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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 “배고픔보다 힘들었던 외로움, 그게 나를 미치게 해” [동정민 特派員의 파리 이야기]|東亞日報

백건우 “배고픔보다 힘들었던 외로움, 그게 나를 미치게 해” [동정민 特派員의 파리 이야기]

  • 東亞日報
  • 入力 2019年 2月 1日 14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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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윤정희 切親커플 4話

45년 전 연애 시절, 두 집의 가운데에 위치한 프랑스 파리 예술의 다리(퐁데자르)는 백건우-윤정희 부부의 단골 데이트 
코스였다. 백건우가 시떼섬 근처 멋진 풍경을 가리키자 윤정희가 사진기를 들고 찍으려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지금도 사진기를 들고 이
 곳을 가끔 찾는다. 사진 동정민 파리 특파원
45年 前 戀愛 時節, 두 집의 가운데에 位置한 프랑스 파리 藝術의 다리(퐁데자르)는 백건우-윤정희 夫婦의 단골 데이트 코스였다. 백건우가 詩떼섬 近處 멋진 風景을 가리키자 윤정희가 寫眞機를 들고 찍으려 하고 있다. 두 사람은 只今도 寫眞機를 들고 이 곳을 가끔 찾는다. 寫眞 동정민 파리 特派員
45년 전 연애 시절, 두 집의 가운데에 위치한 프랑스 파리 예술의 다리(퐁데자르)는 백건우-윤정희 부부의 단골 데이트 코스였다. 백건우가 시떼섬 근처 멋진 풍경을 가리키자 윤정희가 사진기를 들고 찍으려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지금도 사진기를 들고 이 곳을 가끔 찾는다. 사진 동정민 파리 특파원
45年 前 戀愛 時節, 두 집의 가운데에 位置한 프랑스 파리 藝術의 다리(퐁데자르)는 백건우-윤정희 夫婦의 단골 데이트 코스였다. 백건우가 詩떼섬 近處 멋진 風景을 가리키자 윤정희가 寫眞機를 들고 찍으려 하고 있다. 두 사람은 只今도 寫眞機를 들고 이 곳을 가끔 찾는다. 寫眞 동정민 파리 特派員

“여기는 이 쪽(윤정희) 下宿집과 저희 집 딱 中間이었거든요. 다른 곳 가서 데이트 할 必要가 없었어요. 이름부터 너무 마음에 들잖아요. 藝術의 다리”

프랑스 파리 루브르 博物館과 에꼴 드 보자르(高等藝術大學) 사이에 놓인 藝術의 다리(퐁데자르·Pont des arts)는 센江 사이에 놓인 37個 다리 中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꼽힌다. 왼쪽으로는 詩떼섬이, 오른쪽으로는 저 멀리 에펠塔이 보인다.

백건우는 루브르 博物館으로 들어가는 通路를 가리키며 “45年 前 戀愛를 할 때 이 곳을 왔다 갔다 했지요”라고 말했다. 윤정희의 下宿집은 루브르 博物館 옆, 백건우의 집은 생제르망데프레 쪽에 있었다. 戀愛 時節 두 집 가운데인 藝術의 다리에서 늘 아쉽게 헤어졌다.

두 사람은 다리 위에서 무엇을 하며 戀愛를 했을까. 백건우는 “뭐 하긴 뭘 해요. 風景 보는 거죠”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두 사람이 뭘 하는지 지켜봤다.

“오리가 있네”

윤정희가 다리 밑을 내려다보며 핸드백 안에서 작은 카메라를 꺼내 寫眞을 찍었다.

“어디” 하고 곁으로 온 백건우度 핸드폰으로 寫眞을 찍었다. 백건우는 “나는 이 쪽 時떼섬이 좋더라”며 연신 寫眞을 찍어댔다. 윤정희는 “어머, 환한 해 좀 봐” “遊覽船이야. 自己야 이리 와. 遊覽船 지나간다”고 男便을 불러댔고, 연신 寫眞을 찍었다.

두 사람의 趣味는 寫眞 찍기다. 各自 風景을 찍고 나서는 서로에게 “이거 보라”며 자랑했다. 어김없이 “正말 예쁘다”는 맞장구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했다.
지난해 12월 초 스페인 말라가에 연주 여행을 떠났을 때 백건우가 부인 윤정희를 찍은 사진. 사진제공 백건우
지난해 12月 初 스페인 말라가에 演奏 旅行을 떠났을 때 백건우가 夫人 윤정희를 찍은 寫眞. 寫眞提供 백건우

백건우의 寫眞 趣味는 美國 뉴욕 高等學生 時節부터 생겼다.

“寫眞이 藝術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푹 빠졌어요. 寢臺 한 칸 밖에 없는 좁은 房에서 밥을 굶으면서도 돈을 아껴 中古品 라이카 카메라와 現像機를 사서 밤마다 現象했어요. 아마 외로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15歲의 나이에 始作한 백건우의 美國 生活은 배고픔과 외로움의 連續이었다. 백건우가 그 때 이야기를 꺼내자 윤정희는 數次例 “正말 그랬어? 나도 몰랐네”라며 놀라워했다.

1961年 한양공고 1學年生 백건우는 아버지와 함께 生涯 첫 飛行機를 탔다.

뉴욕에서 열리는 第1回 드미트리 미트로폴리스 콩쿠르에 參加하기 위해서였다. 個人 돈으로는 海外에 나갈 엄두도 못 내던 時節. 서울에서 豫選을 거쳐 뽑힌 백건우는 젊은 音樂人들을 위해 만들어진 韓美財團의 도움으로 콩쿠르에 參加할 수 있었다.

-人生 첫 海外旅行인가요.

“그렇죠. 當時 直航이 없어서 釜山 도쿄 하와이 로스앤젤레스(LA)를 거쳐 며칠 걸려 뉴욕에 갔어요. 서울에서 釜山 갈 때는 프로펠러 飛行機를 타고 간 記憶이 나요.”

-元來 콩쿠르 以後 繼續 美國에 살 생각이었나요.

“全혀요. 그러기를 바랐지만 不可能했죠.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어요. 財團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와 함께 다녀올 經費도 艱辛히 마련했어요.”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콩쿠르 끝나고 돌아오려고 할 무렵 콩쿠르 主催者인 한나 색슨이 백건우에게 “뉴욕 아트 스쿨에 다니면서 피아노 工夫를 繼續하는 게 어떠냐”는 提案을 해 왔다. 줄리어드 音大의 世界的인 피아노 敎授 로지나 레빈도 紹介했다. 레빈 敎授는 크라이番, 존 브라운, 딕 히터 等을 키워낸 最高의 피아노 調鍊師였다.
백건우의 인생을 바꿔 놓은 바로 그 연주회. 15세 때 미국 뉴욕 카네기 리사이틀홀에서 열린 드미트리 미트로폴리스 콩쿠르 연주 장면. 이 콩쿠르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눈에 띄면서 백건우는 미국에서 피아노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사진제공 백건우
백건우의 人生을 바꿔 놓은 바로 그 演奏會. 15歲 때 美國 뉴욕 카네기 리사이틀홀에서 열린 드미트리 미트로폴리스 콩쿠르 演奏 場面. 이 콩쿠르에서 世界的인 指揮者 레너드 번스타인의 눈에 띄면서 백건우는 美國에서 피아노 工夫를 할 수 있게 됐다. 寫眞提供 백건우

-그게 可能한 일인가요.

“저도 內幕을 25年 後夜 偶然히 알게 됐어요. 美國 마이애미 協演을 갔다가 偶然히 한나 색슨을 다시 만났어요. 點心食事를 함께 하는데 ‘너 或是 25年 前 콩쿠르에서 발코니에서 나와 이야기하던 사람 기억나니’라고 묻더군요.”

백건우는 똑똑히 記憶하고 있었다. 콩쿠르 途中 카네기 리사이틀홀에서 라흐마니노프 3張 1樂章을 練習하고 있을 때 한나 색슨과 한 神社가 발코니에 서서 自身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옆에 있던 紳士가 世界的인 指揮者 레너드 번스타인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제 演奏를 듣고 한나 색슨에게 ‘當身이 책임지고 키우라’고 했대요. 번스타인이 없었다면 저는 영락없이 서울로 돌아왔겠죠.”

● “외로움, 그게 나를 미치게 해”

뜻하지 않게 家族 없이 홀로 美國에서 學窓 時節을 보내게 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배고픔과 외로움이었다.

-英語는 할 줄 알았습니까.

“아뇨. 처음에 到着했을 때는 예스와 怒濤 헷갈리는 水準이었어요.”

-寄宿舍에서 살았나요.

“아뇨. 房 한 칸 얻었는데 寢臺 하나 넣으면 꽉 차는 작은 房이었어요. 電氣 곤로 하나 놓고 밥은 鷄卵 하나 풀어서 먹었죠. 오페라, 발레 練習에 伴奏해주고 用돈을 벌었어요.”

윤정희가 옆에서 “그래도 라두史라고 돈 많은 女子가 도와줬잖아”고 하자 백건우는 “그 사람은 나를 利用했을 뿐이지 난 그 사람 생각만 하면…”이라고 손을 내저었다.

백건우는 ‘25弗의 屈辱’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 女子는 집에 모임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저를 自己 子息이라고 紹介하며 피아노를 치게 했어요. 제 後援者 行世를 한거죠. 많은 사람들이 저를 金錢的으로 도와주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돈은 한 番도 받은 적이 없어요. 한 番은 제가 거의 一週日을 굶고 너무 배가 고파서 찾아갔어요. 25弗만 빌려달라고 했죠. 그런데 그 돈 많은 富者가 한참 생각을 하더니 저를 後援해주는 韓美財團에 보낼 테니 그 쪽에서 받으라고 하더군요. 稅金을 안 내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나는 죽어가고 있는데…”

윤정희가 “그래서 받았어? 그걸 왜 받아”라고 외쳤다. 백건우는 “그만두라고 하며 나왔죠. 人間으로 안 보이더라고요.”라고 人相을 찌푸렸다.

백건우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배고픔보다 더 힘든 건 외로움이었어요. 그게 사람을 미치게 해. 좋은 親舊들이 있었지만 父母를 代身할 수는 없잖아요. 空虛함을 채울 수가 없었어요. 저 自身에 對한 確信도 없어서 音樂人으로 살겠다는 決心을 하는데도 참 오래 걸렸죠.”

-映畫監督을 꿈꾸기도 했다면서요.

“내 藝術性에 맞는 職業이 무엇인가 苦悶이 많았어요. 피아노가 두려웠기도 했고. 뉴욕은 全 世界 모든 映畫를 다 볼 수 있었거든요. 외로워서, 世界 文化를 接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人間의 삶을 볼 수 있어서 寫眞과 映畫에 푹 빠졌죠.”

-中間에 音樂을 抛棄할 생각은 안 했나요.

“한창 힘들 때 값지고 神祕한 體驗을 했어요. 建物 8層 房 한 칸에서 下宿할 때인데, 저 自身에 對한 確信도 없고, 몸도 안 좋았어요. 宏壯히 추운 겨울이었는데 뉴욕 20街에 있는 病院에서 80街 집까지 걸어왔어요. 人生의 한치 앞도 안 보였죠. 집 안에 들어왔는데 窓門 바깥으로 햇빛이 華奢하게 비치더니 옆 建物에서 소리가 들려요. 英語로 ‘come over here(이리와)’ ‘come over here(이리와)’. 나도 모르게 窓門을 열었어요.”

듣고 있던 윤정희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窓門틀에 걸렸는데 그대로 氣絶을 했어요. 깨어나니 시커먼 밤이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나에게는 復活이었던 것 같아요. 惡魔가 窓 밖으로 나를 불렀지만 守護天使가 그걸 막아준 것 같은 느낌. 그 以後부터 些少한 걱정은 싹 사라졌어요. 나를 完全히 바꾼 모멘텀이었죠.”
폴란드 쇼팽이 태어난 생가에서. 사진제공 백건우
폴란드 쇼팽이 태어난 生家에서. 寫眞提供 백건우


● 나를 키워준 人生의 스승

뉴욕 아트 스쿨을 卒業한 백건우는 줄리아드 音大에 入學했다.

-돈이 없는 高等學生 時節 어떻게 레빈 敎授에게 레슨을 받았나요.

“저는 한 番도 레슨費를 드린 적이 없어요. 오히려 大學 때는 學校에 이야기해서 奬學金을 받게 해주셨죠. 어느 날은 저한테 ‘生活이 괜찮냐’고 물어요. 率直히 ‘힘들다’고 말했더니 곧바로 手票 25달러를 주셨어요. 밥 사먹으라고요. 그것도 何必 딱 25달러였네요.”

-그 분이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제 音樂을 참 아껴주셨어요. 第 心理도 너무 잘 아는 분이셨죠. 레슨 받으러 宅에 가면 ‘몸 풀고 있어’라고 말하시곤 안房에서 化粧하고 옷을 챙겨 입고 나오세요. 어느 날 유난히도 피아노치기 싫은 날이었어요. 제가 봐도 形便없이 치고 있는데 안房에서 나오시면서 ‘너는 참 훌륭한 피아니스트野’하고 稱讚을 하시는 거에요. 마음이 사르르 녹으면서 演奏家 그냥 풀렸죠. 5年이 지나 이제 레빈 先生님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刺戟이 必要한 것 같아 헝가리 出身의 일로나 카봇 先生님께 배우겠다고 했죠,”

-그렇게 잘해줬는데 레빈 敎授가 섭섭해 하진 않았나요.

“그게 더 氣가 막혀요. 힘들게 말씀 드렸더니 레빈 敎授님이 ‘네가 카봇 先生에게도 배울 點이 있을 거야. 하지만 아직 나한테 배울 것도 더 있어. 카봇 先生에게 내가 繼續 가르쳐도 되나 물어봐’라고 하시는거에요. 그래서 두 先生에게 레슨을 받았어요. 엄청난 韻이죠. 世界的인 두 분이 서로 電話해서 백건우의 요즘 連奏 어떻게 생각하냐고 相議도 했어요. 카봇 先生 亦是 레슨費가 비싸기로 有名한 분인데 저에게는 한 番도 받은 적이 없어요.”

음악을 탐구하는 자세를 가르쳐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빌헬름 캠프 선생과 함께. 맨 왼쪽이 백건우, 캠프 선생은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사진제공 백건우
音樂을 探究하는 姿勢를 가르쳐준 世界的인 피아니스트 빌헬름 캠프 先生과 함께. 맨 왼쪽이 백건우, 캠프 先生은 앞줄 왼쪽에서 세 番째. 寫眞提供 백건우


-傳說의 피아니스트 빌헬름 캠프에게도 스승이죠?

“빌헬름 캠프도 레빈 先生이 推薦해서 만나게 된 거에요. 그 분은 해마다 2週 동안 하루 終日 베토벤 疏惰나 32曲과 協奏曲 5曲 全曲을 學生들이 치는 걸 듣고 本人도 쳤어요. 한 音 한 音을 성스럽게 생각했죠. 音樂을 對하는 姿勢를 배웠어요. 한 番은 時計를 찬 채로 피아노를 쳤다가 크게 혼나기도 했죠.”

-遊學 時節인 60, 70年代는 美國人들은 韓國을 잘 모를 때죠.

“全혀 모르죠. 어느 날 뉴욕에서 버스를 탔는데 運轉技士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요. 제가 되물었어요. 어느 出身 같은지. 그 記事가 日本 中國부터 始作해 印度 베트남까지 10個 가까운 東洋 國家 이름을 댔는데 끝까지 韓國은 안 나오더라고요. 그건 그나마 兩班이에요. 한 番은 黑人 取扱하며 버스 記事가 理由 없이 내리라고 한 적도 있어요.”

-집이 그리울 때는 없었나요.

“이탈리아에서 서머캠프에 參與하고 있을 때인데, 하루는 저녁에 호텔 로비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어머니 품 안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어요. 눈물날 程度로.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그리운 對象이 어머니 뿐 아니라 韓國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1972年 뉴욕 튤리홀에서 한 라벨 피아노 全曲 獨走는 그에게 分水嶺이 됐다. 뉴욕타임스가 그 公演을 “代價도 해내지 못한 엄청난 連奏”라며 極讚했다.

“라벨에 흠뻑 빠져 있을 때였거든요. 音樂人들이 그러죠. 제가 音樂을 選擇한 게 아니라 音樂이 저를 選擇했다고. 그럴 때였죠. 그래서 全曲을 하룻밤에 연주했거든요. 뉴욕타임스에 紹介 되고 그 프로그램으로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 獨奏會를 했죠.”

以後 世界的인 피아니스트로 자리 잡은 백건우는 1970年代 파리, 80年代 英國, 90年代 以後 東유럽, 러시아, 最近 中國까지 全 世界를 돌아다니면서 演奏를 하고 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필하모니홀에서 라흐마니노프 전곡 공연을 마치고. 사진제공 백건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필하모니홀에서 라흐마니노프 全曲 公演을 마치고. 寫眞提供 백건우


< 8日 마지막 5回는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人生觀과 백건우 윤정희를 인터뷰하며 느낀 에필로그를 傳해드립니다. >

파리=동정민特派員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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