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 千兩이 나오는 터’…富者들 集結地 眞骨목 가보니 [안영배의 都市와 風水]|東亞日報

‘하루 千兩이 나오는 터’…富者들 集結地 眞骨목 가보니 [안영배의 都市와 風水]

  • 東亞日報
  • 入力 2021年 11月 19日 17時 30分


코멘트
慶北 大邱 市內는 곳곳에 작은 河川이 發達해 장마철만 되면 물이 잠기는 ‘물의 都市’였다. 그러다가 都市 開發과 더불어 여러 河川이 복개되면서 漸次 뜨거워진 都市로 變貌했다. 地形의 變化는 交通과 物流의 흐름을 바꾸게 한다. 이때 蕃盛했던 골목이 衰落하거나, 沈滯돼 있던 곳이 發展하는 現象이 빚어진다. 100餘年 前 近代의 歷史와 文化를 품고 있는 大邱 市內 골목길 旅行을 하다 보면 땅 기운의 變化를 體驗해보는 妙味가 있다.

◆하루에 千兩이 나오는 터


16世紀 末 韓半島에서 臨津·精油 戰爭이 끝나자 明나라 水軍都督 진린의 麾下 長壽 杜思忠(作戰參謀長)은 歸化를 決心한다. 그는 戰爭터에서 陣地와 兵營 터를 고르는 任務를 遂行한 風水 戰略家였다. 李舜臣 將軍과도 親分이 두터웠다. 李舜臣은 그에게 ‘鳳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漢詩를 지어 주는 等 親密感을 表示했고, 杜思忠은 李舜臣 將軍이 戰死하자 그의 묏자리를 直接 選定해 주기도 했다.

오랑캐(靑)에 依해 明나라의 滅亡을 미리 내다보고 朝鮮에 歸化한 그가 定着地로 選擇한 곳은 漢陽이 아닌 大邱였다. 바로 大邱市 中區 포정동의 慶尙監營公園 터다. 그가 ‘하루에 千兩이 나오는 名當’으로 指目한 곳이다.

杜思忠은 倭軍과의 戰爭 當時 韓半島 곳곳을 누비면서 大邱를 점찍어 두었다. 그는 大邱의 南쪽 山인 大德山에서 北쪽으로 치달아온 地脈(地脈)을 有心히 살펴보았다. 地脈은 大邱 市內 硏究山(連龜山; 現 大邱제일중학교)으로 흘러와 暫時 숨을 고루었다. 月견산, 오포山이라고도 불리는 硏究산이 大邱의 鎭山(鎭山)李 되는 셈이다.

대구 남쪽 산을 바라보고 있는 거북바위. 연구산 정상의 대구제일중학교 교정에 있는 이 돌거북은 일제강점기때 머리와 꼬리 방향이 바뀌는 등 수난을 겪었다.
大邱 南쪽 山을 바라보고 있는 거북바위. 硏究山 頂上의 大邱제일중학교 校庭에 있는 이 돌거북은 日帝强占期때 머리와 꼬리 方向이 바뀌는 等 受難을 겪었다.


興味롭게도 硏究山, 卽 大邱제일중학교 校庭에는 돌거북이 造成돼 있다. 거북의 머리는 南쪽의 大德山을 바라보고 있고, 꼬리는 北쪽으로 向하도록 配置돼 있다. 現地에서는 돌거북을 山등성이에 묻어 南쪽 産科北쪽 大邱 中心街가 地脈이 통하도록 한 措置로 解釋하고 있다. 돌거북은 日帝强占期와 開發 過程에서 머리와 꼬리 方向이 바뀌는 受難도 겪었는데, 2003年 ‘達句伐 얼 찾는 모임’에서 只今과 같이 位置를 바로 잡았다고 한다.

아무튼 대덕산의 地脈을 이어받은 硏究山의 돌거북 꼬리가 向하는 方向은 北쪽의 반월당驛(大邱 地下鐵驛) 近處 작은 언덕배기다. 只今은 痕跡이 稀微하지만 峨嵋山으로 불린 이곳은 東學 創始者 崔濟愚의 處刑 場所이자 天主敎 殉敎 聖地인 觀德亭이 자리한 곳이다.

杜思忠은 峨嵋山을 基準으로 다시 더 北쪽으로 800m 남짓 떨어진 慶尙監營公園까지 그 기운이 影響을 미친다고 보았다. 발걸음으로는 千步(千步) 程度 距離다. 杜思忠式 ‘財物 風水法’에 依하면 한 걸음을 한兩씩 計算해 千步는 千兩이 된다. 그만큼 이 一帶가 明堂이라는 뜻이다.

現在 慶尙監營公園에는 杜思忠이 元來 살았던 집은 보이지 않는다. 宣祖때人 1601年 이곳에 慶尙監營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慶尙監營은 以後 日帝强占期인 1910年 慶尙北道 廳舍로 開廳한 뒤 1965年 移轉할 때까지 ‘嶺南의 首都’ 役割을 했다. 嶺南 物資와 稅金의 集結地였던 이곳은 杜思忠의 豫言대로 ‘하루 千兩이 나는 길지’였던 셈이다.

경상감영공원 내 선화당(오른쪽)과 징청각(왼쪽). 풍수 기운을 살펴볼 때 두사충의 집터는 이 두 건물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慶尙監營公園 內 宣化堂(오른쪽)과 징聽覺(왼쪽). 風水 기운을 살펴볼 때 杜思忠의 집터는 이 두 建物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推定된다.


얕은 언덕배기에 자리한 慶尙監營公園은 當時를 記憶하는 象徵物로 宣化堂(觀察使 執務處)과 징聽覺(觀察使 處所) 程度가 남아 있다. 1970年 이곳이 公園으로 거듭나면서 重修된 建物들이다. 杜思忠은 宣化堂과 징聽覺 사이에 自身의 집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明堂 기운이 剛하게 뿜어 나온다. 기운을 얻는 醉氣處(取氣處)로서도 좋아 쉬어갈 만한 곳이다.

◆大邱 富者들의 集結地 眞骨목


慶尙監營이 들어서게 되자 監營 바로 아래쪽, 계산동(計算聖堂 隣近)으로 居住地를 옮긴 杜思忠은 이 一帶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當時 朝鮮의 劣惡한 衣服 問題를 解決하는 한便 食率들의 經濟 生活을 위한 方便이었다.

그런데 杜思忠의 風水的 眼目으로는 다른 뜻도 숨어 있었던 듯하다. 當時 이곳에서는 峨嵋山이 바라보였다. ‘大邱邑誌’에서 “누에나방의 눈썹 模樣”으로 描寫한 峨嵋山을 보고 杜思忠은 누에의 먹이인 뽕잎을 提供함으로써 我眉山의 기운을 끌어당긴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마치 서울의 南山이 누에 模樣을 하고 있어서 蠶室에 뽕나무를 심어놓은 것처럼 말이다.

以後 이 一帶는 中國의 詩聖(詩聖) 杜甫의 後孫인 杜思忠을 始祖로 하는 大邱 두릉杜氏 世居地가 됐고, ‘뽕나무 골목’으로도 불리게 됐다. 現在 計算聖堂 出口쪽 담牆에는 뽕나무 골목임을 象徵하는 8그루의 뽕나무가 자라고 있다. 杜思忠과 朝鮮 寡婦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담은 ‘님도 보고 뽕도 따는’ 壁畫도 그려져 있다.

대구 근대문화골목인 ‘뽕나무골목’에 세워진 두사충과 조선 여인의 사랑을 묘사한 조각상. 담장 뒤로는 뽕나무 골목임을 상징하는 뽕나무들이 서 있다.
大邱 近代文化골목인 ‘뽕나무골목’에 세워진 杜思忠과 朝鮮 女人의 사랑을 描寫한 彫刻像. 담牆 뒤로는 뽕나무 골목임을 象徵하는 뽕나무들이 서 있다.

現在 杜思忠이 살았던 뽕나무 골목을 비롯해 隣近의 아기자기한 골목은 大邱市에서 近代文化골목(1.64km)으로 指定해 觀光資源으로 活用하고 있다. 近代 以後 이 一帶가 大邱 有名 人士들의 集結地이자 開花 文化의 産室이었기 때문이다.

두사충의 근거지였던 근대문화골목 일대가 ‘재물 명당’임을 암시하는 듯한 조선시대 동전 조각품.
杜思忠의 根據地였던 近代文化골목 一帶가 ‘財物 名當’임을 暗示하는 듯한 朝鮮時代 銅錢 彫刻品.


서울의 北村 雰圍氣와도 비슷한 近代文化골목은 ‘明堂 골목’이라고 불러도 遜色이 없을 程度다. 特히 達成 徐氏 集姓村이던 眞骨목은 大邱 富者들이 떼로 모여 살았던 空間이다.

1900年代 初盤 眞骨목 最高의 富者는 서병국이었다. 大邱로 몰려드는 全國 藥劑商들을 相對로 한 客主 事業으로 부를 일군 서병국은 3300㎡가 넘는 大地에 大邸宅을 지어 살았다. 只今의 化敎協會(中區 鍾路 34)가 그가 事務室로 利用하던 建物이고 隣近 華僑小學校 敷地 亦是 그의 所有였다.

1900년대 진골목 최고의 부자 서병국의 소유였던 화교협회와 화교소학교 부지.
1900年代 眞骨목 最高의 富者 서병국의 所有였던 化敎協會와 華僑小學校 敷地.


같은 達成 徐氏인 서상돈(1850~1913) 亦是 이곳에서 輩出된 富者다. 가난한 집안 出身으로 褓負商을 하면서 3萬石지기 拒否로 成長한 그는 後世를 위한 民族敎育 事業 等에 邁進했고, 1907年에는 大韓帝國政府가 日帝에 陳 1300萬원의 빚을 갚기 위한 國債補償運動을 發議한 愛國者였다.

國債補償運動 當時 眞骨목의 女性들도 앞장섰다. 達成 徐氏 夫人 等 7名의 女性들은 國債補償運動에 參與하기로 決意하고, 銀半指 모으기 等을 本格的으로 展開했다. 高宗의 同參과 女性들이 加勢한 이 運動은 霎時間에 全國的으로 퍼져나갔다. 眞骨목에 女性國債補償運動의 發祥地임을 記念하는 碑가 세워진 背景이다.

以外에도 코오롱 創業者 이원만과 아들 이동찬, 금복주 創業者 김홍식, 平和클러치 創業者 김상영 같은 富者들도 眞骨목 一帶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二元만이 살던 집은 只今도 잘 保存돼 있는데, 現在 食堂으로 運營되고 있다. 1945年 光復 以後 眞骨목의 富者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이곳에 남아 있던 古宅들은 大槪 食堂으로 使用되고 있다. 都市開發過程에서 財物 기운의 象徵인 水路와 道路가 바뀌는 等 變化가 생긴 것과도 無關치 않을 것이다.

한便 慶尙監營公園에서 西쪽으로 800m 南珍 떨어진 곳에는 삼성그룹 創業者인 李秉喆 古宅(中區 인교동 오토바이 골목 附近)과 오늘의 三星을 키워낸 三星上廻 옛터(인교동 59-3)가 자리하고 있다. 三星上廻 옛터에는 生前에 이병철이 놓아둔 禁錮 자리도 再現해놓았는데, 財物 기운이 旺盛한 터여서 사람들이 즐겨 쉬어 가곤 한다.

삼성그룹의 모태인 삼성상회 옛터. 왼쪽 하단의 네모 반듯한 곳이 삼성창업주 이병철이 금고를 놓아두었던 자리다.
삼성그룹의 母胎인 三星上廻 옛터. 왼쪽 下段의 네모 반듯한 곳이 三星創業主 이병철이 金庫를 놓아두었던 자리다.
삼청창업주 이병철이 살던 고택.
삼청創業主 이병철이 살던 古宅.


◆ 100年 前 洋屋은 어떤 모습일까?


大邱 近代文化골목은 市內에 있으면서도 100年 前 當時의 모습을 간직한 近代 建築物들이 적잖게 남아 있다. 特히 日帝强占期에 集中的으로 세운 붉은 甓돌 建物들이 유난히 많다. 當時에는 비싼 붉은 甓돌 家屋이 富者들의 象徵이 되다시피 했다.

대구 근대문화를 즐기기 위해 근대에 유행했던 양옥 차림을  한 관광객들. 대구 근대역사관 앞에서.
大邱 近代文化를 즐기기 위해 近代에 流行했던 洋屋 차림을 한 觀光客들. 大邱 近代歷史觀 앞에서.


眞骨목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甓돌組 2層 양옥인 ‘正小兒科醫院’은 1937年 華僑 建築家 茅門금이 設計, 建立한 住宅으로 유럽의 影響을 받은 日本式 建築風이라고 한다. 當時 洋屋 建築 樣式과 文化를 보여주는 重要한 資料로 評價받고 있다.

뽕나무 골목 隣近에는 서상돈이 살던 故宅이 있다. 日帝强占期에 지어진 改良 韓屋집인데, 富를 이루었으면서도 儉素한 삶을 살아온 그답게 참으로 단출한 救助를 하고 있다. 그러나 터만큼은 拒否의 기운을 담고 있는 明堂이다. 서상돈 古宅은 바로 옆쪽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詩로 有名한 民族詩人 李相花(1901~1943) 故宅과 함께 觀光客들이 즐겨 찾는 名所가 됐다.

아치형 입구가 특이한 서상돈 고택. 고택은 검소한 삶을 실천해온 주인답게 단출한 구조를 하고 있다.
아치형 入口가 特異한 서상돈 古宅. 古宅은 儉素한 삶을 實踐해온 主人답게 단출한 救助를 하고 있다.
이상화 고택 에서는 근대의 교통수단이던 인력거 체험을 할 수 있다.
李相花 古宅 에서는 近代의 交通手段이던 人力車 體驗을 할 수 있다.


한便 天主敎 信徒였던 서상돈이 寄贈한 鐘(아우그스티盧)으로도 有名한 計算聖堂은 서울 明洞聖堂과 平壤 관후리聖堂에 이어 國內에서 세 番째로 세워진 고딕風의 로마네스크式 聖堂(大韓民國 史跡 第290號)이다. 初期 計算聖堂은 한옥식 木造 建物이었지만 불에 타 消失되고, 1903年에 現在의 敵甓돌 建物로 지어졌다고 한다. 現地 住民들의 風水的 助言에 따라 언덕배기가 아닌 平地 위에 聖堂이 세워진 點도 特異하다.

붉은 벽돌 건물에 쌍탑이 돋보이는 계산성당.
붉은 甓돌 建物에 雙塔이 돋보이는 計算聖堂.


計算聖堂은 6·25戰爭 中 朴正熙 前大統領과 陸英修 女史가 結婚式을 올린 곳이자, 金壽煥 樞機卿이 司祭敍品을 받은 곳으로 有名하다. 聖堂 옆 한 카페 明堂 자리에 앉아 茶를 마시면서 計算聖堂의 建築美와 明堂 기운을 즐기는 感興을 누릴 수 있다.

청라언덕으로 오르는 ‘3·1운동계단’. 계단 옆 태극기가 1919년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한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청라언덕으로 오르는 ‘3·1運動階段’. 階段 옆 太極旗가 1919年 이곳에서 萬歲運動을 한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計算聖堂 앞에서 서성路를 건너 1919年 萬歲運動을 했던 ‘3·1運動階段’을 오르면 ‘동산’으로 불리는 작은 언덕에 3채의 오래된 西洋式 住宅이 자리잡고 있다. 美國人 宣敎師 스윗즈, 챔니스, 블레어의 집인데, 綠色 庭園에 둘러싸인 風景이 아름다운 곳이다.

청라언덕의 미국인 선교사 주택.
청라언덕의 美國人 宣敎師 住宅.


當時 大邱는 外國人들의 눈에도 理想的인 住居空間으로 여겨졌던 模樣이다. 明나라 出身 杜思忠 뿐 아니라, 壬辰倭亂 當時 倭軍 先鋒將으로 朝鮮을 侵略하러 왔다가 오히려 歸化한 사야가(김충선) 亦是 大邱市 達城郡 우록리에 定着했다. 또 日帝强占期 大邱 市內는 中國系 華僑, 프랑스系 新婦, 美國系 宣敎師 等이 모여 살던 國際的 都市였다. 大韓民國 産業化時代 成長의 中心 役割을 했던 大邱가 다시 일어서길 期待해본다. 땅의 運勢가 變化할 兆朕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청라언덕에서 내려다본 근대문화골목은 현대식 건물에 가려 숨은 듯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아래로 계산성당이 눈에 띈다.
청라언덕에서 내려다본 近代文化골목은 現代式 建物에 가려 숨은 듯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아래로 計算聖堂이 눈에 띈다.



안영배 記者·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火나요
    0
  • 推薦해요

댓글 0

只今 뜨는 뉴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