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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征韓論’ 둘러싼 權力鬪爭… 感情 代身 理性的 接近限 日[박훈 韓日 歷史의 갈림길]|東亞日報

‘征韓論’ 둘러싼 權力鬪爭… 感情 代身 理性的 接近限 日[박훈 韓日 歷史의 갈림길]

  • 東亞日報
  • 入力 2021年 9月 17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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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초상화.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征韓論’을 主張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肖像畫.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朝鮮에서 興宣大院君의 10年 權力이 끝나가던 1873年 겨울, 日本에서도 메이지政府의 運命을 가를 巨大한 權力鬪爭이 벌어지고 있었다. 메이지維新의 英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征韓論을 主張하고 나선 것이다. 1868年 메이지維新 勃發 後 日本은 朝鮮에 新政府 樹立을 알리고 國交를 새로 맺을 것을 要求해왔다. 朝鮮은 日本의 갑작스러운 要求가 1609年 締結한 己酉約條 體制에 反한다고 主張하며 이를 一蹴했다. 그런 葛藤이 이미 5年을 넘고 있었다. 釜山에서의 交涉過程에서 들리는 兩側의 葛藤 消息은 안 그래도 戰爭을 바라던 사무라이들을 刺戟했다. 사이고는 이에 올라탄 것이다.》

그해 7月 사이고는 政府 實力者이자 道士番(土佐藩)의 總帥였던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에게 이렇게 말한다. “軍隊를 派遣하면 朝鮮 側에서 반드시 撤收를 要請할 것이고 우리 側에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면 戰爭이 勃發하게 될 겁니다. 따라서 使節을 먼저 派遣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朝鮮이 (使節에 對해) 暴擧를 일으킬 것이 분명하므로 戰爭의 名分도 생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使節을 派遣하면 잡아 죽일 것이 豫想되므로 부디 저를 보내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 죽는 것 程度는 覺悟가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日本學者 中에는 사이고는 自己가 서울에 直接 가서 朝鮮과의 問題를 平和的으로 解決하려 했다고 主張하는 사람도 있다.

朝鮮 挑發로 戰爭 追求하던 사이고

그러나 8月에 亦是 이타가키에게 보낸 書信을 보자. “戰爭을 곧바로 始作해서는 안 되고, 戰爭은 2段階가 되어야 합니다. … 使節을 잡아 죽일 것이 틀림없으므로 그때는 天下 사람들이 모두 朝鮮의 罪를 討伐해야 한다고 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內亂을 바라는 마음을 밖으로 돌려 나라를 興하게 하는 깊은 戰略입니다. … 저를 보내주신다면 반드시 戰爭으로 連結시키겠습니다.”(‘자유당사’ 上) 이를 보면 사이고의 眞意는 平和的 解決이 아니라, 使節 派遣으로 朝鮮을 挑發해 戰爭의 名分을 確保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內亂이 暴發하기 前에 그 에너지를 朝鮮으로 돌리려고 했던 것이다.(이원우, 사이고 다카모리와 ‘征韓論’) 메이지維新 直後 기도 다카요시가 보였던 認識 그대로다.(8월 20日子 본 칼럼 參照)

이런 認識은 首腦部뿐 아니라 下級 官僚 사이에서도 蔓延해 있었다. 當時 外務省 官吏로 釜山 倭館을 오가며 朝鮮과 交涉하던 사다 하쿠보(佐田白茅)는 “只今 日本은 兵士가 많아서 걱정이지 적어서 걱정이 아닙니다. 各地의 兵士들이 무진戰爭(戊辰戰爭·幕府 討伐 戰爭)에 滿足하지 못하고 戰鬪를 좋아하며 內亂을 생각합니다. 朝鮮을 攻擊하는 것이 兵士들의 鬱憤을 解決할 수 있는 唯一한 方法이 아닐까요. 朝鮮과 싸움으로써 우리 兵士들을 訓鍊하고 皇位(皇威)를 海外에 빛낼 수 있느니 어찌 迅速하게 攻擊하지 않겠습니까”라며 30個 大隊를 動員하면 50日 內에 征服이 可能하다고 主張했다.(현명철, ‘메이지維新 初期의 朝鮮侵略론’)

革命指導者 折半 西區 視察 나서

이와쿠라 사절단 주요 지도부가 187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와쿠라 使節團 主要 指導部가 1872年 美國 샌프란시스코에서 찍은 것으로 알려진 寫眞.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寫眞 出處 위키피디아
그러나 當時 日本은 半쪽짜리 政府가 다스리고 있었다. 1871年 폐번치현(廢藩置縣)을 斷行하자마자 政府 實力者의 半이 條約改正과 西歐文物 視察을 위해 歐美로 떠나 아직 돌아오지 않은 狀態였다. 有名한 이와쿠라 使節團인데, 사이고의 竹馬故友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그 主役이었다. 이토 히로부미度 使節團에 끼어 있었다. 革命 草創期 아직 政權이 不安할 때인데도 革命指導者의 半이 日本을 떠나는 冒險을 敢行했으니, 이들이 國際關係와 海外情報를 얼마나 重視했는지 놀라게 된다. 日本을 떠날 때 오쿠보는 사이고에게 重要한 政策들은 使節團이 歸國할 때까지 施行하지 말라는 付託을 했고 사이高度 承諾했다. 이른바 ‘殘留政府’다.

그러나 殘留政府는 徵兵令, 陽曆 採用, 志操改正(地租改正), 學制(學制) 반포 等 劃期的인 政策들을 連續的으로 施行했다. 이 疾風怒濤의 時期에 餘裕를 부릴 時間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使節團 멤버들도 大體로 同意하는 政策들이었기에 默認했다. 그런데 마침내 到底히 坐視할 수 없는 消息이 유럽의 使節團에 날아들었다. ‘征韓論’, 卽 朝鮮侵略을 敢行한다는 것이다. 오쿠보가 보기에 이는 매우 危險한 戰爭이었다.

卽刻 歸國한 오쿠보는 사이고의 祈禱를 粉碎하기 위해 나섰다. 維新의 英雄, 사무라이들의 頭領 사이고와의 싸움이니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아들에게 遺書를 써놓고 한판 勝負에 나섰다. 이와쿠라 도모미는 歸國 卽時 政府에 復歸했지만 오쿠보는 이를 拒否한 채 政府 밖에서 宮中工作을 始作했다. 메이지維新 때 王政復古 쿠데타를 主導했던 이와쿠라-오쿠보 라인의 再稼動이다. 사이고의 서울派遣은 閣議를 거쳐 태정대신(太政大臣)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가 메이지 天皇에게까지 報告한 狀態였으니 거의 決定된 거나 다름없었다. 이를 뒤엎기 위해 散調를 猛烈히 壓迫했다. 壓迫感을 견디지 못하고 散調가 病으로 쓰러지자 이와쿠라가 냉큼 태정代身(代理) 자리에 올랐다. 當時 21歲에 不過했던 메이지 天皇은 오쿠보와 이와쿠라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內亂 빌미 된 征韓論 論難

서울派遣이 霧散되자 來日이라도 ‘朝鮮征伐’에 나설 듯이 신났던 사무라이들의 憤怒는 極에 達했다. 放置하면 內亂을 避하고자 했던 征韓論이 도리어 內亂의 빌미가 될 판이었다. 사이고는 急遽 사쓰마의 가고시마로 落鄕했다. 그 麾下의 兵力이 大擧 그를 따라가 天皇의 近衛隊가 텅텅 빌 地境이 되었다. 이 征韓論 政變으로 오쿠보는 權力을 獨占하게 되었지만, 커다란 宿題가 생겨버렸다. 바로 ‘在野人士’ 사이고 다카모리다. 그 決判은 1877年 西南戰爭(西南戰爭)에서야 났다.

日本은 사이고의 感情보다는 오쿠보의 理性을 擇했다. 10個가 넘는 龜尾列强들의 富强을 目擊한 오쿠보에게 日本은 아직 어린애였다. 衰弱해졌다고는 하나 人口 1500萬의 朝鮮을 굴복시킬 힘이 日本에는 아직 없었다. 請이나 龜尾列强이 介入하면 또 어떻게 當해낼 것인가? 實際로 22年 後인 1895年 淸日戰爭에서 이긴 日本이 遼東半島를 租借하려 하자 러시아, 프랑스, 獨逸이 介入해 이를 霧散시켜 버린 걸 보면(삼국간섭), 오쿠보의 憂慮도 杞憂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萬一 征韓論이 實行되었다면 메이지 政府는 그 渦中에 崩壞했을 거라고 보는 歷史學者들이 많다. 勿論 그 過程에서 朝鮮은 慘禍를 겪었겠지만.

박훈 서울대 東洋史學科 敎授
#征韓論 #權力鬪爭 #사이고 다카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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