戰爭 뉴스는 한바탕 꿈처럼 痕跡도 없이 사라지고 平素와 다름없는 하루가 始作된다. 알렉산더는 神이 自身의 祈禱에 應答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神과의 約束을 지키기 위해 家族들이 집을 비운 사이 집에 불을 지른다. 그는 精神病院에 실려 간다.

이 非現實的인 스토리를 가지고서 監督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의 눈에 비친 現代文明은 巨大한 虛無의 덩어리였다. 物質萬能主義의 迷妄에 사로잡힌 人類는 ‘精神的인 休眠狀態’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犧牲’ 解說에서 “말은 空虛한 雜談으로 變質되고 過剩 情報가 人間을 질식시키는 時代, 정작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 眞正한 메시지는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時代”에 말이 아닌 “映像과 視覺 이미지”로 觀客과 疏通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映畫에서 疏通의 道具로 選擇한 이미지는 나무다.

세 그루 나무가 빚어낸 寓話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마지막 작품 ‘희생’에서 주인공 알렉산더가 자신의 생일날 황량한 바닷가에 시든 나무 한 그루를 심고 있다(위쪽 사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나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반짝이는 물결이 생명 회복에 대한 희망을 상징한다. 유튜브 캡처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監督의 마지막 作品 ‘犧牲’에서 主人公 알렉산더가 自身의 生日날 荒凉한 바닷가에 詩든 나무 한 그루를 심고 있다(위쪽 寫眞). 映畫의 마지막 場面에 登場하는 나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반짝이는 물결이 生命 回復에 對한 希望을 象徵한다. 유튜브 캡처
‘犧牲’에는 基本的으로 세 그루의 나무가 登場한다. 타이틀 시퀀스에 紹介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會話 ‘東方博士의 敬拜’에 그려진 나무가 그 첫 番째다. 東方博士가 아기 예수에게 膳物을 奉獻하는 場面의 背景에 그려진 草綠 잎 茂盛한 나무는 永遠한 生命을 象徵한다. 이 生命의 나무가 映畫 속에서 喚起되는 方式은 千 마디 말보다 直接的으로 監督의 메시지를 傳達한다.

두 番째 나무는 다빈치의 나무와는 劇的인 對照를 이루는 헐벗은 나무로 映畫의 첫 畵面에 登場한다. 알렉산더는 어린 아들과 함께 바닷가에 詩든 나무를 한 그루 심는다. 아들은 얼마 前에 扁桃腺 手術을 해서 限時的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狀態다. 나무를 심으면서 알렉산더는 아들에게 오래된 傳說을 들려준다. 먼 옛날 어느 늙은 修道士가 山에 죽은 나무를 한 그루 심고 弟子에게 날마다 물을 주라고 命했다. 弟子 修道士는 每日 아침 山에 올라 죽은 나무에 물을 주고 저녁이 되어야 돌아왔다. 3年이 지난 어느 날 修道士는 나무에 온통 꽃이 滿發한 것을 發見했다. “끝없이 努力하면 結實을 얻는 法이지. 萬若 每日같이 正確히 같은 時間에 같은 行動을 늘 꾸준하게 意識과도 같이 反復하면 世上은 變하게 된단다.”

세 番째 나무는 마지막 場面에 나온다. 알렉산더가 精神病院에 실려 간 後 映畫는 그의 어린 아들에게 焦點을 맞춘다. 아이는 傳說 속의 修道士처럼 물을 채운 洋동이를 들고 가 그 前날 아버지와 함께 심은 나무에 물을 준다. 아이가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場面은 壓卷이다. 카메라는 천천히 垂直으로 上昇하며 나뭇가지를 클로즈업한다. 오늘의 나무는 어제와 같은 나무이지만 同時에 完全히 다른 나무이기도 하다. 산들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燦爛한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 물결이 보인다. 갑자기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온 듯한 따사로운 기운이 畵面에서 쏟아져 나온다. 觀客은 나무 아래 누운 아이의 눈으로 나무를 올려다보며 이 나무에 早晩間 잎이 茂盛하게 되리라는 期待를 아주 자연스럽게 품게 된다. 이 마지막 場面에서 르네상스 繪畫의 草綠빛 나무와 20世紀 映畫 속의 말라빠진 나무는 하나로 합쳐져 魔法처럼 새로운 視角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 期待치 않은 融合에서 터져 나오는 强烈한 에너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가 映畫의 觀覽 포인트일 것 같다.

‘犧牲’은 ‘希望’의 다른 이름


타르콥스키는 죽은 나무와 修道士에 關한 傳說이야말로 自身의 創作 履歷에서 가장 重要한 土臺였다고 述懷한다. 여기서 問題는 修道士가 같은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反復했다는 事實 自體가 아니다. 修道士는 疑心도 打算도 없이 希望을 품고 自身의 일에 獻身했다. 그것은 죽은 나무까지도 되살리는 끈질긴 希望, 希望에 對한 希望, 오로지 굳건한 믿음만이 가져다주는 希望이었다. 타르콥스키에게는 그런 希望만이 唯一한 眞實이었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 나뭇가지가 어린잎들로 뒤덮여 있다. 이것이 果然 奇跡일까? 이것은 眞實이기도 하다.” 이렇게 타르콥스키의 意中을 헤아리며 映畫를 觀覽하다 보면 題目의 意味가 사뭇 다르게 와 닿는다. 그에게 ‘犧牲’이란 곧 希望을 의미했던 것이다.

타르콥스키는 1985年 貧困과 病苦에 시달리며 스웨덴에서 ‘犧牲’을 完成하고 이듬해에 世上을 下直했다. 映畫는 監督의 獻辭로 마무리된다. “이 映畫를 아들 안드류샤에게 바칩니다. 希望과 確信을 담아서.” 이 獻辭는 監督의 아들뿐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 嚴酷한 時代에 苦痛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이를 向한 監督의 마지막 메시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석영중 高麗大 露語路文學科 敎授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나무 #希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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