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날 찍힌, 爆發 後 다른 아이들과 달려가고 있는 제 寫眞을 보셨을 겁니다. AP 寫眞記者로 일했던 닉 우트가 찍은 寫眞입니다. 베트남 戰爭의 가장 有名한 이미지 中 하나가 됐죠.
닉은 그 놀라운 寫眞으로 제 人生을 永永 바꿔놓았습니다. 하지만 제 生命의 恩人이기도 합니다. 寫眞을 찍은 直後 그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저를 毯요에 싸 저를 應急室에 데려가줬습니다. 永遠히 感謝할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때때로 그를 미워했던 記憶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고 그 寫眞도 正말 싫어하게 됐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어린 少女高 발가벗었는데 왜 그런 寫眞을 찍었을까? 우리 父母님은 왜 날 保護하지 않았을까? 왜 그 寫眞을 印畫했으며, 다른 兄弟, 四寸들은 다 옷을 입고 있는데 왜 나만 발가벗고 있었을까?’ 寫眞 속 저는 못나보였고 그게 부끄러웠습니다.
자라면서 사라져버리고 싶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제 몸 3分의 1에 남은 火傷의 傷處, 慢性的 痛症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몸에 남은 損傷은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수치스러웠습니다. 傷處를 옷으로 가려봤지만 不安과 憂鬱感은 深刻했습니다. 學校 親舊들은 저를 놀렸고 이웃은 勿論 父母님에게도 全 憐憫의 對象이었습니다. 漸漸 더 나이를 먹으며 아무도 저를 사랑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 寫眞은 漸漸 더 有名해졌습니다. 제 마음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제 삶의 길을 찾기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80年代부터 言論 인터뷰 要請은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全 世界 指導者들은 저 經驗을 듣고 그 寫眞에서 意味를 찾기를 願했습니다. 거리로 뛰쳐나오던 그 아이는 戰爭 恐怖의 象徵이 됐습니다. 저는 제가 그저 ‘被害者’로 비춰질까 두려웠습니다.
寫眞은 말 그대로 瞬間을 捕捉합니다. 하지만 寫眞 속 살아남은 사람들, 特히 어린아이들은 繼續해 남은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單純한 象徵이 아닙니다. 우리도 같은 사람이고, 일자리를 찾아야하고, 戀人도, 包容해 줄 地域社會도, 배우고 養育될 곳도 必要합니다.
前 成人이 되고 캐나다로 亡命한 뒤에야 마음의 平和를 찾았고 社名도 깨달았습니다. 信仰, 男便, 親舊들의 도움 德입니다. 以後 全 世界 戰爭 被害를 입은 어린이들에게 心理·醫療 支援을 하는 財團의 設立에 參與해 希望을 나눴습니다.
마을에 爆彈이 쏟아지고, 집이 무너지고, 家族들이 죽고, 無辜한 이들의 死體가 거리에 늘어져있는 모습을 보는 게 어떤 건지 저는 압니다. 수많은 寫眞과 뉴스로 記錄됐던 베트남 戰爭이 남긴 慘狀이었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모습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發見되고 있습니다.
또 最近 美國 校內 銃器亂射 事件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外國에서 벌어지는 戰爭처럼 屍體가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亂射도 戰爭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殺戮의 寫眞을, 特히 아이들의 寫眞을 퍼뜨린다는 건 너무한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모습들을 正面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結果를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면 戰爭의 現實에서 回避하기가 더 쉬워집니다.
제가 텍사스 유밸디 校內銃器事件 遺家族을 代身해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銃器亂射가 지나간 餘波가 어떠한 지를 보여줘야만 世上에 끔찍한 現實을 제대로 알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暴力에 고개를 들어 맞서야 합니다. 그 첫 段階는 直視입니다.
저는 몸에 戰爭의 結果(傷處)를 지니고 다닙니다. 精神的, 物理的 傷處는 時間이 지난다고 벗어나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9살 少女 時節 제 寫眞이 지닌 힘에, 또 그 以後 저라는 사람이 걸어온 旅程에 이제 感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 제대로 記憶도 못하는 過去의 恐怖는 이제 모두의 恐怖가 됐습니다. 이제는 제가 平和의 象徵이 된 것에도 自負心을 느낍니다. 그 寫眞 때문에 제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도 勿論 많았지만, 50年이 지난 只今, 그래도 저는 닉이 그 瞬間을 捕捉해줘서 기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寫眞은 늘 人間이 저지른 形容할 수 없는 惡行을 상기시켜줄 것입니다. 如前히 저는 平和, 사랑, 希望, 容恕가 그 어떤 武器보다 늘 剛하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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