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日 全北 全州市 基督敎近代歷史記念館. 記念館 뒤便 宣敎師 墓域에는 ‘군산 宣敎의 開拓者’로 불리는 윌리엄 前킨(韓國名 前葦簾)과 全州예수病院을 세운 마티 잉골드 等 宣敎師와 그들의 家族 14名의 墓碑가 있다. 이곳을 둘러보던 韓國敎會總聯合(韓敎總) 代表會長인 류영모 牧師(寫眞)는 前킨 宣敎師의 墓碑 앞에서 한참 동안 눈시울을 붉혔다. 墓碑 옆에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世上을 떠난 前킨의 세 아들을 기리는 키 작은 墓碑들度 있다. 1892年 朝鮮에 들어온 前킨은 全州序文敎會 擔任牧師에 이어 群山 英明學校를 세웠다. 그의 夫人 메리 레이번은 基前女學校 初代 校長을 지냈다. 棋戰(紀全)은 ‘前킨 宣敎師를 記念한다’는 뜻. 流 牧師는 “近代 開化期에 活動했던 많은 宣敎師들이 故國이 아니라 이 땅에 묻히길 所望했다”고 말했다. 7日 開館한 記念館은 地下 2層, 地上 4層 規模로 湖南地域 改新敎 宣敎 現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美國에서 派送된 이른바 ‘7人의 先發隊’ 活動 記錄과 예수病院을 中心으로 한 醫療 分野 遺物이 展示돼 있다. 美國 남長老敎 出身인 7人의 先發隊는 여선교사인 리니 데이니스를 始作으로 前킨과 레이번, 루이스 테이트, 윌리엄 레이놀즈, 테이트의 女同生 매티, 레이놀즈의 婦人인 팻詩 볼링까지, 1892年 韓半島에 온 宣敎師들을 일컫는다. 當時 改新敎의 朝鮮 宣敎는 自立, 自轉(自傳·自進顚倒), 自治의 3字(三自)를 核心으로 하는 ‘네비우스 宣敎政策’으로 이뤄졌다. 美國과 캐나다. 濠洲 敎團들은 中國에서 오랫동안 宣敎한 존 네비우스의 提案을 받아들여 地域別로 나눠 活動했다. 허은철 총신대 歷史敎育科 敎授는 “3者와 함께 눈여겨볼 것이 牧師와 敎師, 醫師가 協力해 宣敎活動을 하는 三四運動”이라며 “改新敎는 우리 近現代史에서 思想的, 物質的으로 큰 影響을 끼쳤다”고 說明했다. 1919年 3·1運動 直後 벌어진 제암리 虐殺事件은 改新敎界의 宣敎政策에 또 하나의 轉換點이 됐다. 日帝는 萬歲運動 主動者를 檢擧하기 위해 제암리 監理敎會로 마을 住民들을 모은 뒤 불을 지르고 銃을 쏘는 蠻行을 저질렀다. 當時 세브란스病院 敎授였던 프랭크 스코필드는 제암리 蠻行을 世界에 告發했다. 이는 精巧(政敎)分離 原則 아래 消極的으로 對應하던 敎界에 警鐘을 울렸다는 評價를 받는다. 이 敎會 擔任牧師로 32年間 活動한 뒤 2012年 隱退한 강신범 牧師는 “누구에게나 ‘3·8·6’ 딱 3가지만 記憶해달라고 말한다. 3·1運動과 8·15光復, 6·25戰爭”이라며 “過去를 記憶하는 일은 아프지만 무엇보다 重要하다”고 말했다. 韓敎總은 個別 敎會나 敎團이 進行하기 힘든 改新敎 近代文化遺産의 保存과 探訪을 團體 次元에서 支援할 計劃이다. 서울에선 宣敎師들이 設立한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 競技와 忠淸에선 3·1運動 殉國遺跡地人 화성시 第癌敎會와 聖經 傳來地로 알려진 忠南 舒川郡 魔兩陣, 湖南은 全州와 光州의 宣敎師 墓域과 近代文化마을, 大邱에서는 청라언덕 中心의 近代 基督敎 遺産 等이다. “世上은 宗敎 없이 살 수 있어도, 宗敎는 世上 없이 살 수 없어요. 韓國敎會는 初期 宣敎師들이 뿌린 씨앗과 初心(初心)을 記憶하며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류 牧師) 全州·華城=김갑식 文化專門記者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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