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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記者 購讀|東亞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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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論說委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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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寧하세요. 신광영 論說委員입니다.

neo@donga.com

取材分野

2024-03-29~2024-04-28
칼럼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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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北美 10%
中東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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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際人物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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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撮影場 銃擊’ 볼드윈… 實彈 든 銃은 어떻게 그의 손에 쥐어졌나

    事件이 난 西部映畫 세트場은 美國 뉴멕시코주 沙漠地帶에 지은 19世紀 樣式의 작은 木造 敎會였다. 그 안에서 한 발의 銃聲이 울렸을 때 밖에 있던 스태프들은 脚本대로 撮影이 始作된 줄 알았다. 몇 秒 뒤 시나리오 作家가 敎會에서 뛰쳐나왔다. “911 불러, 911!” 세트場 안에는 主演 俳優 알렉 볼드윈(64)李 얼어붙은 채 서있었다. 그가 方今 前 리허설 했던 場面은 臺本에 이렇게 나와 있었다. ‘無法者(볼드윈)는 包圍해오는 保安官과 맞서기 위해 敎會 椅子에 앉아 銃을 쏘기로 決心한다.’ 映畫는 農場主를 偶發的으로 殺害한 10代 孫子가 絞首刑을 면하도록 奮鬪하는 白髮의 無法者에 對한 이야기였다. 리허설이 始作되자 볼드윈은 어깨의 拳銃 紙匣에서 45口徑 求刑 리볼버를 꺼냈다. 銃은 가슴을 지나 카메라 렌즈 쪽으로 向했고, 곧 銃聲이 울렸다. 세트場에 두 사람이 쓰러져있었다. 銃알은 撮影監督 할리나 허친스(42)의 몸을 貫通해 뒤에 있던 조엘 수자 監督(48)의 어깨에 박혔다. 劇中에서 殺人을 저지른 孫子를 지키려했던 볼드윈은 現實에서 製作陣에 實彈을 쏜 俳優가 되어 있었다. 10살 아들을 둔 엄마인 허친스는 숨졌고, 수자 監督은 重傷을 입었다. 事件 1年 3個月 만인 지난달 31日 볼드院은 過失致死 嫌疑로 起訴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强力한 銃器規制를 主張해와 全美銃器協會(NRA)에서 눈엣가시로 여기던 人物이었다. 볼드윈이 세트場에서 집어든 拳銃은 小品擔當者, 武器管理子, 助監督의 손을 거쳤다. 武器管理者는 小品擔當者가 가져온 彈丸이 空砲彈이 맞는지 確認해 銃에 裝塡하고, 조監督은 쏴도 安全한지 다시 點檢해 俳優에게 건네는 役割을 한다. 當時 助監督은 볼드윈에게 銃을 주면서 “콜드件(空砲彈이 든 銃)”이라고 말했지만 방아쇠 앞에 實彈이 꽂힌 狀態였다. 武器管理를 맡았던 24歲 女性은 이番 映畫가 自身의 두 番째 作品이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有名한 小品銃 供給業者의 딸이었다. 이 初步 武器管理者는 첫 作品 때도 撮影場에서 豫告 없이 銃을 發射해 스태프들을 놀라게 했다. 主演 俳優였던 니콜라스 케이지가 “當身 때문에 鼓膜이 터질 뻔 했다”며 火를 냈다고 한다. 한 스태프는 “그가 裝塡된 拳銃을 겨드랑이에 꽂고 撮影場을 누볐는데 銃口가 사람들을 向해있었다”고 했다. 助監督 亦是 다른 映畫 撮影場에서 銃器 事故를 내 解雇된 적이 있었다. 25年 經歷自認 그는 製作社의 要求에 맞춰 日程을 管理하는데 能했지만 安全 守則이나 節次를 건너뛰곤 했다는 게 同僚들의 傳言이다. 이 事件으로 볼드윈까지 裁判에 넘겨지자 美國 映畫界가 크게 술렁이고 있다. 映畫·TV 從事者 勞組는 聲明을 내 “허친스의 죽음은 豫防할 수 있었던 悲劇이지만 俳優가 犯罪를 저지른 것도 아니다. 배우는 武器 專門家가 아니다”라고 했다. 한 有名 액션俳優度 加勢했다. “우리는 제이슨 本이 아닙니다. 배우는 캐릭터에 沒入하는 藝術家일 뿐 撮影場 安全要員이 아닙니다.” 하지만 檢察은 볼드윈 亦是 責任을 避할 수 없다고 봤다. 배우는 銃器의 最終 使用者로서 安全 確認 義務가 있고, 사람을 向해 방아쇠를 당기지는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檢察 公訴狀에는 볼드윈이 撮影 前 銃器 安全 訓鍊에 參與하지 않았고, 以後 安全 敎育 때도 家族과 通話하는 等 集中하지 않았다는 內容이 담겨있다. 事件 5日 前 撮影場에서 2次例 銃器事故가 있었다는 證言도 나왔다. 小品擔當者가 발밑에 銃을 겨누다가 銃이 發射됐고, 몇 時間 뒤 스턴트맨이 또 다시 失手로 小銃을 쐈다고 한다. 映畫 製作者이기도 했던 볼드윈은 慘事를 豫告하는 이런 信號를 흘려보냈다. 費用 節減을 위해 安全을 희생시켜온 製作 慣行을 告發하는 목소리도 이番 事件을 契機로 터져 나오고 있다. 新出내기를 싼 값에 武器管理字로 雇用해 다른 일까지 맡기는 일이 적지 않다. 게다가 明文化된 銃器 管理 規定도 없어 撮影場에서 어깨 너머로 배울 뿐이다. 스태프들은 安全事故가 나도 製作社로부터 不利益을 當하거나 向後 雇傭이 안 될까봐 나서기를 꺼린다. 할리우드 撮影場은 安全에 있어 ‘無政府 狀態’에 가깝다는 말까지 나온다. 2021年 10月 美 西部에서 벌어진 이 事件은 日常 속 危險을 過小評價하며 安全을 뒤로 미루다 보면 그 어떤 西部映畫보다 慘酷한 實話가 펼쳐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볼드윈이 든 銃에 어쩌다 實彈이 裝塡됐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쩌면 차곡차곡 累積돼온 부실 그 自體가 實彈이었다.신광영 記者 neo@donga.com}

    • 2023-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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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祕密警察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숨는다

    2017年 4月 5日 밤 美國 뉴저지의 單獨住宅 玄關에 80代 中國人 男性이 구부정하게 섰다. 이 老人은 이틀 前 中國 工作員에게 이끌려 美國行 飛行機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 中國 公安은 賂物收受 嫌疑를 받다가 美國 뉴저지로 숨어든 그의 아들을 쫓고 있었다. “아들을 만나서 繼續 歸國을 안 하면 家族들이 얼마나 큰 苦痛을 받을지 傳하라.” 老人은 아들을 誘引하기 위한 ‘人間 미끼’였다. 公安은 아들의 居處를 몰라 隣近 親戚 집에 老人을 내려줬다. 親戚들은 中國에서 鬪病 中인 三寸이 불쑥 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連絡을 받고 온 아들은 아버지를 車에 태워 30分 距離에 있는 自身의 집으로 向했다. 要員의 車輛이 조용히 뒤따랐다. 집 앞에는 아들의 申告로 美國 聯邦搜査局(FBI) 車輛이 와있었다. ‘目標物’과 對面接觸에 失敗한 工作員들은 2段階 作戰에 突入했다. 다음 ‘미끼’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딸이었다. 要員들은 스탠퍼드대를 卒業하고 結婚해 살던 딸의 집과 職場에 찾아가 아버지를 非難하는 動映像을 撮影하라고 强要했다. 執拗한 스토킹에 시달리던 딸은 시키는 대로 映像을 찍어 페이스북 親舊들에게 共有해야 했다. 全方位 壓迫에도 目標物이 歸國을 拒否하자 要員들은 그의 뉴저지 집에 찾아가 메모를 붙였다. ‘中國으로 돌아와 10年 懲役을 살면 家族들은 無事할 것이다.’ 中國의 이 같은 祕密警察 行脚은 美 法務部가 2020年 10月 中國 側 要員 6名을 起訴하며 法院에 낸 公訴狀에 나오는 內容이다. 中國은 海外 逃走 犯罪者들을 잡는다는 名分으로 ‘여우 사냥(Fox Hunt)’이라 불리는 超國家的 法 執行을 해왔다. 中國 本土와 海外 情報網이 總動員되는데 世界 各地에 布陣한 祕密警察署가 前哨基地 役割을 한다고 美 情報當局과 國際人權團體들은 보고 있다. ‘여우 사냥’은 시진핑 中國 國家主席이 2014年 腐敗 剔抉을 宣布하며 本格化됐다. 美國 等 大部分의 西方 國家들과 犯罪人 引渡 條約을 맺지 않은 中國은 海外에서 中國人을 合法的으로 잡아올 方法이 別로 없다. 送還 對象 中에는 賂物·橫領뿐 아니라 中國共産黨을 批判하거나 人權運動을 해온 人士가 많아 外交 摩擦 素地도 크다. 中國 祕密警察은 懷柔 脅迫 拉致 等 脫法的 手段으로 反體制 人士를 ‘사냥’하는 게 主 任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實際로 中國의 有名 諷刺漫畫家와 民主化運動家가 2015年 彈壓을 避해 泰國으로 脫出해 유엔 難民으로 인정받았음에도 現地의 中國 祕密警察에 逮捕돼 送還됐다. 지난해 12月 國際人權團體 ‘세이프가드 디펜더스’는 中國이 53個國에 祕密警察서 102곳을 두고 있고, 韓國에도 1곳이 있다고 밝혔다. 該當 場所로 疑心받는 서울 漢江邊 中食堂의 代表는 “韓國에서 死亡하거나 다친 中國人 10名의 歸國을 支援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들 機關의 對外 名稱은 ‘海外 110 서비스 스테이션’. 110은 韓國의 112와 같은 中國 公安 申告番號다. 2019年 5月 中國 官營言論은 저장省 警察이 스페인 마드리드의 ‘서비스 스테이션’을 통해 6件의 犯罪 關聯者들을 逮捕하고, 容疑者 2名이 自首하도록 說得했다고 報道했다. 要員들은 中國人 手配者를 잡아 貯藏性의 家族과 映像 通話를 하게 했다. 中國의 海外 工作 據點은 食堂이나 便宜店, 福德房 等 日常的인 外樣을 한 境遇가 많다. 映畫 ‘極限職業’에 나오는 ’水原왕갈비통닭’처럼 威脅的으로 보이지 않는다. 公安이 現地로 出國할 때도 警察 身分을 밝히고 觀光비자로 들어간다. 잘 보이는 곳에 숨는 게 戰略이다. 前 FBI 中國 分析官 폴 무어는 中國의 工作 스타일을 ‘1000個의 모래알’이란 表現으로 說明했다. “어떤 海邊의 모래가 工作 對象이라면 다른 國家들은 特殊要員을 潛水艦에 태워 보내 隱密히 모래를 담아오거나 人工衛星 赤外線 探知裝置 等을 利用해 모래 成分을 分析할 것이다. 中國은 다르다. 中國 市民 1000名에게 그 海邊으로 하루 逍風을 다녀오게 한 뒤 옷을 털게 해 1000個의 모래알을 蒐集할 것이다.” 一種의 ‘人海戰術’로 많은 사람에게 制限된 任務를 附與해 全體 그림을 그려낸다는 것이다. 中國 祕密警察의 正體를 밝히려면 海外 各地에 精巧하고 촘촘히 連結된 네트워크를 把握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海外로 간 犯罪者는 하늘에 떠 있는 聯과 같다.” 상하이 公安의 한 幹部는 中國 官營言論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目標物이 世界 어디에 있든 中國에 남은 家族을 볼모로 잡고 있어 鳶에 달린 줄을 잡아당기듯 中國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말이다. 中國은 2021年 4月부터 지난해 7月까지 約 23萬 名이 刑事處罰 節次를 밟기 위해 自發的으로 歸國했다고 밝혔다. 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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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祕密警察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숨는다

    2017年 4月 5日 밤 美國 뉴저지의 單獨住宅 玄關에 80代 中國人 男性이 구부정하게 섰다. 이 老人은 이틀 前 中國 工作員에 이끌려 美國行 飛行機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 中國 公安은 賂物收受 嫌疑를 받다가 美國 뉴저지로 숨어든 그의 아들을 쫓고 있었다. “아들을 만나서 繼續 歸國을 안 하면 家族들이 얼마나 큰 苦痛을 받을지 傳하라.” 老人은 아들을 誘引하기 위한 ‘人間 미끼’였다. 公安은 아들의 居處를 몰라 隣近 親戚 집에 老人을 내려줬다. 玄關門을 연 親戚들은 中國에서 鬪病 中인 三寸이 불쑥 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連絡을 받고 온 아들은 아버지를 車에 태워 30分 距離에 있는 自身의 집으로 向했다. 要員의 車輛이 조용히 뒤따랐다. 집 앞에는 아들의 申告로 美國 聯邦搜査局(FBI) 車輛이 와있었다. ‘目標物’과 對面接觸에 失敗한 工作員들은 2段階 作戰에 突入했다. 다음 ‘미끼’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딸이었다. 要員들은 스탠포드大를 卒業하고 結婚해 살던 딸의 집과 職場에 찾아가 아버지를 非難하는 動映像을 撮影하라고 强要했다. 執拗한 스토킹에 시달리던 딸은 시키는 대로 映像을 찍어 페이스북 親舊들에게 共有해야 했다. 全方位 壓迫에도 目標物이 歸國을 拒否하자 要員들은 그의 뉴저지 집에 찾아가 메모를 붙였다. ‘中國으로 돌아와 10年 懲役을 살면 家族들은 無事할 것이다.’ 中國의 이 같은 祕密警察 行脚은 美 法務部가 2020年 10月 中國 側 要員 6名을 起訴하며 法院에 낸 公訴狀에 나오는 內容이다. 中國은 海外 逃走 犯罪者들을 잡는다는 名分으로 ‘여우 사냥(Fox Hunt)‘이라 불리는 超國家的 法執行을 해왔다. 中國 本土와 海外 情報網이 總動員되는데 世界 各地에 布陣한 祕密警察署가 前哨基地 役割을 한다고 美 情報當局과 國際人權團體들은 보고 있다.‘여우 사냥’은 시진핑 國家主席이 2014年 腐敗剔抉을 宣布하며 本格化됐다. 美國 等 大部分의 西方國家들과 犯罪人 引渡條約을 맺지 않은 中國은 海外에서 中國人을 合法的으로 잡아올 方法이 別로 없다. 送還 對象 中에는 賂物·橫領 뿐 아니라 中國共産黨을 批判하거나 人權運動을 해온 人士가 많아 外交 摩擦 素地도 크다. 中國 祕密警察은 懷柔 脅迫 拉致 等 脫法的 手段으로 反體制 人士를 ‘사냥’하는 게 主 任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實際로 中國의 有名 諷刺漫畫家와 民主化 運動家가 2015年 彈壓을 避해 泰國으로 脫出해 유엔 難民으로 인정받았음에도 現地의 中國 祕密警察에 逮捕돼 送還됐다.지난달 國際人權團體 ‘세이프가드 디펜더스’는 中國이 53個國에 祕密警察서 102곳을 두고 있고, 韓國에도 1곳이 있다고 밝혔다. 該當 場所로 疑心받는 서울 漢江邊의 中食堂 代表는 “韓國에서 死亡하거나 다친 中國人 10名의 歸國을 支援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들 機關의 對外 名稱은 ‘海外 110 서비스 스테이션’. 110은 韓國의 112와 같은 中國 公安 申告番號다. 2019年 5月 中國의 官營言論은 저장省 警察이 스페인 마드리드의 ‘서비스 스테이션’을 통해 6件의 犯罪 關聯者들을 逮捕하고, 容疑者 2名이 自首하도록 說得했다고 報道했다. 마드리드 要員들은 中國人 手配者를 데려와 앉힌 뒤 貯藏性에 있는 公安要員과 映像通話를 하게 했는데 映像 속 遙遠 옆에 그의 家族이 있었다. 中國의 海外工作 據點은 食堂이나 便宜店, 福德房 等 日常的인 外樣을 한 境遇가 많다. 映畫 ‘極限職業’에 나오는 水原왕갈비통닭처럼 威脅的으로 보이지 않는다. 公安이 現地로 出國할 때도 警察 身分을 밝히고 觀光비자로 들어간다. 잘 보이는 곳에 숨는 게 戰略이다. 前 FBI 中國 分析官 폴 무어는 中國의 工作 스타일을 ‘1000個의 모래알’이란 表現으로 說明했다. “어떤 海邊의 모래가 工作 對象이라면 다른 國家들은 特殊要員을 潛水艦에 태워 보내 隱密히 모래를 담아오거나 人工衛星 赤外線 探知裝置 等을 利用해 모래 成分을 分析하려 할 것이다. 中國은 다르다. 1000名의 中國 市民들을 그 海邊으로 하루 逍風을 다녀오게 한 뒤 옷을 털게 해 1000個의 모래알을 蒐集할 것이다.” 一種의 ‘人海戰術’로 많은 사람에게 制限된 任務를 附與해 全體 그림을 그려낸다는 것이다. 中國 祕密警察의 正體를 밝히려면 海外 各地에 精巧하고 촘촘히 連結된 네트워크를 把握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해외로 간 犯罪者는 하늘에 떠있는 聯과 같다.” 상하이 公安의 한 幹部는 中國 官營言論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目標物이 世界 어디에 있든 中國에 남은 家族을 볼모로 잡고 있어 鳶에 달린 줄을 잡아당기듯 中國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말이다. 中國은 2021年 4月부터 지난해 7月까지 約 23萬 名이 刑事處罰 節次를 밟기 위해 自發的으로 歸國했다고 밝혔다.신광영 記者 neo@donga.com}

    • 202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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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그 日本系 靑年은 왜 6·25戰爭서 피를 흘렸나

    “當身이 美야무라 上兵입니까?”6·25전쟁 休戰 直後인 1953年 8月 20日 中共軍 트럭에서 내린 히로시 美야무라 上兵은 自身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키가 178cm인 미야無라는 45kg도 안 되는 야윈 몸을 일으켜 세웠다. 捕虜交換이 進行되던 非武裝地帶(DMZ)의 흙길을 가로질러 온 한 白人 將校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將校의 軍服에 박힌 星條旗(美國 國旗)를 보자마자 미야無라는 눈물이 차오르기 始作했다.2년 半 前인 1951年 4月 24日 밤, 徐徐히 커져오던 中國軍의 꽹과리 소리를 미야無라는 잊지 못했다. 美 陸軍 所屬으로 6·25戰爭에 參戰한 그는 서울 近郊의 前哨基地를 지키고 있었다. 그날 밤 1000餘 名의 中共軍 部隊는 바로 옆 分隊를 焦土化시킨 뒤 그의 分隊를 包圍해 오고 있었다. 分隊長이던 미야無라는 全滅을 避하기 위해 分隊員 15名을 모두 후퇴시켰다. 그러곤 혼자 남아 中共軍을 向해 機關銃을 쐈다. 銃알이 바닥나자 銃劍을 들고 敵陣에 뛰어들었다.며칠 뒤 意識을 回復했을 때 미야무라는 中共軍의 捕虜가 되어 있었다. 쓰러진 敵軍이 던진 手榴彈에 맞아 重傷을 입은 狀態였다. 28個月間 捕虜로 잡혀 있다 美國으로 歸還한 그는 韓美 兩國에서 最高武功勳章을 받았다. 勳章에는 ‘銃알이 떨어지기 前까지 50名이 넘는 中共軍을 射殺했다’고 쓰여 있다.미야무라처럼 6·25戰爭에 參戰한 日本系 美國人은 5600餘 名에 達했다. 이 中 255名이 戰死했다. 이들은 1900年代 初 美國으로 移住한 日本人들의 子孫이었다. 1941年 12月 日本이 眞珠灣 美 海軍基地를 攻擊했을 때 미야무라는 열여섯 살이었다. 眞珠灣 攻襲으로 日本이 美國의 敵國이 되면서 美國 內 日本人들은 試鍊을 맞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大統領의 行政命令 9066號에 따라 日本系 移民者 12萬餘 名은 美 西部의 强制收容所에 갇혔다.미야무라는 列車에 실려 收容所로 보내지는 이웃들을 보며 入隊를 決心했다. 美國을 위해 싸우는 충성스러운 美國人임을 證明하는 것은 當時 日本系 靑年들이 共有한 生存 本能이었다. 이들은 美國에선 日本과 內通하는 스파이로 疑心받고, 日本에선 曺國의 背信者로 낙인찍혀 있었다. 日本系 中心으로 構成된 美 陸軍 100步兵大隊와 442聯隊는 2次 世界大戰이 한창이던 유럽으로 派兵돼 나치 獨逸軍에 맞서 赫赫한 功을 세웠다. 두 部隊는 美 陸軍 歷史上 가장 많은 武功勳章을 받았다. 1942年부터 3年間 運營된 日本人 强制收容所는 美國 各地에 흩어져 살던 日本人들이 ‘日本系 美國人’으로 새롭게 覺醒하며 連帶하는 契機가 됐다. 美國 內 中國 移民者들 亦是 ‘中國系 美國人’이란 正體性을 定立하게 된 分水嶺이 있다. 1982年 ‘빈센트 친 事件’이다. 當時 27歲였던 빈센트는 結婚式을 앞두고 美國 디트로이트의 술집에서 파티를 하다 白人 男性들에게 殺害됐다. 自動車工場 勤勞者였던 이들은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우리가 일자리를 잃었다”며 野球방망이로 빈센트의 머리를 集中 加擊했다. 明白한 人種 憎惡 犯罪였지만 主犯은 執行猶豫 3年, 共犯은 3000달러 罰金刑에 그쳤다.재미 韓人들은 1992年 로스앤젤레스(LA) 暴動을 起點으로 ‘韓國系 美國人’으로 다시 태어났다. 美 政府의 外面 속에 목숨과도 같은 商店들이 불타고 韓人들이 죽어가자 各自圖生해 온 僑胞들은 團結된 목소리의 必要性을 切感했다.일본인 强制收容所가 생긴 지 80年, 빈센트 事件 40周年, LA 暴動 30周年인 올해는 美國에서 아시안 憎惡 犯罪가 極에 達한 한 해였다. 수많은 아시아系 移民者들이 銃에 맞거나 칼에 찔렸고, 地下鐵을 기다리다 뒤에서 떠밀려 線路로 떨어졌다.미국 社會에 조용히 順應해 온 아시안들은 ‘模範的 少數人種’인 同時에 ‘보이지 않는 移民者’로 비쳐왔다. 이런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前 美 大統領이 코로나19 以後 中國人을 憤怒의 標的으로 삼자 아시안들은 만만한 犧牲羊이 됐다. 工巧롭게도 憎惡 犯罪의 潛在的 被害者라는 共通分母는 韓國系, 中國系, 日本系 美國人들을 ‘아시아系 美國人’으로 結集시키고 있다. 지난해 發效된 아시안 憎惡犯罪 防止法은 中國系·日本系 議員들이 共同 發議했고, 앤디 김 等 韓國系 下院議員 4名이 同參해 만들어졌다.6·25전쟁에서 돌아온 미야무라는 지난달 29日 97歲로 生을 마감했다. 그가 母國의 植民統治 被害國에 와서 피를 흘렸던 것은 美國 內 異邦人으로서 存在價値를 證明하려는, 美國을 向한 鬪爭에 가까웠다. 當時 그가 느꼈을 不安과 크게 다르지 않은 恐怖를 요즘 美國 內 아시안들은 如前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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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日本系 靑年은 왜 6·25戰爭서 피를 흘렸나

    “當身이 美야무라 上兵입니까?”6·25전쟁 休戰 直後인 1953年 8月 20日 中共軍 트럭에서 내린 히로시 美야무라 上兵은 自身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키가 178cm인 미야無라는 45kg도 안 되는 야윈 몸을 일으켜 세웠다. 捕虜交換이 進行되던 非武裝地帶(DMZ)의 흙길을 가로질러 온 한 白人 將校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將校의 軍服에 박힌 星條旗(美國 國旗)를 보자마자 미야無라는 눈물이 차오르기 始作했다.2년 半 前인 1951年 4月 24日 밤, 徐徐히 커져오던 中國軍의 꽹과리 소리를 미야無라는 잊지 못했다. 美 陸軍 所屬으로 6·25戰爭에 參戰한 그는 서울 近郊의 前哨基地를 지키고 있었다. 그날 밤 1000餘 名의 中共軍 部隊는 바로 옆 分隊를 焦土化시킨 뒤 그의 分隊를 包圍해 오고 있었다. 分隊長이던 미야無라는 全滅을 避하기 위해 分隊員 15名을 모두 후퇴시켰다. 그러곤 혼자 남아 中共軍을 向해 機關銃을 쐈다. 銃알이 바닥나자 銃劍을 들고 敵陣에 뛰어들었다.며칠 뒤 意識을 回復했을 때 미야무라는 中共軍의 捕虜가 되어 있었다. 쓰러진 敵軍이 던진 手榴彈에 맞아 重傷을 입은 狀態였다. 28個月間 捕虜로 잡혀 있다 美國으로 歸還한 그는 韓美 兩國에서 最高武功勳章을 받았다. 勳章에는 ‘銃알이 떨어지기 前까지 50名이 넘는 中共軍을 射殺했다’고 쓰여 있다.미야무라처럼 6·25戰爭에 參戰한 日本系 美國人은 5600餘 名에 達했다. 이 中 255名이 戰死했다. 이들은 1900年代 初 美國으로 移住한 日本人들의 子孫이었다. 1941年 12月 日本이 眞珠灣 美 海軍基地를 攻擊했을 때 미야무라는 열여섯 살이었다. 眞珠灣 攻襲으로 日本이 美國의 敵國이 되면서 美國 內 日本人들은 試鍊을 맞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大統領의 行政命令 9066號에 따라 日本系 移民者 12萬餘 名은 美 西部의 强制收容所에 갇혔다.미야무라는 列車에 실려 收容所로 보내지는 이웃들을 보며 入隊를 決心했다. 美國을 위해 싸우는 충성스러운 美國人임을 證明하는 것은 當時 日本系 靑年들이 共有한 生存 本能이었다. 이들은 美國에선 日本과 內通하는 스파이로 疑心받고, 日本에선 曺國의 背信者로 낙인찍혀 있었다. 日本系 中心으로 構成된 美 陸軍 100步兵大隊와 442聯隊는 2次 世界大戰이 한창이던 유럽으로 派兵돼 나치 獨逸軍에 맞서 赫赫한 功을 세웠다. 두 部隊는 美 陸軍 歷史上 가장 많은 武功勳章을 받았다. 1942年부터 3年間 運營된 日本人 强制收容所는 美國 各地에 흩어져 살던 日本人들이 ‘日本系 美國人’으로 새롭게 覺醒하며 連帶하는 契機가 됐다. 美國 內 中國 移民者들 亦是 ‘中國系 美國人’이란 正體性을 定立하게 된 分水嶺이 있다. 1982年 ‘빈센트 친 事件’이다. 當時 27歲였던 빈센트는 結婚式을 앞두고 美國 디트로이트의 술집에서 파티를 하다 白人 男性들에게 殺害됐다. 自動車工場 勤勞者였던 이들은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우리가 일자리를 잃었다”며 野球방망이로 빈센트의 머리를 集中 加擊했다. 明白한 人種 憎惡 犯罪였지만 主犯은 執行猶豫 3年, 共犯은 3000달러 罰金刑에 그쳤다.재미 韓人들은 1992年 로스앤젤레스(LA) 暴動을 起點으로 ‘韓國系 美國人’으로 다시 태어났다. 美 政府의 外面 속에 목숨과도 같은 商店들이 불타고 韓人들이 죽어가자 各自圖生해 온 僑胞들은 團結된 목소리의 必要性을 切感했다.일본인 强制收容所가 생긴 지 80年, 빈센트 事件 40周年, LA 暴動 30周年인 올해는 美國에서 아시안 憎惡 犯罪가 極에 達한 한 해였다. 수많은 아시아系 移民者들이 銃에 맞거나 칼에 찔렸고, 地下鐵을 기다리다 뒤에서 떠밀려 線路로 떨어졌다.미국 社會에 조용히 順應해 온 아시안들은 ‘模範的 少數人種’인 同時에 ‘보이지 않는 移民者’로 비쳐왔다. 이런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前 美 大統領이 코로나19 以後 中國人을 憤怒의 標的으로 삼자 아시안들은 만만한 犧牲羊이 됐다. 工巧롭게도 憎惡 犯罪의 潛在的 被害者라는 共通分母는 韓國系, 中國系, 日本系 美國人들을 ‘아시아系 美國人’으로 結集시키고 있다. 지난해 發效된 아시안 憎惡犯罪 防止法은 中國系·日本系 議員들이 共同 發議했고, 앤디 김 等 韓國系 下院議員 4名이 同參해 만들어졌다.6·25전쟁에서 돌아온 미야무라는 지난달 29日 97歲로 生을 마감했다. 그가 母國의 植民統治 被害國에 와서 피를 흘렸던 것은 美國 內 異邦人으로서 存在價値를 證明하려는, 美國을 向한 鬪爭에 가까웠다. 當時 그가 느꼈을 不安과 크게 다르지 않은 恐怖를 요즘 美國 內 아시안들은 如前히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신광영 記者 neo@donga.com}

    • 2022-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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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移民 家庭-性小數者 38歲 韓人 靑年, 美 主流社會에 挑戰狀[글로벌 포커스]

    《惡條件을 두루 갖췄다. 돈도 背景도 없는 政治 新人에 少數人種, 性正體性 障壁까지…. 住民 多數가 히스패닉人 地域에서 히스패닉 出身 3選 議員에게 挑戰한 韓國系 데이비드 金. 그는 이番 美國 中間選擧에서 누구보다 드라마틱한 勝負를 펼쳤다.》한인 靑年의 美下院議員 挑戰棋 選擧는 이제 40日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美國 聯邦下院에 出馬한 韓國系 美國人 데이비드 金(38)은 다음 날 有權者들에게 나눠줄 퍼즐의 조각을 하나씩 맞춰 봤다. 30個 조각이 다 채워진 퍼즐에는 두 손에 돈다발을 쥔 巨人과 그를 올려다보는 작은 靑年이 그려져 있었다. 데이비드 選擧 캠프의 20代 奉仕者들이 다윗과 골리앗의 對決이 聯想되도록 만든 弘報物이었다. 데이비드는 “저희 地域엔 아이에게 늘 未安한 父母가 많아요. 어린이用 퍼즐을 드리면 도움이 될 거 같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캘리포니아州 로스앤젤레스(LA)에서 兒童福祉 專門 國選辯護士로 일하며 脆弱 家庭을 자주 接했다. 父母들은 大槪 투잡, 스리잡을 뛰며 週 6, 7日 일을 했다. 子女들은 집에 放置되기 일쑤였다. 그가 出馬한 캘리포니아(CA) 34地區는 聯邦下院 地域區 435個 中 가장 가난한 20곳 中 하나다. ○ 히스패닉 根據地에서 巨物과 맞서다퍼즐에서 巨人으로 描寫된 人物은 相對 候補인 이 地域 3線 現役議員(民主黨) 지미 고메즈였다. 住民 70萬 名 中 히스패닉(中南美系 移住民) 人口가 65%에 達하는 CA 34地區는 고메즈 같은 민주당 히스패닉 政治人들의 根據地였다. 그와의 對決은 이番이 두 番째였다. 데이비드는 2年 前인 2020年에도 이곳에 出馬했다. 當時 고메즈는 選擧運動 내내 데이비드의 이름을 言及조차 하지 않을 程度로 그를 競爭 相對로 보지 않았다. LA韓人타운이 34地區에 있긴 했지만 데이비드는 韓人타운에도 알려지지 않은 政治 新人이었다. 現地 韓國系 言論마저 고메즈를 公式 支持했다. 當時 데이비드는 낮엔 피켓을 든 채 住民들을 만나고 밤엔 우버 記事로 일할 때 쓰던 求刑 소나타를 몰고 다니며 壁報를 붙였다. 그가 唯一하게 앞섰던 것은 200餘 名에 達하던 自願奉仕者 數였다. 하지만 選擧 結果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데이비드는 47%의 支持를 얻어 고메즈에게 6%포인트 差로 敗했다. 이 地域 聯邦下院 選擧에서 票差가 이렇게 僅少했던 것은 1976年 以後 44年 만이었다. 데이비드의 2020年 選擧 過程은 最近 國內 開封한 映畫 ‘初選’(監督 전후석)에 詳細히 담겼다. 이 映畫는 當時 聯邦下院에 出馬한 韓國系 候補 5名의 挑戰을 그렸다.○ 韓人 移民者의 險難한 成長期“第 父母님은 1982年 美國으로 移住하셨어요. 아버지가 牧師여서 開拓敎會를 하셨는데 移民者로 살면서 苦生을 많이 하셨죠.” 데이비드가 靑少年期를 보낸 워싱턴州 터코마에는 駐韓美軍과 結婚한 뒤 男便을 따라 移住한 韓國人 女性이 많았다. 韓國에서 ‘黑人의 아내’ ‘混血’이라며 賤待받았던 이 女性들과 子女들은 美國에서도 蔑視를 받았다. 이들은 아버지의 敎會에 와서 慰安을 찾았다. “父母님이 英語를 못하셔서 英語가 必要한 집안일은 어떻게든 제가 處理했어요. 公課金에 延滯料가 너무 많이 붙으면 제가 官公署에 따라가 代身 따졌죠. 어려서부터 抑鬱한 일을 當한 韓國분들 代身해서 목소리를 내야 할 일도 많았어요.” 데이비드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를 거쳐 뉴욕 例示바臺 로스쿨을 卒業했다. 辯護士가 돼 美國의 主流로 들어가라는 아버지의 뜻을 忠實히 따랐다. 그가 社會로 나온 2010年 美國 法律市場은 金融危機 餘波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낮에는 經歷을 쌓기 위해 空짜 辯護士로 일하고 밤에는 우버 技士, 엑스트라 俳優, 學院 講師 等으로 生計를 꾸렸다. “그땐 하루빨리 辯護士로 자리를 잡아 學資金 빚 20萬 달러(藥 2億6000萬 원)를 갚아야 했어요. 가까스로 소니픽처스 社內辯護士로 就業이 됐어요.” 소니픽처스는 LA 郊外의 富裕한 地域인 컬버시티에 있었다. 데이비드는 貧民街에 있는 집에서 出退勤하며 完全히 다른 두 世上을 每日 오갔다. “美國에 힘들게 定着했던 經驗 때문인지 週 7日을 일해도 生活이 안 되고, 病院에 못 가 죽어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데이비드는 結局 소니에서 나와 兒童福祉와 移民 事件을 맡는 國選辯護人으로 일했다. “辯護士나 熱心히 하지 무슨 政治냐 하는 생각도 들긴 해요. 하지만 辯護士만 해서는 사람들 삶이 나아지는 進度가 너무 슬로해서 답답했어요.” 그가 公約으로 내건 基本所得, 全 國民 健康保險, 移民 規制 緩和 等은 少數者로 살아오며 切實하다고 느낀 것들이었다.○ 2年 만의 再挑戰데이비드가 2年 만에 다시 挑戰狀을 냈을 때 고메즈는 戰意를 불태우고 있었다(미 聯邦下院은 2年마다 새로 뽑는다). 放心하다 질 뻔했던 失手를 反復하지 않으려 했다. 製藥會社와 軍需業體 等에서 받은 數百萬 달러의 後援金으로 政策 弘報집과 各種 傳單을 만들어 登錄 有權者 32萬 名에게 여러 番 發送했다. 고메즈는 카멀라 해리스 副統領을 비롯해 민주당 巨物들의 公開 支持도 받았다. 民主黨의 韓國系 下院議員인 앤디 金(뉴저지)과 매릴린 스트리클런드(워싱턴)마저 고메즈를 支持했다. 美國엔 現役 議員들끼리 支持 宣言을 주고받으며 議席을 防禦하도록 相扶相助하는 慣行이 있다. 데이비드 亦是 민주당 候補였다(캘리포니아주는 같은 黨이라도 豫備選擧 2位 候補까지 出馬할 수 있다). 하지만 旣得權의 壁 앞에선 場外 選手였다. 2年 前 59%였던 히스패닉 人口 比率은 이番 選擧 直前 選擧區가 調整되면서 65%로 늘어나 고메즈에게 더 유리해졌다. 아시안은 韓國系(13%)를 包含해 20% 程度였고, 白人이 10%, 黑人이 5%였다. 데이비드의 選擧 캠프에는 奉仕者들이 一一이 손으로 접은 便紙 8萬餘 通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公約과 抱負를 담은 이 便紙들은 各各 英語와 韓國語, 스페인語, 中國語, 泰國語 等 여러 言語로 쓰여 있었다. “저희 地域區의 왼쪽과 위쪽 地域區는 白人이 大多數이고, 오른쪽 地域區는 中國人, 아래쪽은 黑人이 大部分이에요. 저희 地域만 모든 人種이 살아요. 우리 地域을 代表하는 議員이라면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데이비드는 英語로만 疏通했던 고메즈와 달리 히스패닉 洞네에선 스페인語로, 코리안타운에서는 韓國語로 말했다. 廣告板을 세울 때도 該當 地域 出身 市議員이나 活動家들과 나란히 찍은 寫眞을 넣었다. 相對의 物量 攻勢에 맞서 데이비드는 ‘맞춤型’ 戰略을 폈다.○ 拒絶의 傷處데이비드가 出馬를 決心하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건 그의 性正體性이 알려지는 것이었다. 그는 2018年 父母에게 同性愛者임을 털어놓았을 때 뼈아픈 拒絶의 傷處를 받았다. 映畫 ‘初選’에는 共和黨 支持者인 아버지가 데이비드에게 侮蔑的인 內容의 보이스 메시지를 隨時로 보내는 場面이 나온다. “나는 너나 네 보이프렌드를 뭘로 보느냐. 그저 애니멀(動物)로 봐. 그런 짓들을 하는 애들日 뿐이지.” ‘이렇게 살면 너는 72時間 안에 죽을 것’이란 메시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데이비드가 2020年 選擧 때 韓人들에게 積極的으로 다가가지 못했던 것도 敎會 中心의 韓人 커뮤니티가 同性愛에 特히 保守的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性正體性을 숨긴 채 다른 모든 面에서 父母님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壓迫感을 갖고 成長했어요. 韓人 社會를 對할 때도 그런 負擔이 있었던 거 같아요. ‘初選’이 上映되면서 제 性正體性이 알려져 이番 選擧에선 더 以上 숨길 수가 없었죠. 韓人들이 제가 同性愛者라는 걸 알고 ‘저리 가’ 할까봐 무서웠어요.” 데이비드는 여러 韓人 代表들과 住民들을 찾아다니며 支持를 呼訴했다. 多幸히 相當數 韓人들이 그를 받아들였다. 2020年엔 選擧資金 18萬 달러 中 韓人 後援金이 500달러에 不過했지만 이番엔 22萬 달러 中 5萬 달러가 韓人 後援金이었다. “下院議員이 되면 韓半島 平和에도 寄與하고 싶어요. 美國은 大統領이 바뀔 때마다 對北 政策이 출렁거려요. 그래서 終戰 70年이 되도록 아무 變化가 없는 거 아닐까요. 제 뿌리인 韓國의 生存을 韓半島 平和에 眞摯한 關心이 없는 白人 政治人들 손에 맡겨 둬선 안 되잖아요.”○ 고메즈의 黑色 攻擊選擧를 8日 앞둔 10月 31日, 데이비드는 가깝게 지내던 유니시스 허낸데즈 LA 市議員으로부터 多急한 連絡을 받았다. 地域 活動家 出身의 히스패닉 女性인 허낸데즈는 고메즈 側 運動員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人種差別的 言行을 한다고 알려왔다. 그날 허낸데즈는 집에 찾아온 고메즈 側 運動員이 家族들에게 投票를 督勵하며 “相對 候補가 아시안人 거 알죠, 그렇죠?”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허낸데즈는 집 밖으로 나서던 運動員을 멈춰 세웠다. “그런 말을 왜 하는 거죠? 그런 게 人種差別人 거 몰라요?”(허낸데즈) “그냥 事實을 傳했을 뿐이에요.”(운동원) 허낸데즈는 트위터에 이날 일을 올리며 “衝擊的이고 失望스럽다. 우리는 적어도 이렇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데이비드는 “그女가 같은 少數人種으로서 다른 集團이 겪는 不當함에 함께 憤怒해 줬다는 게 고마웠다”고 했다. 選擧가 다가올수록 히스패닉과 黨員들을 結集시키려는 고메즈 側 攻勢는 거세졌다. 구글에 ‘데이비드 金’을 치면 고메즈 側이 만든 웹사이트가 여러 個 떴다. 사이트에는 데이비드가 18歲 때 아버지의 要求로 6個月假量 共和黨에 加入했던 記錄을 提示하며 민주黨員으로 僞裝한 공화당員이며 熱烈한 트럼프 支持者라는 等의 虛僞 事實이 羅列돼 있었다.○ 韓國行 飛行機를 기다리며선거 後 2週쯤 지난 11月 21日, 데이비드는 LA空港에서 서울行 飛行機를 기다리고 있었다. 全 世界 韓人들이 모이는 ‘디아스포라 다이얼로그’ 行事에 招請을 받아 가던 길이었다. 搭乘을 10餘 分 앞두고 아버지에게서 連絡이 왔다. 데이비드는 커밍아웃 以後 아버지의 連絡을 避해 왔지만, 7月 두 父子는 韓人타운의 한 食堂에서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그날 아버지는 “네가 그렇게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하겠느냐. 同性愛者라는 理由로 너에게 쏟아지는 非難이 있다면 내가 代身 받겠다”고 했다. 데이비드가 韓人타운의 大型 敎會에서 演說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놔준 것도 아버지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이 完全히 바뀌기까진 아직 많은 時間이 必要했다. “이番 選擧도 질 거 같은데 同性愛者라는 게 世上에 알려지고 이게 무슨 亡身이냐. 이제라도 그 映畫에서 同性愛 部分은 빼달라고 해.” 데이비드는 아슬아슬한 開票 狀況보다 아버지의 말에 더 기운이 빠졌다. 데이비드는 서울에 5日間 머물며 韓國의 靑年 政治人들과 在外同胞로부터 뜨거운 歡待를 받았다. “開票 結果가 每週 2番씩 업데이트되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롤러코스터예요. 映畫를 보신 어느 분이 ‘데이비드는 지더라도 이긴 것’이라고 激勵해 주셔서 勇氣가 나더군요. 떨어지더라도 어려운 분들을 도울 수 있는 포지션에 있고 싶어요.” 이番 中間選擧에서 聯邦下院에 出馬한 韓國系 候補는 데이비드를 包含해 總 5名이다. 이 中 現職 議員인 4名은 모두 再選에 成功했다. CA 34地區는 아직 開票가 끝나지 않았다. 11月 末 基準(開票率 98%)으로 데이비드는 49%의 支持를 받아 고메즈를 3000餘 票 差로 追擊하고 있다. 最終 結果는 12月 5日 確定된다.신광영 記者 neo@donga.com}

    • 202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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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歲 韓國系 政治 新人, 美 聯邦下院 3線 巨物을 떨게 하다

    選擧는 이제 40日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美國 聯邦下院 選擧에 出馬한 韓國系 美國人 데이비드 金(38)은 다음날 有權者들에 나눠줄 퍼즐의 조각을 하나씩 맞춰봤다. 30個 조각이 다 채워진 퍼즐에는 두 손에 돈다발의 쥔 巨人과 그를 올려다보는 작은 靑年이 그려져 있었다. 데이비드 選擧 캠프의 20代 奉仕者들이 다윗과 골리앗의 對決이 聯想되도록 만든 弘報物이었다. 데이비드는 “저희 地域엔 아이에게 늘 未安한 父母들이 많아요. 子女들에게 줄 퍼즐을 보내드리면 도움이 될 거 같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LA에서 兒童福祉 專門 國選辯護士(Child Dependency Attorney)로 일하며 脆弱 家庭을 자주 接했다. 父母들은 大槪 투잡, 쓰리잡을 뛰며 週 6, 7日 일했다. 子女들은 집에 放置되기 일쑤였다. 그가 出馬한 LA 34地區는 聯邦下院 地域區 435個 中 가장 가난한 20곳 中 하나다. ● 히스패닉 根據地에서 巨物과 맞서다퍼즐에서 巨人으로 描寫된 人物은 相對 候補인 이 地域 3線 現役議員(民主黨) 지미 고메즈였다. 住民 70萬 名 中 히스패닉(中南美系 移住民) 人口가 65%에 達하는 LA 34地區는 고메즈 같은 민주당 히스패닉 政治人들의 오랜 根據地였다.그와의 對決은 이番이 두 番째였다. 데이비드는 2年 前인 2020年에도 이곳에 出馬했다. 當時 고메즈는 選擧運動 내내 데이비드의 이름을 言及조차 하지 않을 程度로 그를 競爭相對로 보지 않았다. 世界 最大規模 韓人 커뮤니티인 LA韓人타운이 34地區에 있긴 했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韓人타운에도 알려지지 않은 ‘政治 新人’이었다. 現地 韓國系 言論마저 고메즈를 公式 支持했다.당시 데이비드는 낮엔 피켓을 든 채 住民들을 만나고 밤엔 우버 記事로 일할 때 쓰던 求刑 소나타를 몰고 다니며 壁報를 붙였다. 그가 唯一하게 앞섰던 것은 200餘 名에 達하던 自願奉仕者 數였다.하지만 選擧 結果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데이비드는 47%의 支持를 얻어 고메즈에 6%포인트 差로 敗했다. 이 地域 聯邦下院 選擧에서 票差가 이렇게 僅少했던 것은 1976年 以後 44年 만이었다. 데이비드의 2020年 選擧 過程은 最近 國內 開封한 映畫 ‘初選’(監督 전후석)에 詳細히 담겼다. 이 映畫는 當時 聯邦下院에 出馬한 韓國系 候補 5名의 挑戰을 그렸다.● 韓人 移民者의 險難한 成長期“第 父母님은 1982年 美國으로 移住하셨어요. 아버지가 牧師여서 開拓敎會를 하셨는데 移民者로 살면서 苦生을 많이 하셨죠.”데이비드가 靑少年期를 보낸 워싱턴州 터코마에는 駐韓美軍과 結婚한 뒤 男便을 따라 移住한 韓國人 女性이 많았다. 韓國에서 ‘黑人의 아내’ ‘混血’이라며 賤待받았던 이 女性들과 子女들은 美國에서도 蔑視를 받았다. 이들은 아버지의 敎會에 와서 慰安을 찾았다.“부모님이 英語를 못하셔서 英語가 必要한 집안일은 어떻게든 제가 處理했어요. 公課金에 延滯料가 너무 많이 붙으면 제가 官公署에 따라가 代身 따졌죠. 어려서부터 抑鬱한 일을 當한 韓國 분들을 代身해서 목소리를 내야 할 일도 많았어요.”데이비드는 UC버클리대를 거쳐 뉴욕 例示바臺 로스쿨을 卒業했다. 辯護士가 돼 美國의 主流社會로 들어가라는 아버지의 뜻을 忠實히 따랐다. 그가 社會로 나온 2010年 美國 法律市場은 金融危機 餘波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낮에는 經歷을 쌓기 위해 空짜 辯護士로 일하고 밤에는 우버 技士, 엑스트라 俳優, 學院 講師 等으로 生計를 꾸렸다.“그 땐 하루빨리 辯護士로 자리를 잡아 學資金 빚 20萬 달러(藥 2億6000萬 원)을 갚아야 했어요. 가까스로 소니픽처스 社內 辯護士로 就業이 됐어요.”소니픽처스는 LA 郊外의 富裕한 地域인 컬버시티에 있었다. 데이비드는 貧民街에 있는 집에서 出退勤하며 完全히 다른 두 世上을 每日 오갔다. “美國에 힘들게 定着했던 經驗 때문인지 週 7日을 일해도 生活이 안 되고, 病院에 못 가 죽어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데이비드는 結局 소니픽처스에서 나와 兒童福祉와 移民 事件을 맡는 國選辯護人으로 일했다. “辯護士나 熱心히 하지 무슨 政治냐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辯護士만 해서는 사람들 삶이 나아지는 進度가 너무 슬로우해서 답답했어요. 第 限定된 時間과 에너지를 脈緦麻地이즈(極大化)하고 싶었어요.” 그가 公約으로 내건 基本所得, 全 國民 健康保險, 移民 規制 緩和 等은 美國에서 少數者로 살아오며 切實하다고 느낀 것들이었다.● 2年 만의 再挑戰데이비드가 2年 만에 다시 挑戰狀을 냈을 때 고메즈는 戰意를 불태우고 있었다(미 聯邦下院은 2年 마다 새로 뽑는다). 放心하다 질 뻔했던 2020年의 失手를 反復하지 않으려 했다. 2年 間 製藥會社와 軍需業體 等 大企業에서 받은 數百萬 달러의 後援金도 있었다. 그 돈으로 두툼한 政策 弘報집과 各種 傳單을 만들어 登錄 有權者 32萬 名에게 여러 番 發送했다.고메즈는 카멀라 해리스 副統領을 비롯해 민주당 巨物들의 公開 支持를 받았다. 民主黨의 韓國系 下院議員인 앤디 金(뉴저지)과 매릴린 스트리클런드(워싱턴)마저 고메즈를 支持했다. 美國엔 같은 黨 現役 議員들끼리 支持 宣言을 주고받으며 議席을 防禦하도록 相扶相助하는 慣行이 있다.데이비드 亦是 민주당 候補였다(캘리포니아주는 같은 黨이라도 豫備選擧 2位 候補까지 出馬할 수 있다). 하지만 旣得權의 壁 앞에 선 場外 選手였다. 2年 前 59%였던 히스패닉 人口 比率은 이番 選擧 直前 選擧區가 調整되면서 65%로 늘어나 고메즈에게 더 유리해졌다. 아시안은 韓國系(13%)를 包含해 20% 程度였고, 白人이 10%, 黑人이 5%였다. 데이비드의 選擧 캠프에는 奉仕者들이 一一이 손으로 접은 便紙 8萬餘 通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公約과 抱負를 담은 이 便紙들은 各各 英語와, 韓國語, 스페인語, 中國語, 泰國語 等 여러 言語로 쓰여 있었다.“저희 地域區의 왼쪽과 위쪽 地域區는 白人들이 大多數이고, 오른쪽 地域區는 中國人, 아래쪽은 黑人들이 大部分이예요. 저희 地域만 모든 人種이 살아요. 우리 地域을 代表하는 議員이라면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데이비드는 英語로만 疏通했던 고메즈와 달리 히스패닉 洞네에선 스페인語로, 코리안타운에서는 韓國語로 말했다. 廣告板을 세울 때도 該當 地域 出身 市議員이나 活動家들과 나란히 찍은 寫眞을 넣었다. 相對의 物量 攻勢에 맞서 데이비드는 ‘맞춤型’ 戰略을 폈다.● 拒絶의 傷處데이비드가 出馬를 決心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건 그의 性正體性이 알려지는 것이었다. 그는 2018年 父母에게 同性愛者임을 털어놓았을 때 뼈아픈 拒絶의 傷處를 받았다. 映畫 ‘初選’에는 共和黨 支持者인 아버지가 데이비드에게 侮蔑的인 內容의 보이스 메시지를 隨時로 보내는 場面이 나온다. “나는 너나 네 보이프렌드를 뭘로 보느냐. 그저 한낱 애니멀(動物)로 봐. 그런 짓들을 하는 애들日 뿐이지.” ‘이렇게 살면 너는 72時間 안에 죽을 것’이란 메시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데이비드가 2020年 選擧 때 韓人들에게 積極的으로 다가가지 못했던 것도 敎會 中心의 韓人 커뮤니티가 同性愛에 特히 保守的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性正體性을 숨긴 채 다른 모든 面에서 父母님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壓迫感을 갖고 成長했어요. 韓人 社會를 對할 때도 그런 負擔이 있었던 거 같아요. ‘初選’이 上映되면서 제 性正體性이 알려져 이番 選擧에선 더 以上 숨길 수가 없었죠. 韓人들이 제가 同性愛者라는 걸 알고 ‘저리 가’ 할까봐 무서웠어요.”데이비드는 여러 韓人 代表들과 住民들을 찾아다니며 支持를 呼訴했다. 多幸히 相當數 韓人들이 그를 받아들였다. 2020年엔 選擧資金 18萬 달러 中 韓人 後援金이 500달러에 不過했지만 이番엔 22萬 달러 中 5萬 달러가 韓人 後援金이었다.“30년 前 LA暴動 때 美國 社會에서 徹底히 孤立됐던 在美僑胞들은 그제야 韓人을 代辯해줄 政治가 切實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아직도 韓國系 政治人이 너무 없어요. 韓國에 계신 분들에겐 저희가 美國人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저는 韓國이 제 뿌리라는 걸 잊어본 적이 없어요. 韓國語를 말하고 韓國 飮食을 먹으며 자랐으니까요. 下院議員이 되면 韓半島 平和에 꼭 寄與하고 싶어요. 美國은 大統領이 바뀔 때마다 對北 政策이 출렁거립니다. 그래서 終戰 70年이 되도록 아무 變化가 없는 거 아닐까요. 韓國의 生存을 韓半島 平和에 眞摯한 關心이 없는 白人 政治人들 손에 맡겨둬선 안 되잖아요.”● 고메즈의 黑色 攻擊選擧를 8日 앞둔 10月 31日, 데이비드는 가깝게 지내던 유니세스 에르난데스 LA市議員으로부터 多急한 連絡을 받았다. 地域 活動家 出身의 히스패닉 女性인 에르난데스는 고메즈 側 運動員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人種差別的 言行을 한다고 알려왔다.그날 에르난데스는 집에 찾아온 고메즈 側 運動員이 家族들에게 投票를 督勵하며 “相對 候補가 아시안人 거 알죠, 그쵸?”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에르난데스는 집 밖으로 나서던 運動員을 멈춰 세웠다.“그런 말을 왜 하는 거죠? 그런 게 人種差別人 거 몰라요?”(에르난데스) “그냥 事實을 傳했을 뿐이에요.”(운동원)에르난데스는 트위터에 이날 일을 올리며 “衝擊的이고 失望스럽다. 우리는 적어도 이렇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데이비드는 “그女가 같은 少數人種으로서 다른 集團이 겪는 不當함에 함께 憤怒해줬다는 게 무엇보다 고마웠다”고 했다.선거가 다가올수록 히스패닉과 黨員들을 結集시키려는 고메즈 側 攻勢는 거세졌다. 구글에 ‘데이비드 金’을 치면 고메즈 側이 만든 웹사이트가 여러 個 떴다. 사이트에는 데이비드가 18歲 때 아버지의 要求로 6個月假量 共和黨에 加入했던 記錄을 提示하며 민주黨員으로 僞裝한 공화당員이며 熱烈한 트럼프 支持者라는 等의 虛僞 事實이 羅列돼 있었다.● 韓國行 飛行機를 기다리며선거 後 2週쯤 지난 11月 21日, 데이비드는 LA空港에서 서울行 飛行機를 기다리고 있었다. 全 世界 韓人들이 모이는 ‘디아스포라 다이얼로그’ 行事에 招請을 받아 가던 길이었다. 搭乘을 10餘 分 앞두고 아버지한테 連絡이 왔다.데이비드는 커밍아웃 以後 아버지의 連絡을 避해왔지만, 7月 두 父子는 韓人타운의 한 食堂에서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그날 아버지는 “네가 그렇게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하겠느냐. 同性愛者라는 理由로 너에게 쏟아지는 非難이 있다면 내가 代身 받겠다”고 했다. 데이비드가 韓人타운의 大型 敎會에서 演說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놔준 것도 아버지였다.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이 完全히 바뀌기까진 아직 많은 時間이 必要했다. “이番 選擧도 질 거 같은데 同性愛者라는 게 世上에 알려지고 이게 무슨 亡身이냐. 이제라도 그 映畫에서 同性愛 部分은 빼달라고 해.” 데이비드는 아슬아슬한 開票 狀況보다 아버지의 말에 더 기운이 빠졌다.데이비드는 서울에 5日間 머물며 韓國의 靑年 政治人들과 在外同胞로부터 뜨거운 歡待를 받았다. “開票 結果가 每週 2番씩 업데이트가 되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롤러코스터에요. 映畫를 보신 어느 분이 ‘데이비드는 지더라도 이긴 것’이라고 激勵해주셔서 勇氣가 나더군요. 떨어지더라도 어려운 분들을 도울 수 있는 포지션에 있고 싶어요.”이번 中間選擧에서 聯邦下院에 出馬한 韓國系 候補는 데이비드를 包含해 總 5名이다. 二重 現職 議員인 4名은 모두 再選에 成功했다. LA 34地區는 아직 開票가 끝나지 않았다. 11月 末 基準(開票率 98%)으로 데이비드는 49%의 支持를 받아 고메즈를 3000餘 票 差로 追擊하고 있다. 最終 結果는 12月 5日 確定된다.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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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내 예일대 로스쿨 卒業狀은 15센트짜리였다”

    美國 聯邦大法官 9名 中 唯一한 라틴系人 소니아 소토마요르 大法官이 예일대 로스쿨을 卒業하던 1978年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소토마요르가 로펌 인턴 面接을 보던 날이었다. 파트너 辯護士가 그에게 물었다. “少數 人種 優待 政策(Affirmative Action)에 贊成하나요?” 大學入試나 採用 等에서 黑人, 라틴系 等 少數 人種을 優待하는 이 政策은 존 F 케네디 大統領이 1961年 導入해 美國 社會에 定着되어가던 때였다. 그 政策의 受惠로 아이비리그 大學에 進學했던 소토마요르는 堂堂히 答했다.“네.” 面接官은 못 마땅한 表情으로 다시 물었다. “로펌度 그 政策을 導入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로펌이 꼭 必要하지도 않은데 雇用하고 몇 年 있다가 解雇해야 한다면 그게 오히려 少數 人種 志願者에게 안 좋지 않을까요?” 프린스턴대를 最優等으로 卒業하고 예일대 로스쿨을 마친 소토마요르는 그날 파트너 辯護士의 無禮한 質問에 瞬間 말門이 막혔다고 自敍傳에 밝혔다. 그보다 5年 앞서 예일대 로스쿨을 卒業했던 클래런스 토머스 大法官도 비슷한 經驗을 했다. 黑人인 토마스는 夫人과 子女를 浮揚하려면 일자리가 切實했지만 로펌 面接에서 番番이 落榜했다. 白人 同期들은 골라서 로펌에 갔지만 그에겐 “黑人이 아니었다면 예일대가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란 先入見이 꼬리票처럼 따라붙었다. 토마스는 後날 自敍傳에서 이렇게 썼다.“나는 예일대에 다녔지만 예일대 出身은 아니었다. 같은 卒業狀이라도 白人과 黑人은 價値가 달랐다. 나는 담뱃匣에서 떼어 낸 15센트짜리 價格表를 예일대 로스쿨 卒業狀에 붙여 地下室에 처박아버렸다.” 소토마요르와 토마스는 둘 다 劣惡한 環境에서 成長했다. 소토마요르는 알콜中毒이던 아버지를 아홉 살에 여의었다. 看護師인 어머니가 라틴系 低所得層이 모여 살던 뉴욕 브롱크스에서 男妹를 길렀다. 토머스 亦是 人種差別이 甚한 조지아州에서 父母 없이 할아버지 손에 자랐다. 가난과 差別은 두 사람의 共有했던 ‘空氣’였다. 어렵게 名文 로스쿨을 나왔는데도 如前히 瘠薄한 世上에서 두 사람은 다르게 適應해갔다. 소토마요르는 正面 對決했다. 로펌 側의 人種 差別的 態度를 學校에 申告하고 다른 少數 人種 學生들과 聯合해 로펌에 公式 謝過를 要求했다. 그는 프린스턴大 在學 時節에도 少數人種 學生會長으로 活動하며 라틴系 敎職員이 ‘0名’인 不公正을 是正하라고 學校 側을 壓迫하기도 했다. 反面 토마스는 속으로 삭였다. 少數 人種 優待 政策이 그間의 모든 努力과 業績을 더럽혔다고 느꼈다. ‘依支할 수 있는 건 나 하나뿐’이란 믿음이 더 剛해졌다. 父母가 어린 토마스를 祖父母 집에 두고 떠난 뒤 그가 依支했던 할아버지는 자주 이런 말을 했다. “人種을 탓해봐야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오직 네 피와 땀으로 일어서야 한다.” 토마스는 예일大 캠퍼스에서도 일꾼들이 입는 멜빵바지에 검정부츠 차림으로 普通 혼자 다녔다고 한다. 둘 다 人種 差別 社會에서 ‘選擇받은 生存者’였지만 소토마요르는 같은 處地의 사람들에게 다리를 놓는 方式으로, 토마스는 自身을 지키려 壁을 쌓는 方式으로 活路를 찾으려 했다. 토마스는 黑人 社會와 등진 채 白人들의 論理를 擁護하는 保守的 法曹人으로 活躍하며 레이건 政府에 重用됐고, 1991年 아버지 부시 大統領의 指名을 받아 大法官이 됐다. 소토마요르 亦是 2009年 버락 오바마 前 大統領의 指名으로 大法官에 오르며 두 사람은 同僚가 됐다. 둘은 올 6月 커탄지 브라운 잭슨 新任 大法官이 合流하기 前까진 聯邦大法院에서 2名뿐인 有色人種 大法官이었다. 하지만 落胎權, 銃器規制 等 主要 判決 때마다 서로 對蹠點에 섰다. 지난달 末 大法院은 하버드대 等의 少數 人種 優待 政策이 白人 志願者에 對한 逆差別이란 主張의 適法性 與否를 가리는 心理를 始作했다. 이 事案에서도 두 大法官은 贊反 兩側을 代表하고 있다. 이番 裁判은 올 6月 大法院의 落胎權 廢止 判決 못지않은 美國 社會의 뜨거운 이슈다. 落胎權이 最近 中間選擧의 成敗를 가른 核心 爭點이었듯 몇 달 뒤 判決이 나면 美國이 또 다시 갈라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施行되는 大學 農漁村 特別銓衡, 公務員 兩性平等 採用目標制, 障礙人 雇傭割當制 等 비슷한 趣旨의 制度들도 挑戰을 받을 수 있다. 토마스 等 少數 人種 優待 政策에 批判的인 大法官들은 “憲法은 人種에 根據한 分類 自體를 排擊한다”며 特定 人種에 對한 差別을 中斷하는 方法은 모든 人種에 對한 差別을 中斷하는 것이라고 본다. 토마스 大法官은 自身의 經驗을 土臺로 “人種的 溫情主義는 다른 어떤 形態의 差別만큼이나 해롭다. 억지로 짜 맞춘 多樣性은 現實을 歪曲할 뿐이다. 黑人들이 大學 側의 支援 없이도 願하는 바를 成就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도 했다. 소토마요르 等 贊成 大法官들을 이 政策을 廢止한 一部 名門大에서 少數 人種 入學生 比率이 急減한 事實을 根據로 “人種 間 敎育 隔差가 如前한 現實을 外面해선 안 된다”고 反駁한다. 出發點이 다른 現實을 애써 無視하는 것은 人種 差別이 蔓延했던 1950年代에 通用됐던 ‘separate but equal(分離하더라도 平等하다면 合法)’ 政策을 擁護하는 것과 같다고 指摘한다. 當時 大法院은 黑人의 白人 學校 入學을 禁止한 措置에 對해 “白人 亦是 黑人 學校에 가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衡平性에 問題가 없다”고 결론지었고, 이 判決은 美國 司法府의 恥辱的 歷史로 남았다. 少數 人種 優待 政策의 受惠 對象에 黑人이나 라틴系보다 少數인 아시안은 包含되지 않아 學業 能力이 뛰어난 韓國系 學生들이 逆差別을 본다는 意見도 있다. 하지만 올해 ‘아시아系 美國人 有權者 設問調査(Asian American Voter Survey)’ 結果 韓國系의 82%, 印度系의 80%가 이 政策에 贊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白人들이 自身의 旣得權을 擁護하기 위해 아시아系를 防牌막이로 끌어들인 것 아니냐는 批判도 있다. 2003年 미시간大 로스쿨에 不合格한 白人 女性이 “逆差別을 받았다”며 大學 側을 相對로 건 訴訟에서 多數 意見을 執筆한 샌드라 D. 오코너 前 大法官은 “미시간의 少數 人種 優待 政策은 合憲”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大學이 志願者의 判斷할 때 人種을 考慮하지 않아도 되는 狀態가 가장 理想的일 것이다. 25年 前인 1978年 大法院이 少數 人種 優待 政策의 合法性을 처음 認定한 以後 25年 동안 少數 人種 學生들의 名門大 進學이 늘어났는데, 앞으로 25年 後에는 이런 政策이 더 以上 必要하지 않기를 期待한다.” 오코너 前 大法官의 豫想대로 少數 人種 優待 政策은 約 20年이 지난 只今 다시 法의 審判臺에 올랐다. 現在 聯邦大法官 9名 中 6名이 保守 性向이어서 落胎圈에 이어 이 政策도 廢止될 可能性이 적지 않다. 이番 裁判은 美國의 人種 間 ‘기울어진 運動場’이 얼마나 平平해졌는지 熾烈하게 따져 묻는 險難한 旅程이 될 것 같다.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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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예일대 로스쿨 卒業狀은 15센트짜리였다”

    美國 聯邦大法官 9名 中 唯一한 라틴系人 소니아 소토마요르 大法官이 예일대 로스쿨을 卒業하던 1978年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소토마요르가 로펌 인턴 面接을 보던 날이었다. 파트너 辯護士가 그에게 물었다. “少數 人種 優待 政策(Affirmative Action)에 贊成하나요?” 大學入試나 採用 等에서 黑人, 라틴系 等 少數 人種을 優待하는 이 政策은 존 F 케네디 大統領이 1961年 導入해 美國 社會에 定着되어가던 때였다. 그 政策의 受惠로 아이비리그 大學에 進學했던 소토마요르는 堂堂히 答했다.“네.” 面接官은 못 마땅한 表情으로 다시 물었다. “로펌度 그 政策을 導入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로펌이 꼭 必要하지도 않은데 雇用하고 몇 年 있다가 解雇해야 한다면 그게 오히려 少數 人種 志願者에게 안 좋지 않을까요?” 프린스턴대를 最優等으로 卒業하고 예일대 로스쿨을 마친 소토마요르는 그날 파트너 辯護士의 無禮한 質問에 瞬間 말門이 막혔다고 自敍傳에 밝혔다. 그보다 5年 앞서 예일대 로스쿨을 卒業했던 클래런스 토머스 大法官도 비슷한 經驗을 했다. 黑人인 토마스는 夫人과 子女를 浮揚하려면 일자리가 切實했지만 로펌 面接에서 番番이 落榜했다. 白人 同期들은 골라서 로펌에 갔지만 그에겐 “黑人이 아니었다면 예일대가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란 先入見이 꼬리票처럼 따라붙었다. 토마스는 後날 自敍傳에서 이렇게 썼다.“나는 예일대에 다녔지만 예일대 出身은 아니었다. 같은 卒業狀이라도 白人과 黑人은 價値가 달랐다. 나는 담뱃匣에서 떼어 낸 15센트짜리 價格表를 예일대 로스쿨 卒業狀에 붙여 地下室에 처박아버렸다.” 소토마요르와 토마스는 둘 다 劣惡한 環境에서 成長했다. 소토마요르는 알콜中毒이던 아버지를 아홉 살에 여의었다. 看護師인 어머니가 라틴系 低所得層이 모여 살던 뉴욕 브롱크스에서 男妹를 길렀다. 토머스 亦是 人種差別이 甚한 조지아州에서 父母 없이 할아버지 손에 자랐다. 가난과 差別은 두 사람의 共有했던 ‘空氣’였다. 어렵게 名文 로스쿨을 나왔는데도 如前히 瘠薄한 世上에서 두 사람은 다르게 適應해갔다. 소토마요르는 正面 對決했다. 로펌 側의 人種 差別的 態度를 學校에 申告하고 다른 少數 人種 學生들과 聯合해 로펌에 公式 謝過를 要求했다. 그는 프린스턴大 在學 時節에도 少數人種 學生會長으로 活動하며 라틴系 敎職員이 ‘0名’인 不公正을 是正하라고 學校 側을 壓迫하기도 했다. 反面 토마스는 속으로 삭였다. 少數 人種 優待 政策이 그間의 모든 努力과 業績을 더럽혔다고 느꼈다. ‘依支할 수 있는 건 나 하나뿐’이란 믿음이 더 剛해졌다. 父母가 어린 토마스를 祖父母 집에 두고 떠난 뒤 그가 依支했던 할아버지는 자주 이런 말을 했다. “人種을 탓해봐야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오직 네 피와 땀으로 일어서야 한다.” 토마스는 예일大 캠퍼스에서도 일꾼들이 입는 멜빵바지에 검정부츠 차림으로 普通 혼자 다녔다고 한다. 둘 다 人種 差別 社會에서 ‘選擇받은 生存者’였지만 소토마요르는 같은 處地의 사람들에게 다리를 놓는 方式으로, 토마스는 自身을 지키려 壁을 쌓는 方式으로 活路를 찾으려 했다. 토마스는 黑人 社會와 등진 채 白人들의 論理를 擁護하는 保守的 法曹人으로 活躍하며 레이건 政府에 重用됐고, 1991年 아버지 부시 大統領의 指名을 받아 大法官이 됐다. 소토마요르 亦是 2009年 버락 오바마 前 大統領의 指名으로 大法官에 오르며 두 사람은 同僚가 됐다. 둘은 올 6月 커탄지 브라운 잭슨 新任 大法官이 合流하기 前까진 聯邦大法院에서 2名뿐인 有色人種 大法官이었다. 하지만 落胎權, 銃器規制 等 主要 判決 때마다 서로 對蹠點에 섰다. 지난달 末 大法院은 하버드대 等의 少數 人種 優待 政策이 白人 志願者에 對한 逆差別이란 主張의 適法性 與否를 가리는 心理를 始作했다. 이 事案에서도 두 大法官은 贊反 兩側을 代表하고 있다. 이番 裁判은 올 6月 大法院의 落胎權 廢止 判決 못지않은 美國 社會의 뜨거운 이슈다. 落胎權이 最近 中間選擧의 成敗를 가른 核心 爭點이었듯 몇 달 뒤 判決이 나면 美國이 또 다시 갈라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施行되는 大學 農漁村 特別銓衡, 公務員 兩性平等 採用目標制, 障礙人 雇傭割當制 等 비슷한 趣旨의 制度들도 挑戰을 받을 수 있다. 토마스 等 少數 人種 優待 政策에 批判的인 大法官들은 “憲法은 人種에 根據한 分類 自體를 排擊한다”며 特定 人種에 對한 差別을 中斷하는 方法은 모든 人種에 對한 差別을 中斷하는 것이라고 본다. 토마스 大法官은 自身의 經驗을 土臺로 “人種的 溫情主義는 다른 어떤 形態의 差別만큼이나 해롭다. 억지로 짜 맞춘 多樣性은 現實을 歪曲할 뿐이다. 黑人들이 大學 側의 支援 없이도 願하는 바를 成就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도 했다. 소토마요르 等 贊成 大法官들을 이 政策을 廢止한 一部 名門大에서 少數 人種 入學生 比率이 急減한 事實을 根據로 “人種 間 敎育 隔差가 如前한 現實을 外面해선 안 된다”고 反駁한다. 出發點이 다른 現實을 애써 無視하는 것은 人種 差別이 蔓延했던 1950年代에 通用됐던 ‘separate but equal(分離하더라도 平等하다면 合法)’ 政策을 擁護하는 것과 같다고 指摘한다. 當時 大法院은 黑人의 白人 學校 入學을 禁止한 措置에 對해 “白人 亦是 黑人 學校에 가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衡平性에 問題가 없다”고 결론지었고, 이 判決은 美國 司法府의 恥辱的 歷史로 남았다. 少數 人種 優待 政策의 受惠 對象에 黑人이나 라틴系보다 少數인 아시안은 包含되지 않아 學業 能力이 뛰어난 韓國系 學生들이 逆差別을 본다는 意見도 있다. 하지만 올해 ‘아시아系 美國人 有權者 設問調査(Asian American Voter Survey)’ 結果 韓國系의 82%, 印度系의 80%가 이 政策에 贊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白人들이 自身의 旣得權을 擁護하기 위해 아시아系를 防牌막이로 끌어들인 것 아니냐는 批判도 있다. 2003年 미시간大 로스쿨에 不合格한 白人 女性이 “逆差別을 받았다”며 大學 側을 相對로 건 訴訟에서 多數 意見을 執筆한 샌드라 D. 오코너 前 大法官은 “미시간의 少數 人種 優待 政策은 合憲”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大學이 志願者의 判斷할 때 人種을 考慮하지 않아도 되는 狀態가 가장 理想的일 것이다. 25年 前인 1978年 大法院이 少數 人種 優待 政策의 合法性을 처음 認定한 以後 25年 동안 少數 人種 學生들의 名門大 進學이 늘어났는데, 앞으로 25年 後에는 이런 政策이 더 以上 必要하지 않기를 期待한다.” 오코너 前 大法官의 豫想대로 少數 人種 優待 政策은 約 20年이 지난 只今 다시 法의 審判臺에 올랐다. 現在 聯邦大法官 9名 中 6名이 保守 性向이어서 落胎圈에 이어 이 政策도 廢止될 可能性이 적지 않다. 이番 裁判은 美國의 人種 間 ‘기울어진 運動場’이 얼마나 平平해졌는지 熾烈하게 따져 묻는 險難한 旅程이 될 것 같다.신광영 記者 neo@donga.com}

    • 202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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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最惡의 自充手, 强制로 히잡 씌우기 [글로벌 이슈/신광영]

    요즘 이란 首都 테헤란의 거리에는 히잡을 벗고 뭉텅뭉텅 잘려나간 生머리를 드러낸 女性이 적지 않다. 語塞하게 잘린 머리칼은 히잡 着用을 强要하는 政府에 抵抗하는 榮光의 傷處들이다. 이란 女性들의 ‘히잡 示威’는 1970年代에도 있었다. 그때는 검은 히잡을 쓰는 게 抵抗의 表示였다. 當時 親美 性向의 팔레비 王朝는 西歐化를 밀어붙이며 히잡을 禁止했다. 40∼50年의 時差를 두고 正反對 示威가 벌어지는 듯하지만 女性들의 要求는 달라진 게 없다. 히잡을 强制로 씌우거나 벗기지 말고 選擇의 自由를 달라는 것이다. 히잡은 머리를 가릴 때 쓰는 천 조각이다. 쓸지 말지를 自律에 맡겼더라면 히잡은 自然스러운 이슬람 文化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政權이 各自 目的에 따라 女性의 몸을 統制하는 手段으로 惡用하면서 히잡은 尖銳한 政治的 象徵으로 變質됐다. 1979年이 重大한 分岐點이었다. 西歐化·世俗化를 爲해 히잡을 못 쓰게 했던 팔레비 政權이 이슬람革命으로 逐出되고, 律法學者 出身인 호메이니가 執權한 해였다. 새 政權은 墮落한 女性들을 ‘解毒시킨다’며 히잡 義務化를 꺼내들었다. 눈에 쉽게 띄는 히잡이야말로 ‘이슬람 原則을 바로 세운다’는 正體性을 皮膚로 와 닿게 해줄 最適의 素材였다. 그런데 미니스커트를 입던 女性들에게 억지로 히잡을 씌우자 豫想치 못한 ‘副作用’이 나타났다. 女性들의 大學 進學率이 높아지기 始作한 것이다. 蔓延했던 西歐化의 痕跡이 除去되고 嚴格한 이슬람 社會로 뒤바뀌자 保守的인 父母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딸들이 집을 떠나 大學에 가더라도 西歐 文化에 물들 憂慮 없이 安全해졌다고 느끼게 됐다. 以後 女性의 大學 進學率은 繼續 올라 只今은 男性보다 높은 70%에 達한다. 高學歷 女性들의 社會 進出이 늘자 不條理에 눈뜨는 女性이 많아졌다. 스포츠 競技場에 女性 出入을 禁止하는 等의 性差別的 惡習은 挑戰을 받기 始作했다. 히잡 强制化에 反對하는 示威도 꾸준히 벌어졌다. 게다가 히잡을 똑바로 썼는지 團束하는 道德警察은 强者에겐 느슨하고 弱者에겐 苛酷했다. 이들은 富者나 政府 官吏의 家族이 사는 地域을 거의 巡察하지 않는다. 이런 不公正은 다른 모든 種類의 差別을 經驗한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들였다. 한 달 사이 100餘 個 都市로 퍼진 示威에는 1970年代 ‘히잡 着用 禁止’에 抵抗했던 中年 女性들이 ‘히잡 着用 强制’에 맞서는 딸과 孫女를 위해 合流하고 있다. 테헤란 示威에 나온 20代 女性은 말했다. “엄마뻘인 분들이 히잡을 쓰고 나온 걸 보면 눈물이 나고, 싸울 勇氣가 나요. 여기는 逮捕, 浮上, 죽음을 覺悟해야 하는 戰爭터란 말이에요.” 지난 數十 年間 示威가 벌어질 때마다 武力으로 鎭壓해온 이란 政權은 이미 200名이 넘게 숨진 이番 示威도 잠재울 수 있을까. 이란 歷史上 처음으로 2030 女性이 主軸인 이番 히잡 示威에는 젊은 男性들과 庶民層이 大擧 參與하고 있다. 40年 넘게 이어진 美國의 制裁로 일자리가 없는데 物價는 10年 새 7倍가 뛰고, 貧困層이 人口 折半을 넘어선 狀況에서 “더는 잃을 게 없다”며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類例없는 速度로 늘고 있다. SNS에 올라오는 示威 映像을 보면 鎭壓作戰에 投入된 警察官들이 며칠째 잠을 못 자 길가에 주저앉은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누이, 戀人, 親舊, 엄마 같은 사람들에게 催淚彈을 쏘고 棍棒을 휘둘러야 하는 그들 亦是 지쳐가는 듯 보인다. 무엇보다 只今의 事態를 “美國과 이스라엘이 企劃한 暴動”이라고 一蹴하는 이란 最高指導者의 억지는 이란을 支撐해온 市民들의 信仰心을 致命的으로 損傷시키고 있다. 示威에 나온 한 中年 女性은 “나는 信實한 이슬람 信者이지만 이 政權이 우리 普通 사람들을 먼지처럼 取扱하는 僞善에 질렸다”고 했다. 히잡이 義務가 되는 瞬間 히잡 着用은 더 以上 宗敎的 믿음에 따른 것이 아닌, 受動的 行爲로 轉落한다. 요즘 테헤란 쇼핑街에선 손님과 히잡을 파는 商人이 嘲弄 섞인 對話를 나눈다. “社長님, 장사 이제 접으시죠. 히잡은 끝났어요.” “사세요. 사서 태우지 그래요(웃음).” 이란 政權은 國際的 孤立과 망가진 經濟를 解決하기에도 벅찬 渦中에 高級 人的 資源인 女性과, 中産層, 多數의 溫乾한 이슬람 信者들을 內部의 敵으로 돌려세웠다. 히잡의 象徵性을 活用해 權力을 鞏固히 하려다 오히려 ‘히잡의 힘’으로 結集한 全 國民的 抵抗에 逢着했다. 强制와 抑壓으로 뭔가를 이루려 하면 結局 最惡의 左忠手로 돌아온다는 것을 벼랑 끝에 놓인 이란을 보며 다시 떠올리게 된다. 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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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最惡의 自充手, 强制로 히잡 씌우기

    요즘 이란 首都 테헤란의 거리에는 히잡을 벗고 뭉텅뭉텅 잘려나간 生머리를 드러낸 女性들이 적지 않다. 語塞하게 잘린 머리칼은 히잡 着用을 强要하는 政府에 抵抗한다는 榮光의 傷處들이다.이란 女性들의 ‘히잡 示威’는 1970年代에도 있었다. 그 때는 검은 히잡을 쓰는 게 抵抗의 表示였다. 當時 親美 性向의 팔레비 王朝는 西歐化를 밀어붙이며 히잡을 禁止했다. 40~50年의 時差를 두고 正反對 示威가 벌어지는 듯하지만 女性들의 要求는 달라진 게 없다. 히잡을 强制로 씌우거나 벗기지 말고 選擇의 自由를 달라는 것이다. 히잡은 머리를 가릴 때 쓰는 천 조각이다. 쓸지 말지를 自律에 맡겼더라면 히잡은 자연스런 이슬람 文化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政權이 各自 目的에 따라 女性의 몸을 統制하는 手段으로 惡用하면서 히잡은 尖銳한 政治的 象徵으로 變質됐다.1979년이 重大한 分岐點이었다. 西歐化·世俗化를 爲해 히잡을 못 쓰게 했던 팔레비 政權이 이슬람革命으로 逐出되고, 律法學者 出身인 호메이니가 執權한 해였다. 새 政權은 墮落한 女性들을 ‘解毒시킨다’며 히잡 義務化를 꺼내들었다. 눈에 쉽게 띄는 히잡이야말로 ‘이슬람 原則을 바로 세운다’는 正體性을 皮膚로 와 닿게 해줄 最適의 素材였다.그런데 미니스커트를 입던 女性들에게 억지로 히잡을 씌우자 豫想치 못한 副作用이 나타났다. 女性들의 大學 進學率이 높아지기 始作한 것이다. 蔓延했던 西歐化의 痕跡이 除去되고 嚴格한 이슬람 社會로 뒤바뀌자 保守的인 父母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딸들이 집을 떠나 大學에 가더라도 西歐 文化에 물들 憂慮 없이 安全해졌다고 느끼게 됐다. 以後 이란 女性들의 大學進學率은 繼續 올라 只今은 男子보다 높은 70%에 達한다. 高學歷 女性들의 社會 進出이 늘자 不條理에 눈 뜨는 女性들이 많아졌다. 스포츠 競技場에 女性 出入을 禁止하는 等의 性差別的 惡習은 挑戰을 받기 始作했다. 히잡 强制化에 反對하는 示威도 꾸준히 벌어졌다.게다가 히잡을 똑바로 썼는지 團束하는 道德警察은 强者에겐 느슨하고 弱者에겐 苛酷했다. 이들은 富者나 政府 官吏의 家族들이 사는 地域을 거의 巡察하지 않는다. 테레란 北部의 高級 食堂街에선 맨 머리의 女性들이 히잡 쓴 女從業員들의 서빙을 받으며 食事를 즐기지만 團束되지 않는다. 道德警察이 탄 흰色 乘合車는 主로 市內와 公園, 地下鐵驛, 庶民 住居地域을 돈다.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느껴지도록 規則的으로 巡察한다. 逮捕된 女性들은 純潔 與否에 對해 質問을 받고, 公開 채찍질을 當하기도 하며, 때론 懲役刑에 處한다. 이런 不公正은 다른 모든 種類의 差別을 經驗한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들였다.한 달 사이 100餘 個 都市로 퍼진 示威에는 1970年代 ‘히잡 着用 禁止’에 抵抗했던 中年 女性들이 ‘히잡 着用 强制’에 맞서는 딸과 孫女를 위해 合流하고 있다. 테헤란 示威에 나온 20代 女性은 말했다. “엄마뻘인 분들이 히잡을 쓰고 나온 걸 보면 눈물이 나고, 싸울 勇氣가 나요. 여기는 逮捕, 浮上, 죽음을 覺悟해야 하는 戰爭터란 말이에요.”지난 數十 年 間 示威가 벌어질 때마다 無慈悲하게 鎭壓해온 이란 政權은 이미 200名이 넘게 숨진 이番 示威도 武力으로 잠재울 수 있을까. 이란 歷史上 처음으로 2030 女性들이 主軸인 이番 히잡 示威에는 젊은 男性들과 庶民層이 大擧 參與하고 있다. 40年 넘게 이어진 美國의 制裁로 일자리가 없는데 物價는 10年 새 7倍가 뛰고, 貧困層이 人口 折半을 넘어서는 狀況에서 “더는 잃을 게 없다”며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類例없는 速度로 늘고 있다. 示威에는 政權 守護에 强勁한 革命守備隊와 바시즈 民兵隊 뿐 아니라 一般 警察官들이 大擧 動員된 狀態다. SNS에 올라오는 映像을 보면 鎭壓作戰에 投入된 警察官들이 며칠 째 잠을 못 자 길가에 주저앉은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누이, 戀人, 親舊, 엄마 같은 사람들에게 催淚彈을 쏘고 棍棒을 휘둘러야 하는 그들 亦是 지쳐가는 듯 보인다. 무엇보다 只今의 事態를 “美國과 이스라엘이 企劃한 暴動”이라고 一蹴하는 이란 最高指導者의 억지는 只今껏 이란을 支撐해온 市民들의 信仰心을 致命的으로 損傷시키고 있다. 示威에 나온 한 中年女性은 “나는 信實한 이슬람 信者이지만 이 政權이 우리 普通 사람들을 먼지처럼 取扱하는 僞善에 질렸다”고 했다. 히잡이 義務가 되는 瞬間 히잡 着用은 더 以上 宗敎的 믿음에 따른 것이 아닌, 受動的 行爲로 轉落한다. 요즘 테헤란의 쇼핑街에선 손님과 히잡을 파는 商人이 嘲弄 섞인 對話를 나눈다.“사장님, 장사 이제 접으시죠. 히잡은 끝났어요.”“사세요. 사서 태우지 그래요(웃음).” 이란 政權은 國際的 孤立과 망가진 經濟를 解決하기에도 벅찬 渦中에 高級 人的資源인 女性과, 中産層, 多數의 溫乾한 이슬람 信者들을 內部의 敵으로 돌려세웠다. 히잡의 象徵性을 活用해 權力을 鞏固히 하려다 오히려 ‘히잡의 힘’으로 結集한 全 國民的 抵抗에 逢着했다. 强制와 抑壓으로 뭔가를 이루려 하면 結局 最惡의 左忠手로 돌아온다는 것을 벼랑 끝에 놓인 이란을 보며 다시 떠올리게 된다.신광영 記者 neo@donga.com}

    • 202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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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간 女子 蹴球 國家代表의 목숨 건 脫出記[글로벌 이슈/신광영]

    지난해 8月 末 美軍이 아프가니스탄에서 完全히 撤收하던 마지막 48時間 동안 벌어진 일이다. 首都 카불을 掌握한 탈레반을 被害 카불空港으로 몰려든 脫出 人波 中에 아프간 女子蹴球代表 選手들이 있었다. 10代 後半인 이 女子選手들은 탈레반의 主要 標的이었다.탈레반의 눈에 유니폼 차림으로 蹴球하는 女性은 코란과 律法을 배반한 反動分子였다. 히잡을 쓰고, 긴 소매 商議에 바지를 입더라도 男性이 女性의 몸매를 볼 수 있다는 理由에서였다. 그들은 ‘蹴球 少女’들을 賣春婦라고 불렀다. 家族에 不名譽를 안긴 罪로 處罰해야 한다고 아버지와 男子兄弟들을 劫迫하기도 했다.골키퍼인 파티(19)는 女子 蹴球代表팀 主張이다. 파티는 카불空港으로 出發하기 前 집 뒤뜰에 60cm 깊이로 땅을 팠다. 그 안에 國家代表 유니폼 4벌과 골키퍼 掌匣 模樣의 黃金色 트로피 5個를 묻었다. 그女는 구덩이를 파면서 自己 무덤을 파는 듯한 慘澹함이 들었다. 平素에 파티는 트로피를 집어 들며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이게 나를 살아있게 하는 것들이에요.”파티네 家族은 아프간에서도 逼迫받는 少數 民族인 하자라族이다. 탈레반에게 이 種族은 ‘人種 淸掃’ 對象이다. 파티는 蹴球場에서 唯一하게 자유로웠다. 늘 戰爭 中인 曺國, 女性, 少數民族 같은 足鎖가 그곳엔 없었다. 하지만 탈레반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只今, 나를 살아있게 한 것들의 痕跡을 지우는 게 살 길이었다.● 유니폼과 트로피를 땅에 묻었다 카불空港은 어떻게든 飛行機를 얻어 타고 故國을 脫出하려는 數萬 名의 群衆들로 가득했다. 탈레반 兵士들은 하늘로 繼續 銃을 쏘아댔다. 出國 게이트로 몰려드는 사람들에겐 채찍으로 내리쳤다. 곳곳에 火藥 냄새와 땀 냄새가 振動했다.파티는 1次 接線知人 空港 밖 注油所 앞에서 女子蹴球 代表팀 選手들에게 餘卷을 나눠줬다. 며칠 前 女子蹴球協會 事務室에 있던 選手 名簿, 얼굴 寫眞 等 탈레반이 찾을 수 있는 證據들을 모두 불태우면서 與圈만은 챙겨 놨다. 殺害 威脅 탓에 아프간에선 競技를 못하고 印度, 우즈베키스탄 等을 떠돌며 競技를 해왔기 때문에 選手들에겐 旅券이 있었다. 파티는 自己를 둘러싼 選手 10餘 名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約束 하자. 우리 中 한 名이라도 脫出에 成功하면 그 사람이 남은 사람들을 꼭 求해주기.”파티의 팔뚝에는 電話番號가 하나 적혀있었다. 携帶電話를 盜難當하거나 押收당할 境遇에 對備해 적어둔 것이었다. 3年 前까지 아프간 女子蹴球 國家代表팀 코치였던 카터의 番號였다. 當時 카터는 美國 텍사스에 살고 있었다. 海兵隊 女軍 將校 出身인 그는 이라크戰 派兵 經歷이 있었다. 이 때 經驗을 살려 아프간 內 美軍과 情報를 共有하며 選手들을 軍用機에 태우려 했다.카터에게 함께 救出作戰을 펴자고 說得한 사람이 있었다. 前 아프간 女子蹴球代表팀 主張 포팔이다. 2007年 女子代表팀 創團 멤버인 포팔은 攻擊手로 猛活躍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殺害 威脅에 시달리다 2011年 덴마크로 移住했다. 그女는 아프간의 後輩 選手들을 求해달라며 美國, 濠洲 政府와 人權團體에 도움을 請했다.카터와 포팔은 파티에게 어디로 움직일지 電話와 채팅 앱으로 實時間 指示를 했다. 파티는 選手들 中 거의 唯一하게 英語를 할 줄 알았다.● 탈레반 兵士가 나에게 걸어왔다“북쪽 게이트로 가. 사람이 나와 있을 거야.”카터는 파티에게 暗號와 祕密番號 말하면 들여보내 줄 거라고 했다. 暗號는 第2次 世界大戰 當時 海兵 英雄인 존 바실론, 祕密番號는 海兵隊 創設一人 1775年 11月 10日에 特殊文字를 結合한 것이었다.북쪽 게이트 앞에는 마침 美軍 兵士가 서 있었다. 파티는 그에게 다가가 카터가 일러준 暗號와 메시지를 여러 番 말했다. 하지만 兵士는 疑訝하다는 表情을 지었다. “너희들 누구야? 무슨 國家代表?” 그는 美國 旅券이 있는 사람만 통과시킨다는 말을 反復했다. 이 場面을 近處의 탈레반 兵士들이 有心히 노려보고 있었다.파티가 狀況을 알리려 카터와 포팔에게 多急히 메시지를 보냈다. 그 때 파티는 바로 옆에서 巨大한 銃聲을 들었다. 瞬間 귀와 눈이 멍해졌다. 날카로운 悲鳴 소리가 稀微하게 들려왔다. 파티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발길질에 쓰러졌다. 空港에 함께 왔던 파티의 오빠(23)가 急히 달려왔다. 오빠는 몸으로 발길질을 막아내며 生水桶을 꺼내 失神한 동생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정신을 차린 파티는 答狀을 確認하려 携帶電話부터 살폈다.‘너무 唐慌하지 마. 南쪽 게이트 濠洲 軍人들한테 狀況을 알릴게.’(카터)‘포기해선 안 돼. 繼續 싸우면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포팔)파티와 選手들은 南쪽 게이트로 方向을 바꿨다. 그곳까지는 탈레반 兵士들이 지키는 檢問所 두 곳을 通過해야 했다. 첫 番째 檢問所 앞은 빽빽한 人波로 한 걸음 내딛기 것조차 어려웠다. 서로를 주스 쥐어짜듯 밀치며 切迫하게 나아갔다. 6, 7살쯤 보이는 少女들이 어른들 틈에 짓눌려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밀지 마세요. 저희도 살고 싶어요.” 파티는 4살 막내 女同生이 떠올랐다. 그女는 소리쳤다. “어린 애들이잖아요. 숨 좀 쉬게 해주세요.” 오빠는 少女 中 한 名을 들어올려 어깨에 태웠다.옴짝달싹 못하는 群衆들을 相對로 탈레반은 電氣 채찍을 휘둘렀다. 一部 選手들은 團톡房에 “너무 아파. 더 異常 못 가겠어”라고 올렸다. 女子國家代表 先輩인 포팔이 團톡房에 連이어 메시지를 올렸다.‘챔피언스리그 決勝戰인 것처럼 움직여.’‘레드카드만 받지 말고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마음으로.’‘팔꿈치를 使用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뚫고 가야 돼.’파티와 選手들은 가까스로 두 番째 檢問所 앞에 닿았다. 車輛과 人波가 數百m 줄지어 있었다. 經費는 더욱 森嚴했다. 銃을 든 탈레반 兵士들이 한 名 씩 身元을 確認하고 있었다. 그 때 群衆 틈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저기 봐요. 女子 蹴球選手예요!”한 탈레반 兵士가 파티에게 銃을 겨누며 다가왔다. 怯에 질린 그女 앞으로 群衆 數百 名이 에워싸듯 몰려들었다. 兵士는 銃口를 그들에게 돌렸지만 瞬息間에 밀려드는 人波에 휩쓸려 넘어졌다. 파티는 無條件 앞으로 내달렸다. 흙먼지 속에 짓밟힌 채 피범벅이 된 탈레반 兵士의 앳된 얼굴이 어깨 너머로 보였다. 다른 탈레반 兵士들은 群衆들을 向해 銃을 쏘기 始作했다.● “넌 나처럼 奴隸로 살면 안 돼” 代表팀 主戰 골키퍼인 파티는 競技 中 날아오는 공을 다이빙해서 막아 내거나, 相對便 쪽으로 공을 뻥 차올려 抛物線으로 날아갈 때 痛快함을 느꼈다. 周邊의 執拗한 反對와 威脅에도 파티의 엄마만큼은 蹴球選手인 딸은 支持했다. 엄마는 學校에 다닌 적이 없고 13歲에 結婚해 5男妹를 낳았다. 엄마는 파티에게 “너는 나처럼 되면 안 된다. 집안의 奴隸가 되지 말고, 부엌 너머의 삶을 찾아가라”고 자주 말했다.파티와 同僚 選手들은 ‘너희들을 죽여서 蹴球 골대에 매달겠다’는 威脅을 隨時로 받았다. 極端主義者들에게 拉致되거나 集團 毆打를 當한 選手들도 있다. 그럼에도 蹴球를 向한 熱望을 繼續 타올랐다. 그들은 수많은 숨죽인 女性들의 希望이었다.파티는 탈레반의 銃알을 避해 艱辛히 두 番째 檢問所를 通過했다. 이제 南쪽 게이트가 눈앞에 있었다. 同僚들의 安全을 確認하려 뒤를 돌아보니 10餘m 앞에 오빠가 넘어져 있었다. 탈레반 兵士가 小銃 개머리板으로 오빠의 머리와 어깨를 내리치고 있었다. 땅바닥에 고꾸라진 오빠는 고개를 쳐들며 부르짖었다.“빨리 가, 어서 도망가, 넌 잡히면 안 돼”.파티는 온몸이 痲痹되는 듯 했다. 空港에 함께 왔던 파티의 家族들은 48時間 동안 脫出을 위해 死鬪를 벌이는 사이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空港 앞에서 4살 女同生을 가슴에 끌어 앉은 채 탈레반의 電氣 채찍을 맞고 주저앉았다. 10代인 두 동생은 空港 어딘가에서 사라져 行方을 알 수 없었다. 平素에 파티가 蹴球를 繼續 할 수 있도록 ‘보디가드’ 役割을 해줬던 오빠마저 눈앞에 무너졌다.파티는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을 느꼈다. 代表팀 同僚인 親한 親舊였다. 그女는 파티에게 울지 말라고 했다. 同僚 選手들의 눈길이 모두 파티를 向해 있었다. 머리와 옷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이 10代 女性들은 시커멓게 된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파티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돌처럼 단단해져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主張이다.’남쪽 게이트 앞에는 濠洲 軍人들이 있었다. 選手들은 與圈을 흔들며 ‘國家代表 選手’ ‘蹴球’ 같은 英語 單語를 미친 듯이 외쳤다. 軍人들은 오라고 손짓을 보냈지만 中間에 있던 탈레반 兵士들이 또 다시 막아섰다. 파티와 選手들 10餘 名은 서로 팔짱을 꽉 끼어 ‘人間 사슬’을 만들었다. 하도 꽉 끼어서 兩팔에 찌릿찌릿 電氣가 통하는 듯 했다. 한 몸이 된 채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 選手들을 向해 탈레반은 차마 銃을 쏘지 못했다.군 輸送機(C-130) 안은 下水溝 냄새와 땀 냄새가 섞여 코가 시큼했다. 搭乘者 中 一部는 空港 下水溝를 통해 게이트에 接近한 뒤 탈레반의 銃彈과 채찍질을 뚫고 飛行機에 올랐다. 飛行機가 離陸하자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機內를 가득 채웠다. 貨物칸 구석에 同僚 選手들과 앉아있던 파티 亦是 이제 아프간으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잘 가, 나의 國家代表 유니폼과 트로피들. 이제 땅속에서 安全할거야. 나의 어린 時節도 안녕.’● 濠洲에서 보낸 힘겨웠던 1年아프간 女子 蹴球代表 選手들은 두바이 等을 거쳐 지난해 9月 初 濠洲에 到着했다. 死地에서 脫出하는 데는 成功했지만 낯선 나라에 定着하기 위해 힘겨운 鬪爭이 1年 째 이어지고 있다.파티는 카불空港에서 잃어버린 初等生人 두 동생을 두바이空港에서 劇的으로 相逢했다. 기쁨도 暫時, 동생들을 學校에 보내고 生計를 책임져야 하는 家長의 役割이 기다리고 있었다. 파티는 다른 家族들을 아프간에 두고 왔다는 罪責感에서도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다. 동생들은 脫出 몇 時間 뒤 카불空港에서 自殺 爆彈테러가 벌어져 自身들을 下水溝 밖으로 꺼내준 美軍 兵士를 包含해 130名이 犧牲됐다는 消息에 큰 衝擊을 받았다.아프간 女子選手들은 蹴球 때문에 故鄕에서 도망쳐 와야 했지만 蹴球는 그들을 자유롭고 安全한 곳으로 이끌었다. 파티와 選手들은 濠洲 멜버른의 한 女子 프로축구팀에 所屬돼 다시 蹴球를 始作했다.이들의 유니폼 뒷面에는 이름 없이 등番號만 있었다. 選手들 身元이 알려지면 아프간의 家族들이 報復을 當할 수 있어서다. 파티는 유니폼 뒤에 조그맣게 재봉된 아프간 國旗를 發見했을 때 손으로 國旗를 매만지며 故國을 代表한다는 것의 자랑스러움을 새삼 떠올렸다.파티는 亡命 中인 選手團을 國家代表로 認定하지 않는 國際蹴球聯盟(FIFA)을 相對로 아프간 國家代表팀으로 認定해달라는 鬪爭도 始作했다.파티는 濠洲 言論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축구를 하면서 제가 사람이라는 것을, 제게도 權利가 있다는 것을, 저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蹴球는 絶對 抛棄 못해요. 蹴球를 통해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고 싶어요.”아프간을 떠난 지 8個月 만인 4月 末, 選手들은 한 女子 프로팀과 처음으로 競技를 치렀다. 0對0 無勝負였다. 아프간 팀이 한골을 넣었지만 오프사이드에 걸려 無效가 된 것을 選手들은 못내 아쉬워했다. ‘아프간 女性들은 元來 蹴球 할 運命이 아니어서 팀이 형편없다’는 惡評을 하도 많이 들어서 選手들은 한 番의 勝利가 늘 懇切했다.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파티는 選手들에게 말했다.“우리 슬픈 얼굴 하지 말자. 여기 이렇게 살아서 공을 차고 있잖아.”※QR코드를 스캔하면 보다 생생한 아프간 選手들의 脫出記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2-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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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레반 채찍질에도…아프간 ‘蹴球 少女’들은 自由 向해 달렸다

    지난해 8月 末 美軍이 아프가니스탄에서 完全히 撤收하던 마지막 48時間 동안 벌어진 일이다. 首都 카불을 掌握한 탈레반을 被害 카불空港으로 몰려든 脫出 人波 中에 아프간 女子蹴球代表 選手들이 있었다. 10代 後半인 이 女子選手들은 탈레반의 主要 標的이었다. 탈레반의 눈에 유니폼 차림으로 蹴球하는 女性은 코란과 律法을 배반한 反動分子였다. 히잡을 쓰고, 긴 소매 商議에 바지를 입더라도 男性이 女性의 몸매를 볼 수 있다는 理由에서였다. 그들은 ‘蹴球 少女’들을 賣春婦라고 불렀다. 家族에 不名譽를 안긴 罪로 處罰해야 한다고 아버지와 男子兄弟들을 劫迫하기도 했다. 골키퍼인 파티(19)는 女子 蹴球代表팀 主張이다. 파티는 카불空港으로 出發하기 前 집 뒤뜰에 60cm 깊이로 땅을 팠다. 그 안에 國家代表 유니폼 4벌과 골키퍼 掌匣 模樣의 黃金色 트로피 5個를 묻었다. 그女는 구덩이를 파면서 自己 무덤을 파는 듯한 慘澹함이 들었다. 平素에 파티는 트로피를 집어 들며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이게 나를 살아있게 하는 것들이에요.” 파티네 家族은 아프간에서도 逼迫받는 少數 民族인 하자라族이었다. 탈레반에게 이 種族은 ‘人種 淸掃’ 對象이었다. 파티는 蹴球場에서 唯一하게 자유로웠다. 늘 戰爭 中인 曺國, 女性, 少數民族 같은 足鎖가 그곳엔 없었다. 하지만 탈레반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只今, 나를 살아있게 한 것들의 痕跡을 지우는 게 살 길이었다.● 유니폼과 트로피를 땅에 묻었다 카불空港은 어떻게든 飛行機를 얻어 타고 故國을 脫出하려는 數萬 名의 群衆들로 가득했다. 탈레반 兵士들은 하늘로 繼續 銃을 쏘아댔다. 出國 게이트로 몰려드는 사람들에겐 채찍으로 내리쳤다. 곳곳에 火藥 냄새와 땀 냄새가 振動했다. 파티는 1次 接線知人 空港 밖 注油所 앞에서 女子蹴球 代表팀 選手들에게 餘卷을 나눠줬다. 며칠 前 女子蹴球協會 事務室에 있던 選手 名簿, 얼굴 寫眞 等 탈레반이 찾을 수 있는 證據들을 모두 불태우면서 與圈만은 챙겨 놨다. 殺害 威脅 탓에 아프간에선 競技를 못하고 印度, 우즈베키스탄 等을 떠돌며 競技를 해왔기 때문에 選手들에겐 旅券이 있었다. 파티는 自己를 둘러싼 選手 10餘 名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約束 하자. 우리 中 한 名이라도 脫出에 成功하면 그 사람이 남은 사람들을 꼭 求해주기.” 파티의 팔뚝에는 電話番號가 하나 적혀있었다. 携帶電話를 盜難當하거나 押收당할 境遇에 對備해 적어둔 것이었다. 3年 前까지 아프간 女子蹴球 國家代表팀 코치였던 카터의 番號였다. 當時 카터는 美國 텍사스에 살고 있었다. 海兵隊 女軍 將校 出身인 그는 이라크戰 派兵 經歷이 있었다. 이 때 經驗을 살려 아프간 內 美軍과 情報를 共有하며 選手들을 軍用機에 태우려 했다. 카터에게 함께 救出作戰을 펴자고 說得한 사람이 있었다. 前 아프간 女子蹴球代表팀 主張 포팔이다. 2007年 女子代表팀 創團 멤버인 포팔은 攻擊手로 猛活躍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殺害 威脅에 시달리다 2011年 덴마크로 移住했다. 그女는 아프간의 後輩 選手들을 求해달라며 美國, 濠洲 政府와 人權團體에 도움을 請했다. 카터와 포팔은 파티에게 어디로 움직일지 電話와 채팅 앱으로 實時間 指示를 했다. 파티는 選手들 中 거의 唯一하게 英語를 할 줄 알았다. ● 탈레반 兵士가 나에게 걸어왔다 “北쪽 게이트로 가. 사람이 나와 있을 거야.” 카터는 파티에게 暗號와 祕密番號 말하면 들여보내 줄 거라고 했다. 暗號는 第2次 世界大戰 當時 海兵 英雄인 존 바실론, 祕密番號는 海兵隊 創設一人 1775年 11月 10日에 特殊文字를 結合한 것이었다. 北쪽 게이트 앞에는 마침 美軍 兵士가 서 있었다. 파티는 그에게 다가가 카터가 일러준 暗號와 메시지를 여러 番 말했다. 하지만 兵士는 疑訝하다는 表情을 지었다. “너희들 누구야? 무슨 國家代表?” 그는 美國 旅券이 있는 사람만 통과시킨다는 말을 反復했다. 이 場面을 近處의 탈레반 兵士들이 有心히 노려보고 있었다. 파티가 狀況을 알리려 카터와 포팔에게 多急히 메시지를 보냈다. 그 때 파티는 바로 옆에서 巨大한 銃聲을 들었다. 瞬間 귀와 눈이 멍해졌다. 날카로운 悲鳴 소리가 稀微하게 들려왔다. 파티는 어딘가에서 날아온 발길질에 쓰러졌다. 空港에 함께 왔던 파티의 오빠(23)가 急히 달려왔다. 오빠는 몸으로 발길질을 막아내며 生水桶을 꺼내 失神한 동생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精神을 차린 파티는 答狀을 確認하려 携帶電話부터 살폈다. ‘너무 唐慌하지 마. 南쪽 게이트 濠洲 軍人들한테 狀況을 알릴게.’(카터) ‘抛棄해선 안 돼. 繼續 싸우면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포팔) 파티와 選手들은 南쪽 게이트로 方向을 바꿨다. 그곳까지는 탈레반 兵士들이 지키는 檢問所 두 곳을 通過해야 했다. 첫 番째 檢問所 앞은 빽빽한 人波로 한 걸음 내딛기 것조차 어려웠다. 서로를 주스 쥐어짜듯 밀치며 切迫하게 나아갔다. 6, 7살쯤 보이는 少女들이 어른들 틈에 짓눌려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밀지 마세요. 저희도 살고 싶어요.” 파티는 4살 막내 女同生이 떠올랐다. 그女는 소리쳤다. “어린 애들이잖아요. 숨 좀 쉬게 해주세요.” 오빠는 少女 中 한 名을 들어올려 어깨에 태웠다. 옴짝달싹 못하는 群衆들을 相對로 탈레반은 電氣 채찍을 휘둘렀다. 一部 選手들은 團톡房에 “너무 아파. 더 異常 못 가겠어”라고 올렸다. 女子國家代表 先輩인 포팔이 團톡房에 連이어 메시지를 올렸다. ‘챔피언스리그 決勝戰인 것처럼 움직여.’ ‘레드카드만 받지 말고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마음으로.’ ‘팔꿈치를 使用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뚫고 가야 돼.’ 파티와 選手들은 가까스로 두 番째 檢問所 앞에 닿았다. 車輛과 人波가 數百m 줄지어 있었다. 經費는 더욱 森嚴했다. 銃을 든 탈레반 兵士들이 한 名 씩 身元을 確認하고 있었다. 그 때 群衆 틈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저기 봐요. 女子 蹴球選手예요!” 한 탈레반 兵士가 파티에게 銃을 겨누며 다가왔다. 怯에 질린 그女 앞으로 群衆 數百 名이 에워싸듯 몰려들었다. 兵士는 銃口를 그들에게 돌렸지만 瞬息間에 밀려드는 人波에 휩쓸려 넘어졌다. 파티는 無條件 앞으로 내달렸다. 흙먼지 속에 짓밟힌 채 피범벅이 된 탈레반 兵士의 앳된 얼굴이 어깨 너머로 보였다. 다른 탈레반 兵士들은 群衆들을 向해 銃을 쏘기 始作했다.● “넌 나처럼 奴隸로 살면 안 돼” 代表팀 主戰 골키퍼인 파티는 競技 中 날아오는 공을 다이빙해서 막아 내거나, 相對便 쪽으로 공을 뻥 차올려 抛物線으로 날아갈 때 痛快함을 느꼈다. 周邊의 執拗한 反對와 威脅에도 파티의 엄마만큼은 蹴球選手인 딸은 支持했다. 엄마는 學校에 다닌 적이 없고 13歲에 結婚해 5男妹를 낳았다. 엄마는 파티에게 “너는 나처럼 되면 안 된다. 집안의 奴隸가 되지 말고, 부엌 너머의 삶을 찾아가라”고 자주 말했다. 파티와 同僚 選手들은 ‘너희들을 죽여서 蹴球 골대에 매달겠다’는 威脅을 隨時로 받았다. 極端主義者들에게 拉致되거나 集團 毆打를 當한 選手들도 있다. 그럼에도 蹴球를 向한 熱望을 繼續 타올랐다. 그들은 수많은 숨죽인 女性들의 希望이었다. 파티는 탈레반의 銃알을 避해 艱辛히 두 番째 檢問所를 通過했다. 이제 南쪽 게이트가 눈앞에 있었다. 同僚들의 安全을 確認하려 뒤를 돌아보니 10餘m 앞에 오빠가 넘어져 있었다. 탈레반 兵士가 小銃 개머리板으로 오빠의 머리와 어깨를 내리치고 있었다. 땅바닥에 고꾸라진 오빠는 고개를 쳐들며 부르짖었다. “빨리 가, 어서 도망가, 넌 잡히면 안 돼”. 파티는 온몸이 痲痹되는 듯 했다. 空港에 함께 왔던 파티의 家族들은 48時間 동안 脫出을 위해 死鬪를 벌이는 사이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空港 앞에서 4살 女同生을 가슴에 끌어 앉은 채 탈레반의 電氣 채찍을 맞고 주저앉았다. 10代인 두 동생은 空港 어딘가에서 사라져 行方을 알 수 없었다. 平素에 파티가 蹴球를 繼續 할 수 있도록 ‘보디가드’ 役割을 해줬던 오빠마저 눈앞에 무너졌다. 파티는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을 느꼈다. 代表팀 同僚인 親한 親舊였다. 그女는 파티에게 울지 말라고 했다. 同僚 選手들의 눈길이 모두 파티를 向해 있었다. 머리와 옷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이 10代 女性들은 시커멓게 된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파티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돌처럼 단단해져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主張이다.’ 南쪽 게이트 앞에는 濠洲 軍人들이 있었다. 選手들은 與圈을 흔들며 '國家代表 選手’ ‘蹴球’ 같은 英語 單語를 미친 듯이 외쳤다. 軍人들은 오라고 손짓을 보냈지만 中間에 있던 탈레반 兵士들이 또 다시 막아섰다. 파티와 選手들 10餘 名은 서로 팔짱을 꽉 끼어 '人間 사슬'을 만들었다. 하도 꽉 끼어서 兩팔에 찌릿찌릿 電氣가 통하는 듯 했다. 한 몸이 된 채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 選手들을 向해 탈레반은 차마 銃을 쏘지 못했다. 軍 輸送機(C-130) 안은 下水溝 냄새와 땀 냄새가 섞여 코가 시큼했다. 搭乘者 中 一部는 空港 下水溝를 통해 게이트에 接近한 뒤 탈레반의 銃彈과 채찍질을 뚫고 飛行機에 올랐다. 飛行機가 離陸하자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機內를 가득 채웠다. 貨物칸 구석에 同僚 選手들과 앉아있던 파티 亦是 이제 아프간으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잘 가, 나의 國家代表 유니폼과 트로피들. 이제 땅속에서 安全할거야. 나의 어린 時節도 안녕.’● 濠洲에서 보낸 힘겨웠던 1年 아프간 女子 蹴球代表 選手들은 두바이 等을 거쳐 지난해 9月 初 濠洲에 到着했다. 死地에서 脫出하는 데는 成功했지만 낯선 나라에 定着하기 위해 힘겨운 鬪爭이 1年 째 이어지고 있다. 파티는 카불空港에서 잃어버린 初等生人 두 동생을 두바이空港에서 劇的으로 相逢했다. 기쁨도 暫時, 동생들을 學校에 보내고 生計를 책임져야 하는 家長의 役割이 기다리고 있었다. 파티는 다른 家族들을 아프간에 두고 왔다는 罪責感에서도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다. 동생들은 脫出 몇 時間 뒤 카불空港에서 自殺 爆彈테러가 벌어져 自身들을 下水溝 밖으로 꺼내준 美軍 兵士를 包含해 130名이 犧牲됐다는 消息에 큰 衝擊을 받았다. 아프간 女子選手들은 蹴球 때문에 故鄕에서 도망쳐 와야 했지만 蹴球는 그들을 자유롭고 安全한 곳으로 이끌었다. 파티와 選手들은 濠洲 멜버른의 한 女子 프로축구팀에 所屬돼 다시 蹴球를 始作했다. 이들의 유니폼 뒷面에는 이름 없이 등番號만 있었다. 選手들 身元이 알려지면 아프간의 家族들이 報復을 當할 수 있어서다. 파티는 유니폼 뒤에 조그맣게 재봉된 아프간 國旗를 發見했을 때 손으로 國旗를 매만지며 故國을 代表한다는 것의 자랑스러움을 새삼 떠올렸다. 파티는 亡命 中인 選手團을 國家代表로 認定하지 않는 國際蹴球聯盟(FIFA)을 相對로 아프간 國家代表팀으로 認定해달라는 鬪爭도 始作했다. 파티는 濠洲 言論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蹴球를 하면서 제가 사람이라는 것을, 제게도 權利가 있다는 것을, 저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蹴球는 絶對 抛棄 못해요. 蹴球를 통해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고 싶어요.” 아프간을 떠난 지 8個月 만인 4月 末, 選手들은 한 女子 프로팀과 처음으로 競技를 치렀다. 0對0 無勝負였다. 아프간 팀이 한골을 넣었지만 오프사이드에 걸려 無效가 된 것을 選手들은 못내 아쉬워했다. ‘아프간 女性들은 元來 蹴球 할 運命이 아니어서 팀이 형편없다’는 惡評을 하도 많이 들어서 選手들은 한 番의 勝利가 늘 懇切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파티는 選手들에게 말했다. “우리 슬픈 얼굴 하지 말자. 여기 이렇게 살아서 공을 차고 있잖아.”신광영 記者 neo@donga.com}

    • 202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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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Z世代의 反中 ‘憤怒 버튼’을 누른 것은[글로벌 이슈/신광영]

    “中國語 하나만 제대로 해도 먹고살 걱정 없다”는 말이 통하던 時節에 筆者는 大學入試를 치렀다. 當時 중어中文科는 ‘핫하게’ 떠오르는 學科였다. 1992年 韓中 修交 以後 몇 年이 흘러 中國 市場에 對한 期待感이 부풀던 때였다. 20餘 年이 지난 요즘은 달라졌다. 여러 大學에서 중어中文科가 폐과되고 中國 關聯 敎養講座는 閉講되고 있다. 中國語를 배우는 中高校生度 줄어 지난해 中高校 敎師 任用試驗에서 中國語 科目 選拔 人員은 ‘0名’이었다. 異常한 일이다. 修交 當時엔 우리와 規模가 비슷했던 中國 經濟는 30年 새 韓國의 10倍로 커졌다. 韓中 貿易 規模 亦是 47倍로 늘어 中國語 能通者를 찾는 需要가 많아질 법한데 中國語의 人氣는 식어버렸다. 며칠 前 동아일보가 2030世代를 對象으로 中國에 對한 認識 調査를 한 結果를 보면 달라진 世態를 더욱 實感하게 된다. 韓國의 젊은이들은 日本은 勿論이고 北韓보다도 中國을 더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取材팀은 韓中 MZ世代 10名씩 總 20名을 深層 인터뷰하기도 했는데 韓國 靑年들의 말에는 中國을 바라보는 3가지 觀點이 녹아 있었다. 于先, 中國이 强大國인 건 맞지만 ‘强大國의 國格’을 갖췄다고는 보지 않는다. 脫權威主義 時代에 태어나고 자란 韓國의 2030世代는 經濟·文化的 影響力을 가진 先進國 市民의 눈으로 中國을 바라본다. 共産黨 一黨 體制下에서 表現의 自由가 制限되고, 홍콩 臺灣을 威脅하는 中國을 보며 ‘價値의 距離’를 느끼는 것을 넘어 國家化된 ‘꼰대’에 가깝다고 여긴다. 둘째, 中國에 對한 非好感이 많지만 經濟·安保 分野 影響力은 認定하지 않을 수 없다. 中國의 國內總生産(GDP)은 美國의 70%를 넘어섰고, 北韓의 後援者 役割을 하고 있어 韓半島 情勢에 미치는 影響力이 莫大하다는 걸 2030世代는 잘 알고 있다. 中國이 2016年 韓國에 ‘사드 報復’을 恣行한 것 亦是 그들은 直接 目擊했다. 一方的으로 當하는 것만 같아 답답하지만 國益을 생각하면 中國에 등 돌릴 수도 없다는 ‘現打’(現實 自覺 타임)에 直面하는 게 2030世代의 세 番째 感情 經路다. 여기에 過去 數世紀에 걸친 中國과의 非對稱的 關係, 6·25戰爭 때 서로 銃을 겨눴던 歷史的 記憶까지 겹쳐지면 無力感은 敵對感으로 번진다. 本報 認識 調査에서 2030世代가 中國에 非好感人 理由로 ‘김치와 한복이 中國에서 祈願했다는 主張’을 가장 많이 꼽은 것도 그 延長線上에 있다. 우리를 高壓的으로 對해 온 中國이 傳統文化마저 빼앗으려 한다는 心理的 마지노線을 건드린 것이다. 2030世代의 反中 情緖는 이처럼 構造的으로 累積된 感情이다. 가볍게 볼 問題가 아니다. 이들에게 反日 感情은 깊이 潛在해 있으면서도 日常에서 體感되지 않는 ‘休火山’이라면 反中 情緖는 언제든 鎔巖이 솟구칠 수 있는 ‘活火山’이다. 本報 深層 인터뷰에 應한 中國 2030世代 10名의 答辯에는 눈에 띄는 共通點이 있었다. 中國에 對한 韓國 靑年들의 ‘憤怒 버튼’은 달궈져 있는 데 비해 中國 靑年들은 比較的 平靜心을 維持하며 차분하게 韓國을 바라본다는 點이다. 이들은 韓國의 사드 配置에 對해 “中國엔 威脅이지만 各自 自國 利益을 優先視할 수밖에 없으므로 理解 못할 일은 아니다”란 趣旨로 말했다. 김치·韓服 論難에 對해선 “文化란 게 서로 影響을 주고받기 마련이다. 起源을 따지는 건 無意味하다”며 무덤덤해했다. 韓國人들의 批判을 否定하진 않으면서도 ‘그래도 내 생각엔 變함이 없다’는 態度는 間隙을 좁히기 어려운 ‘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問題는 ‘우리는 뜨겁고, 相對는 차가운’ 韓中 未來世代의 構圖가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이다. 美中 葛藤 激化로 우리 政府가 어느 한쪽의 選擇을 要求받는 狀況에서 反中 鑑定은 均衡 있고 冷徹한 外交 戰略을 推進하는 데 妨害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政府로선 國內 輿論을 完全히 無視하기 어렵고, 反中 輿論이 政治的으로 惡用될 可能性도 있다. 게다가 3連任을 試圖하는 中國 시진핑 國家主席은 愛國主義 敎育을 强化하고 있어 反中 感情이 反韓 感情을 刺戟해 韓國 企業들에 불똥이 튈 수 있다. MZ世代의 反中 情緖는 그럴 만한 充分한 理由가 있다. 하지만 24日 ‘韓中 修交 30周年’을 맞는 우리 政府는 嚴重한 國際 情勢에 對應하고 賢明하게 中國을 活用하기 위해 反中 感情을 管理해야 하는 課題를 안고 있다. 여러 代案이 必要하겠지만 中國과 對等한 外交를 하는 것부터 始作해야 한다. ‘低姿勢 外交’는 타오르는 反中 感情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 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2-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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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Z世代의 反中 ‘憤怒 버튼’을 누른 것은

    “中國語 하나만 제대로 해도 먹고살 걱정 없다”는 말이 통하던 時節에 筆者는 大學入試를 치렀다. 當時 중어中文科는 ‘핫하게’ 떠오르는 學科였다. 1992年 韓中 修交 以後 몇 年이 흘러 中國 市場에 對한 期待感이 부풀던 때였다. 20餘 年이 지난 요즘은 달라졌다. 여러 大學에서 중어中文科가 폐과되고 中國 關聯 敎養講座는 閉講되고 있다. 中國語를 배우는 中高校生度 줄어 지난해 中高校 敎師 任用考試에서 中國語 科目 選拔 人員은 ‘0名’이었다. 異常한 일이다. 修交 當時엔 우리와 規模가 비슷했던 中國 經濟는 30年 새 韓國의 10倍로 커졌다. 韓中 貿易 規模 亦是 47倍로 늘어 中國語 能通者를 찾는 需要가 많아질 법한데 中國語의 人氣는 식어버렸다. 며칠 前 동아일보가 2030世代를 對象으로 中國에 對한 認識 調査를 한 結果를 보면 달라진 世態를 더욱 實感하게 된다. 韓國의 젊은이들은 日本은 勿論 北韓보다도 中國을 더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取材팀은 韓中 MZ世代 10名씩 總 20名을 深層 인터뷰하기도 했는데 韓國 靑年들의 말에는 中國을 바라보는 3가지 觀點이 녹아 있었다. 于先, 中國이 强大國인 건 맞지만 ‘强大國의 國格’을 갖췄다고는 보지 않는다. 脫權威主義 時代에 태어나고 자란 韓國의 2030世代는 經濟·文化的 影響力을 가진 先進國 市民의 눈으로 中國을 바라본다. 共産黨 一黨 體制下에서 表現의 自由가 制限되고, 홍콩 臺灣을 威脅하는 中國을 보며 ‘價値의 距離’를 느끼는 것을 넘어 國家化된 ‘꼰대’에 가깝다고 여긴다. 둘째, 中國에 對한 非好感이 많지만 經濟·安保 分野 影響力은 認定하지 않을 수 없다. 中國의 國內總生産(GDP)은 美國의 70%를 넘어섰고, 北韓의 後援者 役割을 하고 있어 韓半島 情勢에 미치는 影響力이 莫大하다는 걸 2030世代는 잘 알고 있다. 中國이 2016年 韓國에 ‘사드 報復’을 恣行한 것 亦是 그들은 直接 目擊했다. 一方的으로 當하는 것만 같아 답답하지만 國益을 생각하면 中國에 등 돌릴 수도 없다는 ‘現打’(現實 自覺 타임)에 直面하는 게 2030世代의 세 番째 感情 經路다. 여기에 過去 數世紀에 걸친 中國과의 非對稱的 關係, 6·25戰爭 때 서로 銃을 겨눴던 歷史的 記憶까지 겹쳐지면 無力感은 敵對感으로 번진다. 本報 認識 調査에서 2030世代가 中國에 非好感人 理由로 ‘김치와 한복이 中國에서 祈願했다는 主張’을 가장 많이 꼽은 것도 그 延長線上에 있다. 우리를 高壓的으로 對해 온 中國이 傳統文化마저 빼앗으려 한다는 心理的 마지노線을 건드린 것이다. 2030世代의 反中 情緖는 이처럼 構造的으로 累積된 感情이다. 가볍게 볼 問題가 아니다. 이들에게 反日 感情은 깊이 潛在해 있으면서도 日常에서 體感되지 않는 ‘休火山’이라면 反中 情緖는 언제든 鎔巖이 솟구칠 수 있는 ‘活火山’이다. 本報 深層 인터뷰에 應한 中國 2030世代 10名의 答辯에는 눈에 띄는 共通點이 있었다. 中國에 對한 韓國 靑年들의 ‘憤怒 버튼’은 달궈져 있는 데 비해 中國 靑年들은 比較的 平靜心을 維持하며 차분하게 韓國을 바라본다는 點이다. 이들은 韓國의 사드 配置에 對해 “中國엔 威脅이지만 各自 自國 利益을 優先視할 수밖에 없으므로 理解 못할 일은 아니다”란 趣旨로 말했다. 김치·韓服 論難에 對해선 “文化란 게 서로 影響을 주고받기 마련이다. 起源을 따지는 건 無意味하다”며 무덤덤해했다. 韓國人들의 批判을 否定하진 않으면서도 ‘그래도 내 생각엔 變함이 없다’는 態度는 間隙을 좁히기 어려운 ‘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問題는 ‘우리는 뜨겁고, 相對는 차가운’ 韓中 未來世代의 構圖가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이다. 美中 葛藤 激化로 우리 政府가 어느 한쪽의 選擇을 要求받는 狀況에서 反中 鑑定은 均衡 있고 冷徹한 外交 戰略을 推進하는 데 妨害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政府로선 國內 輿論을 完全히 無視하기 어렵고, 反中 輿論이 政治的으로 惡用될 可能性도 있다. 게다가 3連任을 試圖하는 中國 시진핑 國家主席은 愛國主義 敎育을 强化하고 있어 反中 感情이 反韓 感情을 刺戟해 韓國 企業들에 불똥이 튈 수 있다. MZ世代의 反中 情緖는 그럴 만한 充分한 理由가 있다. 하지만 24日 ‘韓中 修交 30周年’을 맞는 우리 政府는 嚴重한 國際情勢에 對應하고 賢明하게 中國을 活用하기 위해 反中 感情을 管理해야 하는 課題를 안고 있다. 여러 代案이 必要하겠지만 中國과 對等한 外交를 하는 것부터 始作해야 한다. ‘低姿勢 外交’는 타오르는 反中 感情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신광영 記者 neo@donga.com}

    • 2022-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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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切親인 美國-英國도 얼굴 붉히는 强制送還

    美國 뉴욕 맨해튼 南쪽에 ‘조지프 도허티 코너’라는 交叉路가 있다. 뉴욕市 議會가 1990年 美國 政府를 相對로 ‘英國 送還 拒否’ 鬪爭을 벌인 아일랜드人의 이름을 따서 改名한 것이다. 그가 英國으로 送還되기 前까지 收監돼 있었던 矯導所가 이 交叉路 옆에 있었다. 도허티는 殺人 脫走犯이었다. 1980年 英國軍 將校를 銃으로 殺害했다. 그는 英國領인 北아일랜드를 독립시키려는 아일랜드 武裝團體(IRA) 兵士였다. 犯行 後 붙잡혔다가 脫獄한 뒤 旅券을 僞造해 美國으로 逃走했다. 英國은 그에게 ‘不在中 有罪 判決’을 내리고 終身刑을 宣告했다. 도허티는 3年 뒤 美國 聯邦搜査局(FBI)에 逮捕됐다. 英國이 送還을 要求하자 美國 政府는 同意했다. 拒否할 境遇 美國이 테러犯들의 避難處가 될 수 있고, 美國人을 殺害한 테러犯을 處罰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送還을 要請할 때 協助를 받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美國 法院이 制動을 걸었다. “도허티는 美國 獨立鬪士들이 200年 前 英國 統治에 맞선 것처럼 政治犯에 가깝다”며 1985年 ‘送還 不可’ 判決을 내렸다. 以後 도허티 送還 問題는 美 行政府와 司法府가 맞붙는 뜨거운 감자가 됐다. 政府는 어떻게든 判決을 無力化시키려 했고, 도허티는 送還을 막아 달라고 法院에 呼訴했다. 與野도, 輿論도 둘로 갈렸다. 7年의 論爭 끝에 1992年 美 聯邦大法院이 “英國에서 不當한 裁判을 받을 憂慮가 적다”며 追放을 決定했다. 도허티는 英國으로 送還돼 6年間 服役했다. 2019年에는 美國과 英國의 處地가 뒤바뀌었다. 이때는 人質 4名을 拉致 殺害하는 데 加擔한 2名의 이슬람國家(IS) 隊員 處理가 問題였다. 英國 國籍인 이들은 英國式 抑揚 때문에 搜査官들로부터 ‘비틀스’라는 別稱으로 불렸다. 이들 손에 處刑된 人質 中에는 제임스 폴리 記者 等 美國인 犧牲者가 많아 美國 內에서 嚴罰 輿論이 높았다. 美國은 2018年 시리아에서 이들을 生捕해 왔으나 有罪 判決을 하려면 英國으로부터 證據를 넘겨받아야 했다. 英國 政府는 美國과의 同盟關係를 考慮해 이들의 테러 加擔 證據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이番엔 英國 大法院이 가로막았다. 테러犯의 어머니가 政府 方針이 不當하다며 訴訟을 내 勝訴한 것이다. 大法官들은 두 IS 隊員에 對해 “그 어떤 殺人보다 끔찍한 蠻行을 저지른 怪物”이라면서도 美國이 死刑을 宣告하지 않겠다고 保證하지 않는 限 刑事訴訟에 使用될 個人情報를 넘겨선 안 된다고 判決했다. 美國은 이들에 對한 最高 刑量을 終身刑으로 制限하는 데 同意하고 나서야 證據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國家 間 犯罪人 送還은 이처럼 海外에서도 熾烈한 論爭을 불러온 事例가 많다. 國益과 正義, 外交와 政治가 뒤섞여 하나의 正答이 存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民主主義 國家들의 送還 事例들을 貫通하는 두 가지 共通點이 있다. 于先 政府가 單獨으로 決定하기보다 司法府의 判斷을 거쳐 結論을 내리고, 重犯罪者라도 拷問과 死刑이 恣行되는 國家로는 거의 보내지 않는다는 點이다. 犯罪者의 人權을 그렇게까지 지켜줘야 하는지 疑問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慣例의 根據가 되는 ‘犯罪人 引渡條約’이나 ‘유엔 拷問防止協約’은 人權 保護 自體에 目的이 있는 건 아니다. 犯罪人 送還에 關한 여러 國際條約은 大量虐殺이나 戰爭犯罪를 저지른 反人倫 犯罪者의 境遇 國境을 超越해 審判하는 ‘普遍的 管轄權(Universal Jurisdiction)’ 槪念에서 始作됐다. 犯罪者가 어느 나라에 있든 반드시 찾아내 罪값을 치르게 하자는 것이다. 다만 공정한 裁判을 위해 拷問과 死刑이 蔓延한 나라에는 送還하지 않는다는 原則이 더해졌다. 그래야 追後 이뤄질 嚴重한 處罰에 正當性이 생기기 때문이다. 甚至於 오사마 빈라덴 같은 數千 名을 殺傷한 테러組織의 首魁라도 拷問·死刑 可能性이 높은 곳에는 送還하지 않는 게 이 原則에 符合한다. 世界 各國이 犯罪인 送還 與否를 決定할 때 司法府의 判斷을 받는 것은 節次的 正義가 前提돼야 더 큰 正義를 實現할 수 있기 때문이다. 送還 決定을 行政府에만 맡겨두면 國益이나 政治的 利害關係에 따라 原則을 抛棄할 수 있어 牽制 裝置를 둔 것이다. 美國과 英國이 IS 테러犯 裁判 問題로 줄다리기를 하던 2019年 末, 우리 政府는 殺人 嫌疑가 있는 北韓 漁民 2名을 拿捕 5日 만에 强制北送 했다. 北宋이 正當한지를 두고 이들이 우리 政府와 法的으로 다툴 機會는 주어지지 않았다. 凶惡犯으로부터 國民을 保護하는 것은 重要하지만 節次的 正義를 희생시켜 지켜낸 價値는 以內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2-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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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切親인 美國-英國도 얼굴 붉히는 强制送還[글로벌 이슈]

    美國 뉴욕 맨해튼 南쪽에 ‘조지프 도허티 코너(Joseph Doherty Corner)’라는 交叉路가 있다. 뉴욕市 議會가 1990年 美國 政府를 相對로 ‘英國 送還 拒否’ 鬪爭을 벌인 아일랜드人 조지프 도허티의 이름을 따서 改名한 것이다. 그가 英國으로 送還되기 前까지 收監돼 있었던 矯導所가 이 交叉路 옆에 있었다. 도허티는 殺人 脫走犯이었다. 1980年 英國軍 將校를 銃으로 殺害했다. 그는 英國領인 北아일랜드를 독립시키려는 아일랜드 武裝團體(IRA) 兵士였다. 犯行 後 붙잡혔다가 脫獄한 뒤 旅券을 僞造해 美國으로 逃走했다. 英國은 그에게 ‘不在中 有罪 判決’을 내리고 終身刑을 宣告했다. 도허티는 그로부터 3年 뒤 美國 聯邦搜査局(FBI)에 逮捕됐다. 英國이 送還을 要求하자 美國 政府는 同意했다. 拒否할 境遇 美國이 테러犯들의 避難處가 될 수 있고, 美國人을 殺害한 테러犯을 處罰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送還을 要請할 때 協助를 받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美國 法院이 制動을 걸었다. “도허티는 美國 獨立鬪士들이 200年 前 英國 統治에 맞선 것처럼 政治犯에 가깝다”며 1985年 ‘送還 不可’ 判決을 내렸다. 以後 도허티 送還 問題는 美 行政府와 司法府가 맞붙는 뜨거운 감자가 됐다. 政府는 어떻게든 判決을 無力化시키려 했고, 도허티는 送還을 막아 달라고 法院에 呼訴했다. 與野도, 輿論도 둘로 갈렸다. 7年의 論爭 끝에 1992年 美 聯邦大法院이 “英國에서 不當한 裁判을 받을 憂慮가 적다”며 追放을 決定했다. 도허티는 結局 英國으로 送還돼 6年間 服役했다. 2019年에는 美國과 英國의 處地가 뒤바뀌었다. 이때는 人質 4名을 拉致 殺害하는 데 加擔한 2名의 이슬람國家(IS) 隊員 處理가 問題였다. 英國 國籍인 이들은 英國式 抑揚 때문에 搜査官들로부터 ‘비틀스’라는 別稱으로 불렸다. 이들 손에 處刑된 人質 中에는 제임스 폴리 記者 等 美國인 犧牲者가 많아 美國 內에서 嚴罰 輿論이 높았다. 美國은 2018年 시리아에서 이들을 生捕해 왔으나 有罪 判決을 하려면 英國으로부터 證據를 넘겨받아야 했다. 英國 政府는 美國과의 同盟關係를 考慮해 이들의 테러 加擔 證據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이番엔 英國 大法院이 가로막았다. 테러犯의 어머니가 政府 方針이 不當하다며 訴訟을 내 勝訴한 것이다. 大法官들은 두 IS 隊員에 對해 “그 어떤 殺人보다 끔찍한 蠻行을 저지른 怪物”이라면서도 美國이 死刑을 宣告하지 않겠다고 保證하지 않는 限 刑事訴訟에 使用될 個人情報를 넘겨선 안 된다고 判決했다. 美國은 이들에 對한 最高 刑量을 終身刑으로 制限하는 데 同意하고 나서야 證據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國家 間 犯罪人 送還은 이처럼 海外에서도 熾烈한 論爭을 불러온 事例가 많다. 國益과 正義, 外交와 政治가 뒤섞여 하나의 正答이 存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民主主義 國家들의 送還 事例들을 貫通하는 두 가지 共通點이 있다. 于先 政府가 單獨으로 決定하기보다 司法府의 判斷을 거쳐 結論을 내리고, 重犯罪者라도 拷問과 死刑이 恣行되는 國家로는 거의 보내지 않는다는 點이다. 犯罪者의 人權을 그렇게까지 지켜줘야 하는지 疑問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慣例의 根據가 되는 ‘犯罪人 引渡條約’이나 ‘유엔 拷問防止協約’은 人權 保護 自體에 目的이 있는 건 아니다. 犯罪人 送還에 關한 여러 國際條約은 大量虐殺이나 戰爭犯罪를 저지른 反人倫 犯罪者의 境遇 國境을 超越해 審判하는 ‘普遍的 管轄權(Universal Jurisdiction)’ 槪念에서 始作됐다. 犯罪者가 어느 나라에 있든 반드시 찾아내 罪값을 치르게 하자는 것이다. 다만 공정한 裁判을 위해 拷問과 死刑이 蔓延한 나라에는 送還하지 않는다는 原則이 더해졌다. 그래야 追後 이뤄질 嚴重한 處罰에 正當性이 생기기 때문이다. 甚至於 오사마 빈 라덴 같은 數千 名을 殺傷한 테러組織의 首魁라도 拷問·死刑 可能性이 높은 곳에는 送還하지 않는 게 이 原則에 符合한다. 世界 各國이 犯罪인 送還 與否를 決定할 때 司法府의 判斷을 받는 것은 節次的 正義가 前提돼야 더 큰 正義를 實現할 수 있기 때문이다. 送還 決定을 行政府에만 맡겨두면 國益이나 政治的 利害關係에 따라 原則을 抛棄할 수 있어 牽制 裝置를 둔 것이다. 美國과 英國이 IS 테러犯 裁判 問題로 줄다리기를 하던 2019年 末, 우리 政府는 殺人 嫌疑가 있는 北韓 漁民 2名을 拿捕 5日 만에 强制北送 했다. 北宋이 正當한지를 두고 이들이 우리 政府와 法的으로 다툴 機會는 주어지지 않았다. 凶惡犯으로부터 國民을 保護하는 것은 重要하지만 節次的 正義를 희생시켜 지켜낸 價値는 以內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신광영 記者 neo@donga.com}

    •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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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신광영]냄비 속 개구리 身世가 된 獨逸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는 ‘石油 앞에 壯士 없는’ 國際 秩序가 녹아있는 길이다. 1970年代 中東이 談合해 油價를 올린 ‘오일쇼크’의 威力을 實感한 우리는 當時 主要 産油國인 이란과 가까워지려 했다. 서울市는 이란의 테헤란市長을 招請해 姊妹結緣을 맺고 서울엔 테헤란로를, 테헤란에는 서울路를 만들었다. 朴正熙 政權이 1973年 美國의 挽留에도 “이스라엘은 占領 地域에서 撤收하라”는 親아랍 聲明을 낸 것 또한 같은 脈絡이다. 當時 이스라엘이 美國을 등에 업고 아랍國들과 領土 紛爭 中인 狀況에서 우리가 産油國인 아랍 쪽 便을 든 것이다. 日本도 聲明에 同參했다. 아무리 가까운 血盟이라도 石油 앞에선 後順位인 것이다. 20世紀 以後 大部分의 戰爭에서 石油는 勝敗의 決定的 變數였다. 第2次 世界大戰 때 日本이 美國 眞珠灣을 攻襲한 것은 石油 때문이었다. 當時 美國은 日本이 東南亞 石油 運送路를 確保하려 인도차이나를 侵攻하자 日本에 對한 石油 輸出을 禁止시켰다. 日本은 이를 풀기 위해 眞珠灣을 奇襲했는데, 報復에 나선 美國이 日本의 原油 輸送船을 大擧 沈沒시켰다. 日本은 原油 不足에 허덕이다가 敗亡으로 내몰렸다. 히틀러 亦是 에너지 需給 失敗로 敗했던 1次 大戰을 敎訓 삼아 2次 大戰 때는 石炭을 液化시켜 燃料로 만드는 石炭液化工場 稼動에 心血을 기울였다. 獨逸에 맞선 聯合軍이 勝機를 잡은 건 1944年 5月 大攻勢로 獨逸 全域의 石炭液化工場을 爆擊해 히틀러의 急所를 擊破하면서다. 以後 工場 稼動率이 3%까지 떨어지자 두 달 만에 獨逸은 降伏했다. 에너지를 쥔 쪽이 유리한 것은 이番 우크라이나 戰爭도 다르지 않다. 요즘 우리는 戰爭을 일으켜 全 世界를 危機로 내몬 러시아가 나 홀로 乘勝長驅하는 아이러니를 目睹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高油價 高物價에 呻吟하는데, 러시아는 天然가스와 原油 輸出로 好況을 누리고 있다. 그 돈으로 우크라이나에 미사일과 砲彈을 퍼붓는다. 여기서 注目하게 되는 나라가 獨逸이다. 獨逸은 2月 戰爭 勃發 以後 러시아에 가장 많은 돈을 보낸 西方 國家다. 3, 4月 두 달間 支給한 에너지 代金만 11兆3000億 원(83億 유로)이다. 獨逸은 天然가스의 55%, 石炭의 52%, 石油의 34%를 러시아에서 輸入한다. 全體 에너지源 中 約 25%가 러시아産이다. 獨逸은 2011年 후쿠시마 原電 事故 以後 原電 廢棄를 宣言했고 石炭發展度 줄이면서 風力 太陽曆 等 再生에너지 比率을 全體 戰力의 40% 가까이 높여 왔다. 그로 인한 電力 生産의 空白은 러시아 에너지로 메웠다. 獨逸을 修飾해온 ‘新再生에너지 强國’은 러시아 에너지 中毒이라는 致命的 缺陷 위에 세워진 虛妄한 名聲이었던 것이다. 獨逸의 러시아 에너지 輸入은 좋은 名分에서 始作됐다. 冷戰이 한창이던 1970年代 빌리 브란트 總理는 蘇聯과의 經濟 交流를 통해 緊張을 緩和한다는 東邦政策을 推進했다. 後任인 헬무트 슈미트 總理도 “貿易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銃을 쏘지 않는다”며 에너지 輸入을 늘렸다. 1989年 베를린 障壁이 무너지고 뒤이어 蘇聯이 崩壞하자 獨逸 政治人들은 “相互依存 戰略이 鐵의 帳幕을 걷어냈다”고 自評했다. 하지만 蘇聯 崩壞의 實質的 原因은 石油였다. 蘇聯은 原油 販賣가 全體 輸出의 60%를 차지할 程度로 絶對的이었는데, 美國이 이 弱點을 파고들었다. 로널드 레이건 政府는 西方 國家들과 連帶해 蘇聯産 石油와 天然가스 輸入을 줄이면서 사우디아라비아 等 産油國들을 부추겨 大大的인 石油 增産에 나서게 했다. 1985年 배럴當 28달러였던 國際油價는 6個月 새 3分의 1로 暴落했다. 石油 판 돈으로 聯邦國을 支援하고 海外 戰爭을 堪當하던 蘇聯은 이때 입은 致命傷에서 回復하지 못했다. 獨逸은 脫冷戰 後 러시아 에너지 依存 狀態를 바로잡을 機會가 여러 番 있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이 2008年 조지아 侵攻, 2014年 우크라이나 크림半島 倂合 等 野慾을 드러낼 때도 獨逸은 러-獨 天然가스 送油管 建設을 멈추지 않았다. 權威主義 國家를 변화시킨다는 自己滿足, 脫炭素 先導國이 되겠다는 抱負, 값싼 天然가스라는 눈앞의 달콤함에 眩惑돼 安保 危機를 直視하지 않은 것이다. 러시아는 最近 獨逸로 보내는 天然가스를 60%나 줄였다. 非常이 걸린 獨逸은 가장 더러운 에너지인 石炭 發電所를 再稼動하며 過去로 退行하고 있다. 러시아가 가스管을 完全히 잠그면 製造業 中心인 獨逸의 經濟成長率은 5%포인트 下落할 것이란 展望이 나온다. 只今 獨逸은 러시아가 언제 물을 끓일지 몰라 속 태우는 ‘냄비 속 개구리’ 身世다. 설익은 理想主義가 에너지 政策을 左右하면 어떤 代價가 따르는지 돌아보게 된다. 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2-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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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냄비 속 개구리 身世’…獨逸은 어쩌다 러 에너지에 中毒됐나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는 ‘石油 앞에 壯士 없는’ 國際 秩序가 녹아있는 길이다. 1970年代 中東이 談合해 油價를 올린 ‘오일쇼크’의 威力을 實感한 우리는 當時 主要 産油國인 이란과 가까워지려 했다. 서울市는 이란의 테헤란市長을 招請해 姊妹結緣을 맺고 서울엔 테헤란로를, 테헤란에는 서울路를 만들었다. 朴正熙 政權이 1973年 美國의 挽留에도 “이스라엘은 占領 地域에서 撤收하라”는 親아랍 聲明을 낸 것 또한 같은 脈絡이다. 當時 이스라엘이 美國을 등에 업고 아랍國들과 領土 紛爭 中인 狀況에서 우리가 産油國인 아랍 쪽 便을 든 것이다. 日本도 聲明에 同參했다. 아무리 가까운 血盟이라도 石油 앞에선 後順位인 것이다. 20世紀 以後 大部分의 戰爭에서 石油는 勝敗의 決定的 變數였다. 第2次 世界大戰 때 日本이 美國 眞珠灣을 攻襲한 것은 石油 때문이었다. 當時 美國은 日本이 東南亞 石油 運送路를 確保하려 인도차이나를 侵攻하자 日本에 對한 石油 輸出을 禁止시켰다. 日本은 이를 풀기 위해 眞珠灣을 奇襲했는데, 報復에 나선 美國이 日本의 原油 輸送船을 大擧 沈沒시켰다. 日本은 原油 不足에 허덕이다가 敗亡으로 내몰렸다. 히틀러 亦是 에너지 需給 失敗로 敗했던 1次 大戰을 敎訓 삼아 2次 大戰 때는 石炭을 液化시켜 燃料로 만드는 石炭液化工場 稼動에 心血을 기울였다. 獨逸에 맞선 聯合軍이 勝機를 잡은 건 1944年 5月 大攻勢로 獨逸 全域의 石炭液化工場을 爆擊해 히틀러의 急所를 擊破하면서다. 以後 工場 稼動率이 3%까지 떨어지자 두 달 만에 獨逸은 降伏했다. 에너지를 쥔 쪽이 유리한 것은 이番 우크라이나 戰爭도 다르지 않다. 요즘 우리는 戰爭을 일으켜 全 世界를 危機로 내몬 러시아가 나 홀로 乘勝長驅하는 아이러니를 目睹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高油價 高物價에 呻吟하는데, 러시아는 天然가스와 原油 輸出의 好況을 누리고 있다. 그 돈으로 우크라이나에 미사일과 砲彈을 퍼붓는다. 여기서 注目하게 되는 나라가 獨逸이다. 獨逸은 2月 戰爭 勃發 以後 러시아에 가장 많은 돈을 보낸 西方 國家다. 3, 4月 두 달間 支給한 에너지 代金만 11兆3000億 원(83億 유로)이다. 獨逸은 天然가스의 55%, 石炭의 52%, 石油의 34%를 러시아에서 輸入한다. 全體 에너지源 中 約 25%가 러시아産이다. 獨逸은 2011年 후쿠시마 原電 事故 以後 原電 廢棄를 宣言했고 石炭發展度 줄이면서 風力 太陽曆 等 再生에너지 比率을 全體 戰力의 40% 가까이 높여 왔다. 그로 인한 電力 生産의 空白은 러시아 에너지로 메웠다. 獨逸을 修飾해온 ‘新再生에너지 强國’은 러시아 에너지 中毒이라는 致命的 缺陷 위에 세워진 虛妄한 名聲이었던 것이다. 獨逸의 러시아 에너지 輸入은 좋은 名分에서 始作됐다. 冷戰이 한창이던 1970年代 빌리 브란트 總理는 蘇聯과의 經濟 交流를 통해 緊張을 緩和한다는 東邦政策을 推進했다. 後任인 헬무트 슈미트 總理도 “貿易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銃을 쏘지 않는다”며 에너지 輸入을 늘렸다. 1989年 베를린 障壁이 무너지고 뒤이어 蘇聯이 崩壞하자 獨逸 政治人들은 “相互依存 戰略이 鐵의 帳幕을 걷어냈다”고 自評했다. 하지만 蘇聯 崩壞의 實質的 原因은 石油였다. 蘇聯은 原油 販賣가 全體 輸出의 60%를 차지할 程度로 絶對的이었는데, 美國이 이 弱點을 파고들었다. 로널드 레이건 政府는 西方 國家들과 連帶해 蘇聯産 石油와 天然가스 輸入을 줄이면서 사우디아라비아 等 産油國들을 부추겨 大大的인 石油 增産에 나서게 했다. 1985年 배럴當 28달러였던 國際油價는 6個月 새 3分의 1로 暴落했다. 石油 판 돈으로 聯邦國을 支援하고 海外 戰爭을 堪當하던 蘇聯은 이때 입은 致命傷에서 回復하지 못했다. 獨逸은 脫冷戰 後 러시아 에너지 依存 狀態를 바로잡을 機會가 여러 番 있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이 2008年 조지아 侵攻, 2014年 우크라이나 크림半島 倂合 等 野慾을 드러낼 때도 獨逸은 러-獨 天然가스 送油管 建設을 멈추지 않았다. 權威主義 國家를 변화시킨다는 自己滿足, 脫炭素 先導國이 되겠다는 抱負, 값싼 天然가스라는 눈앞의 달콤함에 眩惑돼 安保 危機를 直視하지 않은 것이다. 러시아는 最近 獨逸로 보내는 天然가스를 60%나 줄였다. 非常이 걸린 獨逸은 가장 더러운 에너지인 石炭 發電所를 再稼動하며 過去로 退行하고 있다. 러시아가 가스管을 完全히 잠그면 製造業 中心인 獨逸의 經濟成長率은 5%포인트 下落할 것이란 展望이 나온다. 只今 獨逸은 러시아가 언제 물을 끓일지 몰라 속 태우는 ‘냄비 속 개구리’ 身世다. 설익은 理想主義가 에너지 政策을 左右하면 어떤 代價가 따르는지 돌아보게 된다.신광영 記者 neo@donga.com}

    • 202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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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銃은 銃으로 막을 수 있다’는 幻想[글로벌 이슈/신광영]

    美國 텍사스州 유밸디의 銃器 亂射 犧牲者 追慕行事에는 허리에 拳銃을 차고 自願奉仕를 온 住民들이 적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前 大統領을 2番 連續 支持할 程度로 共和黨 텃밭인 유밸디는 銃器 所持에 寬大한 典型的인 텍사스 시골이다. 小銃이 復權 景品으로 자주 내걸리는, 美國에서 가장 重武裝한 地域 中 하나다. 이런 마을에서 지난달 24日 銃器 事故로 初等學生 19名과 敎師 2名이 숨지자 武裝의 自由를 保障해야 한다는 住民들의 오랜 信念에도 龜裂이 생기기 始作했다. 犧牲된 아이의 三寸이 “더 以上의 慘事를 막으려면 敎師들을 銃으로 무장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다른 犧牲者의 할아버지가 “銃器 所持의 自由가 果然 무엇을 지켜줬나. 그 自由가 結局 사람을 죽였다”며 反論을 편다. 銃器 事故로 家族을 잃은 사람들은 銃器 規制 强化에 곧잘 贊成할 것 같지만 오히려 反對인 境遇도 많다. 事件 當時 銃을 갖고 있었다면 맞서 싸울 수 있고 애初에 犯罪者가 銃을 들고 威脅할 엄두를 못 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銃器 規制를 執拗하게 막아온 全美銃器協會(NRA) 等이 主管하는 射擊大會에선 마트나 피자집에 銃을 든 怪漢이 亂入한 狀況을 假定해 怪漢 服裝의 標的을 먼저 명중시키는 參加者가 優勝컵을 쥔다. ‘銃을 든 惡黨을 막는 건 오직 銃을 든 善한 市民’이라는 銃器 擁護論者들의 世界觀이 投影된 것이다. 武裝의 自由를 保障한 修正憲法 2條까지 굳이 안 가더라도, 나와 家族의 生命을 언제 到着할지 모를 警察에 依存하지 않고 스스로 지키자는 主張은 皮膚에 와닿는 나름의 說得力이 있다. 하지만 銃은 銃으로 막을 수 있다는 集團 心理는 現實에선 ‘幻想’에 가깝다. 이番 유밸디 銃器 亂射犯人 18歲 高校生은 學校로 進入하자마자 4學年 敎室에 亂入해 100餘 발을 쐈다. 마침 敎師들이 銃을 갖고 있어 곧바로 對應 射擊을 했다면 被害를 줄일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發生한 犧牲은 되돌릴 수 없다. 이番 事件에서 유밸디 警察은 學校로 進入하고도 1時間 넘게 犯人을 制壓하지 못했다. 警察은 “容疑者의 位置를 특정하지 못한 狀態에서 섣불리 움직이면 隊員들이 銃에 맞거나 學生들 被害가 더 커질 수 있었다”고 했다. 警察이 不實 對應을 했다면 잘못이지만 이는 武裝한 警察도 銃器犯을 單숨에 制壓하기 어렵다는 點을 보여준다. 銃器가 擴散되면 公權力의 火力은 더 强해지고, 그에 맞서 犯罪者들 亦是 더욱 致命的인 武器를 動員하면서 銃器 性能이 上向 平準化된 結果다. 銃器犯이 銃을 든 市民에 依해 現場에서 制壓된 事例도 極히 드물다. 敎師나 警備員이 武裝한다고 해서 銃器 테러犯들이 犯行을 抛棄할 可能性도 높지 않다. 그들은 大部分 犯行 直後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射殺된다. 죽기로 마음먹은 이들을 相對로 ‘힘의 均衡’을 통한 抑制 效果를 期待하기는 어렵다. 實際 危險 狀況이 벌어졌을 때 銃을 가진 사람이 銃이 없는 사람보다 죽거나 다칠 確率이 5倍假量 높다는 硏究結果도 있다. 自身의 對應 能力을 過大評價해 銃이 없었다면 回避했을 危險을 무릅쓰기 때문이다. 實效性 있는 銃器 規制 導入이 가장 確實한 解法일 텐데 美國人들은 거의 折半씩 贊反으로 갈려 接點을 찾는 데 番番이 失敗해왔다. 2012年 26名이 숨진 샌디훅 初等學校 銃器 事件처럼 다른 나라라면 歷史에 刻印될 慘事가 숱하게 이어져도 美國은 달라지는 게 없다. 美國 歷史에서 銃은 自由와 獨立의 象徵이었다. 銃을 든 民兵隊가 英國軍과 맞서 싸워 獨立을 爭取했고, 以後에도 聯邦政府의 暴政에 對備하기 위해 市民들의 自己防禦權을 保障했다. “國民을 武裝解除 시키는 것은 그들을 奴隸化하는 가장 效果的 方法”이라는 美國 建國의 아버지 조지 메이슨의 말은 當代의 常識이었다. 하지만 文明時代 以前의 傳統으로 흘려보냈어야 할 慣習이 200年 넘게 畸形的으로 살아남아 美國을 半으로 쪼개 놓는 分裂의 象徵이 됐다. 美 言論에선 ‘正體性의 詛呪’ ‘銃이라는 傳染病(Gun Epidemic)’이라는 表現까지 써가며 慨歎한다. 相當數 美國人들은 아침에 子女를 登校시키며 안아줄 때 이 瞬間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恐怖를 每日같이 느낀다고 한다. 銃器에 對해선 事實上 ‘無政府 狀態’에 머물러 있는 美國은 舊習을 제때 淸算하지 못하고, 政治가 分裂을 縫合하지 못할 때 어떤 代價가 따르는지를 보여준다. 신광영 國際部 次長 neo@donga.com}

    • 202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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