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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을 수 없는 엄마의 손을 그린 畫家 [김민의 그림이 있는 하루]|東亞日報

잡을 수 없는 엄마의 손을 그린 畫家 [김민의 그림이 있는 하루]

  • 東亞日報
  • 入力 2021年 11月 27日 10時 3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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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실 고르키 ‘엄마와 나’

當身에게 ‘엄마’는 어떤 存在인가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스포츠 스타나 有名人, 或은 一般人 까지도 인터뷰를 하다가 ‘엄마에게 한 마디’를 付託하면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자주 目擊합니다.

엄마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내가 胎줄로 連結되었던 世上의 唯一한 사람. 때로는 그 連結 고리에서 숨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또 애틋한. 한 마디 말로는 整理하기 힘든 그런 複雜한 存在가 바로 엄마일 것 같습니다.

한 作家가 어릴 적 自身과 엄마의 모습을 그린 作品이 있습니다. 于先 그림을 먼저 볼까요.

○ 하얗게 漆해진 꽃무늬 치마


왼쪽이 當時 8살이었던 作家,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엄마입니다. 그런데 普通 엄마라고 하면 떠올리는 따스하고 포근한 雰圍氣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마치 彫刻像 속에 갇힌 듯 뻣뻣한 姿勢를 하고 있고, 또 少年의 오른쪽 팔과 엄마의 왼쪽 팔이 닿을 듯 말 듯, 全혀 接觸하고 있지 않은 모습입니다.

또 눈길을 끄는 것은 엄마의 검은 눈瞳子가 눈에 비해 宏壯히 크게 描寫되었다는 部分이었습니다. 作家가 元來 사람의 눈을 이런 式으로 그린 걸까, 確認하기 위해 少年의 눈과 比較해 보면 엄마의 눈瞳子가 훨씬 더 크고 흐릿하게 描寫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少年의 엄마가 元來 이런 눈을 갖고 있었던 걸까? 多幸히 이 그림과 比較할 수 있는 寫眞이 있습니다. 한 番 보겠습니다.

아실 고르키와 엄마의 사진
아실 고르키와 엄마의 寫眞


이 寫眞이 作家가 보고 그린 元本입니다. 엄마의 눈이 좀 더 크지만 少年의 눈보다 더 또렷하죠. 寫眞과 比較해보면 마치 瞳孔이 풀린 듯 非正常的으로 크게 描寫됐다는 걸 더욱 確實히 알 수 있습니다. 作家는 왜 엄마의 눈을 이렇게 그린 걸까요?

異常한 點은 또 있습니다. 原本 寫眞을 다시 한 番 살펴볼까요. 이 寫眞에서 보는 사람의 눈길을 가장 사로잡는 것은 바로 엄마의 옷입니다. 꽃무늬가 빽빽하게 그려진 옷을 寫眞 속 엄마는 입고 있지요. 그런데 그림을 다시 볼까요.

엄마의 치마는 무늬가 모두 사라진 흰 色으로 거칠게 漆해져 있습니다. 밝은 色 德分에 畵面에서 가장 視線을 사로잡긴 합니다. 이 흰 덩어리를 두고 엄마의 팔, 少年의 옷과 손에 쥐고 있는 꽃의 色이 定해졌다는 걸 斟酌할 수 있습니다.

또 가장 特異한 것은 엄마의 손입니다. 치마 위에 가지런히 놓였던 손은 마치 繃帶가 감긴 듯 동그란 圓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畫家가 엄마를 왜 이렇게 描寫했을까요. 여기에는 悲劇的인 事緣이 있습니다.

○ 잡을 수 없는 손
아실 고르키
아실 고르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아르메니아 出身의 美國 作家 아실 고르키(1904~1948)입니다. 그가 10代였던 1915年, 고르키의 엄마는 아들의 품에서 굶주린 채 世上을 떠나고 맙니다. 엄마와 아들 그리고 세 姊妹는 집을 잃고 길거리를 轉轉하던 浮浪者였습니다.

그 原因은 1915~16年에 있었던 아르메니아 虐殺 事件입니다. 고르키의 家族은 當時 오스만투르크 帝國 接境地帶에 살았는데, 이 때 오스만 帝國이 아르메니아인을 無差別 虐殺하고 强制 移住 시킵니다. 고르키의 아버지는 第1次 世界大戰 參戰을 避하기 위해 1908年 美國으로 떠난 狀態였습니다.

當時 오스만제국은 英國軍이 侵略해오자 叛亂을 막겠다는 理由로 아르메니아인을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等으로 移住 시켰고 이 過程에서 100萬 名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굶주림과 疾病으로 死亡한 것으로 傳해집니다. 이 過程에 있었던 고르키 또한 집을 떠나야만 했고, 1年 뒤 어린 少年의 품에서 엄마가 숨을 거두었던 것이지요.

아르메니아 강제 이주 당시 사망한 아이.
아르메니아 强制 移住 當時 死亡한 아이.


世上을 떠나기 前 엄마는 少年 고르키를 大理石 椅子에 앉혀 놓고 “너는 詩人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當時 어머니가 생각했던 가장 아름다운 것이 ‘詩’였고, 아들이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 엄마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少年의 心情은 어땠을까. 그래서 꽃무늬 치마를 하얗게 漆해버린 걸까요. 어쨌든 少年 고르키는 엄마의 말을 잊지 않고 使命처럼 여기며 藝術家가 됩니다.

1920年 美國으로 떠난 고르키는 다시 만난 아버지로부터 엄마의 寫眞을 건네받게 됩니다. 떨어져있었던 아버지에게 家族들의 安否를 傳하려 엄마가 보낸 寫眞이었습니다. 고르키는 뭉크가 누이의 마지막 모습을 平生에 걸쳐 그렸던 것처럼, 엄마의 모습을 여러 가지 버전으로 그렸습니다. 비록 世上을 떠나 손을 잡을 수도, 눈을 맞출 수도 없지만 永遠히 그리운 엄마를 繼續해서 그림 속에서 만났던 것이지요.

○ 돌아갈 수 없는 故鄕
고르키는 美國으로 移住한 뒤 마치 過去를 지우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元來 이름 步스타니크 마누그 阿道移安을 지우고 ‘아실 고르키’라는 이름을 새로 지은 것이 端的인 例입니다.

勿論 새로 지은 이름에서도 그는 自身이 겪었던 苦痛을 놓지 않습니다. ‘아실’은 러시아語로 쓰다(bitter)는 뜻이고, 고르키는 러시아의 作家 막심 고르키에서 따온 것입니다. 悲劇이 준 쓴 맛을 이름으로 새긴 다는 것도 平凡하지 않습니다.

고르키는 뉴욕에서 어느 程度 認定을 받았지만, 作品에 걸맞는 充分한 評價를 받진 못했습니다. 고르키 自身도 都市의 삶에서 끊임없는 외로움을 느낀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自身의 女同生에게 보낸 便紙에서 “수많은 親舊를 만나도, 數千 名의 사람들 사이에 둘러 싸여 있어도 나는 언제나 외로움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永遠히 빼앗겨버린 엄마, 그리고 집과 故鄕에 關한 것이었겠지요.



그림만은 熱心히 그렸던 고르키는 結婚한 뒤 아기를 키우기 爲해 버지니아州로 移住하고 이곳에서 自然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때 그의 그림 또한 變化를 맞게 되는데요. 以前에는 세잔과 피카소의 影響을 받은 立體派 스타일에 가까웠다면, 漸次 물감이 눈물처럼 흐르는 等 作家의 心象을 더욱 果敢하게 드러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세잔과 피카소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自身만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위 그림을 그릴 무렵 고르키는 이렇게 털어 놓습니다.

“나는 어릴 적 故鄕에서 쫓겨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의 가장 생생한 記憶들은 그 故鄕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 때 나는 빵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처음으로 붉은 꽃을 보았으며 달을 보았다. 이 記憶들이 나중에 形態가 되고 色彩가 되었다.”

結局 엄마를 비롯한 어린 時節의 幸福을 平生 그리워했고, 그 때의 記憶을 끊임없이 變奏하며 作品을 하고 있었다고 作家는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永遠히 돌아갈 수 없는 그 곳을 말이죠.

고르키의 삶을 보며 只今도 유럽 곳곳을 轉轉하고 있는 難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全體로 보면 골칫거리지만 個個人의 삶을 보면 커다란 悲劇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고르키의 삶과 그림을 통해 間接的으로 斟酌해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집은 安樂하고 所重한 곳인데 그것을 떠나야만 하고, 永遠히 異邦人으로 살아야 하는 삶은 무엇인지….

누군가는 藝術을 華麗한 裝飾, 琉璃欌 속 寶石과 같은 아름다움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고르키와 같은 作家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個個人이 갖고 있는 삶의 다양한 感情들이 時時刻刻 자아내는 正直한 리듬입니다. 그가 平生 떨칠 수 없었던 슬픔을 흐르는 물감에 풀어냈듯이 말이죠. 單純한 예쁨이 아닌 津한 아름다움. 오늘 고르키의 그림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김민 記者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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