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日 忠南 瑞山市 서광사에서 만난 道臣 스님(60)은 部處의 옆모습을 닮은 캐릭터와 글을 써주며 한 卷의 詩集을 건넸다. ‘노래하는 스님’으로 알려진 그의 첫 詩集 ‘웃는 練習’이다. 그런데 著者의 이름은 刀身이 아니라 8歲 때 出家한 그의 俗名(俗名) 박금성이다. 詩集에 실린 詩人의 말에는 이런 글이 있다. ‘날개 잃은 매미/앉아 울 수 있는/나무가 되어주신 當身께/목청 돋웁니다.’ ―매미와 나무는 누구인가? “-매미는 나다. 나무는 부처님일 수도 있고, 내 이야기와 노래, 詩를 들어주는 모든 분들이기도 하다.” ―요즘 노래는 부르지 않나. “1年 한두 番 여는 山寺音樂會를 빼면, 2012年 6輯을 낸 뒤 舞臺에 서지 않는다. 나이가 있어 소리도 안 나오고, 노래는 아무래도 感情을 많이 넣어야 해서 부담스럽다.” ―詩集에 屬名과 비슷한 금자, 金錞이라는 이름이 여러 番 나온다. “내 밑으로 금자, 마리아, 젖먹이였던 金錞 세 女同生이 있었다. 살면서 繼續 찾았지만 다시 볼 수 없었다.” 車를 따라주던 그는 過去의 事緣을 노래처럼 詩처럼 이어갔다. 仁川에 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忠南 禮山郡 修德寺와 因緣을 맺었다. 그는 덕숭叢林 2代 房帳을 지낸 벽초 스님(1899~1986)을 侍奉했고 曹溪宗 第31代 總務院長인 法匠 스님(1941~2005)을 恩師로 모셨다. 1979年 ‘걸레 스님’을 自處하며 畫家로 活動했던 중광 스님(1934~2002)을 만나 그림을 , ‘울고 싶어라’의 歌手 이남이, 신중현에게 노래를 배웠다. ―중광 스님과는 어떻게 만났나. “修德寺 賣票所 밑에서 僧服을 입은 채 ‘한 五百年’이나 羅勳兒 조미미의 노래를 부르고 있던 時節이다. 중광 스님이 다가와 ‘恩師가 누구냐? 노래 잘 부른다. 나랑 같이 가자’고 하더라. 以後 먹을 갈아드리며 10年 그림 수발을 했다. 이남이 先生이 중광 스님의 머리 기른 弟子, 誘發上佐여서 노래도 배웠다.” ―恩師인 法匠 스님이 欣快히 許諾했나. “其他 많이 부서졌다. 하라는 중노릇을 안 배우고, 用돈 주면 기타와 樂譜를 사고 뒷山에서 노래나 했으니…. 중광 스님과 因緣이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許諾이 떨어졌다.” ―그때 그림과 노래 實力을 쌓은 건가. “그림은 ‘書堂개 3年 風月’이라고 흉내만 내는 水準이다. 노래? 좋아하기도 했지만 노래를 통해 동생들과 엄마를 찾고 싶었는데 아무도 찾지 못했다. 노래도 그만 두려고 했는데 듣는 분들이 좋아해 歌詞만 바꿔 노래하는 布敎師 役割을 하려고 했다.” ―이제는 ‘詩人 스님’ 됐다. “2018年 詩人으로 登壇했고 뒤늦게 中央大 大學院 文藝創作學科를 卒業했다. 노래는 리듬 音程 强弱 뿐 아니라 感性에 묶여 있어 그게 힘들더라. 詩는 좀 더 자유로운 便이다. 詩를 쓰면서 어린 時節로 돌아가 보니, 內面에 怨望과 눈물이 아직도 남아 있더라. 첫 詩集을 내면서 ‘내 안의 박금성’을 많이 慰勞하며 治癒하는 時間을 가졌다.” ―바둑도 아마 5段 水準이라던데…. “어릴 때 老스님들 곁에서 배웠다. 2010年 바둑 템플 스테이를 열어 人氣를 끌었고, 김인 국수나 조훈현 유창혁 목진석 양상국 최정 事犯 等과도 因緣을 맺게 됐다.” ―지난 3月 宗團의 司法府 格인 初心 호계院長을 맡았다. “銀絲 涅槃한 뒤 助言해 주는 분이 없는 게 살면서 가장 아쉽더라. 當事者들도 納得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初心 好契員이 되도록 努力하고 있다.” ―앞으로의 計劃은? “무엇을 하기보다는 안하는, ‘쉬는 工夫’를 배우려고 한다. 모든 因緣과 生死(生死) 問題와 關聯해 괴롭지 않은 내가 되기 위한 마음 審(心) 工夫다.”서산=김갑식 文化專門記者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