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執拗한 日帝 妨害工作 뚫고 유럽에 울려퍼진 大韓獨立의 외침|東亞日報

執拗한 日帝 妨害工作 뚫고 유럽에 울려퍼진 大韓獨立의 외침

  • 東亞日報
  • 入力 2020年 2月 22日 03時 00分


코멘트

[2019 3·1運動 臨政 100年, 2020 동아일보 創刊 100年]
3·1運動 100年 歷史의 現場 2部 <제93화> 유럽

파리강화회의
 임시정부 대표 김규식(앞줄 오른쪽)과 그를 도와 선전외교를 펼친 파리위원부 직원들.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설득하기 위해 회람을 
8차례 발간해 언론과 학계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독립기념관 
제공
파리講和會議 臨時政府 代表 金奎植(앞줄 오른쪽)과 그를 도와 宣傳外交를 펼친 파리委員部 職員들. 韓國 獨立의 正當性을 說得하기 위해 回覽을 8次例 發刊해 言論과 學界의 關心을 이끌어냈다. 獨立記念館 提供
3·1運動이 일어났던 1919年, 世界의 耳目은 프랑스 파리에 集中됐다. 獨逸의 降伏으로 끝난 第1次 世界大戰(1914∼1918)의 戰後 處理를 論議하는 强化會議가 열렸기 때문이다. 列强의 植民地로 있던 弱小國家들은 우드로 윌슨 美國 大統領이 公開한 戰爭 終結을 위한 14個項의 平和 原則 가운데 ‘民族自決主義’에 熱狂했다.

우리 獨立運動家들 亦是 큰 期待를 걸었다. 윌슨 大統領의 非公式 代表 찰스 크레인은 1918年 11月 中國 상하이(上海)를 訪問해 “파리講和會議는 被壓迫 民族들이 解放을 圖謀하는 데 最適의 機會”라고 紹介했다. 크레인은 獨立運動團體 신한청년단의 指導者 呂運亨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는 “代表를 派遣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鼓舞된 獨立運動團體들은 代表 派遣을 推進한다. 美洲地域 對韓人國民會는 李承晩과 정한경, 상하이 신한청년단은 김규식, 러시아 沿海州의 大韓國民議會는 允諧와 고창일을 各各 代表로 定했다.

하지만 以後 過程은 順坦치 않았다. 美洲 韓人 代表는 日本과의 關係를 의식한 美 政府가 旅券을 내주지 않아 出國하지 못했다. 러시아 韓人 代表는 1919年 2月 出發했으나 革命으로 混亂했던 蘇聯을 被害 몽골, 노르웨이, 英國 等을 거쳐 가는 바람에 그해 9月 26日에야 파리에 到着할 수 있었다. 講和條約이 締結된 지 석 달이 지난 뒤였다.

다만 金奎植은 달랐다. 그는 日帝의 監視를 避하기 위해 中國人으로 假裝하고 中國 旅券을 使用했다. 또 日本을 經由하지 않는 印度洋 路線의 船舶을 利用했다. 김규식에 對한 情報를 入手한 日帝는 파리 駐在 自國 大使館을 통해 프랑스 外交部에 日本 旅券을 所持하지 않은 韓國人의 프랑스 入國을 拒絶하도록 要請했다.(‘한민족독립운동사’) 이런 妨害 工作에도 金奎植은 1919年 2月 1日 상하이를 出發해 40餘 日 뒤인 3月 13日 파리에 到着했다. 그리고 韓國民의 뜨거운 獨立 熱望을 世界에 알리는 데 獻身的인 努力을 아끼지 않았다.


○ 日帝의 妨害를 뚫고 파리에 到着하다

파리위원부가 있었던 파리 샤토됭 거리의 건물이다. 동아일보DB
파리위怨府가 있었던 파리 샤토됭 거리의 建物이다. 東亞日報DB
파리 9具 샤토됭 거리 38番地. 오페라 가르니에 劇場 等 파리 觀光 名所에서 가까운 이곳에는 7層 石造建物이 서 있다. 金奎植은 이 建物에 파리講和會議 韓國民代表官과 韓國通信局을 設置하고 活動을 始作했다. 現在 이 建物 入口에는 ‘大韓民國臨時政府 파리委員部 廳舍 1919-1920’이라는 案內板이 附着돼 있다.

1919年 4月 11日 樹立된 상하이臨時政府는 이틀 뒤인 4月 13日 金奎植을 外務總長 兼 全權大使로 임명하고 信任狀을 파리로 보내주었다. 公式的으로 臨政 代表 資格을 얻은 金奎植은 本格的인 外交活動에 뛰어든다. 그는 于先 스위스에 留學 中이던 이관용과 美軍으로 유럽戰線에 參戰했다가 獨逸에 있던 除隊 軍人 황기환을 불러들여 各各 副委員長과 書記長職을 맡겼다. 상하이에 있던 金탕 趙素昻 呂運弘 等도 그해 5∼7月 代表團에 合流했다. 이처럼 臨政의 初期 外交는 파리講和會議를 準備하는 活動에 集中됐다.(‘독립운동사’)

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가
1919년부터 2년간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안내판.
동아일보DB
臨時政府의 파리위怨府가 1919年부터 2年間 活動했음을 보여주는 案內板. 東亞日報DB
韓國通信國은 韓國 獨立의 正當性을 알리기 위해 4月 26日부터 5月 末까지 便紙 形式의 ‘回覽’을 8次例에 걸쳐 發刊했다. 回覽은 講和會議 各國 代表團과 公館, 言論社, 政治人, 學者들에게 傳達됐다. 5月 10日에는 △韓國의 歷史·文化·國際的 地位 △3·1運動과 臨政 成立 △日本 帝國主義 暴壓的 統治 狀況 等을 紹介하고 韓日合邦 廢止와 大韓民國 國家 主權 承認을 要求하는 獨立공古書를 强化會議에 提出했다. 5月 24日에는 强化會議 議長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臨政 大統領 李承晩 名義의 書翰을 보내 臨政과 金奎植의 外交活動 承認을 要請했다. 日帝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日本 外務省과 强化會議 日本 代表들은 하루 3次例씩 프랑스 新聞社에 電話해 “韓國 代表가 付託하는 것은 무엇이든 揭載하지 말라”며 妨害工作을 펼쳤다.(‘김규식의 生涯와 民族運動’)


○ 冷待에도 西歐 列强의 認識을 바꾸다

파리委員部는 强化會議 側의 反應이 없자 그해 6月 11日 다시 강蛔會議 議長에게 書翰을 보내 韓民族의 獨立 要求에 對한 立場을 要求했다. 强化會議에 參席한 英國 總理와 美國 大統領에게도 같은 便紙를 보냈다. 마침내 기다리던 答信이 到着했지만 內容은 期待와 달랐다. 講和會議는 事務總長 名義로 보낸 書信에서 “韓國 問題는 1次 大戰 以前의 問題이기 때문에 强化會議에서 取扱할 性質의 것이 아니며 곧 創設될 國際聯盟에서 提起돼야 할 것”이라며 한발 뺐다. 事實上 韓國의 要求를 拒絶한 셈이었다. 結局 韓國 問題에 對해서는 어떠한 論議 없이 6月 28日 對獨(對獨) 講和條約만 締結한 채 파리講和會議는 끝이 났다.

그럼에도 關心 밖에 있던 韓國 獨立 問題가 國際的으로 다뤄져야 할 事案이라고 인식시키는 데에는 一定 部分 成功했다. 프랑스 一部 言論은 파리講和會議가 韓國 問題를 外面한 事實에 對해 批判的으로 接近하며 韓國 便을 들었다. 프랑스 日刊紙 앙탕트는 같은 해 7月 7日子 記事에서 “强化會議가 韓國民의 絶叫를 外面했다”고 指摘한 뒤 “韓國民이 永遠히 奴隸狀態로 머물러 있게 된 것을 보고만 있었다”고 批判하기도 했다. 以後 一方的으로 日本 便만 들던 西歐 列强들이 韓民族의 獨立 要求에 귀를 기울이기 始作했다. 2次 大戰 때 英國 等이 韓國 獨立을 支援하고 나선 것도 決코 偶然이 아니었다.(‘임시정부의 파리講和會議 및 유럽 外交活動’)


○ 繼續된 努力에 英國 프랑스에 親韓派 組織 結成

파리委員部는 强化會議 結果에 失望했지만 屈하지 않았다. 宣傳 外交를 이어갔고 마침내 結實을 본다. 파리委員部는 1919年 7月 28日 프랑스 東洋政治硏究會에서 演說會를, 이틀 뒤인 7月 30日에는 프랑스 國民政治硏究會에서 韓國問題報告會를 開催했다. 또다시 이틀 뒤인 8月 1日부터 9日까지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國際社會黨大會에 趙素昻을 派遣하기도 했다. 그 結果 參加國 25個 나라의 滿場一致로 韓國 獨立 關聯 決議案을 통과시켰다. 國際會議에서 韓國 獨立 要求를 인정받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또 國際社會黨本部는 이듬해 4月 大韓民國의 成立과 大韓民國이 獨立國임을 承認하도록 國際聯盟과 列强들에 要求했다. 獨立新聞은 이 事實을 4月 6日子 號外로 報道했다.

파리委員部는 政府 關係者에 局限된 宣傳 外交에는 限界가 있다고 보고 一般人과 西歐 言論에 對한 說得 作業도 竝行했다. 1919年 9月 프랑스語로 된 冊子 ‘韓國의 獨立과 平和’ 5500部를 發行했다. 이어 1920年 5月부터 1921年 5月까지 月刊誌 ‘自由大韓’을 每달 1000部씩 프랑스語와 英語로 製作해 言論社와 各國 有名人士들에게 보냈다.

이런 一連의 努力들이 繼續되자 韓國 問題에 無關心했던 유럽 言論들이 注目하기 始作했다. 1919年 3月부터 1920年 10月까지 133個 프랑스 新聞이 423回에 걸쳐 韓國 關聯 記事를 揭載했고 나머지 유럽 地域에서도 48個 新聞이 94回의 韓國 關聯 記事를 실었다. 韓國獨立 問題가 國際 問題로 浮刻되자 英國 下院과 프랑스 上院에서 韓國 關聯 內容이 討議 對象에 오르기 始作했다. 特히 英國 下院議員들은 1920年 4月 對政府 質疑를 통해 日本의 韓國人 彈壓, 水原 제암리 事件(日帝 軍警의 民間人 虐殺 事件), 韓國의 國際聯盟 加入 問題 等을 따지며 日本을 糾彈했다. 敎皇은 韓國人의 自由와 幸福을 祈禱한다는 글을 파리위原簿에 보내기도 했다.(‘독립운동사’)

英國과 프랑스에선 親韓派 人士들이 잇따라 韓國親友會를 結成했다. 1920年 10月 26日 親韓派 英國人 議員과 敎授 60餘 名이 런던의 下院議事堂 6號室에 모여 韓國親友會를 만들었다. 프랑스에서도 1921年 6月 23日 파리의 社會博物館에서 23名이 韓國親友會를 設立했다. 當時 日本의 同盟國이었던 英國에서 韓國에 同情的인 輿論이 일어난 것은 日帝에 큰 打擊이 됐다.

파리委員部의 宣傳 外交는 1919年 8月 金奎植이 歐美委員部 活動을 위해 美國으로 떠나고 파리委員部 業務를 넘겨받은 황기환마저 1921年 7月 美國으로 건너가면서 一時 中斷된다. 하지만 臨政의 臺(對)유럽 外交는 1929年부터 파리에 考慮通信社를 設立해 獨立運動을 벌여왔던 서영해가 1934年 主불 外務行書 外交委員으로 任命되면서 再稼動된다. 以後 光復을 다섯 달 앞둔 1945年 3月 프랑스 政府는 臨政에 正式 外交關係 樹立을 要請했고 臨政은 서영해를 主불 代表(大使)로 正式 選任했다. 서영해는 光復 以後에도 大使로 活動하다 1947年 歸國길에 오른다.

성동기 記者 esprit@donga.com
#3·1運動 100年 #獨立運動 #유럽 #프랑스 파리 #김규식 #파리委員部
  • 좋아요
    0
  • 슬퍼요
    0
  • 火나요
    0
  • 推薦해요

댓글 0

只今 뜨는 뉴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