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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隊式 體系 갖춘 ‘이八絲’, 3個 大隊 번갈아가며 戰略的 抗拒|東亞日報

軍隊式 體系 갖춘 ‘이八絲’, 3個 大隊 번갈아가며 戰略的 抗拒

  • 東亞日報
  • 入力 2019年 12月 28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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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運動 臨政 100年, 2020 동아일보 創刊 100年]
3·1運動 100年 歷史의 現場 2部 <제86화> 全南 順天

1956년 6월 8일 전남 순천시 낙안읍에서는 낙안3·1운동을 기리기 위한 ‘기미독립운동기념탑’ 제막식이 거행됐다. 사진은
 낙안3·1운동에 참가했던 생존 독립운동가들과 관계자들의 기념촬영 모습이다. 앞줄에 앉은 이들 가운데 배윤주(왼쪽에서 두 번째)를
 뺀 나머지는 이팔사 대원이다. 왼쪽부터 윤점수, 배윤주, 김인채, 김만득, 안은수, 안규진, 신용석, 오영태, 안덕환 지사. 
낙안3·1운동애국지사유족회 제공
1956年 6月 8日 全南 順天市 落雁邑에서는 落雁3·1運動을 기리기 위한 ‘己未獨立運動記念塔’ 除幕式이 擧行됐다. 寫眞은 落雁3·1運動에 參加했던 生存 獨立運動家들과 關係者들의 記念撮影 모습이다. 앞줄에 앉은 이들 가운데 배윤주(왼쪽에서 두 番째)를 뺀 나머지는 이八絲 隊員이다. 왼쪽부터 윤점수, 배윤주, 김인채, 김만득, 안은수, 안규진, 신용석, 오영태, 안덕환 知事. 落雁3·1運動愛國志士遺族會 提供
1919年 4月 2日 全南 順川郡(現 順天市) 낙안면 신기리 뒷山. 漆黑 같은 어둠을 뚫고 8名의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우리는 같은 해 같은 月 같은 날에 죽자”고 約束한 뒤 ‘도란사(桃蘭社)’라는 結社體를 組織한다. ‘도란’은 中國 漢나라 때 劉備·關羽·裝備 3名이 했던 桃園結義와 秦나라 때 文士들의 모임인 亂政(蘭亭)의 考査에서 한 글字씩 따온 것으로, ‘뜻있는 儒生들이 모여 獨立萬歲運動에 목숨을 바치는 決議’를 意味한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獨立運動史·3’)

안호영(大韓帝國 時節 內官), 이병채(勳章) 等이 主軸이 된 도란사 會員들은 이튿날인 4月 3日 日本 도쿄 留學生들의 2·8獨立宣言에서 이름을 딴 ‘이八絲(二八社)’라는 行動대도 結成한다. 日帝의 監視를 避하기 위해 爲親契(爲親契·相扶相助를 위한 親睦모임)로 假裝한 이八絲 隊員은 33人 民族代表를 象徵하는 33名으로 構成됐다.(광주지방법원 順天支廳 裁判記錄, 1919年 5月 2日)

이들은 效率的인 獨立萬歲運動을 위해 이八絲 組織을 크게 3個 大隊로 나누고, 傘下에 小規模 組織인 ‘朝’를 두는 等 軍隊式 體系도 갖췄다. 1大隊가 日帝 軍警에 잡히면 2大隊가 일정한 時差를 두고 示威를 벌이고, 뒤를 이어 3大隊가 또 다른 萬歲運動을 펼치는 게릴라式 戰術 體制였다.(낙안기미독립운동유적보존회, ‘落雁幾微獨立運動史’)

順天 萬歲運動은 이처럼 軍隊式 編成을 바탕으로 組織的인 示威를 일으켰다는 點에서 다른 地域의 萬歲運動과 區別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要因이 있다. 하나는 日帝와의 戰鬪 經驗이다. 문인향(文人鄕)이라고 불릴 만큼 儒林的人 傳統이 剛했던 順川郡 落雁地域에는 1905年 乙巳勒約 以後부터 義兵活動 等 抗日武力鬪爭에 加擔한 人士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이 萬歲運動에 參與하면서 示威를 體系的이고 戰略的으로 이끌어갔다.

또 다른 要因은 失敗 經驗이다. 順天은 鏡城의 萬歲運動 消息을 接한 3月 初부터 示威計劃을 세웠지만 番番이 日帝 警察의 監視網에 걸렸다. 3月 2日 順天 天道敎徒들이 主導하던 示威計劃이 霧散됐고, 3月 16日 基督敎徒들이 順天邑 難鳳山에 모여 萬歲를 부르려던 計劃도 憲兵 分遣隊에 依해 失敗로 끝났다.

朴殷植의 ‘韓國獨立運動之血史’는 順天에서 6次例의 示威, 1500名의 參與, 8名 被殺, 32名의 負傷者가 發生했다고 記錄하고 있다. 이는 모두 도란사와 이八絲 等에 依한 組織的인 萬歲運動이 이끌어낸 結果였다.


○ 이八絲 隊員들의 戰術

順天의 本格的인 萬歲運動은 이八絲 隊員 전평규(當時 45世)가 이끈 1代代로부터 始作된다. 4月 9日 筏橋面 장좌리 아래場터(現在는 寶城郡)에 모인 이八絲 隊員들은 場이 서자마자 奇襲示威를 펼쳤다. 전평규가 안용갑, 안응섭 等과 함께 ‘大韓獨立機’라고 쓴 종이를 흔들며 場꾼들을 向해 “모두들 우리와 같이 朝鮮獨立을 絶叫하여 그 目的을 達成하지 않으려는가”라면서 朝鮮獨立萬歲를 크게 외쳤다. 太極旗가 휘날리고 群衆이 呼應하자 場터는 瞬息間에 示威場으로 바뀌었다. 이에 日帝 憲兵隊가 武力鎭壓에 나섰다. 이날 李八絲 隊員 전평규, 안덕환 等 14名이 逮捕됐고, 負傷者 여럿이 發生했다.

1大隊의 示威 나흘 뒤인 4月 13日(落雁 場날) 2大隊의 萬歲運動이 뒤를 이었다. 2大隊는 落雁邑內(現 낙안읍성 民俗마을) 隣近의 하송리 사람들이 中心이 됐다. 2大隊를 이끈 이八絲 隊員 김종주는 1912年 林秉瓚이 主導한 大寒獨立義軍府의 湖南類似(湖南有司·義兵大將)를 맡는 等 일찌감치 獨立運動에 뛰어든 志士였다.

이날 午後 2時 김종주와 유흥주는 太極旗와 ‘大韓獨立機’라고 쓴 2個의 大型 旗발을 準備한 뒤 落雁邑城 西門 밖에서부터 示威隊를 이끌고 大韓獨立萬歲를 외치며 城內로 進入했다. 序文을 警備하다 制止하려던 日本軍 2名은 場꾼까지 加勢한 示威隊의 猛烈한 氣勢에 물러섰다. 이때 巡察 中이던 日帝 憲兵과 步兵 6名이 銃劍을 휘두르며 鎭壓에 나섰다. 示威隊 맨 앞에 있던 김종주가 “찔러 죽이려면 죽여보아라”고 소리치며 가슴을 열어젖혔다. 日帝 軍警이 주춤대자 示威隊 一部가 軍人들에게 달려들어 銃劍을 빼앗으려 했다. 김종주度 日帝 憲兵의 拳銃을 뺏을 目的으로 激烈한 몸싸움을 했다. 이 過程에서 김종주는 日帝의 칼날에 兩손을 다치며 쓰러졌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아버지(김종주)를 目擊한 아들(善哉)과 示威隊 一部도 日帝 軍警에 달려들었다가 軍도(軍刀)에 傷處를 입는다.

朝鮮總督府 警務局은 當時 狀況을 이렇게 記錄했다. “4月 13日 午後 2時 10分, 낙안면民 約 150名은 舊韓國氣를 앞세우고 落雁邑內 市場에 들어왔는데 憲兵과 步兵들이 制止했음에도 極力 抵抗하므로 銃劍을 使用해 解散시켰는데, 示威者 中 4名이 負傷을 當하였다. 首謀者(首謀者) 5名을 逮捕하고 解散시켰다.”(‘3·1운동 日次報告’)

落雁 3·1運動愛國志士遺族會 裵賢鎭 會長(65)은 落雁邑內 示威가 펼쳐졌던 낙안읍성民俗마을에서 “客死(復元 前에는 落雁初等學校) 바로 앞쪽 ‘亂廛 飮食店’ 一帶가 當時 落雁長이 열린 곳이고 이곳에서 萬歲運動이 進行됐다”고 說明했다. 現在 이곳에는 새로 丹粧된 ‘落雁 3·1獨立運動記念塔’과 萬歲 示威地임을 알리는 標識板이 세워져 當時를 기리고 있었다.

裵 會長은 “해마다 이곳에서 三一節 記念式과 萬歲運動 再現 行事를 開催했는데(올해는 順天市內에서 開催) 그날만 되면 氣溫이 뚝 떨어졌다”며 “當時 落雁 獨立運動家들의 悽絶하고 熾烈한 마음을 傳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 血書로 그린 太極旗

낙안읍성의 2大隊 示威에 이어 다음 날인 4月 14日 3大隊가 主導하는 3次 示威가 進行됐다. 場所는 1次 示威가 펼쳐진 筏橋 場터였다. 1大隊의 1次 示威를 經驗한 데다 前날의 낙안읍성 示威로 獨立萬歲의 熱氣는 달아올라 있었다.

낙안읍성 동문 쪽에 새로 조성한 3·1운동기념탑. 배윤주 지사의 손자인 배현진 씨가 당시의 만세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순천=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낙안읍성 同門 쪽에 새로 造成한 3·1運動記念塔. 배윤주 支社의 孫子인 裵賢鎭 氏가 當時의 萬歲運動에 對해 說明하고 있다. 順天=박영철 記者 skyblue@donga.com
안용갑이 이끈 3次 示威에는 1次 示威 때 檢擧를 避한 이八絲 隊員들과 自發的으로 同參한 신기리 사람들이 主導했다. 이八絲 隊員 안규삼은 왼손 無名指를 베어 흐르는 피로 太極旗를 그리면서 擧事의 覺悟를 다졌다.(안상규, 안응섭 等 判決文)

午後 3時 ‘大韓獨立機’와 피로 그린 太極旗를 앞세우며 萬歲 示威가 始作됐다. ‘順川郡 動哨面 신기리 입(立)’이란 글씨가 덧씌워진 ‘血書(血書) 太極旗’가 대나무로 만든 長대에 揭揚돼 펄럭이며 나타나자 筏橋市長은 感激과 歡呼聲으로 가득 찼다. 示威 群衆과 鎭壓에 나선 日帝 憲兵隊 間에 몸싸움도 펼쳐졌다.

太極旗를 든 안규삼이 日帝 憲兵들에게 逮捕되자 안규진이 땅에 떨어진 太極旗를 다시 주워들어 萬歲를 불렀다. 안규진이 다시 붙잡히자 안운수(안은수)가 주워 들었고, 안운수가 逮捕되자 안상규가 뒤를 이어 太極旗를 들었다. 이런 式으로 示威隊는 日帝 軍警의 鎭壓에 屈하지 않고 ‘大韓獨立萬歲’를 외치며 前進을 繼續했다.

이날 示威는 日帝의 强制鎭壓度 效果가 없을 程度로 活潑하게 展開됐다. 示威隊는 日帝의 武力 鎭壓을 뚫고 筏橋에 位置한 憲兵分遣隊 앞까지 進出했다. 이들은 太極旗를 흔들며 拘禁된 이들의 釋放을 要求했다. 그날 밤 9時까지 이어진 奉化 示威 때에도 日帝 憲兵과의 武力 衝突이 펼쳐졌다. 며칠 後 山上 示威 때에는 日帝 憲兵隊가 山 頂上을 向해 大砲까지 쏘았다. 이는 當時 示威가 이미 戰爭의 樣相으로 發展했음을 보여준다.

裵 會長은 筏橋 萬歲運動을 主導했던 신기리에서 “落雁邑城과 筏橋場터의 中間 地點에 자리 잡은 이곳은 竹山 安氏 等이 居住하면서 儒林 傳統이 剛했고, 최익현 義兵陣에 加擔하는 等 抗日精神이 透徹했던 곳”이라고 說明했다. 이어 “只今은 신기리 出身 獨立運動家들의 後孫이 거의 사라진 데다 3·1運動을 記念하는 標識石도 없어 住民들조차 獨立運動家를 輩出한 事實을 모르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한便 이八絲 隊員들의 3次例 大規模 示威에 影響을 준 事件이 順天邑內에서 있었다. 1919年 4月 7日 順天邑 場날에 儒生 박항래(當時 58歲)가 順天市內의 南門 門樓人 연자루에 올라 “現在 京鄕 各地에서 朝鮮獨立을 위해 獨立萬歲를 부르고 있으므로 順天에도 그와 같이 萬歲를 외치자”고 演說한 後 單獨으로 萬歲를 외치다 日警에 逮捕된 일이다. 그는 光州刑務所에서 獄苦를 치르다 그해 11月 3日 獄中에서 殉國했다. 現地 鄕土史學者들은 “그의 외로운 喊聲이 以後 落雁과 筏橋 等에서 펼쳐진 大規模 示威에 影響을 줬다”고 解釋했다.


▼ ‘獨立義軍府’에 加擔했던 人士들 湖南의 萬歲運動 主導 ▼

崔益鉉의 弟子 임병찬 檄文 發表, 湖南 義兵-儒生들 積極的 呼應
3·1運動 뿌리는 義兵運動人 셈


順天地域의 萬歲運動을 이끈 이八絲 等 結社體 隊員들은 大多數가 儒生이자 實踐하는 知識人이었다. 特히 김종주 이병채 안주환 안규休 等 隊員들은 勉庵 崔益鉉을 筆頭로 한 全南義兵 活動에 앞장섰다. 1910年 日帝의 强制倂合 後에는 軍隊式 祕密結社체인 ‘大寒獨立義軍府’(1912年 結成·以下 獨立義軍府)의 抗日鬪爭에 加擔했다. 이들은 獨立義軍府의 軍隊式 編制를 應用해 萬歲運動을 組織하고 이끌었다.

湖南地域에서 結成된 獨立義軍府는 全北 옥구(現 群山) 出身의 儒學者 임병찬(낙안군手 지냄·사진)이 1912年 高宗의 祕密文書를 받고 ‘獨立義軍府 全羅南道 巡撫大將(巡撫大將)’의 이름으로 祕密裏에 同志를 모으면서 始作됐다. 임병찬은 1906年 스승 崔益鉉의 指揮를 받아 義兵 活動을 벌이다 붙잡힌 뒤 日本 쓰시마(對馬島)에서 귀양살이까지 했던 義兵將이다. 林秉瓚이 檄文을 發表하자 湖南地域 義兵과 儒生들이 積極的으로 나섰다. 그는 1913年 2月 全羅南北道 순무總長 兼 司令長官에 任命된 뒤 全國 規模의 組織을 짰다.

獨立義軍府는 中央元帥府(中央元帥府)에 病馬島總長(兵馬都總長)과 參謀銃藥欌(參謀總約長)을 두어 指揮部를 構成하고 서울·强化·開城·水原·光州에 5嶺(營)을 設置했다. 各 道·部·郡 單位마다 地域別 代表도 選定했다. 獨立義軍府는 結成 當時 儒生과 大韓帝國 前職 官僚들로 이뤄져 王政復古를 目標로 했지만 時間이 지나면서 海外 獨立運動家들과 連帶하는 祕密結社體로 性格이 바뀌었다. 獨立義軍府 人士들은 國內에서 大寒僑民光線會를 結成하고, 國外地域인 西間島에서는 光霽會를 結成해 同志 糾合과 軍資金 募金을 主導했다. 國權返還要求書 提出 및 全 國民 投書 運動 等과 같은 다양한 抗日鬪爭度 準備했다.

독립의군부의 참모관으로 임명하는 고종의 칙명서(勅命書). 독립기념관 제공
獨立義軍府의 參謀官으로 임명하는 高宗의 勅命서(勅命書). 獨立記念館 提供
하지만 1914年 5月 23日 軍資金 募金 過程에서 組織이 發覺돼 임병찬을 비롯한 많은 隊員들이 붙잡혔다. 임병찬은 逮捕된 뒤 1916年 巨文島 流配地에서 病을 얻어 殉國했다. 이로 因해 抗日義兵을 일으켜 擧事를 計劃하던 유림과 義兵勢力은 큰 打擊을 입고 地下로 潛跡했다. 그러다 1919年 3·1運動이 일어나자 獨立義軍府에 加擔했던 湖南地域 人士 相當數가 萬歲運動에 參與했다. 이는 韓國獨立運動史에서 3·1運動을 義兵運動의 延長線에서 理解할 수 있는 端緖가 된다.

順天=안영배 論說委員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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