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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우리는 大韓民國의 國民이오” 民主 政府 첫발 내딛다|동아일보

“이제부터 우리는 大韓民國의 國民이오” 民主 政府 첫발 내딛다

  • 東亞日報
  • 入力 2020年 2月 8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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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運動 臨政 100年, 2020 동아일보 創刊 100年]
3·1運動 100年 歷史의 現場 2部 <제91화> 中國 上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20년 1월 1일 정부 요인 58명이 한자리에 모여 
신년축하회를 가진 뒤 태극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모습이다. 김구(두 번째 줄 왼쪽), 신규식(두 번째 줄 왼쪽에서 여덟 
번째), 이동녕(두 번째 줄 왼쪽에서 아홉 번째), 안창호(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아홉 번째) 등이 보인다. 동아일보DB
中國 상하이에서 大韓民國 臨時政府가 樹立된 이듬해인 1920年 1月 1日 政府 要因 58名이 한자리에 모여 新年祝賀會를 가진 뒤 太極旗를 背景으로 記念撮影을 한 모습이다. 金九(두 番째 줄 왼쪽), 신규식(두 番째 줄 왼쪽에서 여덟 番째), 이동녕(두 番째 줄 왼쪽에서 아홉 番째), 안창호(두 番째 줄 오른쪽에서 아홉 番째) 等이 보인다. 東亞日報DB
“滿天下 同志 여러분 앞에 宣布, 提議하노니… 海外 各地에 現存한 團體의 對蘇隱現을 莫論하고 糾合 統一하여 唯一無二의 最高 機關을 組織할 것. 大憲을 制定하여 민정에 合한 法治를 實行할 것.”

1917年 2月 中國 상하이에서 發表된 ‘大同團結宣言’에는 민주공화 政府의 精神이 담겨 있다. 特히 朝鮮總督府는 韓國 歷史의 正統性을 가질 수 없으며, 獨立을 追求하고 民族의 良心을 지키는 勢力이 그 正統性을 가진다는 點을 明確히 했다.(김병기, ‘大韓民國臨時政府社’) 또 나라를 빼앗긴 뒤 상하이로 亡命해 國權回復 運動을 展開해온 愛國志士들이 韓國 歷史 最初로 近代 國家 樹立 意志를 다지고 政府 組織體를 出帆시키겠다는 意志를 담은 出師表였다. 신규식을 筆頭로 朴殷植, 申采浩, 趙素昻 等 韓國獨立運動史에 이름을 남긴 이들이 發起人으로 參與한 이 宣言은 1年 半 뒤 상하이 臨時政府가 세워지는 根幹이 된다.


○ “이제부터 우리는 大韓民國의 國民입니다”

最近 訪問한 상하이市 황푸區 신톈디 地域은 쇼핑몰과 노천카페가 줄지어 있는 가운데 華麗한 옷차림의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곳곳의 洗練된 유럽式 建物들은 1900年代 初盤 이곳이 프랑스人 居住地였음을 알려준다. 어지럽게 붙은 中國語 標識板 사이에 ‘大韓民國臨時政府’라는 한글 標識板이 눈에 띈다. 바로 大韓民國臨時政府 廳舍다. 繁華街를 맞은便에 두고 길게 늘어선 住居地 初入에 자리한 廳舍 옆에는 地域住民들이 걸어놓은 빨래들이 널려 있었다.

廳舍 앞에는 立場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이제복 報勳擔當 領事는 “臨時政府 樹立 100周年을 맞은 지난해 週末에는 平均 5000名이 넘는 訪問客이 다녀갔다”고 말했다. 손님들을 위한 椅子와 卓子가 놓인 空間과 작은 廚房이 있는 1層을 지나 좁고 가파른 階段을 올라가니 金九와 臨時政府 要人들의 執務室 및 宿所가 復元돼 있었다. 한 國家의 臨時政府 居處라기엔 작고 초라한 空間. 하지만 이곳에서 臨時政府의 構成員들은 머리를 맞대고 討論하면서 獨立이라는 巨大한 熱望을 키워갔다. 機關紙 ‘獨立新聞’과 美國에 보낸 獨立承認要請書 等이 展示된 3層에선 資料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읽는 觀覽客이 적지 않았다.

1926年 이곳에 자리 잡기까지 臨時政府는 10餘 次例 個人 집과 韓人團體 事務室을 轉轉해야 했다. 푸칭리 建物 直前에 자리했던 廳舍와 關聯해선 建物 守衛와 실랑이를 벌인 한 老人의 이야기가 傳說처럼 傳해져 온다. 灰色 中國 두루마기를 입은 老人이 廳舍에 들어서자 水位가 “뉘신데 말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시오”라며 막아섰다. “내 臨政 廳舍인데 왜 못 들어가는가.” “누굴 만나시려고요.” “나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며 建物 入口가 떠들썩해지자 金九 等이 뛰쳐나왔다가 깜짝 놀란다. 老人은 다름 아닌 臨時政府의 2代 大統領 朴殷植(1859∼1925)이었다. 金九 等은 “이봐, 우리 政府의 第2代 大統領이신 분이야. 操心해! 어서 잘 모셔!”라고 소리 지른다.(우승규 ‘나절로 漫筆’) 朴殷植의 털털하고 儉素한 性格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다. 3·1運動을 實證的인 視角에서 整理한 歷史冊 ‘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著者로 더 알려져 政治 指導者보다는 學者의 面貌가 浮刻됐지만 朴殷植은 理念 對立으로 휘청거리던 臨時政府 正常化에 크게 寄與했다.

臨時政府 廳舍에서 10餘 分 距離에 서금이로(路)가 있다. 高價 패션賣場과 레스토랑이 密集된 이곳의 옛 이름은 金神父로. 臨時政府가 처음 자리 잡았던 곳이다. 只今은 痕跡도 찾기 어렵지만 1919年 4月 이곳에 있던 住宅에서 이동녕 議政院(國會에 該當하는 組織) 議長은 臨時政府 樹立을 宣言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大韓帝國의 臣民(臣民)李 아니고 大韓民國의 國民(國民)입니다. 國民이 나라의 主人이 되는 嚴肅한 瞬間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기다린 일입니까….”(이현희, ‘石吾 이동녕 評傳’) 이동녕은 當初 議長職을 맡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支持했지만 投票者들의 滿場一致로 議長에 推戴된다. 그는 떠밀리다시피 맡은 일이었는데도 “能力도 없고 才幹도 변변치 않아 송구스럽소이다. 허나 누구든 이 자리를 채워야 빼앗긴 나라를 빨리 다시 찾아가지고 돌아가지 않겠소”라며 使命感 어린 목소리로 議長職을 受諾했다. 1954年에서 1966年까지 동아일보에 在職했던 禹昇圭는 1978年 펴낸 回顧錄 ‘나절로 漫筆’에서 “(李東寧 議長은) 아침저녁 中國人의 簡易飮食店에서 月 7원짜리 싸구려 바誤判(每달 一定額의 食代를 주고 먹는 食事)을 宿所로 날라다 드시면서 목이 메어 오직 祖國의 光復만을 祈願하셨다”고 紹介했다.

○ 民主政-共和政이 核心


서이금路에서 다시 10餘 分 떨어진 男唱路로 移動했다.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자 中國語로 史跡地임을 알리는 指定牌가 붙은 建物이 보인다. 中國의 思想家이자 政治家인 천두슈가 이곳에서 雜誌 ‘新靑年’을 냈다. 같은 時期 이곳 2層에 신규식(1879∼1922)이 살고 있었다. 신규식의 外孫子 민영백 氏(78)는 “그때 李範奭 將軍도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곤 했는데 이 將軍이 나폴레옹 映畫를 보고 와선 感動을 받아 크게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傳했다. 獨立運動家들의 人間的인 面貌를 헤아려 볼 수 있는 逸話다.

임시정부가 세워지는 기초를 마련한 신규식(왼쪽)과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마지막으로 지낸 청사. 동아일보DB·상하이=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臨時政府가 세워지는 基礎를 마련한 신규식(왼쪽)과 臨時政府가 상하이에서 마지막으로 지낸 廳舍. 東亞日報DB·상하이=김지영 記者 kimjy@donga.com
신규식이 상하이에 到着한 것은 1911年이었다. 그는 일찍이 을사늑약이 締結되었을 때 飮毒自殺을 試圖했을 만큼 나라 사랑에 對한 熱情이 뜨거웠다. 多幸히 食口들에게 發見돼 生命을 求했지만 後遺症으로 오른쪽 눈의 視力을 잃었다. 하지만 이에 萎縮되지 않고 ‘나라가 亡했는데 世上을 어찌 바로 볼 수 있겠느냐’며 自身의 號를 ‘흘겨본다’는 뜻의 ‘예관(예觀)’으로 지을 程度로 好機를 잃지 않았다. 그는 ‘1919年 4月 상하이에서 大韓民國臨時政府가 樹立될 수 있던 터전을 만들어낸 功은 거의 신규식의 몫이었다’고 評價받을 程度로 많은 寄與를 했다.

韓國 獨立運動史에서 신규식이 特히 注目받는 것은 그가 앞장섰던 大同團結宣言 때문이다. 김희곤 前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腸은 “大同團結宣言은 國民이 主人이자 主體가 되는 民主政, 議會를 갖춘 共和政이 核心으로 大韓民國의 建國 方向을 體系的으로 담아냈다”고 말했다. 當時 國內 同胞의 慘酷한 生活相과 國際 環境, 大同團結의 必要性 等이 적힌 B6板 12個 面과 發起人들의 署名이 적힌 B5倍判의 答紙 1個 面으로 構成된 이 文書는 臨時政府 樹立을 위한 民族大會議의 召集을 提案하고 있다. 1919年 일어나는 3·1運動을 起點으로 國內外에서 臨時政府 樹立運動이 펼쳐질 수 있었던 背景에는 國民主權論에 根據해 共和政을 標榜한 大同團結宣言이 있었다는 게 學界의 評價다. 大同團結宣言을 主導한 신규식을 두고, 民族代表 33人 中 1名인 吳世昌이 “3·1運動은 예관으로 因해 點火됐다”고 言及한 것도 이 같은 理由에서다.

臨時政府 樹立 100周年을 맞아 出刊된 ‘百年便紙’에서 민영백 氏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할아버지는 상하이로 찾아오는 수많은 愛國 靑年들에게 精神的이고 實質的인 멘토 役割을 하셨다 들었습니다. 상하이의 할아버지 宅에서 下宿하던 尹潽善 前 大統領에게 英國 留學을 勸하고, 이범석 金弘一 將軍을 비롯한 수많은 분들을 軍官學校로 보내 工夫하도록 하셨습니다. 先進 技術과 英語를 배워야 한다며 저희 아버지 민필호를 中國遞信學校에 보내, 요즘 말로 表現하자면 IT(情報技術) 人材로 키우셨습니다.” 신규식이 臨時政府의 理性的인 根幹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人材를 育成하는 데도 앞장섰음을 보여준다.

신규식을 통해 當時 最新 技術이었던 全身(電信)을 배운 민필호는 신규식의 唯一한 血肉인 딸 명호와 夫婦의 緣을 맺는다. 韓國 近代史에서 注目할 獨立運動家 家門이 誕生한 것이다. 민필호는 以後 臨時政府의 資金 調達을 도맡았고 金九 主席의 辦公室腸을 歷任하는 等 獨立運動家로서도 큰 活躍을 펼쳤다. 그의 獨立에 對한 熱情은 子女들에게도 이어졌다. 長女 영주는 光復軍 第2地帶 李範奭의 祕書로 일했으며, 學兵에서 脫出해 臨時政府를 찾아온 김준엽과 만나 結婚한다. 김준엽은 光復軍으로 活動했고 後날 고려대 總長을 지냈다.

민필호의 長男 영수와 次女 영애, 둘째 사위 이윤철度 光復軍에서 큰 活躍을 한다. 이들의 外曾祖父이자 舊韓末 情2品 義禁府都事였던 신용우 공도 나라가 亡한 뒤 義兵將 活動에 積極 나선다. 이를 勘案하면 4臺가 獨立運動에 投身한 셈이다.

상하이=김지영 記者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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